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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문학상 특집 <예술가> 2016년 겨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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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거는 날들의 비망록
―정양론
이영숙
Ⅰ
시인은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자이다. 자연이든 도시든 인간이든, 혁명이든 사랑이든 시 자체든, 예禮 추醜든 죄罪든, 중독되어 그것을 끝 간 데까지 밀고 나가는 자이다. 피안을 향해 물결치는 예감과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를 청춘을 품고 입술처럼 부드럽게 뱃머리를 강안에서 밀어낸다.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토막말」) 것들은 이제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정양 시인이 꿈꾸어왔던 것은 이런 것이다.
강아지풀 터럭 끝마다
이슬이 맺혔습니다
밤 새운 고추잠자리도
빛나는 이슬에 젖었습니다
강아지풀에 매달려 있는
새빨간 날개 새빨간 꼬리
사람이 바짝 다가가도
꼼짝도 안합니다
목숨걸고 저렇게
꼼짝도 않는
그 아침이 눈부십니다
―「고추잠자리」 전문
목숨을 거는 일은, 목숨이 하나밖에 없기에, 눈부시다. 목숨은 죽음이 아니라 생명과 운동한다. “사람이 바짝 다가가도/ 꼼짝도 안”하는 “고추잠자리”는 죽음을 모르고, “강아지풀”과 “이슬” 사이에서 그의 “새빨간 날개 새빨간 꼬리”는 생명과 일직선을 이룬다. “고추잠자리”는 바람과 햇빛보다 “강아지풀”과 “이슬”을 먼저 믿는다. “사람”은 그 순위에 없다. 고추잠자리는 매순간 목숨을 걸고 죽음을 살기 때문에 매순간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러므로 정양이 “목숨이란 어차피/ 천벌”(「겨울」)이라거나, “목숨이란 얼마나 지긋지긋한가”(「病床에서」)라고 했을 때, ‘목숨을 걸지 않는’이란 구가 ‘죽음’ 앞에 괄호치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을 우리는 목도한다.
“갈수록 천해”(「겨울」)지고 “뻔뻔해진 이 세상”(「무난골」)에서 목숨을 거는 일의 도저함을 정양은 생의 근간으로 삼는다. 이는 「토탄土炭」이란 시에 잘 드러나 있는데, “오래 묻혀 있으면” “석탄이 되고 석유가 되고 더러는 금강석도 된다는” ‘토탄’은 그러나 “아궁이에 벌겋게 달아오르다가/ 화롯불도 못 담게 버글버글/ 싱겁게 불길이 죽는다”. 그럼에도 “땔감이 귀하던 흉년의 들녘 사람들은/ 농사도 못 지은 흙을 며칠씩 힘겹게 파서/ 허망하게 태워먹곤 했다”. 그는 생각한다. “석탄이 되든 금강석이 되든 말든 내 사랑도/ 없는 듯 묻혀 있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캐느라 바친 수고에 비해 찰나적인 따뜻함만 주고 마는 ‘토탄’은 잠시 불붙었다가 사그라지는 ‘어떤’ 사랑과 닮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이 ‘토탄’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석탄이 되든 금강석이 되든 말든’에서 방점이 찍히는 곳은 ‘말든’인데, 이는 ‘금강석’이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해도 ‘토탄’으로 쓰지는 않겠다는 자기경계의 다른 표현이며, ‘토탄’을 ‘석탄’과 ‘금강석’의 ‘씨앗’으로 보는 인간애이자 ‘석탄’과 ‘금강석’의 날들을 희구하는 미래긍정이다. 목숨을 걸 때 ‘사람’은 다가와 숨을 죽이고 ‘새빨간 날개 새빨간 꼬리’에 아침햇살이 깃드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Ⅱ
시인은 바닥까지 자신을 내려뜨리는 자이다. 바람 따라 가는 것은 몸이지 마음이 아니다. 자아와 타자, 역사와 존재가 일으키는 스파크를 끄지는 않되 종국에는 모두에게 자발적으로 지는 자이다. 유년이 그의 생을 잡았다 놓았다 하므로, 그는 가도 그리 멀리 가지 못한다.
아이들의 손가락질 사이로
숨죽이는 환성들이 부딪치고
감나무 가지 끝에는 구렁이가
햇빛을 감고 있었다
아이들의 팔매질이 날고
새소리가 감꽃처럼
털리고 있었다
(중략)
아아, 그때 나는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가……
꿈자리마다 사나운
몰매 내리던 내 청춘을
몰매 속 몰매 속 눈감은 틈을
구렁이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 살던 뒤안에」 부분
그의 첫 시집 <까마귀떼>(1980)에 실린 위 시에서 어린 시절의 그는 “아이들의 팔매질”에 나무에서 떨어져 “햇빛이 익는 흙담을 끼고” 사라지던 구렁이에 자신을 온전히 투사한다. “눈감은 틈”에 몰매는 내게로 쏟아진다. 그는 스스로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됨으로써 목숨을 건 피학을 감행하려던 것일까. ‘구렁이’처럼 ‘흙담을 끼고’ 어디로 사라지고 싶었던 것일까. “탄광파업철도파업대구폭동여순반란” 등의 사건들에 관여하다 “형무소에 끌려가서” “육이오” 때 “행방불명”된 사회주의자인 “아버지”(「빈 무덤」)로 인해 집으로는 이웃들의 돌이 날아들고, 그는 아이들의 “몽둥이”와 “돌팔매”에 쫓기기도 한다. “겁결에 뛰어든 굴속에는/ 어둡고 으스스한 바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이들의 살기찬 목소리”에 질려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문둥이가 살고 있다는 굴 속을/ 들켜도 좋은 소리로 마구/ 울부짖고 싶었지만” “아무도 없는 한밤중”이 될 때까지 “이빨에 몰려 서걱거리는/ 흙냄새를 숨죽여 깨물”(「폐촌에서 3」)며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견디어 낼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에 그는 원죄의식 같은 것을 깨달았던 것일까. “두근거리며/ 팔매질당하는 한 마리/ 구렁이가 되고 싶었던” 것은 ‘구렁이’처럼 자신도 ‘흙담을 끼고’ 돌아나가 현실조건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어딘가로 가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는 항변한다. “둔갑한 각시라도 품에 안고/ 내 무슨 원수라도 되어왔는가”라고. “불꺼진 건넌방에 칼 가는 소리/ 집집마다 고샅마다 칼 가는 소리/ 산날망으로 고라실로 흐느끼다가/ 깨죽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원수를 찾아 시퍼렇게/ 날서는 소리”(「폐촌에서 4」)에 에워싸인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원죄의식과 패배의식은 샴쌍둥이와 같아서 “친구들은 나를/ 술이나 취해야 사람으로 여”긴다고 여기고, “그럭저럭 나는 어릿광대가 되어 있”(「겨울밤에」)다고도 여긴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도 이웃 어른이 “안되얐다고 쯧쯧쯧 묵은 혀를 차”는 소리를 듣노라면, “묵은 세월이 몰매처럼 온몸에 감기”(「은행나무)」)곤 했다. “품고 잠들고 싶은/ 청춘이 없는 이마빡/ 만나고 싶은 되새기고 싶은/ 역사가 없는 이마빡”(「이마를 짚고」)이란 제 청춘에 대한 자술서의 주제다. “나는 어느 들쥐가 깜박 잊어버린 도토리였던”(「도토리숲」) 것만 같다. 빨갱이의 아들, 전라도 출신, 그리고 대학 생활을 제외한 생의 대부분을 전라북도의 김제, 이리 등지를 벗어나지 않고 살아온 주변부(지역) 문학인이라는 세 겹의 소외에 노출된 채 “사실 나는 이제껏 외눈으로 살”(「핏발 선 눈을 가리고」)아 온 것이라고 그는 결론을 내리는 듯하다.
Ⅲ
그러나 시인은 거슬러 오르는 자이다. 생의 배후가 내내 겨울이었다면 봄은 “그 환장한 목숨들이 새파란 비명들을 악물고 아픈 껍질마다 되돌아”(「봄」)와야 한다고 믿는 자이다. 상흔은 그의 뱃전에서 너울거린다. 제 그림자를 비춰보다 시인은 시선을 미래로 옮긴다. 역사와 시대는 시인의 제2의 고향이다.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훈육부 선생님은 느닷없이
바리깡 들고 수업시간 중에
출입문 드르륵 밀고 들이닥쳐
머리 긴 아이들 머리통에 한 줄씩
드르륵 드르륵 신작로를 내놓고 나갔다
그렇게 당한 애들은 길든 짐승들처럼
이튿날 얌전히 머리를 깎고 나왔지만
그렇게 길들기가 죽어라 싫어
일주일 넘게 신작로를 그대로 이고 다닌
내 머리통에는 네거리가 새로 생겼고
나는 보란 듯이 모자를 벗어들고 다녔다
새로 생겼던 내 별명 신작로가
네거리로 오거리로 바뀔 때까지
―「신작로」 부분
이 시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독자의 연령대는 50대 이상일까. 그러나 “신작로가/ 네거리로 오거리로 바”뀌는 풍경은 “신작로”를 다른 어떤 단어, 일테면 ‘등교시간’이나 ‘교복’ 등으로 대체했을 때 우리의 공통감각이 된다. ‘지각장이’나 ‘불량학생’은 얼마나 사소한 위반들의 과장된 집합수인가. 그런데 이 시에는 “길들기”를 “죽어라 싫어”하게 된 것이 생래적인 것인지, 후천적인 것인지의 여부가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정양은 최근작인 헛디디며 헛짚으며』(2016) 1부에 ‘응답하라 1950’이라는 소주제로 9편을 묶으면서 1950년대의 풍경들 속에 그 실마리를 묻어두었다.
우선 “비 내리는 실내체육시간” 중에 “훈육부 선생들 넷이/ 한꺼번에 교실에 들이닥”친 또 하나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학무국장 긴급 전통으로 전교생 소지품검사 결과를/ 교장선생님이 오늘 중으로 직접 보고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훈육부 선생들과 이에 불복한 체육선생이 “옥신각신 다투”지만, 결국 훈육부 선생들은 체육선생에 의해 교실에서 쫓겨난다. ‘나’는 “학무국장이든 교장이든 개좇이든/ 다 나오라고 해, 씨팔새끼들이 꼭/ 왜정 때 배운 대로만 풀어먹을라고 저 지랄들을 해댄다”는 “선생님의 막말에 귀가 번쩍 열려/ 앞으로는 절대로 선생님을 무식이라고 하지 않겠노라”(「잃어버린 이름」) 다짐한다. “원래 건달이었는데 이사장 친척이라서/ 자격증도 없이 체육선생이 되었다”(「너도 사람이냐」)는 추문은 이쯤에서 ‘나’에 의해 수정된다. ‘체육선생’은 ‘무식’한 것이 아니라 당시 교육에 뿌리박혀 있던 ‘왜정’의 잔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 잔당들에 의해 매도된 것이라고. 이 사건으로 ‘귀가 번쩍 열’렸던 ‘나’는 '체육선생‘의 육성과 「신작로」의 ’나‘의 육성을 번갈아 오간다. 이후시기에 대한 시들, 즉 “십이륙이나 육이구나 최루탄/ 망할 것들은 여간해서 안 망하고/ 더러운 임종이 길다”(「봄날은 가고」)거나, “끓어오를 일 너무 많아서/ 끓어오르는 놈만 미친놈 되는 세상”(「물끓이기」), “이 세상 된장 발라버릴 것들 대신 개장국이든 삼계탕이든 뱀탕이든 또 뙤약볕보다 더 드센 장작불로 푹푹 삶는 게 젤이다”(「복날」)와 같은 비분강개가 전자라면, “분단 63년 해방 63년 미제 63년도/ 다 그게 그거다/ (중략)/ 우리는 아직도/ 독립기념일이 없고/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식민지의 봄날이 맑기만 하다”(「청명 淸明」)는 역설이나, “나이 든 사람들 말로는/ 왜정 말기에도 각급 학교에서/ 가짜 김일성 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김일성이 가짜인지 교육이 가짜인지/ 육이오 이후에는 나도/ 가짜 김일성 교육을 받았고 가르쳤다// 남북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82세의 그 북한 주석이 죽었다/ 그는 진짜로 가짜 김일성인가/ (중략)/ 그토록 열올리던 진짜 가짜 문제는/ 아무데서도 아무런 말들이 없다//(중략)/ 신화도 조직도 음해도 아닌/ 진짜 김일성 교육이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만 같다”에서의 아이러니 등은 후자다. Ⅱ의 원죄의식을 초월한 지점은 그러므로 ’나‘의 ’귀‘를 “번쩍 열‘리게 했던 체육선생의 ’막말‘이었고, 그리고 이는 어느 지점에서는 비분강개와 논리적 어투가 서로 하나가 된 ’논리적인 막말‘로 정양의 비판 정신과 저항 정신의 출발점이 된다.
앞의 시들 외에도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8월 10일」ㆍ「호랑이피」ㆍ「아카시아는 아무데서나」)와 우리 정치사의 암흑과 야만(「적막한 도청」ㆍ「사람들이 제 아무리」ㆍ「백골단」ㆍ「이게 나라냐」) 등을 거리낌 없이 폭로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작금의 우리 현실은 그다지 나아진 게 없다.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미국ㆍ일본과의 갈등도 여전한 가운데 중국이 이에 가담했으며, “독재가 버젓이 세습되는”(「단재 선생의 국적」) 북한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주술사처럼 정양은 현재를 예견한다.
Ⅳ
시인은 꿈꾸는 자이다. 세속의 시간은 ‘여기’고, 신성의 시간은 ‘저기’다. 시인은 신성한 시간대를 세속적 시간대에 전입시키려는 꿈의 거간꾼이다. “삼시랑한티 빌고 터주때감한티 빌고 조왕님한티 빌고 조상님한티 부처님한티 예수님한티 달한티 별한티 빌고 장독대여다 당산나무여다 바위덩어리여다 빌”(「해돋이」)어 얻은 정갈한 밤과 낮을 우리의 하늘에 드리운다.
머슴집 아이들 부잣집 아이들
함께 어울려 밥 빌러 다니는 날
아이들 소쿠리에 집집마다
아낌없이 밥을 퍼주는 날
오늘은 하루에 오곡밥 아홉 번 먹는 날이다
오곡밥이 별거냐, 집집마다 퍼주는 밥을
소쿠리에 섞어 먹으면 오곡밥이지
절구통 위에 걸터앉아서 개하고도 나눠먹는다
정월대보름」 부분
천생원이 만경 사는 형님에게 생일선물 보내려고/ 내일 새보그 맹경 좀 가따 와야 쓰거따 일러놓 고/ 이튿날 새벽 판쇠를 아무
리 찾아도 없더니/ (중략)/ 너 시방 어디서 오냐?/ 맹경 가따가 오는 기리고마니라우/ 맹경은 머더러 가떠라냐?/ 어저끄 가따 오
라고 혀짜너유?/가따가 오란다고 그냥 빈소느로 가씨야?/ 아 글씨 가따가 오라고 혀짜너유?/ 그렁게 맹경은 가서 뭐시라고 현느냐
그 마리여?/ 가따가 오라고 혀서 와따고 혀찌라우/ 그렁게 머시라고 하시대?/ 그냥 우슴시나 인절미 한 소쿠리 주시던디유/ 아치믄
머건냐?/ 인절미 머금서 와꾸마니라우/ 그 인절미를 니가 다 머거씨 야?/ 먹다봉게 그렇게 되야꾸만이라우// 하이고 이 쓸개빠진
노마 인자는 나도/ 쓸개가 다 빠져뿌 런능갑다/ 캐묻다 지친 천생원이 어이없어 웃는 동안/ 판쇠도 덩달아 라이방을 벗고/ 눈물을
찍어 가며 웃었습니다
―「판쇠의 쓸개」 부분
해와 달의 운행, 사계절과 이십사절기에 맞춰 곡식과 채소, 과일 등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것이 농촌의 일상이다. 절기는 우주적 리듬을 세시풍속을 통해 형상화한 것으로, 지역마다 같거나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풍속의 형식과 내용은 오랜 기간에 걸쳐 전승되어 온 것이기에 공동체의 의식과 정서 속에는 원형적 상징과 은유가 남아 있다. 토박이 문화공동체여서 가능한 그것은 지속가능한 유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머슴집 아이들 부잣집 아이들/ 함께 어울려 밥 빌러 다니는 날”인 ‘정월대보름’은 “오곡밥 아홉 번 먹는 날”이기도 하다. 하루 만이라도 “절구통 위에 걸터앉아서 개하고도 나눠먹는” 등 계층이나 종種 간의 차별을 없앰으로써 모두가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을 갖도록 하였다. 풍성한 나눔을 통해 어려울 때 상부상조할 수 있는 질서를 학습함으로써, 공동체는 더욱 결속되었을 것이다. 「정월대보름」이 실린 <철들 무렵>(2009)에서 이십사절기는 원형적 시간대의 순간순간들을 현재의 시간에 현현한다.
공동체의 무형자산인 사투리 또한 선조들의 시공간을 현재에 계시한다. 「판쇠의 쓸개」는 너그러운 주인과 성미 급하고 덤벙대는 ‘판쇠’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체 시다. 천생원이 판쇠 편에 자기 형님께 생일선물을 보내려고 했는데, 판쇠가 맨몸으로 다니러가서 형님으로부터 받은 인절미만 오는 길에 다 먹었다는 내용이다. 그 와중에도 “아치믄 머것냐?”라고 묻는 천생원의 아량과, 제 스스로도 어이가 없어 “눈물을 찍어가며 웃”는 판쇠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현대를 사는 우리네의 각박한 삶을 반추한다. 삶의 주기가 일 년이었던 농부와 월급을 기준으로 그것이 월 단위로 분할된 직장인들, 그리고 그것이 일 단위로 분할된 일당노동자들의 정서는 여유와 여백이라는 측면에서 격차가 클 수밖에 없다. 사투리가 가진 다의성과 생활 밀착어들이 표준말로 전면 교체됨으로써 원형적인 공동체의 시간대도 사라지고 있다. “아니 이게 누구대여 얭이 아녀?// 나도 잘 못 알아듣는 내 이름을/ 용케도 찾아내는 마을”(「은행나무」)도 사라지고 있다. 외지에서 ‘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나’를 단숨에 공동체로 끌어들이는 일은 이제 시인의 몫이 되었다.
향토음식을 전수하는 것도 요리가가 아니라 시인이다. “아무것도 못 드시던 투병의 끝자락에/ 콩밭지꺼리 버무려 밥 한 술 먹고 싶다던” 그의 어머니는 “콩밭지꺼리는커녕 밥 한 술은커녕/ 이런저런 주사만 맞다가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어느 장터에도 그 콩밭지꺼리가 없어서/ 제사상에” “그냥 지껄이밭 지껄이로 담근 김치”(「콩밭지꺼리」)라도 올린다. “제사상에 무슨 흔해빠진 김치냐”는 가족의 “핀잔도” 마다않는다. 그 덕에 ‘김칫거리’의 사투리인 ‘지꺼리’를 우리는 식탁에 김치를 올릴 때마다 맛볼 수 있다. “눈 내리는 굴풋한 한밤중/ 뒤꼍 남새밭 옆 짚벼눌 옆 무구덩이에/ 마님께서 손수 무 캐러 갔다가/ 구덩이 속까지 손이 안 닿아/ 엉덩이 들어올려 어깻죽지까지 밀어넣었다가/ 웬 억센 사내에게 엉덩이 붙들려/ 어깨 못 뺀 채 고개 꺾인 채/ 함박눈 다 맞으며 꼼짝없이 뒤로 당했더”라는 옛 이야기는 “그 사내가 누군지 도통 짐작이 안 가는/ 눈 안 오는 밤에도/ 굴풋하다는 핑계로 마님께서 밤 깊도록/ 실없이 들락거리던/ 그런 무구덩이”(「무구덩이 설화」)를 통해 설화로 재생된다. 설화는 보기보다 가까이에 있다.
Ⅴ
그리하여 시인은 아이에 이른 자이다. “이글거리기도 전에 숨통이 막힌” “청춘”(「참숯」)을 지나, “마이크 잡고 노래도 하고/ 부끄러운 짓 낯두꺼운 짓/ 진땀나는 짓 닭살 돋는 짓”들을 “예사로/ 낯도 안 붉히고 해치”우는 “비위”(「낯도 안 붉히고」)의 시간대를 지나, 연기도 없이 타오르는 골짜기의 단풍처럼 “막판이 저렇듯 타오른다면/ 사람살이 얼마나 아름다우랴”(「막판이 저렇듯 타오른다면」) 싶은 외경畏敬의 시간대를 지나, “누가 뭐라고 쑤월거려야 비로소 잠드는”(「겨울밤」) 노인의 시간대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된다.
조심조심 다녀오세요
알았어요 조짐조짐
어린이 놀이터에 가려고
손자녀석 데리고 나오면서
자식에게 예사로 경어를 쓰는
아들녀석 말투 때문에
할아버지 마음이 내내 편하지 않다
놀이터에서 돌아온 할아버지는
현관 앞에서 세 살짜리 손자에게
현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고
야이 씨팔 문 안 열래?
큰 소리로 외쳐보라고
문 여는 법을 알려준다
손자는 시키는대로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야이 슈발 문 안 열래?
시키지 않아도 거듭 걷어차며 외친다
질색하며 나온 며느리가
제 아들을 껴안고 황급히 들어간다
잠시 후 손자가 다시 와서
할아버지 대학교수 맞냐고
앵무새처럼 쪼아린다
―「야이 슈발」 전문
“자식에게 예사로 경어를 쓰는/ 아들녀석 말투”가 왜 마음을 “편하지 않”게 하는 것일까. “번번이 갈 곳 없던/ 소싯적 무작정 가출/ 번번이 돈 떨어져/ 쪽팔리어 떠돌던 가출/ 배고픔과 어지럼증과 달밤과/ 절망과 자유와 그리움의 혼숙”(「캄캄한 뼛집도 없이」)을 겪어낸 자에게 저 “조심”스러움의 의미는 무엇일까.
옛날에는 과열되면/ 두꺼비집 휴즈가 녹아버렸다/ 휴즈 대신 굵은 철사로 한세상/ 아예 칭칭 감 고도 살았다// 요새는
나 다리미만 꽂아도/ 휴즈도 녹기 전에 덜컥 불이 나간다/ 걸핏하면 불부터 꺼지는 차단기들(중략) // 믹서를 꽂다가 또 불이 나간
다/ 이 소심한 어둠 속 아무데나/ 두근거리던 갈증이 사랑이 혁명이/ 기죽어 깔려 있는 것 같다// 가슴 좀 두근거리면 안 되나/
합선 좀 되면, 차라리 망가지도록/ 불꽃 좀 튀면 안 되나”
―「창 밖에는」 부분
정양은 지금을 “두근거리던 갈증이 사랑이 혁명이” 사라진 시대라고 진단하는 것 같다. “휴즈도 녹기 전에 덜컥 불이 나”간 “이 소심한 어둠 속”에서 “차단기”가 내려진 “가슴”은 원천적으로 “두근거리”지 못한다. “합선 좀 되”기를, “차라리 망가지도록/ 불꽃”이 튀기를 기대하는 마음과 손주에게 막말을 가르치는 마음은 직렬로 연결되어 있다. 다음의 시에서처럼 그는 소년의 처음으로 돌아가 악동처럼 “혼자 쿡쿡거리는 재미”로 ‘할아버지’의 시간대를 지나고 있다.
산동사범대학 한국어과 교환교수/ 한국어 작문선생이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나에게/ 천 자 넘게 이메일 보내라는 숙제를 내
고/ 맞춤법 띄어쓰기 등등을 바로잡아/ 그 이메일을 되돌려주곤 했다// 내가 나들이를 가거나 낯선 이들을 만날 때/ 과대표 부예
서 군이 따라다니며/ 길 안내와 통역을 했고 부예서는/ 내 모습이 자기 할아버지 같다는 핑계로/ 가끔씩 나를 할아버지로 부르기
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부예서가 보내는 이메일 첫 마디의/ ‘교수님’이 ‘할아보지’로 바뀌었다/ 오타인가 싶었지만 혼자 쿡쿡거
리는 재미로/ 그걸 고쳐주지 않았고 부예서의 이메일은/ 그 뒤로 늘 할아보지로 시작되었다/ 귀국 후 부예서에게서 온 이메일의
첫 마디도/ ‘그리운 할아보지’였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고쳐주지 않고 있다
―「그리운 할아보지」 전문
“할아보지”를 “고쳐주지 않고 있”는 것은, ‘토탄’(사랑)을 그대로 묻어두는 일이나, 천생원이 ‘판쇠’에게 ‘아치믄 머건냐?’라고 물어주는 일의 연장이다.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이윽고 사자는 아이가 되듯’(니체) 그는 드디어 아이에 이르는데 성공했다. 세칭 ‘대학교수답지 않은’ 이런 태도들은 서두에 소개된 「신작로」의 소년의 태도로부터 또 다시 직렬연결 된다. 그가 헛디디며 헛짚으며』를 펴내면서 1부의 시 묶음 제목을 ‘응답하라 1950’이라고 타전한 것은 “황량했던” 1950년대가 이 시대의 지나친 소심함을 ‘합선’시켜주기를 긴급지원 요청한 것만 같다. 노인이 아이가 되듯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입춘」)은 와야 하는 것이다.
이영숙 | 1991년 문학예술』 시 등단. 시집 詩와 호박씨』. 서울예술대를 거쳐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과정 졸업. 송파문화원ㆍ추계예술대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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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인이 아이가 되듯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입춘」)은 와야 하는 것이다.
목숨 걸고 봄은 "와야 하는 것이다"
참 눈부신 글의 다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