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셩왕후(仁宣王后)녜쳑(禮陟)션디 오월의 방듕(方中)을[주:능이라]다려 임의 완(完)매 우리뎐해 이에 지으신 바 녹(行錄)을 리오샤 신(臣)슈(壽恒)을 명샤 현궁(玄宮)의 지(誌) 찬진(撰進)라 시니 신(臣)이 삼가 슈계슈(拜手稽首)와 밧와 닑와 오 오홉다 지극다 우리셩후(聖后)의 지덕(之德)을셩샹(聖上)의 긔록시미여 진실노 간연(間然)미 업도다 임의 양야 엇디 못매 감히 녹(行錄)을 가져 찬(纂次)야 펴이다 삼가 안(按)오니왕후(王后)의 셩은댱시(張氏)시니 그 몬져 온슌뇽(舜龍)이니 본듕국인(中國人)으로원(元)나라 당야션무댱군진변총관(宣武將軍鎭邊摠管)으로 공쥬 조차 동으로 와문하찬셩(門下贊成事)의
니고 읍을덕슈현(德水縣)의 식(食)니 손이 인야 젹(籍)니라 우리 나라 드러와 온 격한은한셩부판윤(漢城府判尹)이오 네 번 젼야옥(玉)에 니러 능히 문쟝(文章)야 일즉 대궤(大魁)예 이여승문원판(承文院判校)니니조참판(吏曺叅判)을 증(贈)니후(后)의게 오조(五代祖)오 고조(高祖) 휘(諱)임듕(任重)이니쟝예원의(掌隸院司議)니니조판셔(吏曺判書) 증(贈)고 증조(曾祖) 휘(諱)일(逸)이니목쳔현감(木川縣監)이니녕의졍(領議政)을 증(贈)고 조(祖) 휘(諱)운익(雲翼)이니형조판셔(刑曹判書)니 괴과(魁科)로 일즉 현달고 후의 보조공신(補祚功臣)녕의졍(領議政)덕슈부원군(德水府院君)을 증(贈)고 고(考) 휘(諱)유(維)니우의졍(右議政)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이니 시(諡)문튱(文忠)이니 공이인조(仁祖)긔 지우 밧와 졍샤훈(靖社勳)을 니 문쟝과 덕이 크게 셰샹의 일홈 나고 비(妃) 온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김시(金氏)니안동(安東)의 망(望) 잇 겨레라 튱신(忠臣)우의졍(右議政)문+츙공(文忠公)
샹용(尙容)의 녜니 일시에 문벌을 일 쟤 갑을(甲乙)노 니더라만녁 무오(萬曆 戊午)십이월 경진(庚辰)으로후(后)경긔(京畿) 안산(安山)초샤(村舍)의셔 탄니 나시매 단슉(端淑)샤 망녕도이 유희(遊戱) 아니시고 뉵 셰예 조모박부인(朴夫人)이 야 기 일즉 계부(季父) 와슈원부아(水原府衙)의 가 계시더니 로 만 가온대 부모 각고 우시거 조뫼(祖母) 고 무대 믄득 눈물을 고 다 말노 샤 야곰 그 근심을 티디 아니시니 조뫼(祖母) 긔(奇愛)더라 휘(后) 형님이 이셔 면창(面瘡)을 괴로이 알흘 혹이 닐오되 아 이 장 효험이 잇다 김부인(金夫人)이 거 손의 더러이고져 아니야 후(后)의 을 시험니휘(后) 즉시 손으로 시 아쳐 빗 뵈디 아니시니문튱공(文忠公)이
크게 깃거 이샹이 넉이니 대개 그 지극 셩 어려셔브터 이러 시더라슝뎡 경오(崇禎 庚午)의효(孝廟)봉님대군(鳳林大君)이 되시매인죄(仁祖)친히 그 (配) 실후(后)의 쥬션(周旋) 응(應對) 법이 이시 보시고 심히 착히 넉이시니휘(后) 드여 응시다신미(辛未)의 가례(嘉禮) 일우고풍안부부인(豊安府夫人)을 봉시니 임의 입궐시매 슉야(夙夜)의 기률(夔慄)샤 효도로오시며 공경샤 어긔로오미 업시니 장인녈왕후(仁烈王后)의 권(眷愛)시 배 되시더라 네 만의 츌합(出閤)샤 뎌의예 거샤 집 졍(政事) 잡으시매 졍뎡이 족니(綜理)시며 곤(梱內事) 쟉으며 큰 일 업시 감히 젼(自專)티 아니시며인녈왕후(仁烈王后)형님이 계샤 홀노 궁거(窮居)매휘(后) 쥬구(賙捄)시미 곡진 은위(恩意) 계시더라
병(丙子)겨의 도적의 난의강도(江都)의 드러 계시더니 이듬 졍월의 도적의 병(兵)이 강을 건너매 궁듕(宮中)이 긋물 야 호곡(號哭)야 창황(蒼黃)티 아니리 업휘(后) 홀노 죠용(從容)시며 뎡가(整暇)샤 언동이 죠곰도 상난티 아니시니 사이 다 그 딕희미 계시 탄복더라효(孝廟)쇼현셰(昭顯世子)로 더브러심양(瀋陽)의 볼모시매 미쳐휘(后) 와 실 험조(險阻)의 긔위(羇危)시미 슈미(首尾) 아홉 의 쳐시 배 샹도(常度) 일티 아니시니냥궁(兩宮) 이예 내 간언(間言)이 업더라을유(乙酉)의 비로소 나라흘 도라와 계시더니쇼현셰(昭顯世子)졸시매효(孝廟)인조(仁祖)명을 밧와 뎌(儲嗣)의 오시고후(后) 야 셰빈을 삼으시니휘 스로 더옥 억외(抑畏)샤 몸을 녜로 검틱시며 우흘
졍셩으로 셤기시고 가지 이샹 음식을 어드샤도 반시 몬져인조(仁祖)긔 드리시더라긔튝(己丑)의인죄(仁祖)빈텬(賓天)시매효(孝廟)위(位)예 오시니휘(后) 임의 위(位) 듕곤(中壼)의 뎡시매 음(陰敎) 더옥 나타나샤 안 직(職事) 드시며 빈어(嬪御) 거리시매 화(和)고 목(穆)시며 엄(嚴)고 혜(惠)샤 규목갈담(樛木葛覃)의 화(化)의 거의로 오히려 쇼심익익(小心翼翼)샤 유손(柔巽)므로 가지샤 덧덧시 샤 지어미 스로 착 쳬고 가국(家國)의 해 되디 아니리 젹은디라 암의 경계 가히 근심티 아니랴 시더라긔(己亥)예효(孝廟)병환이 위시매휘(后) 하의 비샤 시 쳥시더니 밋 불위(不諱)시매 니러 곡벽(哭擗)시미 녜(禮)예 넘으시나 그러나 송종지(送終之事)의 큰 거로브터 비록 쟉은 디라+도
반시 친히 시고 셜어의게 맛지디 아니샤 힘 셩신(誠信)을 다신 후야 그티시고 졸곡(卒哭)디 못 다만 미듁(穈粥)만 마시시니 우리뎐해 우시며 슈라 나오시 쳥대 샤 스로 그 명을 쟈 진실노 과(過)커니와 강잉(强仍)야 밥 먹어 살기 구믄 나의 마 못 배라 시더라 우리뎐해 위(位) 니으시매후(后) 놉혀 왕대비(王大妃) 존(尊)시고신튝(辛丑)의 휘호(徽號) 나와 온효슉(孝肅)이라 니 (冊)과 보(寶) 올니 당야휘 친히 님(臨)코져 아니신대 아뎐해 지셩으로 그리 쳥시니휘(后) 효묘(孝廟)의 평셕(平昔)의 효 앙쳬(體)샤 울고 허시니 녜(行禮) 날 슬허시미 좌우 동더라 하례(賀禮)의 니러 내 밧디 아니시다 양 이(灾異)
만나시매 우구(憂懼)샤미 빗 나타나샤 우리뎐하긔 닐너 샤 내 이 오히려 이러 니 네 가히 홀(忽)랴 시며 경계와 치시 배 심히 졀지(切至)시더라휘(后)긔튝(己丑)대쳑(大慽)으로브터 과히 (毁)샤 병환을 닐위여 드여 인야 침고(沉痼)실 일즉 여러번호셔(湖西) 온양(溫陽)의 샤 탕쳔(湯泉)을 시험시니 져기 효험이 계시더니갑인(甲寅)이월의 니러 병환이 홀연이 극(亟)샤 이십일무오(戊午)로경덕궁(慶德宮) : 회샹뎐(會祥殿)의셔 훙(薨)시니 츈 오십칠이시러라 유(有司) 시법(諡法)을 의논니 인(仁)을 베플며 의(義) 복(服)믄 온 인(仁)이오 셩(聖)과 션(善)을 두루 드믄 온 션(善)이니 드여 존시(尊諡) 올녀 온인션(仁善)이라 고 휘호(徽號) 가샹(加上)야 온경녈명헌(敬烈明獻)이라 다 몬져효묘(孝廟)산능(山陵)의 연고 이+셔
겨의 니러녀(驪州) : 흥졔동(弘濟洞)좌오향(子坐午向) 두던의 올마 계시더니 이에 니러후(后)의 말명(末命)을 준(遵)샤 뉵월 초일노 그 아래 장(葬)오니 그 원(原)이 가지오 갓가오므로라 인야 영능(寧陵)이라 일다휘(后) 셩(資性)이 뎡졍(貞靜)시고 법문(法門)의 훈(訓)을 습(襲)샤 얼골을 움이시며 말을 내시매 다 가히 의범(儀範)을 삼을디라 비록 질병과 연(燕私) 즈음이라도 스로 녜(禮)로 가지시며 셩(子姓)을 샤 일즉 탐 빗 두디 아니시고 친(私親)의 쥬목(周睦)믄 비록 힘 시나 곡경(曲徑)으로 은을(간)구믄 결연히 허티 아니시니 외(內外) 졀연더라효(孝廟)닌평대군(麟坪大君)의게 우 도타오신디라휘(后) 그 부인 졉 티 셩신으로 시고의대비(慈懿大妃) 수십 년을 셤기+시매
(慈)의 (孝) 무간(無間)샤 궁(宮)의 이예 화긔(和氣) 늉늉(融融)시더니휘(后) 병환 계시므로브터 로 진현(進見) 엇디 못시고 양 탄식야 샤 사라 이셔 무엇리오 시고 대뎜(大漸)시 져녁의 신긔(神氣) 임의 혼모(昏瞀)야 계시더니 홀연이대비(大妃) 림(來臨)시 드시고 즉시 놀나 티샤 안실 방셕을 촉야 진(進)시고 슌슌(諄諄)이 영결(永訣)을 고(告)시매 브드러온 소와 화신 빗치 옹용(雍容)야 젼일 샤 오히려 장슈디 못고 뵈오므로 (恨)을 삼으시더라 능(陵)을 옴기 날 대예(大輿) 너모 무거워 메 군 젼부(顚殞) 근심니 만흐니휘(后) 듯오시고 츄연(愀然)야 샤션왕(先王) 텬지녕(在天之靈)이 반시 여긔 불안시리로다 시더니 밋 녀시(女侍) 산능(山陵)으로브터 도라오매 무샤 사
샹미 만티 아니 아오시고 비로소 화예(和豫)신 빗 두시니 이제 인산의 항을 리고 로 미 후의 티신 을 앙쳬시미로다효(孝廟)승하시매 비록 궁(窮) 녀염(閭閻)과 벽(僻) 히라도 고비(考妣) 상(喪) 여 졈졈 오래 닛디 못더니 밋휘(后) 훙(薨)시매 셩이 분쥬야 호모(號慕)미 가지니 오회라 엇디 말암아 그러 배 아니리오휘(后) 일남과 오녀 탄휵(誕育)시니 우리뎐하녕돈녕부(領敦寧府事)김우명(金佑明)의 녀 샤 비(妃) 삼으시고 오(五) 공쥬 댱(長)은 온슉안공쥬(淑安公主)니익평위(益平尉)홍득긔(洪得箕)의게 하가(下嫁)고 (次) 온슉명공쥬(淑明公主)니쳥평위(靑平尉)심익현(沈益顯)의게 하가(下嫁)고 (次) 온슉희공쥬(淑徽公主)니닌평위(寅平尉)뎡졔현(鄭齊賢)의게 하가(下嫁)고 (次) 온슉졍+공쥬(淑靜公主)니
동평위(東平尉)뎡륜(鄭載崙)의게 하가(下嫁)고 (次) 온슉경공쥬(淑敬公主)니흥평위(興平尉)원몽닌(元夢鱗)의게 하가(下嫁)니슉졍(淑靜)과슉경(淑敬)은 다 몬져 졸다 우리뎐하 일남삼녀(一男三女) 탄시니 셰병조판셔(兵曹判書)김만긔(金萬基)녀 빙(聘)샤 빈(嬪)을 삼으시고 녀 온명션공쥬(明善公主)명혜공쥬(明惠公主)명안공쥬(明安公主)니명션(明善)과명혜(明惠) 다 라디 못야 요(夭)고홍득긔(洪得箕) 일남(一男)이오심익현(沈益顯)은 이남(二男)이오뎡졔현(鄭齊賢)은 일남(一男)이오뎡륜(鄭載崙)은 일남일녀(一男一女)오원몽닌(元夢鱗)은 일녀(一女)라 업듸여 각오니 우리 녕고(寧考) 셩(盛) 덕(德)과 큰 규뫼(規模) 왕(百王)과 멍에 결워 그 쳑여분발(惕厲奮發)샤 대의(大義) 텬하(天下)의 히시미 오직후(后)의 안흐로 도으신 공을 뢰(資賴)시미오 우리셩샹(聖上) 인심(仁心)과 인물(仁聞)이 사의 과
의 협흡(協洽)샤 녕(域內)의 초유(肖翹)의 뉴(類)로 야금 다 우로지(雨露之澤)을 목욕미 오직후(后)의 부(慈覆)신 화(化) 니으시미니 너시고 둣거오신 덕이 놉히 곤원(坤元)을 (配)시니 이 맛당이 복을 무강(無彊)이 바로 사기리 강능(岡陵)의 슈(壽) 누리실 거시어 호텬(昊天)이 피디 못샤 먼 산을 거연(遽然)이 촉니 오회라 셟도다 오직 그 휘음(徽音)과 의녈(懿烈) 의 이 이목(耳目)의 잇 바 완담(琬琰)의 삭여 뉴슈(幽隧)의 초와 쟝도신(塗莘)의 셩(盛)므로 아오로 만년의 드리오리니 의(猗)홉다 아답다
판듕츄부(判中樞府事)신(臣)김슈(金壽恒)찬(撰)
현렬뎡헌문덕명셩왕후(顯烈貞獻文德明聖王后)김시(金氏)
인선왕후 영릉지〔仁宣王后寧陵誌〕 -김수항 찬
인선왕후(仁宣王后)께서 승하하신 5월, 산릉 준비가 이미 끝난 뒤 우리 전하께서 찬술하신 행록(行錄)을 내려 주시며 신(臣) 김수항(金壽恒)에게 현궁(玄宮 광중(壙中))의 지문(誌文)을 지어 올리라고 명하였다. 신이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서 읽고, 말씀드리기를 “아, 지극합니다. 우리 성후(聖后)의 덕이! 성상(聖上)께서 기록하였으니 참으로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이미 사양하지 못했으니 감히 행록을 보고 순서대로 편차하여 서술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장씨(張氏)이다. 그 선조는 순룡(舜龍)인데 본래 중국인이다. 원(元)나라 때 선무장군(宣武將軍) 진변 총관(鎭邊摠管)으로 공주(公主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따라 우리나라에 왔다가 그대로 고려(高麗)에서 벼슬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으며 덕수현(德水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는데, 자손들이 그대로 그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우리 왕조에 들어와서 핵(翮)이라는 분이 있었는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4대를 내려와 옥(玉)이라는 분이 문장을 잘하여 일찍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며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지냈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이분이 왕후에게 5대조가 된다. 고조는 휘가 임중(任重)으로, 장례원 사의(掌隷院司議)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는 휘가 일(逸)로, 목천 현감(木川縣監)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는 휘가 운익(雲翼)으로 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역시 장원급제하여 일찍이 현달했고, 뒤에 보조공신(補祚功臣) 영의정 덕수부원군(德水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가 유(維)로, 우의정을 지낸 신풍부원군(新豐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인조(仁祖)의 지우(知遇)를 받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었으며, 문장과 덕행으로 세상에 크게 명성을 떨쳤다. 배위(配位) 영가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로, 안동(安東)의 명망 있는 집안인 충신 우의정 문충공(文忠公) 휘 상용(尙容)의 딸인데, 당시 문벌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 첫째, 둘째로 꼽았다.
만력(萬曆) 무오년(1618, 광해군10) 12월 경진일에 경기도(京畿道) 안산(安山)의 시골집에서 왕후가 탄생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얌전하여 함부로 장난치며 놀지 않았다. 여섯 살이 되자 할머니 박씨 부인이 데려다 길렀다. 일찍이 할머니를 따라 계부(季父)의 수원부(水原府) 관아에 갔는데 때로 남몰래 부모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물으면 그때마다 눈물을 훔치면서 다른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며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니 할머니가 기특하게 여기며 더욱 사랑했다.
왕후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얼굴에 종기가 나 고생하고 있었다. 누군가 어린아이의 똥이 가장 효험이 있다고 말하자 김씨 부인이 짐짓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왕후의 생각을 떠보았다. 왕후가 즉시 손수 발라 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문충공이 매우 기뻐하며 기특하게 여겼다. 대체로 왕후의 지극한 성품은 어려서부터 그러하였다.
숭정(崇禎) 경오년(1630, 인조8) 효종께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된 뒤 인조께서 친히 그의 배필을 간택하실 때, 왕후가 법도 있게 행동하고 응대하는 모습을 보고 매우 현숙하다고 여기었다. 왕후께서 마침내 선발되어 신미년(1631) 가을에 가례(嘉禮)를 치르고 풍안부부인(豐安府夫人)으로 봉해졌다. 대궐로 들어온 후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면서 어김없이 효도하고 공경하여 인열왕후(仁烈王后)에게 가장 사랑을 받았다.
4년이 지나 대궐에서 나와 사저에서 살았는데 집안 살림을 맡아 조리 있게 잘 처리하면서도 집안일이 크든 작든 간에 감히 혼자 결정하지 않았다. 인열왕후에게는 일찍이 과부가 되어 곤궁하게 살던 언니가 있었는데 왕후가 은혜로운 마음으로 곡진히 도와주었다.
병자년(1636) 겨울에 호란(胡亂)이 일어나 강도(江都)로 들어갔다. 이듬해 1월, 적병이 강을 건너 쳐들어온다고 하자 궁중(宮中)이 발칵 뒤집혀 너나없이 울부짖으며 갈팡질팡하였으나 왕후만은 차분하고 여유로워 말이나 행동이 평상시와 조금도 다르지 않으니 사람들 모두 왕후가 본분을 지키는 모습에 탄복하였다.
효종께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게 되자 왕후도 따라갔다. 험난한 타국살이를 앞뒤로 9년이나 하면서도 처신은 지켜야할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두 궁(宮) 사이에 끝까지 틈이 벌어지는 말이 없었다.
을유년(1645, 인조23)에 비로소 귀국했다. 소현세자가 졸(卒)하고, 효종께서 인조의 명을 받아 세자의 자리에 올랐으며 왕후는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왕후께서 더욱더 스스로를 낮추고 조심하며 예로 몸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주상을 섬겼으며 색다른 음식이 하나라도 생기면 반드시 먼저 인조께 드렸다.
기축년(1649)에 인조께서 승하하여 효종께서 왕위에 올랐다. 왕후께서 중전 지위에 오르자 내교(內敎 후비(后妃)의 덕)가 더욱 드러났다. 내직(內職 내명부(內命婦))을 맡아 빈어(嬪御 후궁과 궁녀)들을 거느리는데 온화하면서도 의젓했고 엄격하면서도 은혜로워 거의 〈규목(樛木)〉이나 〈갈담(葛覃)〉의 교화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오히려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몸을 유순하게 가졌다. 항상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안 된다는 경계를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했다.
기해년(1659, 효종10)에 효종께서 병이 위중하시자 왕후가 하늘에 빌며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달라고 청하였으며, 승하하시자 예에 벗어날 정도로 곡하며 슬퍼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보내는 일은 시신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것부터 아무리 작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몸소 하면서 아랫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힘써 정성을 다하고야 말았다. 졸곡(卒哭) 전에는 미음만 드셨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수라를 드시라고 눈물지으며 청하니 왕후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정말 지나친 일이지만, 살려고 억지로 밥을 먹는 것도 내 차마 못하겠소.”라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왕후를 왕대비로 높였다. 신축년(1661, 현종2)에는 효숙(孝肅)이란 휘호를 올렸는데, 책보(冊寶)를 올릴 때 왕후께서 친림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굳게 청하시자 왕후께서도 효종께서 생전에 분부하신 말씀에 따라 눈물지으며 허락했다. 예를 치르던 날 슬퍼하시던 모습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례(賀禮)는 끝내 받지 않았다. 재이(災異)를 당할 때마다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낯빛을 띠시며 우리 전하에게 “내 마음에도 이러한데 주상이 소홀히 해서야 되겠습니까.”라며 일깨워 주었으니, 그 경계하고 가르친 바가 매우 절실하고 지극하였다.
왕후께서 기해년에 큰 슬픔을 당한 후로 지나치게 애도하여 병이 났는데 드디어 그 일로 고질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여러 번 호서(湖西)의 온양(溫陽)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니 조금 효험이 있었다. 갑인년(1674) 2월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 24일 무오에 경덕궁(慶德宮)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시니 춘추는 57세였다. 유사(有司)가 시법(諡法)을 의논하였는데,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실천하는 것을 인이라 하고, 성스럽고 착한 소문이 두루 난 것을 선(宣)이라 하므로 드디어 인선(仁宣)이란 존호를 올렸으며, 또 경렬 명헌(敬烈明獻)이란 휘호를 가상(加上)했다.
이에 앞서 효종의 산릉에 일이 생겨 계축년(1673, 현종14) 겨울에 이르러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 자좌오향(子坐午向 정남향) 언덕으로 옮겼다. 이때 이르러 왕후의 유언에 따라 6월 4일 그 아래에 부장(祔葬)했는데, 같은 산줄기인 데다 가깝기 때문에 그대로 영릉(寧陵)이라고 불렀다.
왕후는 타고난 성품이 곧고 차분한 데다 또 법도 있는 가문의 가르침을 받았으므로 몸가짐이나 말씀하신 것이 모두 다 모범이 될 만하였으며, 비록 병중이나 평소 혼자 있을 때에도 반드시 예절에 맞게 행동했다. 자손들을 대할 때도 태만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고, 사가의 친척과 두루 화목하게 지내면서도 도리에 벗어난 요구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으며 안팎의 구분이 분명하였다.
효종께서 인평대군(麟坪大君)과 우애가 지극히 돈독했고 왕후도 그 부인을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다. 자의대비(慈懿大妃)를 수십 년 섬기는 동안 사랑하고 효도하여 조금도 틈이 벌어지지 않았으며 궁중에 화기가 감돌았다. 왕후께서 병을 앓고부터 때맞추어 나아가 뵙지 못하게 되자 매번 “이렇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 하며 탄식하셨다. 병이 위독하던 저녁에 정신이 이미 혼미해졌는데도 대비께서 오신다는 말을 갑자기 듣고는 즉시 깜짝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좌석에 나아가 앉아서 정성스럽게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와 화기 띤 안색이 평상시처럼 온화하고 차분하였으나 오히려 몸단장을 못하고 뵌 것을 한스러워하셨다.
효종의 능을 옮기던 날 신거(蜃車 상여)가 너무 무거워 상여 메는 사람들이 넘어지고 다칠까 걱정이 많았다. 왕후께서 듣고 걱정스런 얼굴로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분명 이를 불안해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산릉에서 돌아온 시녀에게 다친 사람이 많지 않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안도하는 빛이 있었다. 이번에 육로를 버리고 배를 이용해 육인(六引 상여(喪輿)를 끄는 여섯 가닥의 발인(發靷))을 운반하게 된 것도 왕후가 남긴 뜻을 따른 것이라고 한다. 효종이 승하하셨을 때 비록 궁벽한 곳에 사는 사람들도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오래도록 잊지 못하더니, 왕후께서 승하하시자 백성들이 달려와 울부짖고 그리워하기를 그때처럼 하였다. 아, 어찌 이유 없이 그러하였겠는가.
왕후께서는 아들 한 분과 딸 다섯 분을 낳아 기르셨다. 우리 전하께서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우명(金佑明)의 따님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공주 다섯 분은 첫째가 숙안공주(淑安公主)로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다음은 숙명공주(淑明公主)로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다음은 숙휘공주(淑徽公主)로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다음은 숙정공주(淑靜公主)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다음은 숙경공주(淑敬公主)로 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에게 시집갔는데, 숙정공주와 숙경공주는 모두 먼저 졸했다.
우리 전하께서는 아들 한 분과 딸 세 분을 낳으셨다. 세자 모(某)는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의 따님을 빈(嬪)으로 맞아들였고, 딸은 명선공주(明善公主)ㆍ명혜공주(明惠公主)ㆍ명안공주(明安公主)인데, 명선공주와 명혜공주는 시집가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홍득기는 아들 한 명, 심익현은 아들 두 명, 정제현은 아들 한 명, 정재륜은 아들 한 명과 딸 한 명, 원몽린은 딸 한 명을 두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효종대왕께서는 융성한 덕행과 크나큰 규모가 뭇 왕들보다 뛰어나셨는데 그 가다듬고 분발하여 천하에 큰 의리를 밝히신 것은 오직 왕후께서 내조하는 공에 힘입었으며, 우리 성상의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살과 뼛속에 젖어들고 온 나라의 미물까지도 모두 비나 이슬과 같은 은택을 누릴 수 있게 한 것도 오직 왕후께서 자애로 감싸 주신 덕화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넓고 두터운 덕이 곤원(坤元 만물을 기르는 땅의 덕)과 높이 짝하였으니 한없는 복을 받아 강릉(岡陵)과 같은 수명을 길이 누렸어야 하는데 하늘이 보살펴 주지 않고 갑작스럽게 명을 재촉하였으니, 아, 슬프도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귀와 눈에 선하게 남아 있는 그 아름다운 말씀과 공렬을 옥돌에다 새겨 무덤 속에 간직해 두니 장차 훌륭한 도(塗)ㆍ신(莘)과 함께 만년토록 전해질 것이다. 아, 아름답도다.
- [주-D001] 소현세자가 …… 책봉되었다 :
- 소현세자가 죽은 뒤 장남 석철(石鐵)이 있었음에도 인조는 나라에 나이가 많은 군주가 있어야 한다는 국유장군(國有長君)의 논리를 내세워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국역 인조실록 23년 윤6월 2일》
- [주-D002] 규목(樛木)이나 갈담(葛覃)의 교화 :
- 〈규목〉은 《시경》 〈주남(周南)〉의 편명인데, 문왕(文王)의 후비(后妃)가 질투가 없으므로 여러 첩(妾)이 그 덕을 즐거워하여 칭송한 시로, “남산에 아래로 굽은 나무가 있으니, 칡덩굴이 얽혔도다. 화락한 군자여, 복록이 편안하네.〔南有樛木, 葛藟纍之. 樂只君子, 福履綏之.〕”라고 했다. 〈갈담〉은 《시경》 〈국풍(國風) 주남〉의 편명인데 “칡덩굴이 쭉쭉 뻗어, 골짜기 가운데에 뻗어 가서, 잎이 매우 무성하거늘, 꾀꼬리는 날아와, 떨기나무 위에 앉아서, 평화로이 울어대도다.〔葛之覃兮, 施于中谷. 維葉萋萋, 黃鳥于飛. 集于灌木, 其鳴喈喈.〕라고 했다. 이는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효심도 지극했던 문왕 후비를 기린 노래이다.
- [주-D003] 기해년 :
- 원문에 ‘기축(己丑)’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으로 보아 1659년 기해년 효종(孝宗)의 상(喪)을 말하는 듯하다.
- [주-D004] 강릉(岡陵)과 같은 수명 :
- 《시경》 〈소아(小雅) 녹명(鹿鳴)〉에 “하늘이 그대를 보호하여 정했으니 흥성하지 않음이 없으리라. 산과 같고 언덕과 같으며 산마루와 같고 구릉과 같도다.〔天保定爾, 以莫不興. 如山如阜, 如岡如陵.〕”라고 했는데, 장수를 축원한 말이다.
- [주-D005] 도(塗)ㆍ신(莘) :
- 하(夏)나라 우(禹) 임금의 비(妃)인 도산씨(塗山氏)와 은(殷)나라 탕(湯) 임금의 비인 유신씨(有莘氏)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