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조각
#.청주 유일국보
#.용두사지 철당간
#.공주 갑사 당간(보물)
#.안성 칠장사 당간(시도 유형문화재)
🧧용두사지 철당간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에 있었던 용두사 터에 있는 철제 당간지주.
밑에서부터 세 번째 철통에 철당간을 만들게 된 내력이 양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주성(鑄成) 기록에 의하면 이 철당간은 준풍(峻豊) 3년(고려 광종 13, 962)에 건립되었다.
이 당간은 당시 청주지역의 대표적인 호족(豪族)세력인 당대등(堂大等: 戶長) 김예종(金芮宗)의 원(願)에 의하여 시작되어 그 종형(從兄) 되는 김희일(金希一)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리고 30단(段)의 철통(鐵桶)으로 60척(尺)의 높이로 건립되었음이 주성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철당간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운등사(雲燈寺) 주지 혜원(蕙園)스님이 청주 고을을 지나다가 청주 북쪽에 있는 율량 객방(栗陽客房)에서 하루 밤 쉬어 가게 되었다. 자정이 넘자 큰 비가 내렸고 먼동이 틀 무렵 서쪽 하늘에 영롱한 무지개가 다리를 놓은 위로 부처님이 나타나 혜원(蕙園)스님에게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고 말했다.
비몽사몽간에 부처님의 현시(顯示)를 받은 혜원(蕙園)스님은 급히 행장을 수습하여 용두사 주지스님을 만났다. 그 스님도 혜원(蕙園)스님과 꼭 같은 현시를 부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두 스님이 아무리 생각해도 부처님이 현시한 돛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며칠 뒤 한 초립동이 나타나 목암사에 올라가서 조용히 살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주고 사라졌다.
혜원(蕙園)스님이 혼자 목암산(牧岩山)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밤중에 고을이 북쪽으로 움직이는 착각을 느끼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지주(支柱)를 모아 김예종에게 철당간을 세우도록 하였다.
청주는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 형국이 배가 지나가는 모양인 이른바 행주형(行舟形)이어서 주성(舟城)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청주가 행주형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심천(無心川)은 청주 시가지를 가운데 두고 석교초등학교 부근에서 동쪽은 서운동, 문화동, 우암동 쪽으로 직류(直流)하여 청주농고 앞에서 서류(西流)하였고, 서쪽은 대체로 현재의 하도(河道)에 따라 흘러 내덕동 부근에서 두 내가 합류하였다고 전한다.(지금은 1939년 및 1969년 무심천(無心川) 제방공사에 의해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래서 청주의 지형은 마치 물위에 배가 떠 있는 형상과 같아서 주성이란 별칭을 얻게 되었다.
현재 철당간의 높이는 12.7m로 충청남도 공주시 갑사에 있는 철당간, 경기도 안성시에 남아 있는 칠장사 철당간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제 당간이다.
철제당간을 받치고 있는 석조(石造)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양쪽 밖으로 곡선을 그리고 있는 단순한 기둥 형태이다. 또한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하여 당간지주의 윗부분을 고리로 연결시켰다. 철통은 현재 20단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사찰인 용두사 터에 전해오는 유물이지만 현재는 청주시내의 중심지인 상당구 남문로 2가 48-19번지에 위치한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1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국보로 재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글출처: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