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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할렐루야 거룩한 주의 날입니다. 주님의 날,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리는 저와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일터, 직장 내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좌우 앞에 계신 분들하고 사랑의 인사, 축복의 말을 건네도록 하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도행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 이후에 최초 한 30여 년간 기독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라고 보시면 되겠어요. 특별히 사도행전을 누가 행전이라고 하는데 누가에 의해서 기록된 누가 복음의 연장이라고 보시면 되겠죠. 따라서 누가 복음의 속편이다. 그렇게 이해하셔도 됩니다. 이는 누가 복음의 서문과 사도행전의 서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하죠. 데우 빌로에게 내가 먼저 쓴 글 먼저 쓴 글이다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렇다면 저자가 먼저 쓴 글은 어떤 책일까요? 질문이 너무 어렵죠. 누가 복음입니다. 누가복음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을 통해서 이것을 확인할 수가 있어요. 우리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 말씀 앞에 보시고 같이 읽어보실까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에는 뜨네요. 누가복음 1장 1절에서 4절 말씀 제가 읽어드릴게요.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목격자와 말씀의 일꾼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욱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3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겠어요?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원치 않게 하나둘씩 순교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때 당시에 의식이 있었던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마가와 같은 사도들이 1세대 제자들이죠. 그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의 가르침이 좀 문서로 보존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것이 잘 승계되면 좋겠다라는 필요성을 느낀 거예요. 제자들이 다 죽고 나면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하나둘씩 붓을 들고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그 삶에 대해서 사역에 대해서 기록했다는 것이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저자인 누가도 모든 일을 처음부터 정확하게 조사해 보았기 때문에 정리한 순서대로 베오빌로 가카에게 차례대로 이 서신을 이 편지를 이 글을 보내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순서에 따라서 누가 복음을 먼저 그리고 이어서 사도행전을 저술하게 된 것이죠. 누가가 붓을 든 목적은 분명합니다. 여기에 보니까 데오빌로 및 데오빌로로 대표되는 이방 독자들, 데오빌로는 데오 하나님 빌로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을 대표하는 그러한 표현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방인까지 모두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지금까지 복음에 대해서 들었는데 그 배운 말씀들이 역사적으로 확실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기록한 것이죠. 그래서 1절 2절을 읽어보시면 오늘 본문 누가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이 뭔지를 사도행전이 가르쳐주고 있어요. 우리 사도행전 1장 1절 2절 같이 읽어보실까요?
데오빌로요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누가 복음에 뭘 기록했다고요? 예수님께서 행하시고 가르치기 시작한 것 그것부터 시작해서 승천하실 때까지 사도들에게 성령에 대해서 가르치고 승천하시는 그때까지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야 될 핵심 부분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승천하시기 전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령하셨다는 거예요. 성령으로 명령하셨다. 여기 명하셨다는 것은 명령하다는 뜻도 있지만 위임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령으로 위임한 거죠. 따라서 명령하시다는 그 표현보다 사명을 부여하셨다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더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들에게 사명으로 부여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냐라는 사명으로 부여하신 것 이것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과도 같은 것이죠. 그 핵심 내용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이 놀라운 사실을 근거로 해서 회개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거 전하라 이것이 바로 핵심 내용이다. 그래서 그 내용의 부분이 이제 누가복음 마지막 부분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46절에서 48절인데 함께 보실까요?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죄사함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지으니라.
따라서 여러분 먼저는 이 누가 복음 같은 경우는 복음의 역사성을 기록해 주었다면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사도행전은 그 연장선상에서 성령의 역사, 약속하신 그 성령의 역사가 사명을 부여받은 자들로 인해서 어디까지 땅끝까지 복음이 확산되어지는 것을 기록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그 성령의 역사는 사도행전으로 끝나지 않고 지금도 여전히 역사하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복음을 위해서 우리가 살아야 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 준 책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요 전래동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기록해 준 실제 예수님께서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또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면서 복음을 전하라 말씀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다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이 약속된 성령은 결국 모여 있던 제자들에게 임하게 되었고 그들을 통해서 놀라운 역사로 세상 가운데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 성령의 역사는 초대교회 때만 일어났던 역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임하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이 누구시라고요?
성령님.
그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삶과 날마다 동행하며 승리의 삶을 걸어가는 힘과 능력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3절을 보시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계시면서 말씀하셨던 핵심 키워드가 있어요. 우리 3절 말씀을 한번 보실까요?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사 40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여기 핵심 키워드가 뭐겠어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고 돼 있죠.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사실 이 하나님 나라는 사도행전의 핵심 키워드이기도 하면서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을 보시면 선지자들이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예언을 했거든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이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임을 이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하게 하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친히 오심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하나님의 나라가 친히 임함으로 인해서 그대로 성취가 되었던 것이죠. 즉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주님 오시는 그날에 도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시긴 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런 노래 있잖아요. 인생은 미완성 그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언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됩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고 재림하시는 그날에 구원과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된다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3절에 기록된 이 하나님 나라의 일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즉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회개를 통한 죄사함의 복음을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라는 거예요. 따라서 예수님께서 40일을 머무는 동안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던 그 핵심은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였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죄사함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셨습니까? 그렇다면 죄사함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 된 저와 여러분들이 동시에 감당해야 될 것이 무엇이냐 이제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는 자가 되어야 된다. 이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인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 또 우리 신은 공동체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일 그래서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위해서 날마다 전진해 나아가는 귀하고 복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해야 되는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그게 중요하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는데 다른 방향으로 가도 안 되고 잘못해도 안 되잖아요.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서 오늘 성경 4절은요. 제자들에게 이것을 요구했습니다. 4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예수님께서 너희들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해야 되는데 이 사명 감당하기 위해서 먼저는 떠나지 말아야 된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자들이 예수님 십자가에 그 자리로 나아갈 때 다 뿔뿔이 흩어졌잖아요. 그런 제자들을 기억하셔서 그랬을까 그래서 떠나지 말라 했을까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떠나지 말아라. 어디에서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말아라.
그럼 예루살렘은 도대체 어떤 것인가 그것을 알아야겠죠. 예루살렘은 예루라는 것과 살렘이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예루라는 것은 터 기초 기초를 둔다는 것이고 살렘 살렘은 뭘까요? 살렘 살렘 살렘 하다 보면 뭐가 떠올라요? 샬롬 평화 평강 그러면 예루살렘이 뭐예요? 평강의 터 평화의 터 그렇게 되는 것이죠. 즉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면 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것들이 있었는가를 우리는 볼 수 있는데 먼저 하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것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죠.
또한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바쳤던 곳이 바로 예루살렘입니다. 솔로몬이요. 하나님의 성전을 지은 것도 예루살렘이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어디를 향해 갔어요? 예루살렘을 향해서 가셨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그 길을 어디에서 십자가의 그 고난을 바로 예루살렘에서 감당하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예루살렘이라는 것은요. 구속사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을 매우 중요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을 마치 마음의 고향 신앙의 근거지로 알고 살았던 것이죠. 그래서 어디를 가도 이들에게는 항상 예루살렘을 떠올리며 살았던 것이죠.
여러분 우리는 집을 지을 때 무슨 향을 좋아합니까? 남향 왜 그런 건지 저는 잘 모르겠는데 남양집이 좋대요. 해가 잘 들어오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어쨌든 남양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요. 해당을 지을 때도 그 정문을 예루살렘을 향해서 했다는 거예요.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아침마다 연병장을 돌고 이렇게 묵념을 합니다. 매일 한 건 아니지만 고향을 향해서 음 그럼 다 각자 자기 고향을 향해서 서서 이렇게 숨깁니다.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묵념을 하죠.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다니엘과 같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어디를 향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기도하라는 거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이 매우 중요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셨을까 왜 그랬을까요? 오늘 본문에 그 해답이 있는데 약속하신 것 때문 약속 그래서 여러분 이 약속이 무엇인가 보았더니 성령 세례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5절 말씀 함께 읽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즉 성령 세례 받기 위해서는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떠나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성경을 여러분 열심히 보시면 성령 세례 역시도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해 주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요엘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했어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주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죠.
또한 에스겔서를 통해서 새 영을 너희에게 두며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시겠다 그렇게 약속했다는 거예요. 구약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살아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누누이 가르치고 알려주었던 것이 있는데 제자들을 향해서 내가 너희들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겠다. 이를 위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어서 너희와 함께하겠다 그렇게 약속해 주셨죠.
또한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 그가 나를 증언할 것이다 고 주님에 대해서 증언하시겠다 말씀하셨고요.
또한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저와 여러분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겠다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거예요.
따라서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이 자리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 진리의 성령께서 인도하신 것이죠. 할렐루야 우리의 삶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우리를 바른 길로 옳은 길로 진리의 길로 날마다 인도하신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들이 성령 의지하여서 이 땅을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님들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여러분 이들이 떠나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바로 성령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고, 또한 더 나아가서 성령을 받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것을 볼 때 아무리 예수님의 제자들일지라도 성령받지 아니하면 사명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을 3년이나 따라다녔어요. 제자들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힐 그때가 되니까 어떻게 됐습니까? 다 도망가버렸어요. 이렇게 따지고 보면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잘 교육하지 못한 스승이 되는 거예요. 제자들이 하나도 남지 않고 도망갔잖아요. 그래도 나는 같이 죽겠노라. 베드로는 남았어야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그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떠났다.
그런데 성령 받고 나니까 어떻게 돼요? 그들이 자기의 생명을 걸고 복음을 위해서 살아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성령 세례를 받아야 된다. 그러니 저와 여러분들이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성령 세례 없이 성령의 충만함 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효력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오라 해도 오지도 않고 그런 일들이 빈번한 거예요. 그 전하기에 앞서서 하나님 나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채워주시고 내가 전하는 이 입술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가 그의 삶 가운데 부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가 준비되어질 때에 복음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임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기 위해서 때로는 예루살렘을 기다리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라는 것은 어떤 자리일까요? 여러분 이 예루살렘 우리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주님 만나는 자리가 되어야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는 것은 우리에게 예수 중심의 삶을 살아다오라고 요청하는 메시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라. 내가 너희를 어떻게 하겠다고요?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명예를 배워라. 나의 명예를 베고 배워라 이렇게 말씀하죠.
그리고 하신 말씀이 뭐예요? 너희 마음에 쉼이 있으니 쉼 앞서 이야기한 예루살렘 뭐예요? 바로 평화의 턱 이 슈메터가 주님 안에 있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탕자처럼 자기 살 길 찾아서 아버지 품을 떠나보십시오. 처음에는 즐거움이 있을 거예요. 당자도 그랬잖아요. 즐거움이 있고 나름대로도 자기 만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는요. 진정한 쉼이 있지 않았던 거예요.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거짓 신세가 되어서 아버지 품 그곳이 정말 내 평안한 장소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하다 보면 시험이 찾아와요. 여러분 어떤 시험이 찾아올지라도 아버지의 품을 떠나는 어리석은 탕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혹시 이 자리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아직 내가 주님을 알지 못하겠고 주님과 함께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두드리시는 그 음성을 듣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는 은총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읽으실 때 이게 내 말씀 되게 해 주십시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함께 읽어보실까요?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돌아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문을 두드리고 계세요. 여러분 이때 마음을 활짝 여시고 주님 어서 오십시오. 초청하시고 받아들여서 우리 주님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기쁨과 감사가 우리 안에 충만하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루살렘에 머물러라는 것은 예수 중심의 삶을 살아라는 것과 더불어서 영적 에너지가 공급되는 교회 중심으로 살아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어요.
여러분 에스겔서 47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점점 수위가 높아지더니 발목을 채우는 거예요. 조금 지나니까 무릎까지 찹니다. 조금 지나니까 허리까지 찼어요. 좀 더 지나니까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었다. 그렇게 성경은 기록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번성했다라고 기록하는 것이죠. 또한 그것이 사회로 흘러들 사회 사회는 물고기가 살 수 없어요. 염분이 너무 많아가지고 사회에 들어가서 우리가 경험 제가 이제 성지 순례에 가서 신학생들이 사회에서 경험한 것이 있는데 1열로 서서 거기서 달리겠어요. 누가 더 빨리 달리 안 내려가니까 되더라고요. 여기 물고기가 살 수가 없어요.
그런데 오늘 말씀 성경 에스겔서 47장에 보니까 그 사이에 이 물이 들어가니까 고침을 받고 물고기들이 살게 되더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강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이죠. 그리고 강물 이쪽 저쪽 언덕에 있는 온갖 종류의 과일나무가요. 자라기 시작하는데 잎이 무성해지고 시들지 않으며 열매도 끊이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무들이요. 달마다 새로운 열매를 맺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 이유가 단 한 가지 성서로부터 물이 나왔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것 주님의 성전에 나와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 강단으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 나의 발목을 채우고 무릎을 채우고 허리를 채우고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그러한 가득함이 우리 안에 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기도가 저와 여러분 기도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제가 성령 충만에 대해서 가끔 묵상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요. 성령 충만이라는 것은 그냥 물에 내 몸을 맡기는 것이다. 만약에 발목까지만 찼으면 내 의지대로 걷지 무릎까지 차도요. 힘이 있습니다. 허리까지 차도 움직입니다. 그런데 내 몸이 당길 정도로 가득 차면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그때 지혜가 발생하는 거죠. 이 물에 맡기고 살아 성령 충만은 그 물에 맡기고 사는 인생, 성령에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 성령에 따라 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생수를 통해서 사는 은혜 회복의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풍성한 열매로 결실을 맺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코로나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난다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교회가 아니어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잖아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아라.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우면 볼수록 더욱 모유가 모여 모여서 함께 은혜 나누고 사랑의 교제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며 살라는 것이죠. 특별히 여러분 초대교회의 모습을 알잖아요. 성령 충만 받았던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가 되면 모이기가 점점 힘들어질 것입니다. 아마 사단 마귀는 아무래도 더 우리를 모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코로나19보다 더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을 발생시켜서라도 우리의 환경을 모이지 못하게 만들 것인데 그때 저와 여러분들이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 힘쓰는 초대교회와 같은 신앙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고 명령을 하나 했죠. 근데 그 구절에 보니까 또 한 가지 명령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기다리라. 기다리라. 무엇을 기다려야 되는가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하고 있죠.
여러분 약속에는요. 반드시 기다림이라는 것이 수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 믿음이 있을 때 기다리시오. 그 믿음이 없으면 기다리지 않습니다. 또한 그 기다림에는 인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렇죠 이 인내는 언제 생깁니까? 믿음이 있을 때 인내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기다림이라는 것과 믿음 인내라는 이 세 단어는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에요.
기다리는 자는 믿음이 있어서 기다리는 거예요. 그래서 인내할 수 있는 거예요. 믿는 자는 소망이 있기 때문에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 왜 인내합니까? 믿기 때문에 인내하는 것이죠. 옛날에 핸드폰 없던 시절 옛날 과거를 한번 떠올려보십시오. 영화를 보거나 드라마의 옛날 이야기들을 한번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 두 사람이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신라명가에서 만나자 이렇게 약속을 했어요. 근데 연락처가 없잖아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10시에 어디에서 만나기로 약속만 하는데 그러면 어떡합니까? 그 시간에 맞춰서 가죠. 한 10분 일찍 가든지 가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기다리다가 1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12시 59분 어디 보자 1시 댁에 안 오네 가자.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만나기로 약속했는데 기다려야죠. 무슨 일이 있는가 차가 막히는가 왜 안 오지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기다리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경우 보면 돌발 상황이 생기잖아요. 가야 되는데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갈 수 없게 되는 그러면 그 기다리는 사람은 알지도 못한 채 어떻게 해요? 1시간도 기다리고 또 차 한 잔 시켜서 2시간 기다리고 왜 기다립니까? 약속했잖아요.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기다리는 물론 그 약속이 내가 원치 않는 약속이었다면 아마 59분 되면 바로 1분 기다렸다가 바로 일어나 갈 거예요.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 만나기로 약속한 그 기다림에는 반드시 올 거라는 기대감 그것을 가지고 늦더라도 기다립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약속이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 그것을 기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인생을 살다 보면 돌발 상황이 생겨서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돌발 상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함으로 지키시고 우리에게 확실하게 이루신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 약속을 기억하고 날마다 기다리며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제자들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거예요. 성령 충만을 기다려라. 여기에는 소망을 갖고 구하라는 의미도 있잖아요. 하나님 나에게도 예수 믿었는데 성령 충만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셨다면 성령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도로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요. 성령 충만이에요. 그냥 세상 사람으로 살아갈 때는 성령 충만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성령 충만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라는 또한 여러분 기다림에는 우리가 성령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또 하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앞으로 계속 기다려야 될 것 뭘 기다려야 됩니까?
오늘 본문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 아래쪽에 11절에 보면 약속의 말씀을 주세요. 우리 11절 말씀 같이 읽어보실까요?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에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그렇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기다림을 믿음을 가지고 기다려야 되고요. 또한 소망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약속해 주신 주님 오시는 그날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대하면서 기도하고 기다리는 그러한 귀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을 드립니다. 지나리라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머리 가운데 스쳐간 한 분이 계셨어요. 이분 얘기를 할까 말까 하다가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기다리라 하는데 이제 고인이 되신 박천효 집사님이 제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거예요. 이분이 새벽마다 교회에 오셔서 기도를 하시면 눈물 흘리면서 그렇게 기도를 하세요. 제가 새벽마다 봤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이분이 소리 내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굉장한 음유를 타면서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제가 집중해서 들으려고 하는 게 매일 들으니까 제 귀에 인이 박인 거예요.
근데 그거를 제가 분석해 보니까 리라리라리라 리라예요. 제가 한번 불러봤어요. 하도 이제 제가 모시고 많이 다녔거든요. 시도때도 없이 저한테 전화해서 어디 좀 가자고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해요? 가야죠? 그렇게 해서 시간을 보냈던 그때에. 근데 집사님 새벽에 기도하실 때 딸이라 이렇게 하시는데 뭔 이야기예요? 제가 물어본 적 있어요. 내가 어떻게 하냐고 성령께서 하시는데 어떻게 하냐고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리라리라리라를 제가 뒤에서 듣는데 어떻게 들렸냐면 저한테 기다리라 기다리라 기다리라 이렇게 들리는 거예요. 제가 어떤 기도를 했냐면 하나님 우리 박천일 집사님 뭔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주의 은혜가 임하는 그 기다림이 이 시간에 임하기를 소원합니다.
제가 뒤에서 기도했던 적이 있어요. 기다리는 것 매우 중요하죠.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주님 다시 올 수 있는 그날을 기다리고 산다는 것은 진짜 행복한 것이고요. 참 기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 소망이 있기에 오늘 하루를 힘들어도 심의 겨워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지 반드시 약속하셨습니다. 주님 다시 오시면 그 말씀을 붙잡고 저와 여러분들이 기다리시면서 뭐 해야 됩니까? 하나님 나라의 일 즉 성령 받아서 우리를 통해서 죄사함의 그 복음을 전함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기다림을 함께 기다릴 수 있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저와 여러분들을 오늘 이 시간 부르신 목적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그 사실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 일을 위해서 먼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고 약속한 성령을 기다려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아직 만나지 못하셨다면 먼저 기도할 것은 부활의 주님을 내가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 부활의 기쁨이 내 안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다면 이제 주님 내가 하나님의 백성 되었으니, 나도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서 성령 충만함 받고 내 주변에 있는 자들에게 이 복음의 복된 소식을 전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 제목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