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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덕숭산
2024년 05월 18일(토요일)
산행코스 : 주차장(10:25) - 수덕사(10:40) - 소림초당(11:00) - 정혜사(만공탑) (11:05) - 전월사(11:20) - 덕숭산(11:35) - 주차장(12:55)
산행거리 : 5km
수덕사 주차장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선문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라는 편액이 있는 선문을 지나갑니다. 조계종에는 8개의 총림이 있습니다. '총림(叢林)'이란 불전 법당뿐 아니라, 참선 수행을 위한 선원(禪院), 경전 교육을 위한 강원(講院), 계율 교육을 위한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합니다. 8개의 총림은 해인총림 합천 해인사, 조계총림 순천 송광사, 영축총림 양산 통도사, 덕숭총림 예산 수덕사, 팔공총림 대구 동화사, 금정총림 부산 범어사, 고불총림 장성 백양사, 쌍계총림 하동 쌍계사입니다.
‘덕숭산덕숭총림수덕사’ 편액
수덕사 일주문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서 있는 문'이란 뜻으로 세속의 잡다한 번뇌와 망상을 모두 버리고 한 마음으로 진리의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는 상징적인 문입니다.
예산 수덕사는 창건과 관련된 기록이 없어, 백제 위덕왕 재위 시기인 554년부터 597년 사이에 지명법사가 창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백제 무왕 때인 601년 혜현법사가 수덕사에 처음 주석하며 법화경과 삼론을 강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남아있습니다. 고려 공민왕 때 나옹 선사가 중수한 기록이 사기(寺記)에 남아 있고, 구한말에는 경허 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일으켰고, 1898년에 만공 스님이 수덕사를 크게 중창하였다고 합니다.
덕숭산수덕사(德崇山修德寺) 편액은
'임인청추 소전 손재형(壬寅淸秋 素筌 孫在馨)'이란 관지가 있습니다.
손재형(孫在馨.1903∼1981)은 전남 진도 출생으로 이 글씨는 1962년에 쓴 것으로 보입니다.
안쪽의 예서체로 쓴 '동방제일선원(東方第一禪院)' 편액은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의 글씨입니다. 손재형 선생은 중국 금석학자인 나진옥에게 서법을 배워 예서와 전서에 탁월한 기교를 보였고, '서예'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었으며, 수집가로 해방되기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찾아온 인물로 유명합니다.
편액에는‘임인장월 소전산인(壬寅長月 素筌散人)’이라는 관지와 2과의 도서가 있습니다. 이것은 소전이 1962년 절에 들려 일주문 앞에 걸려 있는 산문사액과 함께 쓴 것으로 보입니다
세로 9개의 쪽판을 연결한 이 편액은 변죽을 청색으로 액판을 흰색으로 칠했는데 조선 시대의 편액 형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편액의 글씨는 그가 즐겨 썼던 회화성이 강한 전서로 금문(金文)의 결구를 차용하여 쓴 것입니다.
금강문
두 번째로 지나는 금강문은 초서체 한자로 현판이 적혀 있었고 안에는 사찰 내부를 청정도량이 되도록 악귀를 막아주는 금강역사가 있는 문으로, 안에는 소조 금강역사상이 있습니다.
금강문 편액
금강문(金剛門)편액은 수덕사 주지를 지내신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의 초서체 글씨로, 강건하면서 요동치는 필획으로 금강역사의 우락부락한 모습을 형상화 하였습니다.
수덕사 금강문 나라연금강
금강문 안 나라연금강은 천상계의 역사로서, 그 힘이 코끼리 100만배가 되고 항상 입을 열고 "아"소리를 낸다고 하여 '아금강역사'라고 합니다 '아'는 범어(고대 인도어)의 첫 글자입니다. 나라연금강은 통상 보현동자와 함께 봉안합니다. 밀적금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으로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을 들으며, 항상 입을 다물고 "훔"소리를 낸다고 하여 '훔금강역사'라고 합니다. '훔'은 범어의 마지막 글자입니다. 밀적금강은 통상 문수동자와 함께 봉안합니다.
금강문 밀적금강
세 번째로 지나는 사천왕문, 문 안쪽에는 좌우로 사천왕들이 눈을 부라리고 서있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편액
서방광목천왕(좌), 북방다문천왕(우)
서방광목천왕은 인간의 선악을 살피고, 손에 용과 여의주를 들고 있으며, 잘한 사람에게는 여의주로 상을 주고, 잘못한 사람에게는 용을 보내 비를 뿌리는 등 벌을 줍니다. 북방다문천왕은 사천왕 중 우두머리로 손에는 보탑과 보당을 들고 부처님의 도량을 수호하고 불법을 불자들에게 전하는 신입니다.
동방지국천왕(좌), 남방증장천왕(우)
동방지국천왕은 나라를 다스리고, 지키며, 손에는 비파를 들고 음악을 연주하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입니다. 남방증장천왕은 불자들에게 지혜와 복덕을 늘려주고, 이익을 증장시켜 주며, 금강검으로 불자에게 남아있는 번뇌를 끊어 지혜가 생기게 합니다.
포대화상
사천왕문을 지나면 코끼리 석등이 있고 맞은편에는 포대화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포대화상은 본명은 '계차'로 항상 포대자루를 들고 다녔기 때문에 포대화상이라 불렸고, 배가 나오고 대머리인 것이 특징입니다
코끼리 석등
예산 수덕사 코끼리 석등은 불을 밝히는 석등의 역할보다는 경전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속리산 법주사에 쌍사자 석등이 있습니다.
황하정루
예산 수덕사 황하정루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엄청난 규모의 2층 누각으로 1992년에 법장 스님이 개축하였습니다. 특이한 것은 사찰 건물인데, 목조가 아닌 콘크리트 건물입니다.
건물의 정면 2층 위에는 '선지종찰수덕사', 1층 중앙 통로 위에는 '덕숭총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황하정루 선지종찰수덕사( (禪之宗刹 修德寺 ) 편액
덕숭총림(德崇叢林) 편액
황하정루(黃河精樓) 편액
'선지종찰수덕사', '덕숭총림', '황하정루'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예산 수덕사 삼층석탑(충남 유형문화재 제103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탑으로 높이가 4m.
상륜부는 2개의 보륜과 함께 보개(寶蓋)·앙련(仰蓮)·노반(露盤)이 찰주(擦柱) 없이 포개져 있는데,
노반은 방형(方形)으로 탑신부의 최상층 옥개석과 1매의 석재로 만들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기단과 탑신 및 상륜 일부가 잘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양식을 잘 갖춘 탑입니다.
1,2층 옥개석 귀퉁이 일부가 파손되었습니다.
대웅전(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1308년) 때 지어진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4칸으로 겹처마에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정면 3칸에는 모두 3짝의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는 널문을 두었습니다.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건물들 중에서 특이하게 백제 양식의 곡선을 보여주는 목조건축물로 전체적인 가구의 축조 기법은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비슷한 측면이 있지만, 세부적인 양식은 여러가지의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수덕사 대웅전은 지은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국내 현존 건축물 중 건축시기가 명확한 기록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1928년 단청 작업 시 묵서명 발견 至大元年武甲四月十七日立柱(지대원년무갑사월십칠일 입주)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18호) 이 수덕사 대웅전보다 앞선 시기로 건립이 추측이 되는데 건립 시기는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대웅전(大雄殿) 편액
대웅전 편액은 예술, 문화, 특히 서화에 능했다는 덕숭총림 수덕사 3대 방장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대웅전 옆면
처마와 문에는 단청이 없고, 공포 외에 장식을 하지 않아 절제 속의 화려함을 구현하고 있고 맨 가장자리 기둥에 도리를 길게 빼어 넓은 지붕과 처마를 받치고 있습니다.
우미량
고려 이전 주심포 건물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단차가 있는 도리를 께단 형식으로 상호 연결하는 부재를 말합니다.
직선 부재가 아니고 소꼬리처럼 곡선으로 만들어져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크기가 작으며 다른 보처럼 기둥을 연결하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엄격한 의미에서 보라고 할 수 없는데 현재는 우미량(牛尾樑)이라고 하여 보의 범주 속에 넣고 있습니다.
수덕사 대웅전 종단면을 보면 종도리를 기준으로 양쪽에 각각 세개씩 여섯 개의 우미량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포형식식이나 익공 형식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미량은 주심포 건물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웅전 내부
목조 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381호)
대웅전에는 중앙에 석가모니불, 우측(좌협시)에 약사불, 좌측(우협시)에 아미타불 등 삼세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이 삼세불(보물 제1381호)은 인조 17년(1639년)에 남원의 풍국사에서 조성하였는데, 후에 남원의 귀정사(歸淨寺) 로 이운되었고, 1938년 수덕사 대웅전의 해체수리 작업이 끝나면서 만공 (滿空 : 1871~1946) 스님이 수덕사로 다시 이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릅을 하여 안정되어 보입니다.
유계의 구분이 불분명한 머리에는 중앙계주와 정상계주가 표현되어 있으며, 네모꼴의 각진 얼굴에는 근엄한 듯 부드러운 미소가 엿보입니다.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늘어졌고, 가늘어진 목에는 세 개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렸합니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진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습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 눈, 입, 코의 표현, 양 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약사불이 왼손을 위로 하고 오른손을 아래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댄 채 오른손 바닥에 약그릇을 들고 있는데 비해, 아미타불은 약사불과 손의 좌우가 바뀌고 약그릇이 보이지 않는 것만이 다를 뿐입니다.
삼성각
삼성각(三聖閣) 편액
편액은 덕숭총림 수덕사 4대 방장을 지내신 송원 설정 (松原 雪靖) 스님의 글씨입니다.
설정 스님은 1942년 예산에서 태어나 주역의 대가인 부친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3세 때 만공 스님에게서 계를 받았던 부친과 수덕사에 찾아와 출가하기로 결심하고 7년간 속가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1980년에 수덕사 주지, 2009년에 덕숭총림 수덕사 방장, 2017년에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내셨습니다.
삼성각 내부
삼성각에는 중앙에 치성광여래(북극성)와 일광·월광보살, 칠월성군(북두칠성)을 그린 칠성탱이 있고, 좌우에 산왕대신을 그린 산신탱과 나반존자를 그린 독성탱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칠성탱
중앙에 치성광여래(북극성)와 일광·월광보살, 칠월성군(북두칠성)을 그린 칠성탱
명부전
예산 수덕사 명부전은 지옥 중생의 구제하겠다고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명부의 시왕들을 모신 전각으로 1968년 원담 스님 주석 당시 세웠습니다.
명부전(冥府殿) 편액
편액은 원담(圓潭 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원담(圓潭)의 원(圓)을 원(○)으로 표현한 게 재미있습니다.
명부전 내부
지장보살
명부전 중앙에는 지장보살이 협시 없이 모셔져 있고, 후면 벽에는 목각후불탱이 조성되어 있는데, 수덕사의 특징적인 명물입니다.
범종각
범종각(梵鐘閣)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범종각에는 1973년에 조성된 무게 6,500근(3,900kg) 짜리 청동종이 있는데, 국내에서 두번째로 큰 크기이고, 한 번 타종에 2분30초 동안 소리가 울리며, 30리(12km) 밖에서도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범종의 소리는 지옥중생을 제도합니다. 아침, 저녁 예불 때 법고, 목어, 운판, 범종 순으로 칩니다.
청련당
청련당 옆면에는 '세계일화( 世界一花 )'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스님이 간월암에서 천일기도 후, 조국이 광복되자 길 가의 무궁화 꽃잎을 따다가 '세계일화(世界一花,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나는 둘이 아니고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다)' 라는 네 글자를 쓰고 낙관 대신 '근화필(槿花筆)'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법고각
예산 수덕사 법고각에는 불전 사물 중 법고(法鼓)와 운판, 목어(木魚) 만 비치되어 있고, 범종은 맞은편 범종각에 있습니다. 건물의 단청이 예사롭지 않게 화려하고 불전 사물도 미술품 수준으로 조성하였습니다. 법고와 운판, 목어를 두드려 축생, 조류, 어류를 제도합니다.
법고각(法鼓閣) 편액
편액은 원담 진성(1926~2008) 스님의 글씨입니다.
법고받침
법고각에는 용머리에 거북이 등껍질, 사자다리, 불꼬리를 한 독특한 동물형태의 받침이 법고를 받치고 있습니다.
사면석불
정상 1.65km, 조사전 0.10km, 수덕사 0.24km
사면석불
1983년 예산군 봉산면에서 발견된 백제시대 사면불을 재현해 조성하였고,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미륵존불을 사방에 모신 사면석불입니다.
정상 1.36km, 수덕사 0.53km
사면석불이 있는 이곳부터 정혜사까지 '벽초 경선(碧超鏡禪)스님의 1080돌계단'이 이어집니다. "인간의 백팔번뇌를 열 번 내려놓으라."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벽초스님은 만공(滿空)스님의 법맥을 이은 수좌로 선농일치(禪農一致)를 실천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으며 황무지나 다름없던 사찰 전답(田畓)을 손수 개간하여 옥토(沃土)로 만들었고, 수덕사에서 정혜사까지 이르는 1080 돌계단을 쌓았다고 합니다. 당시 주지 스님이었던 벽초스님이 정혜사까지 손수 만들었다는1080 돌계단, 하나씩 밟고 올라섭니다.
소림초당 갈림길
정상 1.22km, 수덕사 0.67km, 소림초당 0.02km
소림초당
1920년 중반, 만공스님이 덕숭산 중턱 절벽 위에 지은 작은 암자입니다. 자연목으로 짓고 그 위에 이엉을 올린, 자연 그대로의 멋을 간직한 작은 초당입니다. 정상까지는 1.22km 오르면 되는데, 만공스님이 "저곳에 초가집 하나 지으면 참 좋겠다"하였더니 벽초스님이 지으셨다고 합니다.
정상 1.15km, 정혜사 0.22km, 만공탑 0.04km, 수덕사 0.76km, 향운각 0.03km
관음보살입상
소림초당에서 돌계단을 3분 정도 오르면 관음보살입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관음보살입상이 위치한 곳에 향운각은 들어갈 수 없는 곳으로 관음보살입상을 보고 되돌아 나와 정상을 향해 오릅니다.
덕숭산 관음보살입상은 만공스님이 1924년에 조성 봉안하였습니다. 관음보살입상은 관음보살의 덕으로 중생의 8가지 고통을 덜어주는 감로수 병을 손에 들었습니다. 머리에는 어머니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관세음보살의 상호를 모시고 있습니다.
1층기단의 하대갑석에는 '세존응화이천구백오십일년갑자동십만공계수봉안(世尊應化二千九百五十一年甲子冬十滿空稽首奉安)'이라는 명문이 보입니다. 서기 2951-(기원전 1027)=1924년으로 보입니다.
향운각(香雲閣)
정혜사 진양문(眞楊門)
진양문(眞楊門) 편액 역시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의 글씨입니다.
정혜사(능인선원) 출입이 제한되고 있습니다. 5백년 이어진 숭유배불정책으로 조선시대의 불교는 그야말로 근근히 그 맥을 이어오다가 조선조말 경허 선사의 등장으로 홀연 불교중흥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1900년대 우리나라 불교계에서는 ‘북(北) 오대산에 방한암이 있고, 남(南) 덕숭산에 송만공이 있다“는 말이 든든한 버팀목처럼 회자 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오대산의 한암 스님과 덕숭산의 만공스님은 당시 우리 불교계를 상징하는 두 거목이셨습니다.
진여문(眞如門)
정혜사 선수문(善修門)
선수문(善修門) 편액은 덕숭총림 수덕사 4대 방장을 지내신 송원 설정(松原 雪靖) 스님의 글씨입니다.
정혜사는 599년 지명법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능인선원은 만공스님이 주석하며 선풍을 진작시킨 정진처입니다. 매년 철마다 수십 명의 스님들이 용맹 정진하는 우리나라 대표 선원입니다. 외부인 출입을 금한다기에 열려있는 문틈과 담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습니다.
두 개의 탑이 보입니다.
정혜사 능인선원(定慧寺 能仁禪院)
정상 0.91km, 수덕사 0.98km
정상 갈림길
수덕사 1.17km, 정상 0.5km, 정상 0.74km
이제 갈림길이 나온다. 정혜사를 지나 삼거리를 통과하는데 양쪽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지만 좌측은 짧으나 가파른 길(0.5km), 우측은 돌아가나 덜 가파른 길(0.74km)이다. 우리는 우측으로 향합니다.
전월사 0.02km, 정상 0.53km, 수덕사 1.38km
전월사 입구
전월사를 들려볼까 했는데 출입금지입니다. 전월사 "넘지 마시오"란 출입 금지와 같은 말인데 부드럽게 와닿습니다.
정상 0.24km, 수덕사 1.67km
조망바위
덕숭산 정상이 바로 코앞입니다.
덕숭산 정상에는 이정목과 정상석, 국가지점번호, 등산 안내도가 있습니다. 덕숭산(수덕산)은 호서의 금강산이라고도 불리는 예쁘장하고 아담한 산으로 기슭에 수덕사를 품고 있으며 예산읍에서 서쪽으로 20㎞, 덕산면 사천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덕숭산 정상
덕숭산 정상에서 바라본 수암산 방향 파노라마
가야산
덕숭산에서 당겨본 가야산 가야봉과 석문봉, 원효봉
덕산과 예산평야, 수암산
둔리저수지와 우측 악귀봉, 용봉산이 보입니다.
덕숭산 정상에서 바라본 오서산 방향 파노라마
좌측 악귀봉, 용봉산, 오서산, 백월산, 홍동산
저멀리 오서산, 백월산과 수덕사 주차장이 보입니다.
당겨본 수덕사
당겨본 오서산, 백월산, 홍등산
삼준산
정상 갈림길
덕숭산 정상을 긴 코스로 올라 한 바퀴 돌아 짧은 코스로 하산하면 가파른 나무 계단도 만나고 이 이정목으로 옵니다.
다시 돌아온 사면석불
수덕사 승가대학인 심우당은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수덕사 내 '선 미술관'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전문 미술관으로 2010년 10월 26일에 개관했다고 합니다.
수덕여관 옆에는 이응노 화백이 '영화롭고, 마르고, 성하고, 쇠함' 즉, 모든 물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는 불교의 '제법무상'의 의미인 '영고성쇠(榮枯盛衰)'를 표현한 추상화 암각화와 이 화백이 한글 자모 문자 추상화 암각화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1960년대에 이응노 화백은 문자추상화에 빠져 있었다고 합니다.
수덕여관
고암 이응노 화백이 작품 활동을 하던 수덕여관과 우물, 암각화를 포함한 일대가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수덕여관은 화백이 1944년 구입하여 6.25 전쟁 당시 피난처로도 사용하였으며,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했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수덕사 위쪽으로부터 내려온 좁은 개울물이 집 앞으로 흘러 지나가고 개울 건너편에 여관을 배치하였습니다. 가운데 안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는 여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여관만 아니라면 소담하면서 궁색하지 않은 전형적인 농가 모습입니다. 후면에는 이응노 화백이 사용하던 우물이 있습니다.
부도전
예산 수덕사 일주문 가기 전 오른쪽에는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부도가 모여 있는 수덕사 부도전이 있습니다. 수덕사 초대 방장 혜암 대종사, 2대 벽초 대종사, 3대 원담 스님 등 수덕사에서 주석하셨던 고승들의 부도가 있습니다.
수덕사 입구 먹거리촌에서 바라본 덕숭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