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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두 번의 패배 (2)
관중(管仲)이 제나라 재상으로 발탁된 그 이듬해 정월이었다.
그는 처음 재상직에 올랐을 때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을 80여 명 선발하여 각 나라로 들여보낸 적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사족(士族)도 있었고, 상인도 있었다. 명목은 숨어 있는 인재들을 찾아 천거하라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고정 첩자나 마찬가지였다. 그 중 노나라로 들어가 활동하던 상인 하나가 뜻밖의 소식을 전해왔다.
- 노나라 임금이 제나라를 치기 위해 병차를 징발하고 있습니다.
관중(管仲)은 생각했다.
'이는 필시 우리 주공이 나를 죽이지 않고 재상으로 등용한 것에 대한 분한 마음에서일 것이다. 굳이 맞서 싸울 필요가 없다. 사자를 보내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면 군사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제환공도 그 소식을 들었다.
관중(管仲)을 불러 물었다.
"이는 노나라가 아직까지 나를 인정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우리가 먼저 노나라를 쳐서 그들을 길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관중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모든 일에는 시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새로 출발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내정도 군대도 안정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군사를 일으켜서는 노(魯)나라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사자를 보내어 노장공의 분한 마음을 달래십시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관중에 대한 제환공(齊桓公)의 신뢰는 절대적이지 못했다.
"나는 노나라를 혼내주고 싶소. 우리가 노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그대의 말을 나는 믿을 수가 없소."
이렇게 말하고는 따로이 포숙(鮑叔)을 불러 장수로 삼고 군대를 내주어 노나라 장작(長勺)땅을 치게 하였다.
한편, 노장공(魯莊公)은 제환공이 관중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재상으로 삼았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알았다.
"내가 시백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천추의 후회로다."
이렇게 탄식하고는 시백을 불러 제환공에 대해 복수할 방도를 의논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오히려 제나라에서 먼저 군대를 일으켜 장작(長勺) 땅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노장공은 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소백(召白)이란 자가 나를 너무도 작게 보는구나. 이번 기회에 본때를 보여주리라."
시백이 옆에 있다가 조용히 아뢴다.
"신이 한 사람을 천거하겠습니다. 그라면 능히 제나라 군대를 제압할 것입니다."
노장공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그대가 천거하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오?"
"성은 조(曺)이며, 이름은 말(沫)입니다. 지금은 동평(東平)이라는 조그만 땅에 살고 있지만, 능력이 뛰어난 인재입니다. 본래 벼슬에 뜻이 없으나, 나라에 위험이 닥친 것을 알면 과감히 주공을 도울 것입니다."
노장공은 크게 기뻐하며 조말을 데려오도록 분부했다. 시백은 곧 동평 땅으로 달려가 조말을 데려왔다.
그런데 조말(曺沫)의 행동이 여간 무례하지 않았다. 그는 노장공에게 절을 올리자마자 허리를 펴고 뻣뻣이 물었다.
"싸움이란 모름지기 믿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여쭙노니 주공께서는 무엇을 믿고 제군(齊軍)과 싸우려 하십니까?"
"내 비록 요순과 같은 성군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백성들이 의식주에 부족함을 느끼지 않도록 늘 신경을 쓰고 있소. 나의 것을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었는데, 어찌 백성들이 나를 위해 싸우지 않겠소?"
그러자 조말(曺沫)의 입가에 희미한 비웃움이 스쳐갔다.
"의식주를 고루 하는 것은 작은 은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은 은혜로는 결코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궁정을 나가려 했다.
노장공이 조말을 불러세워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조상에 제사를 지냄에 있어 정성을 다하고 있소. 이제껏 한 번도 형식적인 제사를 올려본 적이 없소. 이 정도면 하늘이 나를 도와주지 않겠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작은 마음일 뿐 결코 큰 마음이라고 할수가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하늘은 주공에게 복을 내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조말(曺沫)은 또 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노장공이 다시 불러세워 말했다.
"내 비록 모든 정사를 다 살피지는 못하나 매사 일을 처리할 때는 정(情)으로써 하고 있소. 이것으로도 안 된다면 나는 제나라와 싸우는 것을 그만두겠소."
그제야 비로소 조말이 몸을 굽히며 아뢰었다.
"정(情)이야말로 백성을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입니다. 주공께서 백성들에게 그러한 사랑을 베푸셨다면 우리는 능히 제군(齊軍)과 싸워볼만합니다. 신 또한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조말(曺沫)이 싸움 준비에 임하려 할 때, 이번에는 노장공이 그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그대는 어떠한 계책으로 제나라 군대를 막을 작정이오?"
하지만 조말의 대답은 간단했다.
"대저 군사(軍事)란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일을 꾀할 뿐입니다. 어찌 임하지도 않고 미리 계책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싸움터로 나가 살핀 후에야 계책을 올릴 수 있겠습니다."
노장공(魯莊公)은 더 이상 조말에 대해 할말을 잃었다. 하지만 의심과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이번 싸움에 승리하지 못하면 이자의 목을 베리라!'
이렇게 결심한 노장공은 조말(曺沫)을 장수로 삼아 병차 3백 승과 함께 장작 땅으로 향했다.
그무렵, 제나라 장수 포숙(鮑叔)은 국경을 돌파하여 장작 땅에 진채를 내리고 있었다. 그는 지난 건시싸움에서 크게 이긴바 있었기 때문에 노나라 군대를 얕보았다. 노장공이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나온 것을 알고는 호기롭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북을 울리며 진격하라. 먼저 적진을 점령한 자에게 후한 상을 내리리라."
제군이 쳐들어오자 노장공(魯莊公)도 북을 울려 맞서 싸우게 했다. 그때 조말(曺沫)이 노장공 앞을 가로막으며 말렸다.
"제나라 군사의 기세가 몹시 날카롭습니다. 주공께서는 좀더 때를 기다리십시오."
이어 군사들을 향해 추상 같은 명을 내렸다.
"누구든지 먼저 움직이는 자가 있으면 목을 베리라!"
제나라 군사는 노나라 진영을 공격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노나라 진영은 고요할 뿐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진문이 열리지 않으니 싸울 수가 없었다. 결국 제군(齊軍)은 혼자서 고함을 지르다가 제풀에 지쳐 물러갔다.
잠시 후 제군(齊軍)은 다시 북을 울리며 진격했다. 그러나 노군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제나라 군사들은 또 같은 욕설만 퍼붓다가 물러갔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포숙(鮑叔)이 군사들에게 외쳤다.
"이것은 노나라가 우리를 무서워하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북소리를 울리며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달아날 것이다."
제나라 군사들은 북을 울리며 세 번째로 노군 진영을 향해 쳐들어갔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망루에 서서 제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조말(曺沫)이 노장공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금이야말로 진문을 열고 나가 싸울 때입니다."
노장공은 영문을 알 수 없었으나 조말(曺沫)이 시키는 대로 좌우 군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속히 북을 울리고 나가 싸우라!"
마침내 조용하던 노나라 진영에서 북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이어 군사들이 밀물처럼 뛰어나가 마주 달려오는 제(齊)나라 군사들을 향해 덮쳐갔다. 그러한 그들의 움직임과 기세는 마치 벼락이 고목을 치는 것과도 같이 거세고 날카로웠다.
그때 제나라 군사들의 가슴속에는 노군을 깔보는 마음이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진문을 굳게 닫아걸고 지키기만 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북소리가 울리더니 노군(魯軍)이 벌 떼처럼 몰려나오는 것이 아닌가. 제나라 군사들은 한결같이 당황했다. 대열을 채 정비할 틈이 없었다. 그들은 그저 빗발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칼과 창을 맞고 쓰러지는 수밖에 없었다.
싸움은 단 한 번의 북소리에 의해 판가름났다.
제나라 군사들은 반 이상이 쓰러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포숙 또한 기겁하여 악을 쓰듯 외쳤다.
"후퇴하라!"
노장공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급히 병차에 올라탔다. 그때 조말(曺沫)이 달려나와 노장공의 소매를 붙잡았다.
"주공께서는 잠시 기다리십시오."
조말(曺沫)은 제나라 군사가 진을 벌였던 곳으로 가 한바퀴 둘러본 후 돌아와 말했다.
"이제 적을 추격해도 됩니다."
이에 노장공(魯莊公)은 제군을 30리나 뒤쫓다가 돌아왔다. 빼앗은 무기와 군량미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노장공은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아직도 노군의 대승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조말에게 물었다.
"그대는 세 번이나 공격해온 적군을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겼으니, 어찌 된 일이오?"
조말(曺沫)이 웃으며 대답한다.
"싸움에서 중요한 것은 기세입니다. 기세가 강하면 이기고, 기세가 약하면 집니다. 북을 울리는 것은 기세를 돋우기 위한 것입니다. 한 번 울리면 기세가 강해지고, 두 번 울리면 기세가 약해집니다. 세 번 울리면 기세가 아예 없어집니다. 저는 처음부터 북을 울리지 않고 기세를 숨겨두었습니다. 적이 세 번 울려서 기세가 없어졌기에 저는 한 번 북을 울려 기세를 일으켰습니다. 강한 기세로 약한 기세와 싸우는데 어찌 패할리 있겠습니까?"
노장공(魯莊公)이 또 물었다.
"그렇다면 제나라 군사가 달아날 때 그대는 어째서 즉시 추격하지 않았소?"
"제나라 사람들은 속임수가 많습니다. 복병을 숨겨둔 계획적인 퇴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그들이 머물렀던 진영을 둘러보았습니다. 수레바퀴 자국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그제야 저들이 계획적으로 달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말의 설명을 들은 노장공(魯莊公)은 연신 고개를 그덕이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대야말로 병법을 아는 사람이오."
그는 곡부로 돌아가 조말(曺沫)을 대부로 삼고 그를 추천한 대부 시백에게도 많은 상을 내렸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