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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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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 작품 1 |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 |
대표 작품 2 | |
수상연도 | 2015년 |
수상횟수 | 제34회 |
출생지 | |
[수상 작품]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
중국의 고대 단편소설집 《태평광기》에는 황보 씨가 썼다는 <경도유사(京都儒士)>라는 짤막한 소설이 하나 실려 있다.
어느 날 장안의 친구들끼리 이야기하다가 누가 담력이 센지 시합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한 유생이 담력이라면 자기라며 자청하여 흉가에서 밤을 새운다. 그는 횃대 위에서 펄럭이는 헌 모자를 허깨비로 보고 칼을 휘두르고 자기가 타고 갔던 나귀도 요물인줄 알고 코를 베어버리고 무서워 바들바들 떨며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 혼절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친구들이 꺼내서 보고 박장대소하는데, 열흘이 지나도록 공포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더라는 이야기이다.
나는 현재 우리나라 사학계를 보면서 자꾸 이 이야기가 머리를 맴도는 것이다. 지금은 누가 와서 윽박지르지도 않고 죽이려 쫒아오지도 않는데도 한 번 겁에 질린 민족은 아직도 오금을 펴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옆 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말살하려고 온갖 협박 공갈에 못된 짓을 다하였다. 당나라는 삼국을 멸하고 침략군 사령관 이세적(李世勣)의 주도하에 고구려의 환도성에서 우리의 사서를 몰수하여 4개월간이나 불태웠다. 일제강점기에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초대 총독의 주도하에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수색작전을 벌려 금쪽같은 우리의 사서 20여만 권을 남산에서 소각하였다. 뒤에는 일본 왕의 특명으로 한국의 역사를 일본보다 짧게, 일본보다 못나게 기록하라는 목적으로 조선총독부 산하에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조선사 편찬을 완성시켰다.
그런데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의 사서를 인멸한 것이다. 고려 때는 인종이 신라 종파주의자 김부식을 시켜 민족사서는 모두 거두어 소각하게 하고 모화사상으로 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조선조 때는 우리의 국시가 아예 ‘사대’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 하랴?
그런데 희한하게도 우리나라에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두 책은 우리 고대사의 7천년 역사를 다 잘라 내버리고 삼국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중국이고 일본이고 대찬성하는 바가 아닌가? 비록 삼국유사에서는 승 일연이 ‘환국(桓國)’과 ‘고조선’을 몇 줄 언급하기는 하였지만 자기나름대로 엉터리 주를 달아, 환인천황을 마치 불법을 지키는 무당의 신처럼 해석해버린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 고대사를 신화 전설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40여 년 전, 일본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사료를 하나 찾아들고 손을 부르르 떨며 지켜보고 있었다. 만주 일경의 두도구(頭道溝) 분관에서 압수하여 일본외무성에 보관하고 있는 이 사료는 만주의 한인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던 중등교과 대동제국지리라는 프린트 판이었다.
리 배달나라의 영역은 조선반도와 캄차카 반도와 요동반도와 남북만주와 시베리아로 이루어졌으니, 동은 베링, 타타르 해협에 이르고 서는 몽골, 청해에 이른다. 남은 제주도, 모슬포에 이르고 북은 북빙양에 접하고 있다.…
이 말이 웬 말인가? 베링 해협이라 함은 러시아와 알래스카 사이의 해협이 아닌가. 타타르 해협이라 함은 연해주와 사할린 사이의 바다이다. 북빙양이라 함은 시베리아 북쪽의 북극해를 말한다. 그리고 서쪽은 몽골과 청해호에 이른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나 독립군 자녀들은 이런 역사를 배우고 있었구나, 이것이 우리의 역사였구나 하는 것을 알고 나는 하마터면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만 해도 박은식(임시정부 대통령), 신채호, 정인보, 김교헌 등 민족사학자들은 이런 역사를 저술하였고 만주의 수 십 개 단체의 독립군이나 한인학교에서는 이런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은, 우리의 찬란한 역사에 비해서 중국은 겨우 우리 배달나라 중기쯤에 탁록(涿鹿)이라는 척박한 황토지역에서 생긴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은 아예 없다가 나중에 신라 백제인들이 건너가서 세운 나라였다. 그런데 그런 중국이 사마천의 터무니없는 『사기』가 나오면서 가당찮은 중화사상이란 것을 만들어냈고, 일본은 날조된 『고사기』와 『일본서기』라는 사서로 황국사관을 만들어 내어 자기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며 중국도 동생취급을 했다. 우리는 진짜 세계의 중심이면서도 모든 사서를 소각당하고 노예사상으로 집필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남아 한없이 작고 자신 없는 나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가 동경대학 조선사학과 박사반 학번 1호로 입학하던 해가 1972년이다. 동경대학에는 그 때까지 조선사를 동양사학과에서 겸하고 있었고 조선사학과란 것이 없었다. 내가 입학한 해에 처음으로 생겼지만 그것도 완전히 독립된 과가 아니고 동양사학과 내의 조선사연구과정이란 대학원이었다. 한국사를 마음대로 요리했던 태풍의 눈 속으로 내가 한국인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전에 이 과에 재직했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구로이타 가츠미(黑板勝美),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三) 그리고 쓰보이의 학생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은 모두 죽고 없었고, 내가 갔을 때는 다가와 코조(田川孝三),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가 갓 동경대학 강사급으로 퇴임을 했고 현직으로는 다케다 유키오(武田幸男)가 재직하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허탈감을 느꼈다. 우리나라 전역사를 바꾸어 놓은 그들이 어마어마한 세력인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겨우 한줌밖에 안 되는 존재였던 것이다. 이들을 존경하며 곁불을 쬐고 추종했던 우리의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이선근 등은 반 줌도 못되는 철없는 아희들이었다. 한 인간 수명의 3분의 1정도 밖에 안 되는 35년 동안 잠깐 기만당한 것을 가지고 ‘독립’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른스럽지 못한 짓이었다.
지도교수 다케다(武田)와는 거의 매 주 토론을 벌렸으나 사관의 소통이 전혀 불가능한 극과 극의 대결이었다. 나는 일제를 전혀 모르는 신세대였고 지도교수는 그 때까지 한국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동경제국대학의 정통 식민사학자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지도교수는 나의 사관을 문제 삼아 산더미처럼 정서해 간 내 학위논문을 접수도 하지 않고 퇴자를 놓았고 나는 빈털터리로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우리 사학계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이제 ‘경도유사’에서 탈피하여 가슴을 펴도 된다고 위안을 드리는 바이다. 누가 당장 쫒아오지 않으니 당당하게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역사를 쓰고, 일본의 거짓 역사를 반박하는 떳떳한 우리의 역사를 써도 괜찮다는 것을 조용히 타일러 주는 바이다.
[수상 소감]
중국 오지여행 중에 지연희 회장님으로부터 뜻밖의 낭보를 듣게 되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를 걷다가 문득 만난 소나기였다. 내가 수필문학상을 받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다가 당한 일이기 때문에 한편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 기쁘기도 하였다.
전에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수필을 4반세기 동안이나 써 왔는데 그래도 하나 정도는 무슨 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그러나 그것은 순간의 생각이었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옛날의 텔레파시의 분자가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분자와 결합하는 순간 작은 폭발을 하였나 보다.
상을 받는다는 것은 그때부터 진정한 시작을 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까지는 서론이었고 이제부터 본격적인 문인의 대열에 들어서 명작도 한 편쯤 만들어보라는 명령일 수 있다. 나는 그리 받아들이기로 했다.
재주 없는 사람은 칭찬을 해주면 플라시보 효과를 발휘하여 더 잘할 수 있다. 나는 자신을 잘 알고 있다. 글에 대한 선천적인 재질은 없고 열심히 노력하는 형이다. 이제 나에게 플라시보 효과를 주었으니 그런 김에 이제부터 끝까지 글만 쓰면서 생을 마감하기로 하였다. 나는 평생을 학문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낯익은 동무 하나가 항상 동행하고 있었다. 그것이 문학창작이었다. 그것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정년도 했으니 본격적으로 네 마음껏 한 번 해보라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고 있다.
수필은 내 인생의 저장창고였다. 생각이 많고 상념이 흐트러져 난삽하다가도 수필 한 편으로 묶으면 말끔히 정돈되고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쾌감에 젖어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차곡차곡 저장을 해두는 습관을 들여왔었다. 이제 문장 쓰기에 인정을 받았으니 수필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른 장르까지 섭렵해볼 작정이다.
느지막하게 신선한 설렘을 주신 한국수필가협회와 심사위원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작가 프로필]
한국외대 졸. 대만대 석사졸. 동경대 박사수료. 한국외대 박사졸. UC Berkeley, Exchange Professor. 성신여자대학교 교수 겸 총장. 주타이뻬이한국대표부 대사.
저서 : 수필집 『새벽을 깨는 새』 『우리는 왜 노하지 않는가』 『기분 좋은 날』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며』 『부단히 떠나야 한다』 『일본은 결코 문명대국이 될 수 없다』 『사자 등에 사는 벼룩』 『곰의 집』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 등
[심사평]
2015년도 한국수필문학상에 응모된 작품집 속에서 심사위원들의 합의로 제일 먼저 선정된 작품이 구양근 수필가의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였다. 성신여자대학 총장과 대만 대사를 역임한 구양근 박사의 수필집 <이웃나라에 떨지 마라>는 작품에 담긴 테마와 관점에 있어서 여느 수필집에서 볼 수 없는 스케일과 대범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수필이 '나의 삶과 인생'이란 범주에 매몰되어 신변잡사의 나열이 많은 현상에서 벗어나 국자와 민족, 사회 환경과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과 새로운 전개를 보여준 수필집이다. 거침없는 모습과 놀리적인 에세이가 있는가 하면 서정적인 감성을 살린 수필과 간간이 시 작품도 수록하여 시헙적인 편집도 눈길을 끈다. 이 시대 한 석학의 뚜렷한 개성, 지성, 감성의 미학을 맛 볼 수 있는 수필을 보여준다.
심사위원 정목일 유혜자 지연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