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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광천 첫 나들이
■ 정관읍 행정복지센터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용수로
https://www.gijang.go.kr/
☯ 정관읍(Jeonggwan-eup/鼎冠邑)
인구 : 76,013 (2016)
면적 : 38.22㎢
행정구역 : 49개리 665개반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기장군
사이트 : http://jumin.busan.go.kr/dong/jeonggwan/
요약 : 부산광역시 기장군 북서부에 있는 읍.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기장군 북서쪽에 위치한 읍. 2015년 9월 정관면에서 읍으로 승격되었다.
산간분지 지형을 이루며, 좌광천 유역에 평야가 분포한다.
면 북부 일대는 상수원보호구역에 포함된다.
정관신도시 개발 이후 인구가 급증해 기장군 인구의 48%가 정관읍에 거주하고 있으며, 산업단지 및 농공단지의 조성으로 읍내 100여 개의 산업체가 입지해 있다.
부산-울산을 잇는 국도와 면의 서단을 연결하는 도로가 읍내를 지난다.
행정구역은 방곡리·예림리·달산리·매학리·용수리·모전리·병산리·두명리·임곡리·월평리 등 10개리가 있다(법정리 기준, 행정리 기준 49개리).
읍사무소 소재지는 정관읍 용수로 4이다. 면적 38.22㎢, 인구 83,071(2019).
☯ 정관읍(鼎冠邑)은 부산광역시 기장군의 북부에 위치한 읍이다.
정관읍의 이름은 정관령(鼎冠嶺)이라고도 부른 소두방재(聳岩嶺)에서 유래하였다.
소두방재는 정관읍 사람들이 동래(東萊)로 내왕하는 유일한 관문이었기 때문에 1914년 3월 군,면의 행정구역 개정 때 정관면의 이름으로 정한 것이다.
소두방은 솥뚜껑의 이곳 방언이다.
이를 솥 정(鼎), 갓 관(冠)자로서 아주 멋있는 작명을 하였다.
소두방재라고 한 것은 재(嶺) 근처에 있는 매바우가 꼭 소두방처럼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매바우는 아무리 살펴보아도 소두방처럼 생기지 않고, 큰 바위가 산처럼 솟아 있을 뿐이다.
매바우를 옛사람들은 솟아 있는 바위(聳岩)라 하여 솟은 바위를 이곳 방언으로 솟은방우→솟은바우→소든방우, 소두방이라 한 것이다.
즉 이곳 방언으로 소두(聳), 방우(岩)인데 방우는 방으로 줄여서 소두방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따라서 그 참뜻은 솟은 바위이지 솥뚜껑〔鼎冠〕은 아닌 것이다.
그 때문에 소두방재가 있는 곳을 소산평(蘇山坪)이라 하였는데 이는 솟은(용), 뫼(산), 들(평), 즉 용산평(聳山坪)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소두방(聳岩)을 그 모양이 뫼처럼 생겼다 하며 뫼바위(山岩)라 한 것이다. 뫼바위(山岩)를 이곳 방언으로 매바우라 하기 때문에 한자로 매암(梅岩)이라 하였고, 그 아랫마을은 매곡(梅谷)이라 하였던 것이다.
옛날 매바우에 두루미가 살고 있었다하여 소학대(巢鶴台)라는 멋진 이름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백운산에 있었던 기장 제일의 대가람이었던 선여사(船余寺)에 딸린 망일암(望日庵)이 있었다.
그 이름 그대로 이곳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일출광경은 가히 장관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큰 도로가 생겨 이곳 관문은 이제 송림속에 길이 묻혀 내왕도 어렵게 되었다. 소두방재라는 본래의 이름은 용암령(聳岩嶺)이라는 뜻이 되니 정관읍이라는 이름 역시 그 본래의 뜻대로 한자로 표기하면 용암읍(聳岩邑)이 된다.
☛ 연혁
원삼국시대 : 거칠산국의 갑화양곡에 속함
79년 : 신라 석탈해왕에 정복됨
505년(신라 지증왕 6년) : 거칠산군의 갑화양곡현이 됨
757년(신라 경덕왕 16년) : 동래군의 현령으로서 기장현으로 개명
983년(고려 성종 2년) : 김해(금주)의 영현이 되었다가 그 후에 양산에 영속됨
1018년(고려 현종 9년) : 울산에 영현이 되면서 기장현에 감무를 둠
1304년(고려 충렬왕 30년) : 양산의 영현으로 되고 기장현에 현감을 둠
1413년(조선 태종 13년) : 기장현의 북면이 됨
1599년(조선 선조 32년) : 기장현은 폐지되고 울산군 하미면의 3동이 됨
1617년(조선 광해군 9년) : 기장현이 다시 복설되었으나 하미면으로 남음
1653년(조선 효종 4년) : 울산에서 기장현의 상북면과 중북면으로 복귀
1660년(조선 현종 1년) : 울산 하미면의 3동으로 환속
1681년(조선 숙종 7년) : 다시 기장현으로 복귀
1831년(조선 순조 31년) : 하미면으로 불림
1839년(조선 헌종 5년) : 기장현 하북면으로 복칭
1895년(조선 고종 32년) 5월 26일 : 동래부 기장군이 되어 기장군 하북면이 됨
1914년 3월 1일 : 기장군이 폐지되고 동래군 정관면이 됨. 정관면은 예림리, 달산리, 방곡리, 매학리, 용수리, 모전리, 병산리, 두명리, 월평리, 임곡리의 10개 동리로 구성됨.
1973년 7월 1일 : 동래군이 폐지되고 양산군 정관면이 됨
1994년 12월 31일 : 대통령령 제4802호로 기장군이 설치되어 기장군 정관면이 됨
1995년 3월 1일 : 기장군이 부산시에 편입됨으로써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면이 됨
2015년 9월 23일 : 정관읍으로 승격
2018년 4월 : 인구가 8만 명을 돌파함.
2008년 12월말 5,171 명이던 인구가 2009년부터 급증하기 시작하여 2009년 7월에 1만 명을 돌파하였고, 2010년 5월에 2만 명, 2012년 8월에 3만 명, 2013년 5월에 4만 명, 2013년 11월에 5만 명, 2014년 8월에 6만 명, 2015년 7월에 7만 명을 돌파하였다.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한자 : 鼎冠邑
영어의미역 : Jeonggwan-eup
분야 : 지리/인문 지리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시대 : 현대/현대
집필자 : 김기혁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속하는 읍.
[명칭 유래]
정관읍(鼎冠邑)의 명칭은 소두방이라는 지명을 ‘솥 정(鼎)’에 ‘갓 관(冠)’으로 한자화한 것이다. 정관읍의 중심인 덕산에서 매남산[매암산]을 바라보면 마치 솥을 엎어 놓은 듯도 하고 솥뚜껑을 덮어 놓은 듯도 하여 정관읍과 철마면 등 주변 주민들이 이곳을 소두방이라 하였다고 한다.
정관과 철마와 동래를 잇는 고갯길은 소두방재로 부르며 정관의 상징물이 되었고, 이 상징물을 고장의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형성 및 변천]
정관읍 일대는 삼한 시대에는 동래와 더불어 변한(弁韓) 12국 중 독로국(瀆盧國)에 속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갑화량곡현이 기장현으로 개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역사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정관읍 일대는 조선 전기 기장현에 속하였다가, 1599년(선조 32) 기장현이 폐지되며 울산군에 합속되었으며, 1681년(숙종 7) 다시 기장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동래부(東萊府) 기장현의 하북면과 하서면이었다가, 1914년 기장군이 폐지되면서 하북면과 하서면의 월평동·임곡동·두전동·부명동 4개 동을 병합하여 동래군 정관면이 되었다.
이때 정관면의 덕전동·산막동·평전동·가동 등 4개 동을 병합하여 용수리(龍岫里)로, 매곡동과 상곡동을 병합하여 매학리(梅鶴里)로, 두명동과 부명동을 병합하여 두명리(斗明里)로 개칭하였다.
1973년 동래군이 폐지되면서 양산군에 속하였다가, 1986년 양산군 동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부산광역시에 편입되며 기장군 정관면이 되었고, 2015년 9월 23일 정관읍으로 승격되었다.
[자연 환경]
정관읍은 북쪽으로 용천산(湧川山)이 있고, 남쪽으로 백운산(白雲山)[520m]·망월산[522m]·문래봉[507m]·치마산[457m]·첨마산[347m]·달음산[588m]으로 이어지는 산지가 읍의 경계를 이룬다.
정관읍의 하천 유역은 둘로 나뉘는데, 서쪽은 수영천의 상류에 해당하여 월평리(月坪里)·두명리·임곡리(林谷里)에서 발원한 하천이 서쪽으로 흘러 수영강 상류를 이루면서 모여들어 남쪽으로 흐른다.
수영천 유역 이외의 지역은 대부분 정관천 유역에 속한다.
정관천은 읍의 북쪽에 있는 상어령 일대에서 발원하여 병산리(屛山里)를 지나 남쪽으로 흐르다가 모전리(募田里) 일대에서 남부와 서부 산지에서 발원한 소하천과 합류한 뒤 동쪽으로 흐른다.
하천 유역에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있고 취락이 비교적 큰 규모로 발달해 있다.
[현황]
2020년 12월 면적은 38.21㎢이고, 인구는 3만 1,205가구에 총 8만 2,029명으로 남자가 4만 524명, 여자가 4만 1,505명이다.
정관읍은 기장군의 북단 중앙에 위치해 동쪽으로 장안읍, 서쪽으로 철마면과 양산시 동면(東面), 남쪽으로 일광면, 북쪽으로 양산시 웅상읍에 접한다.
기장군이 대부분 개발 제한 구역에 속해 있으나 정관읍에는 지방 산업 단지와 택지가 대규모로 조성되고 있어 농촌과 아파트 단지 등의 주거지와 공단이 혼재되어 있다.
기장 군내에서 제조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
정관읍의 서쪽에 부산~울산 간 고속 도로가 지나며, 동서로 좌광천을 따라 국도 제60호선인 정관로가 달린다. 방곡리(芳谷里)·예림리(禮林里)·달산리(達山里)·매학리·용수리·모전리·병산리·두명리·임곡리·월평리 등 10개 법정리가 있다
☯ 부산광역시 기장군 북부에 위치한 읍.
2000년대 중반까지는 교통 문제 등으로 개발되지 못 했던 농촌이었으나 정관신도시 개발로 인해 유명해지게 된 동네. 2008년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었으나 신도시 바깥을 벗어나면 영락없는 농촌. 읍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다.
비범한 인구증가로 2015년 9월 23일부로 읍으로 승격되었다.
10년 전인 2008년 11월과 비교해 10배 증가했으며 기장군은 현재의 증가세로 볼때 신도시 조성이 완료되는 시점에는 정관읍의 인구가 8만 6천명을 넘어설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현재 CGV, 메가박스, 물놀이 시설, 일신기독병원 등이 있어 정관내 생활에는 큰 불편함이 없다. 정관어린이도서관 근처 장미공원에 물놀이 시설이 개장되어 아이들은 무료로 이용가능하며 그외 중앙분수, 돌고래분수 등 공원이 많아 아이들을 키우기엔 최적화된 도시이다.
주변에 정관산업단지, 명례산업단지가 있어서 일자리가 부산에서 많은 지역에 속한다. 멀게는 양산, 울산에 출퇴근하는 직장인도 있다.
울산은 울주군, 남구까지는 그나마 거리가 가까운 편이지만 그 위로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위치는 부산광역시에 포함되어 있지만 부산의 최북단에 위치해 있어 오히려 양산(웅상)과 더 가깝다. 또한 부산 구 도심인 남포동으로 나가는 시간보다 양산 중심지인 양산신도시로 가는 것이 시간이 훨씬 덜 걸린다.
부산의 큰 시내로 가는 해운대구, 서면, 동래구 버스가 있지만 대기시간 포함 약 1시간이 소요된다.
자동차 이용 시에는 20~30분이 걸리고, 기름값 소모량이 부산 시내에 있을 때보다 많이 소비된다.
정관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자가용 자동차가 필수이며, 없으면 생활에 불편함을 많이 느낀다.
특히 친구와 시내에서 술을 마실 경우 자정 이전에 무조건 귀가하는 일을 자주 겪게 되며, 만약 막차 버스를 놓치게 된다면 과도한 택시비, 숙소비 등 돈을 많이 쓸 각오를 해야 한다.
아니면 익일이 휴일이라면 차라리 밤샘하고 새벽에 첫차타고 가는편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시내로 나가기에는 정관산업로(곰내터널, 개좌터널)을 지나야만 한다.
아니면 월평리방향으로 나가서 7번 국도 타거나 장안읍방향으로 나가서 14번국도를 타는 방법도 있으나 빙빙 돌아가야 하므로 추천하지 않는다.
부산의 급행버스노선 9개 중 3개(1002번, 1008번, 1010번)가 이곳을 지나간다.
부산 도시철도 정관선 계획이 있지만, 정관신도시 주민들은 언제 될 지 모르는 정관선 대신 부산 도시철도 기장선 (4호선 일광까지 연장 예정)을 일광에서 장안읍을 거쳐서 정관읍으로 넣어달라고 하고 있으나, 부산교통공사 측에서는 반송에서 정관 사이를 오가는 곳에 수익이 적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동해선 기장역까지 연장 및 환승역으로 할 계획이라고 한다.
주변에 정관산업단지, 장안산업단지, 명례산업단지가 있어서 일자리 구하기는 수월한 편이다. 단, 장안산업단지와 명례산업단지는 정관읍에서 거리가 제법 멀기 때문에 자가용 자동차가 필수이다.
버스를 통해 환승하면서 갈 수도 있지만 많이 운행하는 편은 아니다.
10년 전에 비해 땅값이 많이 상승하여 정관에 집을 사는 사람들이 많으나 어디까지나 서민들이 투자하기에 적당한 곳이지 땅값이 해운대구가 1억 오를 때 정관은 약 3000만원 가량 소폭 상승하므로 많은 금액을 생각하고 투자를 한다면 신중히 생각하여야 된다. 게다가 부산치곤 위치가 너무 애매하므로 여전히 땅값이 저렴한 편에 속한다.
월평리, 임곡리와 두명리 일부는 정관읍의 다른 곳과는 백운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월경지는 아니지만 대각선으로 뾰족하게 튀어나와있으며 철마면과 웅상 사이에 끼어있다. 교통편도 정관신도시로 가는것보다 노포역이 있는 금정구로 이동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다.
부산시민들 대다수가 죽어서 영면을 시작하는 곳도 정관읍이다.
부산추모공원과 백운공원묘원, 대정공원묘원이 이곳에 있기 때문.
즉, 부산시민들을 심판할 염라대왕은 정관읍에 거주하는 셈.
물론 선두구동에 있다가 부산추모공원 개장과 함께 정관읍으로 옮겼다고 보는 것이 낫다.
그리고 여기가 바로 천성산과 더불어 웅상을 실질월경지 신세로 만든 또다른 원흉이다.
■ 人生(인생)
人生事(인생사) 先後(선후) 緩急(완급) 輕重(경중)이 있습니다.
우리네 人生(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 주거나 누구도 대신 아파 주거나 죽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갈 수 있을 때 가지 않으면 가고 싶을 때 갈 수가 없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으면 하고 싶을 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奇跡(기적)은 아무에게나 어디서나 함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꿈과 희망을 먹고 자랐지만 성인이 되면 計劃(계획)과 實踐(실천) 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잘 생각하고 判斷(판단)해서 몸 가는 대로 行動(행동) 하고 實踐(실천)하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될 것입니다.
다만, 嚴重(엄중)한 現實(현실)앞에 우선순위를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가에 愼重(신중)을 기해서 責任(책임)과 義務(의무)를 다해야 할 것입니다.
人生事(인생사) 刹那(찰나)와 彈指(탄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 이 순간, 最善(최선)입니까?
인생의 眞理(진리)는 오직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로지 건강하세요.
가족의 健康(건강)과 가정의 幸福(행복)을 축원합니다.
늘 고맙습니다.
19991212(陰1105) SUN
Mundy Sung
■ 生活사진
생활寫眞은 일상의 사소한 발견입니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은 곧 사진의 훌륭한 소재라고 생각합니다.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 전화기나 손 안에 쏙 들어가는 똑따기 사진기만으로도 누구나 크게 공감하고 많이 동감하는 이야기를 만들 수가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더 없는 사랑과 꾸밈없는 정성으로 인시공(人時空)을 담아내어 소중한 추억으로 오래토록 간직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자 역사의 기록이다’
생활寫眞에 대하여 이렇게 거창한 말까지 앞세울 필요는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진실과 진심으로 있는 대로 보고 진정과 최선을 다하여 보이는 대로 담아내면 그것이 곧 예술이자 역사가 될 것입니다.
보다 많은 사진 인구의 저변 확대를 기대합니다.
가족의 건강과 가정의 행복을 祝願(축원)합니다.
오로지 건강하세요.
늘 고맙습니다.
20121212(陰1029) WED
Mundy Sung
■ CAMERA : SONY DSC-HX80(똑따기 사진기) & SAMSUNG SM-A102N(휴대용 전화기)
✺ 20210628 MON 08:00 수술(Left knee artificial joint surgery)후 첫 걷기 운동
■ 좌광천 첫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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