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학시집<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문학과 지성사. 2017년 5월.
[책 소개]
상상과 유희를 극대화한 자리, 프랑스
사소함을 공통 감각으로 확장하는 경험
서정학의 두번째 시집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가 출간되었다. 1998년 첫 시집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을 낸 지 19년 만이다. 시인은 1995년 군 복무 중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은신처」 등 다섯 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데뷔 당시 “첨단 문명이 낳은 새 문화들에 침윤된 시인은 문화 중독자답게 바로 그것들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고 짓는다”(『문학과사회』 편집동인)는 평을 들었으며, 이후 함기석, 이수명, 이철성 등과 함께 “억압적 질서와 형식을 파기”하는 “신세대 시인”(문학평론가 정끝별)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이후 시인은 꾸준히 시를 쓰는 동시에 서촌 골목에 나눔 가능한 예술적 아이디어를 실현시키는 ‘세컨드 뮤지엄’을 열어 소규모 전시나 워크숍 등을 진행하는 등 다양한 예술 분야의 디렉터로도 활동해왔다. 이번 시집에는 그가 지난 시간 동안 써온 시들 중 고심 끝에 고른 서른네 편이 고르게 묶였다. 2017년에 쓴 시들이 담긴 <17 흔적> 장부터 1999년에 쓴 시들이 모인 <99 반복> 장까지 역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번 시집은 예민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장들의 맛을 즐길 수 있는 동시에, 시의 형식이 가진 느슨함을 최대한으로 끌고 나가 그 넓어진 공간에서 충만한 유희를 선보인다.
시에서 살짝 비켜선, 가장 충실한 시 형식.
한때는 그 문장, 그 단어들은 시였다. 글자와 글자는 접착제로 제법 튼튼하게 붙어 있었고, 뼈대는 비록 얼기설기 엉켜 있었지만 나름 튼튼했고, 알록달록한 단어들은 제법 아름다웠다. [……] 제법 시다웠지만 다, 한때의 일일 뿐이다. 그냥 그 종이 위에는 이제, 검은색 글자들과 약간 색이 바랜 여백들과 나름의 침묵이 남아 있다. 쓴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지금 와서는 제법 아쉽지만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 뭐, 대단한 일은 아니다.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쓸 뿐이다.
– 「제법,」 부분.
역사가 기록되기 전부터 존재해온 시는 가장 확고한 양식을 가진 장르인 동시에 항상 그 형식에서 살짝 비켜서는 태도의 창작자들, 그 변주되고 유희되는 욕망을 동력으로 삼아 이어져왔다. 서정학은 시 형식을 의도 없이(무의식적으로) 흩뜨리며 느슨하게 만드는, 어쩌면 가장 장르에 충실한 ‘낯선 시’를 구현해낸다. 과거 그의 시에 덧붙은 타이틀은 “세기말의 감각” “분열된 자아” “무의미하고 절망적인 유희” 등이었지만, 기실 그의 시에서 대단한 의지나 의식적 지향을 읽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힘주지 않고 무심한 듯 정곡을 찌르는 뾰족한 감각이 발견된다. 서정학 시에서 이런 ‘사소한 것, 가벼운 것, 쓸모없는 것’들의 진동이 읽는 이에게 ‘울림’으로 가닿는 경험은 전혀 사소하지도 쓸모없지도 않다.
시인의 변화와 시절의 흐름, 그 밀착성의 감지
스무 개가 겨우 천 원이라는 상상 초월 대박 가격에 모든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재료값도 안 나오는 착한 가격! 안 사는 것이 손해! 붉은 글씨로 빼곡히 적힌 불어 현수막은 들이닥친 사람들의 발밑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다. 누군가 필사적으로 에펠탑을 향해 소리치며 누군가는 큰 소리로 라데팡스를 향해 울었다. 붉은 나비 같은 유로가 하늘을 향해 아름다운 디자인을 뽐내며 날고 있었다. 종이상자를 양손에 들고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며 경고한다. 프랑스에서 만든 것은 프랑스로! 점장은 고객들의 품 가득 사은품을 챙겨 주느라 분주했다. 본전이나 뽑을 수 있을지 모두들 걱정하는 가운데 그 많던, 프랑스가. 결국 매진되었다. 눈가가 붉게 물든 점장은 전단지를 둥글게 말아 격양된 악센트의 불어로 모든 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매장 바깥에서 누군가 주차된 차들 사이로 화염병을 던져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이게 다 아름다우면서도 저렴한 프랑스 덕분이다.
–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 전문.
시인은 표제작인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를 비롯한 ‘프랑스’ 연작시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첫 시집과는 다르게 ‘내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고 표현한 바 있다. 실제로 첫 시집에서는 “아프잖아” “기분이 나빠져서”처럼 시적 화자의 정서가 직접적으로 돌출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프랑스’ 연작 시편들은 다소 힘이 빠지고 좀더 세계와 감각이 혼재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첫 시집과 이번 시집을 연속해서 읽다 보면 서정학의 시풍이 격변했다고 느끼기보다는, 그의 시들이 대부분 일상과 밀착된 시들이기에 당연하게 변해가는 시절과 세대 감각을 시에 반영한 것처럼 읽힌다. “낡은 이야기들”이라며 “유통기간이 아슬아슬하거나 살짝 지났다고 생각한다”고 시인 스스로 뒤표지에 겸양의 글을 싣기도 했지만, 사실 이 시집의 시들이 구식이나 진부함이 아닌 자연스럽게 시절을 따라 흐르는 감성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시대를 의식하며 유행을 좇기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시를 도구 삼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해온 그의 스타일 때문일 것이다.
여러 겹으로 덧씌워지는 의미소, 공통 인상으로의 확장.
그들은 공연을 위해 왔다고 했다. 종이상자 몇 개를 엎어놓은 듯한 그들의 비행선은 너무도 낡아서 한눈이라도 팔았다가는 금방, 수거해 가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도 사실을 알고 있는지 누군가 한 명은 꼭 남아서 비행선을 지킨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글자가 박힌 몇몇 부품은 이미 재활용된 듯했지만 그들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 그들이 뜨겁게 사랑받을 수 있는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고 싶다고 했다. 뜨거운 사랑을 원료로 하는 종이상자가 바람에 흔들거렸다. 그들은 연습을 위해 밤늦게까지 웅얼거리며 시체처럼 힘없이 걸어 다닌다. 빨리 비행선이 날 만큼 사랑을 모아 집 마당이나 비워줬으면 좋겠다.
– 「종이상자」 부분.
이 시집의 개성은 ‘종이상자’ 연작에서도 느낄 수 있다. 조금은 성기고 부실해 보이는, 흔하지만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존재하는 종이상자들을 소재로 한 이 시들은 반복·중첩되는 맥락과 묘사들 사이사이에 틈입하는 의미들로 선명한 인상을 구축해나간다. 시인은 “나는 종이상자에 개인적인 잡동사니나 별것 아닌 깨달음, 딱히 쓸 데가 없는 감정들을 넣고 테이프를 두른다. 나에게나 뭔가 의미가 있지, 그다지 가치가 있을 것 같진 않다”(「뒤표지 글」)고 말하지만 사실 그 개인적이고 소소한 ‘유희’는 독자에게도 편안하고 즐거운 ‘놀이’로 다가온다. 맨 마지막 면지에 양면으로 인쇄된 종이상자 도안이 마련된 이유도, 독자에게 전하는 서정학식의 ‘즐거움’이다. 번호를 따라가며 읽어도 되고, 무작위의 순서로 다 다른 시가 되기도 하는 종이상자와 함께 서정학식 유희의 극단,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가 지금 독자들을 향해 출발한다. 이 시집은 “나도, 독자도 ‘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 시인의 온전한 결과물인 동시에, 오로지 당신, 개인의 고유한 독서 경험으로 새로 구축될 것이다.
[목차]
시인의 말
17 흔적
제일 앞자리엔 채리가 앉는다/초현실적인 기계장치와 푸른 나무들/중요하지 않은 뭔가의 부국장, 그리고 그의 청춘./인스턴트 사랑주스
06 상자
대답 없는 레베카/종이상자/뜨거운 사랑/종이상자 선반/아드레날린/종이상자 연구소/종이상자 공장/비밀
04 연맹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인천 미식가 클럽/인천개포구연수동국제사탕조합대표자회의제7차대회전야제기념식장/선착장/주체 자유민주 국제연맹 최북단 간이사무소 연락지국 1525호/도파민/써라!/인천 세관 도착 환영회/컴포지션 넘버포/연애드라마
00 프랑스
동네에서 제일 싼 프랑스/앗, 프랑스/아앗, 프랑스/다시, 프랑스/그래도, 프랑스
99 반복
너는 생필품/완벽한 컬렉션 (가)/코끼리 하이힐/풀사이드/프랭클린 박사의 하루/비 오는 유행가/제법,
해설 | 중력의 자장을 벗어난 오늘의 시・김동원
[작가소개]
서정학
시인 서정학씨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전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문학과사회』 겨울호에 「은신처」외 4편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모험의 왕과 코코넛의 귀족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