분단 시대의 위기와 바람직한 극복 방향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2년 만에 한반도는 1950년부터 1953년까지 3년간 끔찍한 한국전을 겪어야 했다. 한반도의 남북한에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공화국 양 체제가 성립된 지 오래지 않아 6•25가 발발하면서 남북한의 양 공화국 국민들은 역사적인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남북한 공화국 건국과 거의 동시에 2년 만에 터진 한국전은 표면적으로 공화국 체제를 거부하는 구체제 세력, 또는 통일 조선과 통일 일제 강점기와 다른 미소 분할 남북한 분단 체제에 대해 반발하는 통일 세력들을 원인으로 한 통일 전쟁으로 해석된다. 남북한 공화국 체제와는 다른 구체제 세력이 잔존했고, 미소 분할 남북한 분단 체제와 다른 통일 조선 세력도 잔존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세력들 가운데 구체제 세력은 오래되었고 역사적으로 소멸했다고 판단되며, 근본적으로 미소 신탁 반대론자들을 포함한 통일 세력들의 반발이 가장 큰 갈등 요소였다고 본다.
3•1운동의 불길이 결국 일제 강점기를 극복하고 해방을 성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미소 분할 신탁 통치에 반대하는 신탁 통치 반대의 물결이 결국은 한반도 통일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고, 그런 결과가 될지 아무도 몰랐어도, 결국 결과는 통일의 실패였고, 분단 체제의 강화에 다름이 아니었다. 3년여의 전쟁을 겪고, 남북한은 사회주의 일당 지배 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양당 지배 체제로 나뉘었다.
1953년 이후로 남북한은 각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양 진영을 표방하면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갔다. 일제 시대 산업화의 수혜를 받았던 북한 지역은 1950년 이후 사회주의 체제로 공고화되면서 사회주의 경제로 쇄국화되었고, 상대적으로 저개발 상태였던 남한 지역은 오히려 박정희 개발 드라이브를 기반으로 해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한국은 수출 주도 성장 정책으로 세계 수위권의 수출 경제를 목표로 일관적인 경제 정책을 실행해 왔다.
한국전이 발발한 지 50년 만인 2000년 이래로 남북한은 또다시 양 체제 사이에서 갈등이 증폭되면서 분쟁국의 대열에 들어서게 되었다. 20세기 말엽에 남북한 사이의 남북 교류 기간에 북한 금강산 관광 지역이 개방되기도 했고, 21세기 초엽에는 개성공단이 남북한 합작 사업 지구로 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방과 합작은 분단의 암초에 부닥치고 말았다. 1980년대 이후로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금강산 관광 사업이 갑자기 총성과 함께 중단되었고, 21세기 새로이 개방된 개성공단 합작 사업은 10여 년을 견디지 못하고 1년 여의 남북 사이의 격렬한 군사적 충돌 과정을 거쳐 중단되었다.
금강산 관광 사업과 개성공단 합작사업의 중단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안겨준 결과를 가져왔다. 개성공단 분단 과정을 거친 후에 남북한은 각자 도생(圖生)의 길을 가기는커녕 오히려 체제 대결이 심화되었고, 보이지 않는 군사 경쟁과 대결도 악화되었다. 사실상, 남북한은 독일식 통일과 베트남식 통일이라는 두 가지 가능한 통일 시나리오를 놓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듯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거나 혼기를 이미 지난 남녀가 당연히 거쳐야 하는 결혼 과정을 이행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는 뻔한 것이지만, 독일식 통일이 한국에서 합의되지도 않았을 터이고, 마찬가지로 베트남식 통일의 결과 여부와는 관계 없이 베트남식 통일 역시 합의되지는 않았을 터이다. 두 가지 시도의 결과는 모두가 뻔한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북한의 갈등의 골은 깊어만 갔고, 남북한의 통일과 분단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어느덧, 북한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다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문제시되는 분쟁 지역이 되어 버렸다. 미사일의 발사 빈도가 그렇다. 그러나 미사일의 타겟이 실제 공격 지점을 타겟으로 하는 이-팔 관계와는 달리, 북한의 미사일은 단거리나 중장거리 해상을 목표 지점으로 하므로 직접적인 공격이 되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과 달리, 북한은 미사일 무기의 개발과 현대화에 주력하고 있는 듯하며, 실전과는 현재까지 별다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 경제 개발의 주요 견인차가 되는 노동 계층이 차츰 국제화되는 추세에 있으며, 이들이 북한이나 중국계 조선족이 아니라 아시아계 외국인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경제 개발의 주요 세력으로서 북한계 노동자를 흡수하지 못하고 외국인 노동자에 그 역할을 넘겨주는 오류를 범했다. 명백히, 이러한 현상은 독일식 통일 과정을 넘어선 베트남식 통일 과정의 아시아계 현상이라고 파악된다. 노동 계층은 이미 베트남식 통일 방식으로 방향 전환한 지 오래된 것이다.
독일식 경제 통일 모델이 실패하고 베트남식 통일 방식이 부각된다면, 이것은 한반도의 위기 국면이다. 1950년의 통일 전쟁에 준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거나, 그에 준하는 결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이미 경계선을 넘은 지 오래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랜 원인의 축적으로 인한 결과는 아무도 예상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억 2~3천여 만 명의 인구가 남북한 전체 인구 7천여 만 명의 두 배에 다소 못 미치는 일본은 철저한 경제 관리와 정책 관리로 단일 민족을 유지하고 있다. 일본의 외국인 비율은 2.5%를 넘지 않는다. 한국의 인구는 5천만 내지 5천 1백여 만 명이지만, 외국인 비율은 4.5%를 훨씬 상회하고 있다. 거의 인구 절벽을 달리는 출생률 최저 국가이면서, 또한 거의 인구 곡예를 넘는 외국인 비율 위험 국가로 5천 년간 지켜온 한민족의 단일 민족이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중국이나 미국의 다민족 국가와 달리, 한국은 지역이 협소한 강소 국가이며, 따라서 여러 민족이 한 국가에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민족 국가로 질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5천 년 단일 민족이 종료되고, 전혀 새로운 명칭의 다민족이 시작되는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 국면이다.
이것은 누구나 파악할 수 있듯이, 독일식 통일 결과가 아니라 베트남식 통일의 결과이다. 스스로 자기 발목을 묶고, 스스로 자멸하는 셈이다. 이러한 위기를 제대로 잃고 해석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아무튼, 외국인 유치 비율이 가장 높은 충남도(6~7%)는 천안-아산 지역에 이민청을 새로 설립할 것을 꿈꾸고 있다. 급속도로 소멸되어 가는 인구 소멸 지역에는 2024년 한 해에만 16만 명 이상의 외국인 노동자를 새로 배치할 계획이기도 하다. 소멸 지역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외국인을 배치해서 인구 감소에 대처하겠다는 정부 당국의 관련된 정책이다.
한반도는 특수한 강소 국가로서, 중국처럼 특정한 민족들이 여럿 공존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니라, 좁게 섞여서 다민족화되는 지역이다. 그러므로 인구 통제의 실패는 한민족 단일 민족의 종료와 전혀 새로운 다민족의 시작을 의미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OECD와 유엔 등의 국제 기구에서는 외국인 비율 5%를 기준으로 한 국가를 다민족으로 분류하며, 그렇게 분류되면 한민족은 그 이름을 다하고 전국 어디에도 갈 데가 없이 다민족으로 섞여야 하기 때문이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일본의 단일 민족 사례를 기준으로 삼고 그들이 유지하고 있는 단일 민족 정책을 본보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이것을 정책의 일반론으로 삼아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덧붙여, 한국의 세계화 경제 정책을 조선의 쇄국정책이나 북한의 폐쇄 정책과 비교하는 건 아니지만, 단일 경제 정책으로 시급히 쇄신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2024년 한 해가 어쩌면 4월 총선을 지나는 것을 계기로 이제까지의 잘못된 정치와 경제의 정책으로부터 꺾어지는 해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여기까지 우리는 2000년 이후 남북한 분단 시대의 위기와 위기 극복 방향을 모색해 보았다. 베트남식 세계화의 추세는 전국 어디에도 갈 곳이 없는 국가적인 질적 변화의 범주화(categorization) 추세라고 보인다. 우리는 현재 5천 년 역사의 단일 민족과 완전히 다른 다민족 사이의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민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정치, 경제, 사회 전 분야의 국민적 쇄신을 기대해 본다. <끝> <2024년 2월 20일, 나종혁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