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결혼 이야기
이영호
이 세상에 태어나 부모님의 알뜰한 보살핌과 가르침으로 성장해 가면서 남자로 또는 여자로 거듭 태어난다.
나는 군 병역을 필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28살의 나이로 중등학교 교사가 되었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으나, 경쟁사회에서 나의 희망과 포부를 더욱 넓히기 위해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더 하고 난 뒤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열심히 노력하여 학위를 마쳤다.
나의 아내는 결혼을 전제로 지인의 소개를 받아 만난 여성으로, 다방에서 큰오빠와 함께 나와 잠시 인사를 하고, 골목 음식점에 가서 큰오빠가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청주를 따라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큰오빠는 술로 나를 테스트 한것이다.
며칠 후 명동에 있는 다방에서 만나 들은 이야기인데 큰오빠가 나를 좋게 보았다고 한다.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괜찮은 음식점에 들어가려고 하니, 비싼 데 가지 말고 근처 포장마차에서 하자고 한다. 김밥에다 어묵국을 시켜 맛있게 먹었다.
그 후 퇴근 후 두세 번의 만남에서 느끼는 모습이나 태도가 너무 서민적이고 순수해 보였다. 한번은 내가 감기가 심하게 들어있는 것을 보고 약방에 가서 약을 사주고 나서 걱정하는 전화도 왔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좋은 감정들이 쌓여가고 결혼 상대자로 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 사람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필요해졌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그 당시 아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 대학시절의 이야기는 하지않거나 친구를 초대하는 자리에 고등학교 친구를 데리고 나오는 모습에 혹시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1960년에서 70년대는 가짜 대학생도 많았고 졸업생도 많았다.
중, 고등학생들은 교복과 교모를 쓰고 다닐 때, 명문대학 배지를 달고 다니면서 금품, 사기를 치고, 가짜 졸업장으로 취업하고, 농락해서 결혼하고 나니 거짓된 것이 들통이 나자, 이혼하고 소동이 벌어지는 사건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문교부에서 발부한 대학 학위증이 있어야 정식 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인정되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명문대학 졸업장은 있지만 학위증이 없다.
그래서 시간을 내어 학교에 찾아가서 확인을 해보려고 하니 학교 당국에서 거절하여, 나의 신분증을 보여주고 내가 결혼할 상대니 알아보고 싶다고 하자 그때 서야 정식으로 학위증을 받고 대학을 졸업한 것을 확인해 주었다.
그 후 명동에서 만나 생맥주집에서 한잔하면서 자기 과거를 나에게 꺼내놓는다.
칠 남매의 어려운 환경에 막내로 자라나면서 가정 형편상 언니와 오빠들은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시집을 가고 사회에 취업하여 생활하였으나, 자신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은행에 취업하기를 희망하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부모를 오라는 연락을 받고 큰오빠가 담임선생을 만나고 와서 성적이 우수하니 대학에 진학하기를 권유했단다.
그래서 큰오빠의 지시로 대학교 시험을 치게 되어 이화여대 상학과(경영학과)에 합격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대학에 가는 것은 가정형편이 좋지 않고는 엄두도 내지 못한 시절이었다. 대학 다닐 때 고등학교 동창을 만날 때는 배지를 떼고 만났다고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여자상업고등학교에 선생으로 취업이 되었다고 한다.
1950년 6.25 사변이 일어나서 1, 4 후퇴 때 경기도 ‘발안’이라는 동네에서 피난하게 되었는데 태어나서 백일이 조금 지난 때였다고 한다. 피난 도중 많은 식구가 어려움이 많아 도중에 버리고 간 것이다. 한참을 가다가 아버지가 막내 ‘창순’이는 어떻게 되었냐고 물으니 그때 그냥 가자고 하여, 그럴 수는 없다 하고 다시 찾게 되었다. 큰오빠가 뒤돌아 2킬로 정도 가서 눈 속에 포대기에 쌓여있는 것을 다시 찾아오게 되었다고 하며 흐느껴 울면서 못 마시는 맥주잔을 다 비우는 것이다.
지나간 먼 이야기지만 1·4후퇴 때 눈 속에 버려두고 그냥 가족들이 피난 갔었더라면, 지금의 아내는 없을 것이다.
나는 옆에 앉자 꼭 안아 주면서 ‘내가 지금부터 책임질 테니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부잣집에 외동딸이라며 맨몸으로 장가오라는 둥, 부모 친척들이 좋은 조건의 신붓감을 중매하는 것을 마다하고, 만난 지 한 달 보름 만에 1976년 1월 11일 12시에 전격 결혼식을 올렸다. 나의 나이 31세, 신부 나이 26세이다.
결혼하면서 2년 정도만 같이 고생하면 셋방살이는 면할 수 있으니,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아내는 임신 중에 몸이 약해 너무 힘들어해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이마도 피난시절과 어려운 환경 속에서 7남매의 막내로 자라다 보니 몸 건강이 좋지 않아 감기에 자주 걸린다고 했다.
그 후 나 혼자 벌어서 생활해야만 했다. 아내의 알뜰한 집안 살림으로 2년 만에 조그만 13평 주공 아파트를 마련하게 되었다. 꿈에 그리던 내 집을 마련하게 되자 제일 먼저 전화를 신청하며 집 전화가 개통되자 아내는 전화기에 수를 놓아 옷을 입혀 주기도 하며 그렇게 좋아한다.
정부 시책으로 딸, 아들 둘만 낳았다.
1983년 6, 25 특집으로 시작, 남북 이산가족 찾기가 KBS에서 한창 방영될 때 TV를 틀면, 남북 이산가족의 생사와 상봉하는 장면을 보고, 지난날 눈 속에서 울다 지쳐 잠이 들어있는 자신을 생각해서인지, 아버지~ 아버지~ 하면서 흐느껴 우니까, 딸이 엄마는 왜 자꾸 울고 있어 하고 물었더니 지난 이야기를 해 주어서 알았다고 한다.
이산가족 찾기 신청과 상봉의 극적인 장면은 감동과 눈물바다로 연속 138일간 생방송을 진행한 역사적 방송으로,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세월 속에 알뜰하게 열심히 노력하여 연립주택에서도 살았고, 내가 정년퇴직 할 무렵에는 43평 아파트도 마련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놓고 책 읽을 수 있는 서재가 있는 내방이 생겨 너무 좋다. 퇴직 후에는 여유를 갖고 여행도 다니면서, ‘제3 인생의 삶을 행복하게 지내자’, 정성(精誠)을 다하고 있다.
2024. 6.25.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