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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 - (주)진성월드산업 대표 강진성
대담: 위두량 천관편집장
정리: 김옥희 부편집장
편지가 쓰고 싶은 날입니다. 손 글씨로 사연 적은 살뜰한 편지를...
가슴이 따뜻한 분을 만나고 왔습니다. 겨울이 깊어가는 지난 12월 초입에 편집장님과 (주)진성월드 강진성 대표님을 찾아뵀습니다. 고향의 행사나 동문모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셨던 분이라 직접 봰적은 없으나 그 명성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천관문화장학회 이사로 후학양성을 위해 오랜날 묵묵히 활동해 오시며 많은 출연금을 쾌척해주신 분으로 귀감이 되시고 저 역시 존경해 왔던 선배님이셨습니다. 약속시간에 맞춰 약간의 긴장감과 설레임으로 들어서는데 막연히 생각해왔던 근엄함이나 어려움은 기우였고, 중후한 멋스러움에 인자한 모습으로 화안히 반겨주시는데 일순간 따뜻해졌습니다. 추운날씨에 먼 길 왔다며, "맛있는 밥먹자. 내가 뭐 풀어놓을 게 있나?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 고맙다." 하시며 웃으시는데, 유년의 어느 언덕배기 소꼴베던 소년의 모습이 스쳤습니다. 그리고 담소를 나누는 내내 그 소년이 한웅큼 베어놓은 듯한 풀냄새는 가시질 않았고 설레임으로 함께했습니다.
Q. 현재 하시는 사업은 어떤 일인지요.
(주)진성월드는 특수장비를 수입하여 공급하는 회사로 세계유명 건설용 장비 및 엔진업체 등과 Agent 맺어 그에 따른 장비 및 부품들을 공급하고 있으며, 특히 국내에서 공급이 원할치 않은 부품들을 적시에 공급해 주는 수입 전문 회사다. 더불어 수입대행과 Offer 견적도 겸하고 있다. 건설, 철강, 조선 등 국내에서 사용되는 수입 중, 대형 중장비 엔진 어쎄이(Engine Ass'y) 및 부품을 신속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으로 공급하고 있으며, 전세계 신뢰도 최고인 독일업체 엔진의 모델별 재고를 다량 확보하여 소비자의 만족도를 높히고 있다. 또한 수입 부품인 만큼 A/S부서를 구축하여 끝까지 신용과 만족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서울 영등포에 본사가 있으며 부품판매장을 겸하고 있다. 조선소, 재철소용 운송기기 제작 및
임대 A/S는 물론 수리, 철저한 점검까지 하고 있다. 또한 도이치 엔진, 공.수냉식 엔진 부품 공급을 하고 있으며, 유명 브렌드 엔징보링과 산업용 및 장비용도 공급하며, 유럽용 엘리베이팅 트랜스포터(Elevating Transporter: 공단이나 공항 항만지역에서 비행기나 대형화물을 운반하는 차량)의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김포에 대형 자재창고를 두고 있으며 광주, 광양 사무소에서는 광산 토목 건설장비 및 부품공급을 하고 있고 마산 사무소에서는 엘리베이팅 트랜스포터 제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의 부품은 대부분 독일에서 직수입되어 제작되며, 독일 현지 제조업체 장비와 견주어 봐도 결코 품질면으로 뒤쳐지지 않는 장비를 연구 & 생산 & 판매하는데 보람과 자긍심을 갖고 있다.
Q. 이사업을 하시게 된 계기와 그 과정은요.
군입대가 계기가 되었던 것같다. 군복무 기간 동안 기술보직을 받고 근무를 하는 과정에 자격증를 하나하나 취득하였다. 고생은 되었지만 값진 시간으로 기억된다. 제대 후 탱크, 장갑차 등 장비관련 무역회사에 근무하다가 광주고속(현, 금호고속) 금호자동차 기술관련 분야에 취업을 하였고, 기술직으로 5년여를 근무하였다. 그때를 회상해 보면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임금착취 등 정말 힘든 시기였다. 곳곳에서 근로기준법에 준하여 노동자 인권과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가 빈번했고, 급기야 전태일 분신사건이 터졌으며 그 소용돌이 속 과도기에 나역시 노조결성과 구속 등으로 고난의 한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그 혼란기에도 좌절은 없었다. 오히려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행동을 해야할지, 그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질 수 있겠구나 라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노조위원이라는 블랙리스트에 올라있어 더이상의 진급은 어렵게 되어 있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싯점에 1974년도 처음 우리나라에 벤츠버스가 도입되었다. 외국 기술과 기계의 놀라운 성능에 눈을 뜨게 되었으며 그로인하여 젊은나이, 호기롭고 패기 넘쳤던 나는 해외파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결국 대림산업으로 또 한 번의 이직을 했고, 평소 성실함과 책임감을 높히 사주셨던 고마운 상관의 도움으로 열망하던 독일과 스웨덴 이테리 등으로 연수를 다니며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강의도 다니며 내실을 더욱 튼실히 쌓을 수 있었으며, 영어와의 소통이 되었던 관계로 아람코라는 미국 회사내 대림소속으로 해외에서 3년을 근무하기도 했다. 그 3년의 기간이 지금까지도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줬으며, 현재의 수입 사업을 하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그 기간에 선진기술을 접목하여 엄청난 외화 벌이에 일조 하였으며 내 인생에 커다란 성취감을 주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작으나마 국위선양을 한 듯 뿌듯한 자긍심을 느낀다.
귀국 후 해외근무를 또 나가게 되면 이혼도 불사하겠다던 아내의 완강함에 결국 국내에 머물게 되면서 소규모 장비업체에 엔진공급 교육담당으로 들어갔다. 근무 중 엔진 등 부품들을 삼성중공업 창원공장 등에 판매를 하게 되었고 그러는 과정에 굴지의 대기업들에 적잖은 실망을 하게 되었다. 그때 배운 철칙 하나는 '대기업에서 손을 뻗치면 즉각 빠져나온다' 였다. 지금도 그 철칙은 고수하고 있다. 대기업과 맞서는 것은 무모하고 불가능 하다 느끼며, 그러면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틈새시장을 노리자 였다. 또한 그즈음 미래의 내모습을 반추해보니 회사중역 정도로의 인생을 보내고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어떻게 사느냐 보다는 어떻게 행동 하느냐'에 인생의 포커스를 맞추고 실행에 옮겼다.
1990년 2월 직원 4명과 회사를 창설하고 '진성월드'로 법인설립을 하였다.
'진성'을 상호로 하게 된 계기는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고, 내 얼굴, 곧 나 자신이기에 정직하게 최선을 다해 사업을 하겠다. 라는 취지였으며 그 바람대로 현재 초심잃지 않고 신뢰와 신용으로 기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Q. 성공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굳이 성공이라고 말한다면 틈새시장을 잘 이용했고, 신용을 으뜸으로 여겼으며, 버는 것 가지고 그만큼만 시작하고, 또 버는 것 가지고 시작하고.., 그렇게 내실있게, 회사의 역량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차근차근 일궈왔기에 IMF금융위기 때도 큰 흔들림 없이 지금에 이른 것같다. 또한 해외 전시장을 직접 찾아다니며 아이템을 구축하고, 양질의 물건을 적기에 저렴하게 공급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다. 그리고 각 나라 회화, 특히 영어의 어휘력도 한 몫 했지싶다. 물론 전문지식도 중요하지만 무역업에서는 그나라 사람들과의 소통이 가장 우선시 되기 때문이다. 현재 큰아들이 미국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그쪽 파트를 맡아 일선에 참여하고 있다. 젊은 감각으로 차별화된 기업을 일궈가겠지만, 성공의 비결이였다고 감히 아버지로써 말할 수 있는 기본 모토인 정직, 성실, 신용, 최선의 정신만은 꼭 계승할 것이다. 이쯤에서 강장현(대덕중18회) 영업관리 이사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사촌동생이나 사업파트너로는 진성월드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이며, 믿고 맏기고 신뢰할 수 있는 든든한 내 편, 고마운 사람이다. 회사의 기반다짐과 확장기 그리고 매출확대 전반적인 부분에 그의 노고가 함께 했고, 보이지 않는 곳, 굳은 일 도맡아 해왔으며 현재도 회사 전반 총괄을 하고 있다. 가끔은 내 욕심으로 동문이나 고향행사 등의 활동을 가로막지 않았나 미안하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강장현 이사는 내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고 진성월드의 일부이다.
Q. 유년(幼年)과 고향사랑의 남다름을 듣고 싶습니다.
이회진, 연동에서 과수원집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큰형님께서 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할 때였는 데 뜻하지 않게 복막염을 앓게 되었다. 열악한 의술과 병원의 환경 때문에 쉽게 완치가 되지를 않았고, 집안의 장남인 형을 부모님께선 광주로 데려가 무려 네번의 수술을 하게 되었으며 그로인하여 가세는 덧없이 기울었다. 중학교도 그 여파로 일년을 쉬었다가 진학하게 될 정도 였으니... 부모님의 고생이야 이루말할 수 없었겠지만, 그 시절 우리네 농어촌 현실이 어디 녹록했던가? 다들 가난을 짊어지고 살았지. 나 역시 가난을 싸매고 서울로 상경하여 그 가난을 떨쳐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상경 당시 청바지를 입고 왔는데,
그 청바지를 무려 3년을 입었다. 지금도 그때를 추억하며 청바지를 즐겨입는다. 영등포표 청바지...ㅎㅎ
아내와 아이들에게 그 청바지 이야기만은 종종 들려주곤 했다. 근검절약을 강조하기 위해서 였으나, 근본적으로 아내는 물론 아이들도 불필요한 낭비나 소비없이 잘 살아주었고, 잘 자라주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덕분이였나 사업도 어느정도 안정기에 들어서고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던 중 뜻밖의 가슴아픈 사건으로 소외된 이웃에 눈을 뜨게 된 결정적 계기가 왔다. 8년전이였나 큰아들이 아프다는 진단을 받고, 오진이라는 판명을 받기까지의 수많은 날 피말리는 순간들을 보내게 됐다. 그 때 아프다는 진단을 내린 원망보다는 오진이라는 판명에 감사하며 성당을 나가게 되었고 무언가를 해야 겠다는 간절함이 들었다.
수녀님의 추천으로 소년 소녀 가장돕기 후원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줄곧 3년을 해왔다. 그러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고향사랑이라 하기엔 부끄럽지만, 어느해 시제에 갔다가 우연히 회진초등학교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고,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우리세대의 아쉬움이랄까? 아이를 둔 아버지의 마음에서랄까? 망설임 없이 컴퓨터와 냉, 난방시설을 하게됐다. 지금도 참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휴우증도 있었다. 무슨일이든 한 번 하게 되면 계속해야 된다는 중압감과 주위의 따가운 시선이 그렇다. 이제는 마음은 있어도 돕는다는 일에는 신중을 기하게 된다. 천관문화장학회는 초장기 부터 참여하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열망이 깊었던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틈틈히 영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열심히 배웠다. 한번은 대우조선소 납품 건으로 대학이라는 학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뒤늦게 공부해 어려움도 많았지만 당당히 대학을 졸업하기도 했다. 배움은 끝이 없다고 하지만 정규교육은 때가 있다고 본다. 후학양성을 위해 일익을 할 수 있어 기쁘다. 차후 회진장학회에도 기여할 관심을 가지고 있다.
Q. 역대 동문회장으로 '천관가족축제'에 관하여 하고싶은 말씀 있으신지요.
2003년 도였던가 18대 동문회장으로 천관가족축제를 치루던 때가 새삼 떠오른다. 그때 주관기수가 20회였고, 홍세곤 후배가 주관기수 회장으로 나와 함께 고생을 참 많이 했다. 지금에 비교하면 많은 것들이 열악했지만 최선을 다했고 단합과 열정만큼은 대단히 뜨거웠던 걸로 기억된다. 같은 고향, 동문들이란 이유만으로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끈끈한 정(情)이 운동장 가득 넘실댔으니... 축제는 성황리에 치뤄지고 400만 원이라는 그 당시로는 제법 큰 차액을 남기게 되었다. 의미있고 뜻깊게 사용하고 싶었다. 홍세곤 주관기수회장 등 집행부와 의논하여 그 때 더부살이를 하고 있던 천관사무실을 독립된 공간으로 기틀을 마련해보자에 의견일치 하였고, 마침내 지금의 천관이 독립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매년 후배들의 열정과 향우들의 동참으로 치뤄지는 천관축제에 나 역시 관심을 갖고 참여하며 나날히 발전되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실로 뿌듯하다. 특히 지난 29회천관축제 기수들의 다양한 콘텐츠로 차별화된 변화를 주려한 열정에 칭찬과 박수를 보낸다. 앞으로의 바람은 역대 선배님들께서 기틀을 마련해 주었으니 후배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게 조율해가며 그 명맥을 잘 이어가주기를 당부해본다.
Q. 끝으로 귀감(龜鑑)이 될 만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먼저 나를 다 내보여 부끄럽다.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내 살아온 삶이 힘이 되거나 감응이 있다면 바랄 게 없겠다. 그리고 귀감이라기 보다는 요즘 젊은 사람들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 국가 신용도 하락이라는 것은 절대 있어서는 안될일이다. 국가가 잘 되어야 내가 있고, 내가 살며, 외국에 나가서도 대우 받는다. 국가 신용도가 떨어지면 개인 신용도까지 떨어진다는 걸 실감, 명심해야 한다. 각자 주어진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유기적인 관계에 있어서 신뢰는 매우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야 된다. 열심히 노력하여 국가가 부강해지고, 개인의 삶도 윤택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해외 배낭여행을 짬짬이 다녀오기를 권장하고 싶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를 인용해보며, 얻은 것이 상상 그 이상으로 많을 것이다. 끝으로 좌우명 처럼 늘 되뇌이는 나의 사고(思考)로 갈무리를 하고싶다.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짐만 져라', '신용은 신용으로 되돌아 온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느꼈을 때는 즉시 행동하라 그 다음은 자연스러워진다'
* epilogue
선배님의 좌우명과도 같다는 思考, 그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가슴에 담습니다. 그리고 긴 대화 늦도록 정리하며, 살아온 지난 삶에 깊은 감응을 느낍니다. 다소 두서없지는 않았는지, 제대로 전달력 있게 정리가 되었는지 걱정이 앞서며, 저도 갈무리 즈음하여 선배님의 '아내 팔불출사랑' 한 줄 남기고 마감하겠습니다. 용서를...!
"내 아내는 천성이 순한 여자지. 무조건 믿고 따르는 외유내강형이기도 하고. 회사 초창기 어려웠을 때, 그리고 IMF금융위기 때 매일 사무실에 나와 함께 일했었지. 고생많았어. 몇해전부터는 취미생활로 고전무용을 배우더니 봉사활동을 다니데. 그리고 언젠가 크루즈여행을 가는데 배안에서 깜짝 고전춤사위를 벌여 박수갈채도 받고. 각국 사람들이 다 모인 자리인 만큼 그사람도 국위선양한 셈이지? 세월의 더께가 더해갈수록 참 예쁜사람이야..."
- 청바지가 잘 어울린다는 선배님. 다음에 봬올 때는 그 모습 보고 싶습니다.
긴 시간 도란도란 옛이야기 하듯 함께해준 인연에 감사드리며, (주)진성월드의 무한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첫댓글 김옥희 선배님
어쩜 이리도 글을 잘 쓰실까!
지루 하지 않고 귀에 쏙쏙 들어 오는 필력은 독자로 인 하여 단숨에 읽어 내리게 하는 마력을 지녔습니다
진성월드 대표님 고맙습니다
서 있는 그곳에서 우뚝 서서 고향을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편집장님을 비롯한 함께 한 모든 분들도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