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곶감은 풍부한 영양성분으로 비타민A와 비타민C (사과의 10배)가 풍부하여 건강보조식품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곶감을 드실때 끝맛이 떫은 이유는 바로 타닌 성분 때문입니다. 이 타닌 성분은 설사를 멎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곶감은 설사치료 및 모세혈관을 튼튼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모세혈관 강화에 의해서 고혈압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습니다.
음주 전후에 곶감을 3개를 물에 넣으신후 달여서
1컵씩 하루에 세번 복용하시면 매우 효과적입니다.
한방에서 곶감 표면에 형성되는 하얀가루를 기침이 많거나, 가래가 끓을때, 폐가 답답할때, 만성기관지염등 치료에 쓰입니다.
곶감은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위와 장을 두텁게 만들어주고 비위를 강화시켜 목소리를 곱게 해주고 얼굴의 주근깨를 없애줍니다.
또한 정력강화 및 정액생성 향상에 효과적입니다. 곶감 표면에 형성되는 하얀가루는 시설 이라고 불리는데 정액을 보충해주고 정력제로써 매우 좋습니다.
곶감을 드실때 하얀가루를 털어내고 먹는 행동은 복을 차버리는 짓과 같습니다.
곶감을 꾸준히 먹게되면 면역력이 향상되여서 각종 질병 및 감기예방에 효과적입니다.
■ 곶감 부작용
곶감에는 타닌이라는 성분이 있는데, 곶감을 많이 섭취했을시 변비를 일으킬수 있다고하며
술과 함께 먹게될경우, 쉽게 취하고, 빈속에 감을 먹으면 위에 결석이 생겨, 소화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합니다.
특히, 빈혈이나 저혈압이신분들께는 좋지 않다고 합니다.
♡ 역사속의 한식 ㅡ 곶감 이야기 ♡
곶감이야 죄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강한 단맛이 죄다.
성종 10년(1479년) 6월 2일, 중전 윤씨가 폐출되었다. 폐비 윤씨다. 불과 사흘 후인 6월 5일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성종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윤씨를 폐하여 사가로 내보낸 이유를 신하들에게 장황하게 설명한다.
“경(卿) 등은 내가 폐비한 연유를 알지 못하고 모두 다 이를 의심하니, 내가 일일이 면대하여 말하겠다. 지난 정유년(1477년)에 윤씨가 몰래 독약을 품고 사람을 해치고자 하여, 곶감(乾*·건시)과 비상(砒p)을 주머니에 같이 넣어 두었으니, 이것이 나에게 먹이고자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성종 독살 시도는 물론 미수였고 시도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었다. 이때도 성종은 ‘중전 폐출’을 주장했으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로 폐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신 윤씨를 모시던 하녀들 몇몇이 벌을 받는 선에서 끝났다.
성종은 폐비 윤씨에 대한 고삐를 더 죈다. 문제는 차기 대권 주자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윤씨의 아들이 왕이 될 판이다. 어머니를 박대한 아버지를 어떻게 볼지 불안하다.
폐비에 찬성하거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던 이들의 안위도 문제가 된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다. 아들 연산군은, 어머니를 박대하고 죽음으로 내몬 신하들을 처절하게 숙청한다.
성종 13년(1482년) 8월 11일, 성종은 다시 ‘비상 섞은 곶감’을 들먹인다.
“차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에 항상 비상을 가지고 다녔으며, 또 곶감에 비상을 섞어서 상자 속에 넣어 두었으니, 무엇에 쓰려는 것이겠는가? 만일 비복에게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나에게 쓰려는 것일 텐데, 종묘와 사직이 어찌 편안하였겠는가?”
"곶감과 독약 비상"에 대한 서술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나에게 독약 묻은 곶감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에서 “반드시 나에게 사용하려 했다”고 업그레이드시킨다. 갑자기 종묘사직도 들고나온다.
닷새 뒤인 8월 16일, 윤씨는 사사된다.
곶감이 궁중 권력투쟁에 이용된 경우다. 곶감은 달다. 곶감 싫어하는 사람이 없으니 민간이나 궁중 모두 곶감을 널리 사용했다. 단맛이 가장 강한 것은 꿀이다. 꿀은 귀했다. 귀한 과자를 만들 때나 사용했다.
생산량이 많지 않으니 민간에서는 약재로나 사용할 정도였다. 사탕수수 등에서 단맛을 뽑아낸 사탕도 있었다. 류큐(琉球·지금의 오키나와)에서 오는 사신들이 공물로 가져왔지만 먼 나라의 수입품이니
민간에서는 먹기 힘들었다.
곶감은 비교적 쉽게 만들고, 구할 수 있었다.
단맛이 강하니 정과(正果) 혹은 수정과(水正果)로 만들기도 하고 노인이나 아이들의 간식으로도 이용했다.
곶감은 사대부의 소박한 선물로도 이용되었다.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 9년(1576년) 1월 5일의 일기에서, “편지와 함께 곶감 1접을 멀리 오겸에게 보냈다.
옛날 내가 귀양가 있을 때 처자를 돌봐주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자신이 고난을 겪을 때 가족을 챙겨준 고관 우찬성 오겸(1496∼1582)에게 보낸 선물이 곶감 1접이었다.
시상(*霜)은 곶감 표면에 생기는 흰 가루다.
단맛이 특히 강하다. 효종은 인선 왕후 장씨와의 사이에 1남 6녀를 두었다. 인조 26년(1648년) 1월, 동궁의 막내 숙경 공주가 태어났다.
산후조리 과정의 인선 왕후(당시 동궁 빈)에게
식초 넣은 국을 마시게 하고 그 사이사이에
시상을 먹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다산 정약용은,
“은풍(경상도 풍기) 준시(준*)에 서리가 뽀얗게 앉았다”고 했다. 서리는 역시 곶감 표면의 흰 가루다.
준시는 나무 꼬챙이 등에 꿰어서 말리는 곶감과 달리 꿰지 않고 납작하게 말린 곶감이다. 상품으로 쳤다.
허균은
“지리산에서 나는 먹감(烏*·오시)이 검푸른 색에 끝이 뾰족하며 곶감으로 만들어 먹으면 더욱 좋다”고 했다.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영남의 여러 고을에서는 감나무를 재배해 곶감을 만들어 판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는 이미 곶감이 상품화되었다.
#출처:황광해음식평론가
#출처:오리지날산약초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