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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블뤼 주교 처형순간, 조창원바오로작 )
제5대 조선 대목구장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에 대하여…
(다블뤼 주교님과 관련된 이야기는 2014년 내포지역 성지순례 때 자주 접하게 됩니다. 박해시기에 일어난 박해와 순교에 대한 역사를
추적하여 자료를 남기신 주교님의 공로가 있었기에 저희들은 지금의 성지순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블뤼 주교님에 대한 일생을 알고 순례의 길을 걷는다면 순례 일정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성 다블뤼 주교는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 마리 니콜라 앙투안 다블뤼(Marie Nicolas Antoine Daveluy), 1818-1866의 한국이름은 안돈이(安敦伊)입니다. 나는 1818년 3월16일 프랑스 아미앰(Amiens)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졸업 후 1834년 10월 파리 교외의 잇시(Issy)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 생 쉴피스(saint supice) 신학교에 입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배운 다음 1841년 12월 18일 사제로 서품 되었지요. 서품 후 르와(Roye) 본당의 보좌로 20개월 동안 사목하고 1843년 10월 4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이듬해 극동 선교사로 임명 받았습니다. 1845년 페레올 주교와 함께 상해로 가서, 8월17일 김가항 성당에서 거행된 김대건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한 뒤, 8월24일 상해에서 30리 떨어진 힁당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김대건 신부를 보좌하였습니다.
내가 갈 선교지 조선의 첫 사제의 첫 미사를 보좌할 수 있었던 그날의 감희를 뭐라고 표현하기 어려웠습니다. 저보다 먼저 조선에 들어간 방인 사제를 길러낸 여러 선교사들의 노고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조선에 가서 내가 이렇게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 하느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겠지요. 마침내 8월31일 나는 조선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페레올 주교, 김대건신부와 함께 상해를 떠나 어려운 항해 끝에 10월 12일 저녁 8시경 충청도 강경부근 황산포에 상륙했지요.
조선에 입국한 이튿날부터 나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교우촌 공동으로 가서 조선말을 배우는 한편 1846년 1월부터는 공동 주변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수리치골에서는 몇몇 신자들을 모아 신심 단체인 성모 신심회를 조직하였습니다. 하지만 김대건신부의 순교 이 후 박해를 피해 이곳 저곳으로 피신하면서 큰 고초를 겪었고, 이때 겪은 고생으로 오른쪽 무릎인대가 늘어나 평생 동안 보행에 불편을 감내해야 했지요, 1850년 1월에는 병이 너무 위중해져 최양업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기도 했지요. 그러던 중 1857년 3월25일 나는 서울에서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로부터 승계권을 가진 부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주교 서품 예식에는 메스트르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참석했습니다. 한밤중에 서울의 회장들과 신망 있는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주교관에서 이루어졌는데 마치 로마의 카티콤바와 같았습니다. 1856년부터는 조선교회사 및 조선 순교사 사료를 수집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이와 더불어 신입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도 편찬하였지요. 그리고 1862년에는 그동안 수집 정리해 온 조선교회사 및 조선 순교자들에 대한 자료들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장 알브랑 신부에게 보냈습니다. 이 자료들이 바로 여러분이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라 부른 것입니다. 애통하게도 비망기를 쓰면서 모았던 한국 순교자 관련 자료들이 주교관이 불이 나면서 소실되고 말아 두고두고 안타까운 마음을 다스리기 어려웠습니다. 후에 달레 신부가 이 비망기를 바탕으로 하여 한국천주교회사를 썼다니 하느님의 계획은 참으로 오묘하십니다. 1866년 2월 베르뇌 주교가 서울 태평동 주교댁에서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고 내가 대목구장직을 승계하여 제5대 조선 대목구장이 되었지요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의 대목구장 재임기간은 23일 불과했습니다. 베르뇌 주교가 순교하고 4일 뒤인 3월 11일에 나 역시 거더리에서 체포되었고, 위앵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 그리고 신자 황석두, 장주기와 함께 3월 30일 갈매못으로 이송되어 내 나이 48세에 하느님께서 주신 순교의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제로서 산 지 25년 이었고 조선에서 활동한 시간을 따져 보니 21년이었습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떠나기 앞서 불렀던 '선교사들의 출발 노래'가 있는데. 달레 신부가 가사를 쓰고, 구노가 곡을 지었다. 구노가 이 곡을 만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구노는 1846년부터 2년간 사제가 되기 위해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를 다녔다. 아마 신학생 시절에 지었을 것 같은 이 곡은 지금도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이 임지로 떠나기에 앞서 신학교에서 선교사 파견예식 때 불려지고 있는 곡이다. 달레 신부가 쓴 이 곡의 노랫말은 당시 선교사들의 비장한 각오를 잘 보여준다. 모두 8절인 이 노랫말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오늘은 그대들이 원하던 날, 그 어떤 것도 그대들의 열정을 막을 수 없네, 떠나라 형제들이여, 그대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가. 형제들이여, 이 세상에 하직 인사를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먼 곳으로 떠나라. 그리스도의 병사들이여, 세상 모든 땅이 복음을 듣도록 십자가의 깃발을 도처에 꽂아라. 하느님께 그대들의 땀을 바쳐라. 그대들은 포승으로 묶일 것이고, 그대들의 시신은 형장에 버려질 것이다. 사나운 폭군들의 칼 아래에서 그대들의 승리를 나눠라. 우리가 죽어야 한다면 죽으리라. 그대들 뒤를 곧 따라가리라. 한 영혼을 개종시키기 위해 땅끝까지 찾아가리라.…"
이 노래 말처럼 다블뤼 주교께서도 갈매 못 형장에서 칼 아래 쓰러진 것이다.
그리고 구노는 다블뤼 주교의 순교 소식을 접한 후 아름다운 성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 곡이 바로 구노의 아베마리아다.
프랑스 작곡가 샤를 프랑스와 구노(Gounod, C. F., 1818-1893년)는
1843년 파리 외방 전교회 신학교 성당의 악장(樂長)이 된다.
구노는 그때부터 사제의 길을 걷고자 성 슐피스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선교사의 꿈을 접고 1848년 전교회를 떠나 음악에 전념하지만 마음 속엔 선교사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종교음악을 작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노는 조선교구의 제5대 교구장이며 순교 성인인 다블뤼(Daveluy, 1818-1866년)와 같은 시대에 파리 외방 전교회의 신학교에서 살았으며 서로 잘 아는 사이. 구노는 다블뤼를 비롯한 자신의 신학교 친구들이 죽음의 땅 조선으로 들어간 소식들 듣고 \'아베 마리아\'를 작곡한다.
또 다블뤼 주교가 1866년 조선에서 무참히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그는 1869년 조선의 순교자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한다.
구노가 곡을 붙인 우리 성가곡 ‘무궁무진세에’(「가톨릭 성가」, 284번)는 자신이 친애한 선교사 다블뤼를 비롯하여, 신학교 시절의 동료와 후배들의 순교를 기리는 조선을 위한 단 하나의 구노의 곡이다.
오늘날에도 애창되는 구노의 “아베 마리아(Ave Maria)”는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조선의 선교사들을 위한 곡이며, "무궁무진세에" 역시 조선의 순교자들을 위한 구노의 곡이다.
그리고 순교 전 신자들에게 보낸 회유문에서 다블뤼 주교는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극히 사랑하는 형제들아!
내 떠날 때 내 주님의 훈계를 좋은 마음으로 받아 지성으로 따라서 행하여라.
떠나도 너희를 자주 생각하여 그리워하고, 너희를 위하여 항상 기구하고, 너희 영혼의 神益(신익)을 항상 돌아볼 것이오, 멀리서라도 통 공 하는 은혜로 너희 가운데 있음과 같으니, 나를 생각하여 너희 본분을 열정으로 지켜라. 환난 이후에는 잊기 쉬우니 어려운 가운데 너무 겁내고 낙심하지 말며, 부디 사람의 힘으로 구해 주기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도우심만 바라고 구하며, 너희들이 주님을 위하여 당한 것을 주님께서 알고 계시니 당신 인자하심만 믿고 기다려라. 예로부터 환난이 성교를 널리 펴는 법이다.
또한 주 예수께서 여러 가지 말씀으로 미리 가르쳐 주셨으니, 그 말씀을 생각하면 어찌 지나치게 염려하겠느냐? 또 성 베드로 말씀에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욕을 당하는 사람은 眞福者(진복자)다."라고 하셨으니, 너희 모두는 마음을 일으켜 甘心(감심)으로 참아 받아 흩어지지 말고 思言(사언)행위에서 愛主愛人(애주애인)하는 진실한 덕을 드러내고, 해롭게 하는 사람도 모두 사랑하여 그 回頭(회두)함을 천주께 구하고, 국왕과 관장에게 원망을 품지 말고, 도리어 성실히 받들어 섬길지니, 이렇게 하면 예수의 참 제자가 될 것이다.
이 몇 가지 훈계를 착실히 지킬 것으로 바라며, 너희 모든 이에게 강복하노라. - 다블뤼 주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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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유문 원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