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맞아 가족은 전주 투어를 하기로 했다. 출발 아침 목이 아프단 아들을 데리고 가다 결국에는 진주 한일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치료를 받은 후 좋아져서 인근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할 수 있었다. 명절이라 도로 정체가 심했다. 전주까지 무려 7시간이 소요되었다. 지친 나머지 다시는 전주를 찾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졌다.
우리는 부용헌이란 한옥 체험집에 2박 3일을 묵을 요량으로 예매를 해 두었다. 부용헌은 전주 향교 바로 옆에 있는 아담한 집이었다. 작은 마당엔 잔디를 심어 두고 소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한켠엔 작은 분수가 있었고 전반적으로 깨끗한 집이었다. 집은 기억자로 방울 10개를 넣어 손님을 맞고 있었다. 오후 5시에 짐을 풀고 거리를 나왔다. 연휴를 맞아 많은 관광객들이 한옥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먼저 가까이 있는 향교를 들렀다. 내가 가 본 향교 중에 가장 규모가 컸다. 뜰 안에는 4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은행나무가 아직도 은행을 생산하고 있었다. 커다란 공자의 전신 초상이 걸려 있고 선비들의 이름이 적힌 책걸상이 놓여 있다.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공부하는 선비들이 묵었던 곳도 어느 곳보다 규모가 크다. 가히 이 길이 선비의 길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옛날에는 향교를 중심으로 많은 선비들이 이 길을 메웠음에 틀림없다. 잠시 선비들로 가득 찼을 거리를 걸으며 옛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한옥 거리는 작은 상점들이 있어 구경거리가 많았다. 먹거리, 구경거리 등을 안내하는 발자국이 인상적이었다. 우선 저녁을 해결해야 할 것 같다. 택시를 타고 2만원에 18가지 안주가 나온다는 용진집으로 가기 위해 막걸리 거리로 갔다. 수요미식회의 방송을 탄 효과로 다른 집은 텅 비어 있었지만 그 집만큼은 대기줄을 서고 있었다. 아들과 딸에게 줄을 서게하고는 구경을 나섰다. 다니다가 감격시대 막걸리 집의 여사장의 달콤한 말에 이끌려 그 곳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4인 가족상으로 55000원 상을 받았다. 가히 안주거리가 많다. 배터지게 먹고도 남는 다는 말이 사실이다.
다시 숙소로 택시로 이동해 와서 남부시장 야시장을 구경하였다. 야시장엔 세계 여러나라의 음식을 팔고 있었다. 모두가 짝퉁이긴 하지만 터키의 케밥까지 흉내내어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 곳에서 안주거리와 아이스크림을 사와서 또 한잔!
아침엔 주인이 차려주는 아침상을 받았다. 나물과 미역국, 그리고 조기구이까지. 생각보다 괜찮은 식사였다. 가이드 없이 여행을 하니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했다. 그냥 발길 닿는대로 가다 보니 오목대에 도착했다. 이성계가 왜구를 무치르고 서울로 가는 길에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 최근에 정자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쉴 수 있게 단장되어 있었다. 숲 속이라 시원했다. 오목대에서 나와 어디로 갈까 하다가 벽화마을로 향하는 표지판을 발견하고 만수동 벽화마을로 갔다. 옛날 달동네, 또는 꾜방동네로 불렸을 동네에 누군가의 아이디어로 벽화를 그려서 마을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동심을 느낄 수 있는 벽화 앞에서 찰칵, 이미 빈 집도 있고 이 곳을 새로운 관광지로 시도할 카페와 쉼터가 준비 중에 있었다.
벽화 마을을 나와 차길을 따라 이동하다가 한옥마을 입구를 찾았다. 명절이라 한복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오늘이 추식이라 경기전을 무료로 관람한다는 안내를 접하고 경지전을 관람하였다. 경기전은 '경사르런 터'라는 의미란다. 태조 이성계의 4대 선조가 태어난 자리.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 사람이 태어난 자리이니 경사스런 자리임에 틀림없다. 이 곳에는 어진이 전시되어 있다. 태조와 영조, 그리고 철종의 어진은 어진의 기법되로 그려졌으며 고종과 순종의 어진은 사진을 보고 그렸다고 한다. 태조는 눈과 입이 작으나 광대뼈가 튀어나온 그야말로 우락부락한 상이었으며 영조는 눈꼬리가 위로 치올라가고 귀가 큰 예리한 인상이었다. 철종은 강화도에서 풀 베는 초동이었다고 하였는는데 눈이 동그랗고 얼굴이 작은 갸름한 인상으로 연약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고종과 순종은 참으로 많이 닮았다. 그 외 어진은 현대인의 모습으로 그려 당시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어진을 모셔오는 과정을 닥종이 인형으로 만들어 전시되어 있었으며 조선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사관이 보관되어 있을 정도로 전주가 중요한 도시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경기전을 나와 전동성당을 구경하였다. 성당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성당의 연혁을 읽었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전주사람들이 천주교를 아주 일찍 받아들였음이 틀림없어 보였다. 천주신자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한 자리에 이 성당이 세워졌다 한다.
점심 때가 되어서 인근의 식당에서 전주비빔밥을 먹었다. 찬거리가 보잘것 없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전주 비빔밥이 유명세를 타고 있지만 먹지는 말라는 뜻을 알 것 같았다. 나온 음식에 비해서는 가격이 비쌌지만 맛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오후엔 전주의 유명한 덕진 공원을 보기로 했다. 택시로 이동하였다. 택시비는 5300원이 나왔다. 그 곳에서 우린 오리배를 탔다. 다리고 노를 젓는 배로 시간댕 12000원이었다. 50분을 탈 수 있다지만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20분쯤 탔을까? 그래도 우리 부부는 40분은 탄 것 같다. 남편이 요즘 다리 힘이 좋은가 보다. 공원에는 시비들이 더러 있었다. 신석정의 시가 마음에 들어 찰칵. 어쩜 그렇게 순수한 정서를 품었을까 감탄했다. 남편과 아들은 노젓기에 힘을 쏟았는지 의자에서 잠을 청하고 있다.
다시 한옥거리로 왔다.또 정처없이 걷다가 청명루, 억새꽃이 피어있는 남천을 따라 걸었다. 억새꼿이 가을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지금은 윤기가 난다. 얼마후면 잔털을 날리는 억새가 되겠지. 남천을 따라 걸러 숙소에 도착하여 오늘은 가까이 있는 떡갈비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술도 몇 병 먹었지만 가격은 5만원대. 음식 값이 싸다. 다시 밤거리를 거닐었다. 야경도 아름답다. 나는 엿과 한지 쟁반을 구입했다. 딸은 임실 요쿠르트를 사고 남편과 아들은 그냥 돌아다니다 들어왔다. 내일은 일찍 출발하가 위해 잠을 청했다. 이웃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왔구나! 아기울음소리를 들으니 딸 아이의 어린시절이 생각났다.
아침 늦게 일어나 차려준 밥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전주는 인구 50만의 도시란다. 시내의 간선도로가 편도 2차로였으며 도로 주변의 건물도 2,3층 건물이 대부분이다. 사람을 위압하는 고층 건물이 별로 없어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하늘을 많이 볼 수 있는 도시이다. 아직 인공의 힘이 덜 가해진 도시였다. 한 때 위세를 떨쳤을 도시였지만 지금은 현대적인 물살이 덜 느껴져서 슬로우도시라고 한 모양이다. 현 시대의 속도감에서 오는 피로감과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이 곳을 찾는 사람이 많나보다. 걸어서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즐거움이 있는 도시였다.
울산으로 오는 길은 소통이 잘 되어 3시간만에 도착했다. 가족과 한 방에서 자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뜻깊은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