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더 사랑을 주세요, 그러면 꽃을 피울게요”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8-03-11 20:02:09
“자기, 이리 와 봐, 이것이 아무래도 꽃망울 같아”
이른 저녁 드라마 삼매경에 삐져들 무렵, 어린아이처럼 호들갑을 떨던 아내가 나에게 손짓을 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더니 아내는 난 줄기 하나를 쳐다보며 요모조모 살피고 있었다. 두툼한 잎과 잎 사이에서 휘어질 듯 길게 꽃대를 쭉 뽑아 올린 난 줄기 하나, 그 끝에 도톰한 한 것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아내는 지금 그것에 심취해 있는 증이었다. 나 역시 바싹 눈을 붙이고 그것을 들여다봤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꽃망울이지 아니면 난 잎인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꽃망울이 맞는 것 같아”
스스로 답을 찾은 듯 꽃망울이란 것을 확신한 아내는 여전히 신기한 표정이었다. 그 난은 얼마 전 나의 직장 화장실 뒤편 베란다에 놓여있던 난화분을 집으로 옮겨온 것이었다.
회사의 높은 분이 이 취임식을 할 때마다 외부에서 들여와 축하용으로 쓰던 난 화분이었다. 그 화분 속에서 싱싱하게 꽃을 피운 난들이 꽃을 지우고 시들 무렵이면 어김없이 그 화분들은 화장실 뒤편 베란다로 쫓겨 나왔다. 어찌 보면 난들도 무척이나 가련한 존재였다. 화사한 꽃을 피울 때는 축하용으로 쓰이다가 꽃이 시들거리면 영락없이 찬밥 신세가 되는 그 현실은 인간들이 지닌 이중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쓰레할 때도 많다. 그렇게 며칠동안 베란다위에서 꿈을 꺾고 지내던 난화분들이 쌀쌀해지는 날씨 속에서 혹시 얼어붙지 않을까 염려해서 집으로 옮겨오게 된 건 얼마 전이었다. 안 그래도 인테리어를 한 거실이 너무나 무미건조해서 거실을 꾸밀 겸해서 가져오게 된 난화분을 아내는 애지중지 간수하게 되었다. 그 화분은 눈요기 거리로는 아주 안성맞춤이었다. 텔레비전과 전화기 등 전자제품으로 채워진 딱딱한 공간을 자연이 숨쉬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그런데 며칠 후 놀랍게도 그 난이 줄기를 쏙 뽑아 올린 것이다. 중간에 그 난줄기를 찾지 못한 것은 아마도 나의 게으름 탓이 컸다. 거실에 들여놓기만 했지 자식을 대하듯 관심 있게 살피지 못하는 나의 게으름, 그러나 이제 와서 나의 게으름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난 화분을 들여다보지 못한 사이 난줄기를 쏙 빼 올린 난의 생명력에 감탄을 하고 만 것이다. 이런 현상은 봄날처럼 훈훈해진 거실의 온도 때문이었다.
난을 들여놓기 전 집을 수리한 일이 있었다. 25년이 더 지난 낡은 단독주택이라 주저하다가 큰 맘 먹고 일을 밀어붙인 것이다. 윗풍이 새어 들어오는 삐걱이는 창문을 이중창문으로 갈아 끼우고 커텐을 친 거실을 심야보일러로 �혔더니 집안은 몰라보게 훈훈해졌다. 집안은 완전 봄날이었다. 바깥엔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어도 집안만은 봄날처럼 훈훈해 않아만 있어도 하품이 나오고 졸음이 밀려왔다. 그 시간에 난들이 줄기를 쏙 빼 올린 것이다. 내가 하품을 하고 조는 동안 난도 긴장이 풀어진 꽃대에 물을 들이 키고 잎을 더 새파랗게 물들이더니 놀랍게도 난줄기를 빼 올리고 그 끝에 두툼한 망울들을 매단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한다. 아내는 그것들이 꽃망울일 거라고 확신을 했지만 며칠 더 기다려 보면 정체가 드러낼 것이다. 이때부터 아내는 여유만 생기면 난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화사하게 꽃망울을 열어젖힐 난의 모습을 기다리고 있는 표정이었다. 회사의 화장실 뒤편 베란다위에서 사람들의 외면을 받다가 졸지에 우리 집 거실로 옮겨와 자식처럼 사랑을 받는 난, 난이 줄기를 쏙 빼 올리고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마도 아내의 극진한 사랑에 탄복해서 인지도 모른다. 한참 동안 난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난이 가만히 내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좀더 사랑을 주세요, 그러면 꽃을 피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