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7년 대한제국(大韓帝國) 선포
아관파천 이후 1897년 2월에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한 고종은 바로 그해 몸소 황제에 오르는 한편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였다. 이를 위해 고종은 1897년 9월에 이전의 남별궁에다 원구단(丘壇)을 조성하고, 10월 12일 이곳에서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때마침 <독립신문> 1897년 10월 14일자에는 원구단에서 거행된 예식장면을 자세히 그려놓고 있어서 많은 참고가 된다. 다만, 여기에서 거듭 '환구단'이라고 표기한 것은 '원구단'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는 점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논설] 광무 원년 십월 십이일은 조선 사기에 몇 만년을 지내드라도 제일 빛나고 영화로운 날이될지라. 조선이 몇쳔년을 왕국으로 지내여 가끔 청국에 속하야 속국 대접을 받고 청국에 종이 되야 지낸 때가 많이 있더니 하나님이 도우샤 조선을 자주독립국으로 만드샤 이달 십이일에 대군주 폐하께서 조선 사기 이후 처음으로 대황제위에 나아가시고 그날부터 조선이 다만 자주독립국뿐이 아니라 자주독립한 대황제국이 되었으니 나라이 이렇게 영광이 된 것을 어찌 조선 인민이 되야 하나님을 대하야 감격한 생각이 아니 나리요. 금월 십일일과 십이일에 행한 예식이 조선 고금 사기에 처음으로 빛나는 일인즉 우리 신문에 대개 긴요한 조목을 기재하야 몇 만년 후라도 후생들이 이 경축하고 영광스러운 사적을 읽게 하노라.
십일일 오후 이시반에 경운궁에서 시작하야 환구단까지 길가 좌우로 각 대대 군사들이 정제하게 섰으며 순검들도 몇백명이 틈틈이 정제히 벌려서서 황국의 위엄을 나타내며 좌우로 휘장을 쳐 잡인 왕래를 금하고 조선 옛적에 쓰던 의장등물을 고쳐 누런 빛으로 새로 만들어 호위하게 하였으며 시위대 군사들이 어가를 호위하고 지내는데 위엄이 장하고 총 끝에 꽂힌 창들이 석양에 빛나더라. 육군장관들은 금수 놓은 모자들과 복장들을 입고 은빛 같은 군도들을 금줄로 허리에 찼으며 또 그중에 옛적 풍속으로 조선군복 입은 관원들도 더러 있으며 금관조복한 관인들도 많이 있더라.
어가 앞에는 대황제 폐하의 태극국기가 먼저 가고 대황제 폐하께서는 황룡포에 면류관을 쓰시고 금으로 채책한 연을 타시고 그 후에 황태자 전하께서도 홍룡포를 입으시고 면류관을 쓰시며 붉은 연을 타시고 지내시더라. 어가가 환구단에 이르샤 제향에 쓸 각색 물건을 친히 감하신 후에 도로 오후 네시쯤하야 환어하셨다가 십이일 오전 두시에 다시 위의를 베푸시고 황단에 임하샤 하나님께 제사하시고 황제 위에 나아가심을 고하시고 오전 네시반에 환어하셨으며 동일 정오 십이시에 만조백관이 예복을 갖추고 경운에 나아가 대황제 폐하께와 황태후 폐하께와 황태자 폐하께와 황태비 전하께 크게 하례를 올리며 백관이 길거워들 하더라.
십일일 밤에 장안 안사사집과 각전에서들 색등들을 밝게 달아 장안 길들이 낮과 같이 밝으며 가을달이 또한 밝은 빛을 검정 구름 틈으로 내려 비치더라. 집집마다 태극국기를 높이 걸어 인민의 애국지심을 표하며 각대대병정들과 각처 순검들이 규칙있고 체절있게 파수하야 분란하고 비상한 일이 없이 하며 길에 다니는 사람들도 얼굴에 길거운 빛이 나타 나더라. 십이일 새벽에 공교히 비가 와서 의복들이 젖고 찬 기운이 생하였으나 국가에 경사로움을 길거워하는 마음이 다 중한 고로 여간 젖은 옷과 추움을 생각지들 아니하고 정제하게 사람마다 당한 직무를 착실히들 하더라.
십삼일에 대황제 폐하께서 각국 사신을 청하샤 황제위에 나아가심을 선고하시고 각국사신들이 다 하례를 올리더라. 이왕 신문에도 한 말이어니와 세계에 조선 대황제 폐하보다 더 높은 임군이 없고 조선 신민보다 더 높은 신민이 세계에 없으니 조선 신민들이 되어 지금부터 더 열심으로 나라 위엄과 권리와 영광과 명예를 다 애끼고 더 돋으와 세계에 제일등국 대접을 받을 도리들을 하는 것이 대황제 폐하를 위하야 정성 있는 것을 보이는 것이요 동포형제에게 정의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세계에 났던 장부의 사업이라. 구습과 잡심을 다들 버리고 문명진보하는 애국 애민하는 의리를 밝히는 백성들이 관민 간에 다 되기를 우리는 간절히 비노라."
이처럼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은 분명히 자주적 국권의식의 발로이며, 일본의 침략에 맞선 왕권회복의 표출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고종의 황제즉위에 대한 논란이 비롯된 것은 아관파천에서 경운궁으로 환어한 직후의 일로 알려진다. 이에 대해서는 찬반량론이 크게 엇갈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황제가 없으면 독립도 없다"는 논리에 따라 제국이 탄생이 이뤄지게 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황제즉위식이 있던 그 다음날인 1897년 10월 13일에는 경운궁에서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여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고종실록> 1897년 10월 11일자에는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정한 경위와 그 까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이하를 인견(引見)하였다. [의정(議政)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민영규(閔泳奎), 장예원 경(掌禮院卿) 김영수(金永壽)이다.]
상이 이르기를, '경 등과 의논하여 결정하려는 것이 있다. 정사를 모두 새롭게 시작하는 지금에 모든 예(禮)가 다 새로워졌으니 원구단(丘壇)에 첫 제사를 지내는 지금부터 마땅히 국호(國號)를 정하여 써야 한다. 대신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나라는 기자(箕子)의 옛날에 봉(封)해진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그대로 칭호로 삼았는데 애당초 합당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나라는 오래되었으나 천명이 새로워졌으니 국호를 정하되 응당 전칙(典則)에 부합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천명이 새로워지고 온갖 제도도 다 새로워졌으니, 국호도 역시 새로 정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억만 년 무궁할 터전이 실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 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삼대(三代) 이후부터 국호는 예전 것을 답습한 경우가 아직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바로 기자가 옛날에 봉해졌을 때의 칭호이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그 칭호를 그대로 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또한 '대한'이라는 칭호는 황제의 계통을 이은 나라들을 상고해 보건대 옛것을 답습한 것이 아닙니다. 성상의 분부가 매우 지당하니, 감히 보탤 말이 없습니다'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각 나라의 사람들이 조선을 한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또한 '한' 자의 변이 '조(朝)'자의 변과 기이하게도 들어맞으니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은 만년토록 태평 시대를 열게 될 조짐입니다. 신은 흠앙하여 칭송하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호가 이미 정해졌으니, 원구단에 행할 고유제(告由祭)의 제문과 반조문(頒詔文)에 모두 '대한'으로 쓰도록 하라' 하였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에 벌어진 가장 극적인 변화는 1899년 9월 11일에 한국과 청국간에 새로운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된 일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중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가 종결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은 곧 청국도 한국을 실제적으로 대등한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로써 정동의 경운궁은 '황제의 궁궐'로만이 아니라 '자주독립국'을 표명한 대한제국의 중심부로 재탄생하기에 이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