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 파베르
Homo Faber 工作的人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종을 의미하는 앙리 베르그송의 이론이다.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 호모 파베르는 문화인류학의 개념이 아니고 진화론과 철학의 개념이다. 호모(homo)는 인간종이고 파베르(faber)는 ‘만드는 사람, 일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호모 파베르는 도구와 같은 것을 만들어 사용하는 인간이다.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Creative Evolution)](1907)에서 자연환경에 적응하고 도구를 만들면서 진화하는 인간의 창조성에 주목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에 의하면 인간은 피동적으로 창조된 인간이 아닌 스스로 창조하는 능동적 창조자다. 그 창조적 진화는 도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생각하는 인간 호모 사피엔스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인류학적 개념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약 20만 년 전에 출현한 현생인류를 지칭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로운 인간종이다. 인류학과 생물학에서는 현생인류의 특징을 생각하는 존재로 설정하고 호모 사피엔스로 명명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있고, 상징을 만들며, 형이상학적으로 사유하는 현생인류의 역사를 호모 사피엔스 중심으로 기술했다. 호모 사피엔스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를 거쳐 사유하는 존재로 정리되었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사유하는 인간존재론은 인간의 본질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인간의 본질은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하여 만든 도구(tool, 道具)는 신체적 정신적 목표를 위한 수단을 말한다. 그런데 베르그송 철학에서 도구는 물질적 도구만이 아니라 논리적 도구, 이성적 도구, 추론의 도구 등 생존을 위한 모든 수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도구인(道具人) 또는 공작인(工作人)은 물질과 정신을 사용하는 인간종이다.
호모 파베르의 또 다른 대비 개념은 데우스 파베르(Deus faber)다. 데우스 파베르는 창조자 신이다. 창조자 신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을 비롯한 아브라함계 종교의 절대 신이다. 창조론에 의하면, 신이 인간과 우주자연을 창조했고 신의 뜻에 의하여 모든 것이 움직인다. 베르그송은 창조론을 비판하면서 호모 파베르를 제시했다. 호모 파베르는 창조된 인간이 아닌 창조하는 인간(Man as creator)이면서 스스로 진화하는 능동적 존재다. 인간이 생의 약동(élan vital) 속에서 창조적 진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도구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뛰어난 지성과 영리한 이성은 무엇인가? 베르그송에 의하면 도구가 인간을 진화시켜서, 뛰어난 지성과 영리한 이성을 갖도록 했다. 가령, 동물처럼 손으로 물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도구로 물고기를 잡으면서 인간의 머리가 발달했고 기억하고 경험하면서 지혜가 깊어졌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도구가 인간을 새롭게 만든다. 인간은 도구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창조적 존재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지성과 이성은 도구를 발명하고 사용하면서 발달한 것이다. 도구는 환경에 적응하고, 자연을 변형하고, 위험을 피하고, 생산을 위한 활동 과정에서 얻어진 기억과 경험이다. 인간의 의식 중에서 기억과 경험이 바로 지성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르그송은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의 차이를 강조한다. 동물은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지만, 도구를 만들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만이 도구를 만들고, 도구를 발전시키고, 도구를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생물 진화의 최종 결과일 수 있다. 그런데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는 정지된 시간이 아니라 지속의 시간을 전제로 한다. 플라톤에서 칸트에 이르는 시간관은 모두 정지된 시간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실제 시간은 한순간도 정지하지 않는다.
지속의 시간에서 (기계적) 시간, 물질, 생명, 운동 등이 변화하여 다양성(multiplicity)을 가진 세상이 구성된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생존을 생각하는 인간, 호모 파베르는 끊임없이 진화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호모 파베르는 생존의 기본적 욕구에서 형성된 인간존재의 본질이다. 호모 파베르는 이성으로 사유하는 인간이 아니라 직관으로 실천하는 인간이다. 실제로 인간은 끊임없이 무엇을 만들고 개량하면서 인류의 역사가 발전했다. 그래서 인류사를 도구의 사용에 따라서 분류한다. 구석기, 중석기, 신석기, 농경시대, 산업혁명, 디지털혁명 등은 모두 도구를 기준으로 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도구가 인간을 창조적으로 만들고 진화의 동력이라는 베르그송의 관점은 많은 비판을 받는다. 대표적인 비판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도구를 만들었다는 호모 사피엔스 중심적 관점이다.(김승환)
*참고문헌 Henri Bergson, Creative Evolution, L'Évolution Créatrice(1907), (Henry Holt and Company, 1911).
*참조 <공간>, <공예>, <기계론>, <생명>, <순수지속[베르그송]>, <시간>, <시간[베르그송]>, <운동>, <이성>, <중립진화>, <지성>, <진화론>, <창조적 진화>, <호모 루덴스>, <호모 사피엔스/현생인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