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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91)숨은 은인(恩人)
아무래도 이정승에게 벼슬을 사기 위하여 바친 돈이 되돌아온 것이 아니라면 그 수상한 돈의 정체를 반드시 밝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으 으음! 그 그랬구나. 아범아! 너 건강하고 우리가 이렇게 건강하게 잘살고 있으니 괜찮다.”
어머니가 말했다. 김선비는 부끄러움으로 어머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때 그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그래요. 생각해보니 3년 전 돈궤미를 지게에 짊어지고 온 젊은 짐꾼이 돈궤미의 사연을 묻자 수원에서 나리가 새 집 지으라고 보낸 것이라고 말했지요.”
“부부 부인, 부... 분명 그 짐꾼이 수원에서 나리가 보낸 것이라고 했단 말인가요?”
김선비는 놀라 소리쳤다.
“정말이다. 아범아! 그 소리는 나도 들었단다. 그 돈 때문에 우리가 굶어죽지 않고 대궐 같은 새 집을 짓고 이렇게 잘 살아왔단다.”
어머니가 김선비를 빤히 쳐다보고 말했다.
“아아! 그것은 필시 그 소백주가 보내온 것입니다! 어머니!… 이 이렇게 내 가정사까지 샅샅이 신경을 써주다니… 으음!…”
김선비는 속 깊은 소백주를 떠올리며 벌린 입을 닫지 못했다. 그해 봄 낙향하는 쓸쓸한 길에 수원에서 한편의 시를 쓰고 그녀를 만나 호사하며 지내던 어느 날밤 어디에 사느냐며 가족 사항을 자세하게 묻던 그녀가 김선비의 눈에 불꽃처럼 환하게 떠올랐다. ‘아아! 우리 가족을 은밀히 보살펴 준 숨은 은인(恩人)이 소백주였다니!’ 그녀가 아니었다면 이 가족들은 얼마나 힘든 생활을 했겠는가!
“지금까지 3년째 봄마다 그렇게 살림살이에 쓸 돈을 수원에서 나리가 보냈다며 젊은 짐꾼에게 거금을 지게에 짊어 보내왔지요. 서방님! 오늘은 그만 늦었으니 이 집에서 쉬시고 내일 그리로 다시 가세요. 어찌 사람으로서 은혜(恩惠)를 저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우리 가족의 은인이자 이제 우리와 같은 한 가족입니다.”
김선비의 아내가 김선비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김선비는 놀라 벌렸던 입을 닫고는 점잔을 빼며 말했다.
“어흠! 부인, 고맙소! 우리가 이렇게 여러 해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금방 날 더러 그곳으로 가라고 내쫓으려 하는 건가요? 그새 그렇게 투기(妬忌)를 부리면 되나요.”
“투기라뇨? 서방님! 생각해 보세요. 소백주라는 사람이 당신 하나를 보고 이렇게 많은 돈을 해마다 보내 왔던 게 아닌가요. 그 돈이 아니었다면 우리 식구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여기 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새로 지은 좋은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고 아이들 잘 기른 덕이 모두 소백주 그 사람의 은덕인데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의 은혜를 모르면 아니 되겠지요.”
기생 소백주 (92)은인자중(隱忍自重)
김선비의 아내가 조목조목 따져가며 조용히 말했다. 그것은 투기서린 독 오른 여인네의 말이 절대로 아니었다.
“아범아! 어멈 말이 맞다. 그 사람은 우리 집의 은인이다. 너는 그 사람에게로 가거라.”
어머니가 타이르듯 김선비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그 분에게로 가셔야겠군요.”
조용히 듣고 있던 큰아들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으음!… 음… 어 어흠!…”
김선비는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6년 만에 돌아온 집인데 사랑하는 어머니며 처자식을 두고 그들이 원한다고 당장 그곳으로 떠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은 이렇게 소백주가 많은 돈을 보내와 새 집을 짓게 하고 가족들을 해마다 보살펴 주었으리라고는 김선비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역시 소백주는 다른 여인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넓은 마음과 지혜와 기량을 지닌 세상에 하나 있을까말까 하는 훌륭한 여인임에 틀림없었다.
김선비는 소백주의 자신을 향한 깊은 마음을 생각하며 그해 눈 내리는 하얀 겨울을 고향 집에서 은인자중(隱忍自重)하며 지냈다. 북풍한설 몰아치는 겨울은 참으로 살갗이 시리고 추웠다. 싸늘한 겨울밤을 가로지르며 기러기가 울며 날아가고 아침이면 처마 끝에 고드름이 한발이나 늘어나 달렸다.
창끝 같은 고드름을 아이들이 떼어내 가지고 놀기도 하고 얼음 언 논다랑이 위에서 팽이를 치거나 썰매를 타고 지냈다. 이토록 추운 겨울에도 먹을 식량이 있고 또 땔나무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밥이 없거나 땔나무가 없다면 겨울 추위는 참으로 혹독할 것이었다.
김선비는 흰쌀밥을 먹으며 고운 비단 이불을 덮고 따뜻한 방안에서 편히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는 한편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런 행복은 영영 뒷전이 되고 말았을 것이었다. 이렇게 한가로이 낮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아이들 글공부를 보아주고 밤으로는 아내와 한 이불 속에서 도란도란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지낼 수 있는 것이 그 소백주의 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녀가 한없이 고맙고 한편으로는 더없이 그리운 것이었다.
사람을 알아볼 줄도 알고 또 가지고 있는 재물도 쓸데다가 아낌없이 쓸 줄 아는 여인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웬만한 사내보다도 더 야무지고 당찬 데가 있고 또 이렇게 알 수 없는 깊은 데까지 섬세하게 신경을 써 배려해 줄줄 아는 그 고운 마음씨가 김선비를 늘 그녀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김선비는 내놓고 소백주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낼 수는 없었다. 집안에는 어엿이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다. 그녀 또한 김선비에게는 다시없는 고마운 여인이었다. 평생 글공부만 한다고 책만 읽으면서 살아온 과거에도 급제하지 못한 무능한 서방님에게 집안의 전 살림을 팔아 벼슬을 사려는 데까지 마다하지 않고 마음을 써준 자상한 부인이었다. 더구나 홀로 된 어머니를 잘 봉양하며 아이들을 길러 온 것을 생각하면 그 고마움은 어디 비길 데가 없었다.
기생 소백주 (93)그리운 소백주
그러고 보면 역시 늘 자신만이 큰 문제였다. 아직껏 남의 덕으로 살았지 스스로는 늘 낭패만 보아온 인생이었다. 아무래도 김선비 자신은 또 소백주에게로 떠나야만 할 성 싶었다.
기생으로 이름을 드날리며 천하의 내로라는 권력가며 재력가인 한량들과 유희에 빠진 수많은 사내들을 상대해 농락하며 그들이 가진 눈먼 돈을 산더미처럼 긁어모은 능력 있고 당찬 소백주에게로 가야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며 처자식이 또 한해를 행복하게 살 돈궤미를 봄이면 소백주가 보내줄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다시는 보내주지 않는다고 하여도 소백주와 함께 살았던 지난날 자신의 옹색하고 가난한 처지와 고향에 남아있을 늙은 어머니며 가솔까지 생각해 그 가족을 보살펴준 그 마음에 대한 일억 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하여 기어코 가야만 했다.
물론 그것은 김선비의 순수하고 지극한 소백주에 대한 티끌 한 점 없는 끝없는 사랑에 기인한 것이었지만 말이다. 온 세상을 송두리째 지배하던 겨울 북풍이 남으로부터 몰려오는 따뜻한 바람에 밀려 얼음 얼어붙던 자리에 어느 결 파릇파릇 봄 새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아니다. 겨우내 푸른빛을 내지 못하고 얼어붙었거니 녹았거니 견디던 것들이 날이 따뜻해지자 푸른빛이 함빡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계절이 오고 가는 자연의 섭리 따라 하얀 눈이 내리는가 하면 또 그 자리에 오색의 꽃이 피어나고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들고 나는 때를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가을볕에 잠시 속아 씨앗을 뿌렸다가는 큰 낭패를 볼 것이었다.
적어도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어붙었다 해도 그 자리에 봄이 올 것을 미리 알아보고 땅을 일궈 씨앗을 뿌리는 혜안(慧眼)을 사람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러한 혜안이 없이 막무가내로 살아가기에 사람들이 우연히 모든 일이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아! 지금은
온천지가 살아나는 때
얼음 어는 땅에 새로 새싹 돋고
꽃 피어 향기 가득 할 때
언제나 새봄은 남으로부터 오나니
북으로 가는
거침없는 저 봄 등을 타고
내 마음 달려가네.
그리운 이에게로”
언젠가부터 자꾸 그리운 소백주를 마음속에 감춰두고 사는 김선비는 시를 읊조리며 남으로 왔던 봄이 북으로 가는 길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서 그녀에게로 가고 싶은 뜨거운 그리움의 나래를 펴곤 하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94)봄길
그것을 김선비의 아내가 알았던 것일까? 개울 옆의 버들강아지 털이 보송보송 부풀어 오르고 개나리 노란 꽃잎이 녹은 눈자리에서 피어나자 김선비의 아내는 정성껏 나들이 의복과 괴나리봇짐을 마련했다. 그리고는 화창한 어느 봄날 아침 김선비에게 가져다주고 말했다.
“어서 더 늦기 전에 수원엘랑 가시지요.”
“어어 어흠!”
김선비는 뭉그적거리며 대답대신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여기 말 대령했습니다. 지난겨울 잘 먹여서 아주 잘 달릴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셔야 저희들도 행복하게 살 수 있지요.”
큰 아들이 지난 늦가을 김선비가 타고 온 하얀 말고삐를 끌고 나오며 말했다. 김선비는 이제 더는 안되겠구나 싶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 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어머니, 소자 잠시 수원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아범아! 우리 일일랑 걱정 말고 어서 가거라.”
김선비는 어머니 방에서 나와 나들이 의복을 입고 아내가 챙겨준 괴나리봇짐을 등에 짊어졌다.
“내 수원에 다녀오겠소. 부인, 그동안 어머니와 아이들과 건강히 잘 있으세요!”
김선비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말 등 위에 올라 채찍을 후려 쳤다.
“이랴! 이랴!”
그리운 소백주가 있는 수원 땅을 향해 김선비는 쏜살같이 말을 몰았다. 그리운 소백주를 볼 양으로 일심으로 가슴이 부푼 김선비는 주막에 들려 쉬는 것도 줄이면서 말 먹이를 먹이고는 저녁에 잠깐 눈을 붙이고는 새벽 여명이 트면 또 재빠르게 말을 몰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간다는 것은 늘 가슴 뜨거운 일이었다.
푸른 봄풀 살아오는 들길을 달려 봄바람 몰아가듯 산길을 달리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 갈 때 가졌던 무거운 마음과는 다르게 다시 소백주를 향해 달려가는 길은 꽃길이었다. 며칠 동안 줄기차게 달려가는 길 끝에는 그리운 임이 함빡 봄꽃 같은 웃음을 입술 가득 물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어느 따뜻한 봄날 오후 드디어 고대하던 수원에 당도한 김선비는 낯익은 대문 앞에 서서 말 등에 앉아 소리쳤다.
“이리 오너라! 이리 오너라!”
그 소리를 듣고 집안에서 일하던 하인들이 뛰쳐나왔다.
“아이구! 상주나으리 오셨어요!”
기생 소백주 (95)사랑
집안일을 하는 옥단이가 소리치며 반겼다. 그 뒤로 집안에서 일을 하는 늙은 사내가 나와 말고삐를 부여잡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말에서 내린 김선비는 에헴! 하고 큰 기침을 하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구! 서방님 오셨어요!”
옥단에게 김선비가 왔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소백주가 버선발로 마당을 가로질러 나와 소리치며 반긴다. 화사하게 핀 한 송이 붉은 모란꽃이 나비마냥 향내를 풍기며 다가오는 모습에 김선비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내 그대가 그리워 눈 녹은 길을 따라 가는 봄을 쫓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왔소이다.”
“어젯밤 꿈에 창공을 날아온 하얀 학 한 마리가 품으로 깃들고 아침에는 까치가 울더니 서방님이 오시려고 그리했나 봅니다.”
소백주가 기쁨으로 넘치는 얼굴로 복사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김선비를 맞아 집안으로 들어간다.
“여기 저기 봄꽃이 피는 모습이 마치 그대를 보는 양 마음 설레었소이다. 하하하!”
김선비는 소백주의 손을 와락 잡으며 웃는다.
“서방님 시장하시다. 어서 진지를 지어 올려라!”
소백주는 집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분부를 내리고는 김선비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정하고 앉자 소백주가 말했다.
“저는 서방님이 가시고 난후 이제 다시는 영영 아니 오실 줄로 알았는데 왜 이렇게 다시 오셨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요! 내 어찌 그대를 잊을 수가 있겠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을 나도 모르게 다 해주었지 않소. 큰 집을 짓게 하고 우리 집 식솔들을 해마다 그리 따뜻하게 보살펴준 그대의 은혜를 생각하면 꿈에라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김선비는 그렇게 말하며 소백주를 와락 가슴에 끌어안고 입술로 입술을 덮치는 것이었다.
“으읍! 서 서방님, 자… 잠시 참으시지요.”
김선비의 뜨거운 입술을 받아들이며 소백주가 신음하듯 말했다. 김선비는 더욱 사납게 드넓은 가슴 안으로 소백주를 달싹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 그대를 잠시라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속삭이며 김선비는 다시 소백주를 와락 끌어안고 입술을 맞추었다. 뜨거운 혀가 소백주의 달콤한 입속 혀 밑을 파고들었다.
“흡! 서방님, 차-암! 급하기도 하셔라! 흐흡! 대낮에 이런…!”
“오랜만에 꽃같이 그리운 그대를 만났는데 내 어찌 낮밤을 따질 새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원래 낮거리가 더 좋은 법이지요.”
김선비는 곧바로 일을 치를 기세로 소백주의 저고리고름을 풀어 헤치며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기생 소백주 (96)고운 마음
“에구! 칫! 급하기도 하시옵니다!”
소백주는 슬그머니 밀치듯 몸을 빼내려 하였지만 김선비의 완력이 너무 셌다.
“마님! 진지상 대령했습니다.”
그때 문 밖에서 부엌에서 일하는 옥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음!… 그 그래, 잠시만 기다리거라.”
김선비와 소백주는 옷매무시를 단정히 하고 바로 앉았다. 뒤이어 걸게 차린 밥상이 들어왔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하얀 쌀밥에 닭고기 미역국, 생선이 노릇노릇 구워 올려 있고 푸른 봄나물에 막 지진 고기 전까지 가득 한상 차려진 밥상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시장 하실 텐데 어서 진지부터 드세요. 서방님.”
소백주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밥뚜껑을 열며 수저를 들려주었다. 김선비는 못이긴 척 수저를 잡았다.
“어흠! 내 밥보다도 실은 그대의 향기가 더 그리운 것을 이 불같은 마음을 어찌 참는다 말입니까!”
“칫! 정력도 좋으시지… 그래도 먼저 몸을 생각하셔야지요. 우선 진지부터 드시지요. 서방님.”
소백주가 가볍게 눈짓을 했다. 김선비는 놓으려는 밥 수저를 다시 들었다. 그리고는 흰쌀밥을 한술 푹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먹는 밥맛이 꿀처럼 달콤했다. 달게 밥을 먹고 반주로 서너 잔 술을 기울이는데 소백주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차분한 눈빛으로 김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안에 어엿이 마나님이 계시는데 서방님을 이리 내게 보내주시던가요?”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은 그대의 은혜에 감사하며 내가 가던 날 바로 다시 그대에게 돌아가라고 그랬지요. 그대가 있었기에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을 잘 기를 수 있었다면서 몹시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리하셨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아내뿐만이 아니라 늙은 어머니, 아이들조차도 한 가족으로 생각하면서 그대에게 내가 어서 가야 한다고 말했지요. 그 길로 바로 오고 싶었으나 오랜만에 간 고향집을 당장 떠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봄이 오자 다들 더 늦기 전에 그대에게로 돌아가라고 성화여서 내 못이긴 척하고 돌아온 것이지요.”
소백주는 김선비의 그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김선비의 아내가 자신에게 질투를 내고 내쳐버리는 것이 여자로서의 근본적인 마음일 것인데 그리 고운 마음을 써주었다니 달리 생각되는 것이었다. 참으로 고운 마음을 지닌 여인이라고 생각한 소백주는 자신만 혼자서 김선비를 서방님으로 차지해서는 아니 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97)지음인(知音人)
“무엇을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나요? 어서 상을 물리고 이리 오세요.”
순간의 침묵을 깨며 김선비가 다그쳤다. 소백주가 문밖을 바라보며 밥상을 물려가라고 소리쳤다. 부엌에서 일하는 옥단이 밥상을 물려가자 김선비는 소백주에게 달려들어 와락 끌어안고 다시 뜨거운 입술을 가져가는 것이었다. 한동안 뜨겁게 입맞춤을 하던 김선비가 소백주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 안고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뜨거운 시정(詩情)을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한 점 불티같은 인생
이 봄 꽃 피는 사연을 만났거니
천고(千古)의 시름일랑 잊고
이 산야 저 산야 피거니 지거니”
지그시 눈을 감고 김선비의 시를 음미하며 듣고 있던 소백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서방님, 참으로 좋습니다. 저 시선(詩仙)이라 일컫는 당나라의 이백이 그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달밤에 홀로 술을 마시면서 인생의 낭만과 허무와 인연을 노래했는데 그 중 ‘봄이 가기 전에 즐겨야지(行樂須及春) 하는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가버린 젊음은 다시 오지 않고 인연이 끊어지면 흩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허허! 역시 그대는 나의 지음인(知音人)이 올시다! 백아의 거문고 가락을 알아주던 종자기처럼 말입니다!”
김선비는 소백주가 자신의 마음을 세심하게 알아주는 것을 찬탄하며 말했다. 진나라 때의 대부 초나라 사람 유백아(伯牙)는 거문고의 달인이었다. 백아가 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추석 무렵 달밤에 고향에 들려 거문고를 뜯었다. 마침 나무꾼인 젊은 종자기가 그 음악을 듣고 정확히 이해했다. 깜짝 놀란 백아는 종자기에게 ‘당신이야 말로 진정 내 음악을 알아주는 지음인이라고 극찬하면서 의형제를 맺고 내년 이맘때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그렇지요. 서방님! 백아절현(伯牙絶絃)처럼 서로의 깊은 뜻을 헤아려 알아보지 못한다면 거문고는 그 날로 부서지는 것이겠지요.”
소백주가 김선비를 바라보며 맞장구치며 말했다. 백아가 약속대로 이듬해 종자기를 찾아갔는데 그는 죽고 없었다. 백아는 종자기의 무덤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한 곡조 거문고를 뜯고는 줄을 끊고 산산조각 부셔버렸다. 지음인이 없다면 더 이상 음악을 연주할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러고말고요! 그대야말로 나의 사랑입니다!”
김선비와 소백주는 오래전 서로를 알아주는 지음인이었다. 김선비는 소백주를 와락 끌어안으며 이불 속으로 깊이 파고 들었다. 소백주는 김선비의 손길이 닿자 봄눈 녹듯 스러졌다. 지난시절에 타오르던 뜨건 불길에 길들여졌던 장작개비가 낯익은 불씨를 만나자 삽시에 활활 타오르는 것이었다.
“으 으읍! 서 서방님...”
입술을 덮쳐오는 김선비의 손길은 빠르게 소백주의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보드라운 젖무덤을 향해 안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물큰 젖무덤을 헤집던 김선비의 손날은 이제 소백주의 치마끈을 향했다. 치마끈을 풀어 헤치며 아래로 아래로 손을 더듬어 가며 김선비가 말했다.
“그대 그리워 내 가슴 지난 한겨울을 마냥 새까맣게 애를 태웠습니다.”
“흐읍! 서 서방님! 임이 떠나가시고 행여 임이 오실까 기다려져서 매일 밤 대문을 걸어 잠그지 못했지요. 으… 으으 음!”
김선비는 능숙한 솜씨로 소백주의 온 몸에 한밤 내 타오를 꺼지지 않을 봄 불을 내기 시작했다. 뜨겁게 달구어진 미끄러운 소백주의 몸속으로 김선비는 불기둥을 들이밀며 오랜만의 그리움을 녹여 사랑의 튼튼한 성을 봄밤 내내 다시 쌓아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생 소백주 (98)돈 삼천 냥
“서방님! 오늘은 저랑 같이 한양엘랑 가시지요.”
따뜻한 어느 봄날 아침을 먹고 나자 소백주가 김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한양엘랑 무엇 하러 가자는 것인가요?”
김선비는 소백주를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돈 삼천 냥을 되찾아야지요.”
‘돈 삼천 냥이라?’ 아무래도 돈 삼천 냥을 되찾자는 것이 혹여 김선비가 이정승에게 벼슬 사러 가서 바친 그 돈 삼천 냥을 되찾자고 말하는 것일까? 김선비는 의심이 되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혹시 돈 삼천 냥이라면 이정승에게 내가 벼슬 사려고 바친 그 돈을 말하는 것인가요?”
“서방님! 그렇지요. 어서 찾으러 가야지요.”
소백주가 말했다.
“아! 그 그것은 아니 됩니다. 내 처음에는 그 이정승이 원수로만 느껴졌으나 그로 인하여 어여쁜 그대를 만나 여기 수원에서 이렇게 잘살게 되었으니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은인이 아닌가요. 원수가 은인이 된 셈인데 어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요. 그리고 이정승 그 작자 보통 욕심쟁이가 아니어서 절대로 그 돈 삼천 냥을 거저 내주지 않을 것입니다.”
김선비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김선비는 그 욕심 많은 먹구렁이 같은 이정승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벼슬에 대한 미련도 돈에 대한 마음도 이미 오래전에 놓아버린 김선비였다. 이정승 말만 들어도 이렇게 몸서리가 쳐지는데 이정승이란 작자를 다시 보게 된다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서방님은 이정승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소백주가 김선비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야 국가의 안위와 백성의 삶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권력과 돈 밖에 모르는 탐욕스런 소인배가 아닙니까!”
“서방님, 그런 자가 지금 일국의 정승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 할 수 없다고 한다지만 그런 자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전답과 집을 모조리 팔아 삼천 냥을 그냥 고스란히 가져다 바치고도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삼천 냥은 반드시 되돌려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 으음!……아아 아무래도 그런 욕심 많고 사악한 천하의 권력을 틀어쥐고 있는 인간을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무슨 변을 당할지 모르지 않겠소!"
소백주의 다그침에 김선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서방님께서는 위나라의 방연과 제나라의 손빈에 얽힌 이야기를 잘 알고 있겠지요?"
소백주가 김선비를 바라보며 말했다.
기생 소백주 (99)묘수(妙手)
“그야 잘 알고 있지요.”
소백주는 지금 손빈의 방연에 대한 복수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김선비는 잘 알고 있었다. 위나라의 대장군이 된 방연이 스승 귀곡자 밑에서 병법을 동문수학 했던 손빈이 자신보다 뛰어나 출세할 것을 시기하여 손빈을 제나라의 첩자로 무고하여 결국 무릎을 손상시켜버리는 형벌을 받게 하여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렸다. 손빈은 가까스로 살아나 제나라로 도망 가 군사(軍師)가 되었다.
훗날 위나라가 한나라를 침공하자 한나라가 제나라에게 구원병을 요청했다. 제나라는 전기를 장군으로 삼고 손빈을 참모로 삼아 파견했다. 방연은 위나라의 수도 대량을 제나라 군이 공격할 것을 예상하고 후퇴했다. 위나라 군이 대량으로 오자 공격할 것을 포기하고 제나라 군이 퇴각했다. 방연은 제나라 군을 쫓았다. 이 기회에 손빈을 잡아 죽일 요량이었다.
방연이 위나라 군을 이끌고 추격해 온다는 것을 알고 손빈은 마릉에서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 방책을 만들고 오직 한그루 나무만 세워 두었다. 그 나무의 껍질을 벗겨 ‘방연이 이 나무 밑에서 죽다(龐涓死于此樹之下)’라고 적어 두고는 주변에 궁수 일만을 매복시켰다.
그날 밤 추격을 해온 방연이 한 그루 나무만 덜렁 서있는 것을 보고는 횃불을 들고 그것을 본 순간 그 불빛을 신호로 제나라의 일만의 궁수가 일제히 화살을 날렸다. 화살을 맞고 죽어가는 방연은 ‘기어코 그놈 손빈의 이름을 만천하에 날리게 하고 말았구나!’라고 말하며 탄식하며 죽었다고 한다.
“서방님, 불구의 몸이 되어 복수를 한 저 손빈도 있는데 하물며 세상에 큰 뜻을 세워 공부를 한 사내대장부가 뜻도 이루지 못하고 더구나 이정승이라는 탐관오리에게 거저 바친 삼천 냥을 되찾지도 못한다면 어찌 대낮에 낯을 들고 살수가 있겠습니까?”
소백주가 조목조목 따져 말하는 것에 김선비는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렇다고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이렇다 할 묘안도 떠오르지 않았다.
“으음! 그렇긴 그렇습니다만…?”
“물론 서방님의 심정은 잘 알겠습니다만, 이 나라가 매관매직(賣官賣職)으로 깊이 병들어 있는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그 이정승의 못된 버릇도 고치고 돈도 반드시 되찾고 또 애초에 목적으로 했던 벼슬자리도 하나 얻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정승의 버릇을 고치고 삼천 냥 돈도 되찾고 거기다가 벼슬까지 얻는다니! 김선비는 깜짝 놀란 눈빛으로 소백주를 쳐다보며 말했다.
“허허! 그 그렇다면 그 이정승을 굴복시킬 무슨 기묘한 묘수(妙手)라도 있으신가요?”
소백주가 김선비를 말없이 한동안 묵묵히 바라보다가 무슨 커다란 결심이라도 한 듯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물론 있지요. 서방님, 잘 들으세요. 소녀를 그 이정승에게 바쳐야하는 것입니다!”
기생 소백주 (100)소인배
‘뭐? 뭐라! 지금 뭐라고 말하였는가?’ 소백주가 자신을 그 악마 같은 이정승에게 바쳐야 한다고 말했는가! 그 말을 들은 김선비는 순간 정신이 아찔하여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한손으로 현기증이 나는 이마를 짚고 더듬거리면서 말했다.
“지 지금, 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돈에 미치지 않았고 또 하찮은 벼슬자리에 대한 미련도 마음에서 지워버린 지 오래인데 그것 때문으로 사랑하는 그대를 그 탐욕스런 악마에게 바쳐야 한다니 참으로 듣기 거북하고 괴로운 일입니다. 내 그대 없이는 한시도 살수 없으니 그 말씀일랑은 꿈에라도 마십시오.”
김선비는 가슴이 벌떡거리는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말을 마치고는 소백주를 깊은 애정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설마 저 소백주가 혹여 김선비의 장래를 위해 정말로 자신을 이정승에게 바치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벼슬자리와 돈보다도 정말 김선비가 자신을 더 사랑 하는가 의심이 되어 은근 슬쩍 떠보고 시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김선비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서방님께서는 일평생 글만 읽으셨지 세상사를 도통 잘 모르십니다. 저 이정승을 마음대로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김선비는 소백주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으음!… 그야 참된 선비에 군자라면 정의롭고 합당한 뜻으로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기에 별다른 수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십년이상 가는 권력이 없고 부자 삼대(三代) 가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런 무상한 지위나 물질 따위에 정신을 팔고 살지 않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이정승 같은 소인배에 속물들이야 권력과 돈이라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서방님, 맞습니다. 그는 정의나 정직이나 진실이나 백성 따위는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자이기에 그런 심오하고 고매한 정신적인 가치를 들이대는 방법으로는 도무지 움직일 수 없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정승을 권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누구겠습니까?”
“그야 이정승의 누이가 왕비인데다가 삼정승의 하나인 우의정이니 오직 그를 권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는 군왕(君王) 한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서방님, 그런데 서방님은 군왕이 아니시니 그를 절대로 권력으로는 움직일 수 없지요. 그렇다면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으음!… 그야 소인배에 속물들이 좋아하는 것이 돈이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서방님, 그런데 그 이정승에게 삼천 냥이라는 돈을 바쳤는데도 그를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으음!… 그거야 내가 바친 돈 삼천 냥이 부족해서 그렇지 않았을까요?”
그것을 생각하는 김선비는 순간 끙! 하고 괴로운 듯 신음을 토하며 말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