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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의경묘(懿敬廟)
정의
덕종으로 추존된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제사 지내기 위한 사묘(祀廟).
개설
의경세자는 세조의 장자로, 세자위에 있다 요절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효정묘(孝靖廟)라 칭하다가[『세조실록』 5년 9월 26일] 1471년(성종 2)에 의묘(懿廟)로 이름을 바꾸고 사시대향(四時大享)을 지냈다[『성종실록』 2년 12월 22일]. 1475년(성종 6) 의경세자를 회간대왕(懷簡大王)으로 추존하고 경복궁 내 별전인 연은전(延恩殿)으로 위패를 옮겼다[『성종실록』 6년 2월 26일]. 이후 의묘는 회간대왕의 영정(影幀)·시고(諡誥)·고명(誥命)을 안치하는 곳이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의경묘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위치한 덕수궁 지역 내에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조선시대 행정 구역은 한성부 남서(南署) 명례방(明禮坊)이다. 명례궁 자리는 이전에 연경궁(延慶宮)이었는데, 명례궁은 그중에서도 연경궁의 후원에 있었다.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되어 그의 위패가 연은전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의경묘는 세조의 장남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요절한 의경세자의 묘호(廟號)다. 1459년(세조 5)에는 사우(祠宇)는 효정묘(孝靖廟), 무덤은 의묘(懿墓)라고 하였다. 예종 사후에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왕위에 오르면서 1472년(성종 3) 사우를 왕실의 별궁인 연경궁 후원에 세웠다. 제사를 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이 맡게 되면서 연경궁도 월산대군에게 하사되었다. 즉 연경궁은 왕자의 제택이면서 사묘가 있는 제사궁(祭祀宮)이 된 것이다.
1475년 2월 3일, 의경세자를 회간대왕으로 추존하여 분황제(焚黃祭)를 행한 후, 이전의 위패는 북쪽 기단 아래에 묻고 새로운 위패를 써서 경복궁 내 연은전에 옮겨 봉안했다. 연은전에서의 의례는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따랐다. 위패를 연은전에 모시고 종묘에 부묘한 후, 연경궁의 의묘는 회간대왕의 영정·시고·고명을 안치하는 곳이 되었다. 의묘의 앞길에는 신문(神門)과 하마비(下馬碑)를 세웠다.
의묘의 훼철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모른다. 임진왜란 시 월산대군의 제택이 행궁으로 사용되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그 기능을 상실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의령원(懿寧園)
정의
조선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
개설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자리하고 있다. 1752년(영조 28)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장된 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해당하는 양주 안현(鞍峴)으로, 당시에는 의소묘(懿昭墓)라고 불렀다. 1870년(고종 7)에 의령원으로 원호를 고쳤으며, 1949년 6월 7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조성 경위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홍씨의 적장자로,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다. 1751년(영조 27) 5월 13일에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세 살이 되던 해인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통명전(通明殿)에서 죽었다. 죽은 지 석 달 만인 5월 12일에 양주 안현 남쪽 기슭에 예장하고 묘는 의소묘라 불렀다.
조성 상황
의령원은 세손 묘의 격식을 갖추고 있어 매우 간소하다. 봉분 사방에 호석과 양석 각 2개씩이 설치되어 있으며, 상계에는 표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이 있다. 표석은 영조가 직접 쓴 것이다. 하계에는 가운데에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마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변천
의소묘는 편의에 따라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했기 때문에, 묘역의 숲에 사는 호랑이와 표범이 백성들의 걱정을 사는 경우가 있었다. 1779년(정조 3)에는 이를 염려하여 묘역의 수목을 베어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1870년(고종 7)에는 모든 능·원·묘의 정자각을 일제히 수개하였는데, 이때 의소묘의 정자각도 개수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원호를 의령원으로 고쳤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정자각 내에 설치한 신욕(神褥)과 좌면지(座面紙)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마련하여 배설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과 효장묘(孝章墓), 문효묘(文孝墓) 등을 모두 서삼릉 내로 옮겼는데, 의령원은 해방 이후인 1949년에 효장묘 뒤쪽으로 이장되었다.
관련 사항
영조는 의소세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원사(奉元寺)를 의소묘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특교(特敎)를 내려 용인의 땅을 사위전(寺位田)으로 획급하였다[『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참고문헌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Ⅴ. 문화사적』,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8.
의릉(義陵)
정의
조선 태조의 조부인 도조이춘의 능.
개설
도조(度祖)이춘(李椿)의 아버지는 익조(翼祖)이행리(李行里)로, 원나라의 천호(千戶) 벼슬을 지냈다. 어머니는 등주(登州)의 호장(戶長)최기열(崔基烈)의 딸로, 이행리가 첫 부인 손씨(孫氏)의 사후에 맞이한 두 번째 부인이었다. 이춘은 아버지의 천호 관직을 계승하였으며, 원나라로부터 발안첩목아(勃顔帖木兒)라는 몽골식 이름을 받았다.
박광(朴光)의 딸과 혼인하여 이자흥(李子興)과 환조(桓祖)이자춘(李子春)을 낳았고, 얼마 뒤 박씨(朴氏)가 죽자 쌍성총관(雙城總管)의 딸 조씨(趙氏)와 재혼한 뒤 의주에서 화주(和州), 즉 함흥으로 옮겼다. 1342년(고려 충혜왕 3) 7월 24일에 세상을 떠나 함흥부(咸興府)에 안장되었다[『태조실록』 총서]. 1392년(태조 1) 조선을 개국한 태조가 4대조의 존호를 정할 때 도왕(度王)으로 추존되었으며, 1411년(태종 11) 종묘에 올리는 존호를 도조로 하였다.
조성 경위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직후 아들 이방원을 동북면에 보내, 4대 조상의 능에 제사를 지내고 왕위에 오른 일을 고하게 하였다. 이때 각 능의 능호를 정해 올렸는데, 조부인 도조의 능은 ‘의릉’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8일].
조성 상황
의릉은 함흥부 동쪽 14리 지점인 예안부(禮安部) 운천동에 위치하였는데, 임좌병향(壬坐丙向) 즉 동남쪽을 향하였다[『세종실록』 지리지 함흥부]. 1392년(태조 1)에는 능지기 권무(權務) 2명을 두고, 능을 지키는 민호를 몇 가구 두고 재궁을 세웠다[『태조실록』 1년 10월 28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표석을 세웠다고 했다. 19세기 초반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중에서 의릉을 그린 도형에는 곡장과 혼유석, 장명등, 문무인석, 마석(馬石), 정자각, 수라간, 재실, 홍살문, 샘, 석비(石碑)가 갖추어져 있다.
변천
조선후기에는 석물과 능상을 지속적으로 보수하였다. 1746년(영조 22), 1791년(정조 15), 1806년(순조 6)에 각각 석물을 수개하였으며, 1858년(철종 9)에는 능상을 수개하였다. 1873년(고종 10)에도 능을 보수하였다.
관련 사항
도조의 비 박씨는 1392년에 경비(敬妃)로 추존되고, 이듬해에는 능호를 순릉(純陵)으로 정하였다[『태조실록』 2년 9월 18일]. 1411년(태종 11) 경순왕후(敬順王后)로 추존되었다. 순릉은 의릉과 떨어져 있었는데, 함흥부 동쪽 33리 거리인 예안부 대구지동(大仇只洞)의 감산(坎山)에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조성되었다[『세종실록』 지리지 함흥부].
오늘날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태조의 4대조 능과 관련 사적지를 그린 『북도각릉전도형(北道各陵殿圖形)』이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는 목조(穆祖)와 효공왕후(孝恭王后)의 덕안릉(德安陵), 익조의 지릉(智陵), 정숙왕후(貞淑王后)의 숙릉(淑陵), 도조의 의릉, 경순왕후(敬順王后)의 순릉, 환조(桓祖)와 의혜왕후(懿惠王后)의 정화릉(定和陵)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왕실의 행사그림과 옛지도』, 민속원, 2005.
의릉(懿陵)
정의
조선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의 능.
개설
경종이 1724년(경종 4) 8월 25일에 승하하자, 양주 남쪽 중량포 천장산(天藏山) 언덕을 택하여 능침을 조성하고 능호를 의릉이라 하였다. 1730년(영조 6) 10월에는 선의왕후어씨를 합장하였다. 두 능침은 같은 언덕에 상하(上下)로 배치되었는데, 여주에 위치한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능인 영릉(寧陵)과 비슷하다.
조성 경위
경종은 재위 4년 만인 1724년 8월 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였다. 그날 우의정 이광좌(李光佐)를 총호사(摠護使)로, 오명준(吳命峻)·심수현(沈壽賢)·이사상(李師尙)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임명하였다. 9월 16일에 산릉 터를 간심한 결과, 총호사이광좌는 옛 영릉(寧陵)을 주장하고 국장도감(國葬都監) 당상(堂上)김일경(金一鏡)과 이사상 등은 중량포를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옛 영릉이 건원릉(健元陵) 경역 내에 있으며 산세도 매우 좋으나 천릉한 옛터에 새 능을 조성한 사례가 없으므로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는 이유에서 중량포를 다시 살펴보게 한 뒤 그곳을 능지로 선택하였다. 9월 24일에 산릉을 조성하기 시작했으며, 산릉이 궁궐에서 가까워 12월 16일에 발인하여 당일에 재궁을 현궁에 안치하였다. 봉분을 만들고 그달 24일에 공역을 마쳤다.
산릉의 제도는 부왕 숙종의 능인 명릉(明陵)의 전례를 따랐다. 능상의 석물 및 봉분의 규모를 모두 명릉과 같게 하였으며, 정자각도 명릉과 마찬가지로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총 8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또 정자각의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을 각각 3칸 규모로 조성하였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는 선의왕후가 경희궁 어조당에서 승하하였다. 당일에 우의정이집(李㙫)을 총호사로 임명하고 산릉도감 당상으로 신사철(申思喆)·서명균(徐命均)·어유룡(魚有龍)을 임명하였다. 7월 4일에는 산릉 터를 간심하고, 이튿날 의릉의 하혈(下穴)로 결정하였다[『영조실록』 6년 7월 5일]. 선의왕후의 능은 왕릉과 같은 언덕 80자 정도 아래쪽에 조성되었다. 그런데 1724년(경종 4)에 경종을 의릉에 장사 지낼 때 이미 선의왕후는 의릉의 왼편에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곳에 묻히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고 한다. 능침 조성 공사는 8월 6일에 시작되었으며, 10월 19일에 발인하여 당일에 재궁을 현궁에 안치하였다[『영조실록』 6년 10월 19일].
선의왕후의 능침 역시 능상의 제도는 명릉을 따랐으며, 정자각·비각·수라간·수복방·재실 등은 왕릉을 조성할 때 이미 갖추었으므로 별도로 건설하지 않았다. 의릉은 1724년에 경종을 위해 처음 조성되고, 1730년에 선의왕후를 같은 언덕에 안장함으로써 상하로 배치된 두 개의 봉분이 완성되었다.
변천
1962년에는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내에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왕릉의 우측 능선을 깎아 축구장을 만들고 청사를 세웠다. 1970년 5월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나, 1972년 정자각과 홍살문 사이에 인공 연못을 만들어 조경 시설을 설치하고, 1973년에 고종의 아들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묘소인 영원(英園)을 조성하면서 재실을 이건하는 등의 훼손이 계속되었다. 1995년에 중앙정보부가 이전하면서 토지가 반환되어 능역을 정비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경종]의릉산릉도감의궤([景宗]懿陵山陵都監儀軌)』
『[선의왕후]의릉산릉도감의궤([宣懿王后]懿陵山陵都監儀軌)』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문화재청, 『의릉 능제복원 기본 및 실시설계』, 문화재청, 2008.
의묘(懿廟)
정의
성종(成宗)의 생부인 덕종(德宗)의 묘호(廟號) 또는 그를 모신 사당.
개설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의 생부이며 세조(世祖)의 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숭하고 1471년(성종 2)에 정한 묘호(廟號)이다. 처음의 이름은 의경묘(懿敬廟)였다.
연원 및 변천
의경세자는 처음에 의경왕(懿敬王)이라 했다가 다시 추존(追尊)하여 시호(諡號)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이라 했다. 그의 묘호는 처음에 의경묘(懿敬廟)라 칭하였으나 다시 의묘(懿廟)로 정해졌다.[『성종실록』 2년 12월 22일] 의묘는 연경궁(延慶宮)의 후원에 세우고 연경궁은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에게 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3년 12월 2일] 의경묘가 완성된 것은 1473년(성종 4)의 일로서 여기에 의경왕의 신주와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월산대군 이정이 제사를 받들어 올렸다.[『성종실록』 4년 9월 20일]
의묘 조성의 도제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제조는 행상호군(行上護軍) 김개(金漑), 전의군(全義君) 이덕량(李德良), 의묘 조성 낭청(懿廟造成郞廳)은 행부호군(行副護軍) 김작(金碏), 행부사직(行副司直) 윤해(尹垓)ㆍ남칭(南偁)ㆍ이계정(李繼楨) 등이었다. 성종은 월산대군 이정이 의묘를 봉사(封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 아들에게 흥록대부(興祿大夫), 손자에게는 가덕대부(嘉德大夫), 증손에게는 승헌대부(承憲大夫), 현손 이하는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하도록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존할 때에는 성종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의 뜰에 나아가 영성부원군 최항(崔恒)을 보내 옥책(玉冊)을 의경묘에 올렸다. 또 영의정 윤자운(尹子雲)을 보내 금보(金寶)를 의경묘에 올리도록 하고 향례(享禮)를 행하였다.[『성종실록』 3년 1월 24일]
의묘 제향을 지낼 때 처음에는 땅에 울창주를 붓는 관례(祼禮)를 행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이 옳지 않다 하여 1473년 9월의 제사부터 관례를 행하는 것으로 정했다.[『성종실록』 4년 9월 7일]
1473년(성종 4)에는 성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의경묘에 제사지냈는데, 음악은 고취(鼓吹)를 쓰고 희생(犧牲)은 대뢰(大牢)를 썼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월산대군 이정의 집에서 음복연(飮福宴)을 행하였다.[『성종실록』 4년 11월 1일]
1475년(성종 6)에는 예조의 청에 따라 의묘에 분황제(焚黃祭)를 지내도록 했으며,[『성종실록』 6년 1월 23일] 의묘의 분황제에 쓰는 희생은 대뢰를 쓰도록 하였다.[『성종실록』 6년 2월 3일] 덕종의 시책(諡冊)은 1475년(성종 6) 2월에 올렸는데 성종이 면복을 입고 인정전의 계단 위에 나아가 올렸다. 이때의 초헌관은 월산대군 이정이, 아헌관은 인산부원군 홍윤성(洪允成)이, 종헌관은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가 담당하였다.
의묘에 제향을 올릴 때의 음악은 계상(階上)에 편성되어 등가(登歌)와 헌가(軒架)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악대로만 연주하였다. 왕이 친히 올리는 친향의묘의(親享懿廟儀) 때에는 영신(迎神)ㆍ초헌ㆍ아헌ㆍ종헌ㆍ송신례 절차에서 음악을 연주했는데, 가야금ㆍ거문고ㆍ당비파ㆍ향비파ㆍ노래ㆍ방향(方響)ㆍ해금ㆍ대금ㆍ퉁소ㆍ교방고ㆍ장고ㆍ피리ㆍ당적(唐笛) 등의 악기를 편성하여 제례악을 연주하였다.
참고문헌
『國朝五禮儀』 『國朝五禮序例』
익릉(翼陵)
정의
조선 숙종의 원비(元妃) 인경왕후(仁敬王后) 김씨(金氏)의 능.
개설
인경황후는 1680년(숙종 6)에 천연두를 앓다가 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이에 능호를 익릉(翼陵)이라 하고 전호를 영소전(永昭殿)이라 하였다. 익릉은 오늘날 서오릉(西五陵)의 하나로,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 및 인원왕후(仁元王后)의 능인 명릉(明陵) 서쪽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성 경위
인경왕후가 1680년(숙종 6) 10월 26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자 이튿날 민정중(閔鼎重)을 총호사(摠護使)로, 박신규(朴信圭)·이익상(李翊相)을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로 삼고, 여성제(呂聖齊)에게 국장도감(國葬都監)의 일과 겸하여 산릉도감 제조의 일을 맡겼다[『숙종실록』 6년 10월 27일]. 여러 곳을 간심한 끝에 11월 15일에 고양의 경릉(敬陵) 경내에 정남향에서 약간 서쪽으로 향하는 축좌미향(丑坐未向)의 언덕을 선택하고 산릉의 공역을 시작하였다[『숙종실록』 6년 11월 15일].
본 공역에서 주로 전례로 삼은 것은 1674년(숙종 즉위) 가을에 이루어진 숭릉(崇陵) 조성의 사례이다. 궁궐에서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한 재궁을 봉안하기 위한 영악전(靈幄殿)을 별도로 건립하지 않고 정자각을 이용하도록 하였으며, 정자각의 규모는 8칸으로 정전 3칸에 좌우 익각을 갖추고 배위청을 3칸으로 하여 확대하였다. 이는 세조광릉(光陵)의 정자각제도를 따른 것이다.
1674년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동구릉에서 여주로 천릉하면서 정자각을 8칸으로 조성하였다. 이후 현종의 숭릉과 인경왕후 익릉, 장렬왕후의 휘릉(徽陵), 인현왕후의 명릉, 경종의 의릉(懿陵)에 이르기까지 정자각은 같은 규모로 조성되어 이 시기의 특색을 형성했다. 익릉의 정자각은 오늘날에도 정전의 좌우 익각이 그대로 남겨져 있어 17세기의 특색을 드러내고 있다. 숭릉 정자각이 팔작지붕으로 처리된 것과는 달리 맞배지붕으로 하고 좌우에 풍판을 달아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도록 하였다. 팔작지붕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길고 굵은 목재를 사용하는 추녀를 쓰지 않기 위한 계획이었다.
정자각 좌우에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각 3칸 규모로 조성되었으나,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재실은 안향청·집사청·전사청·참봉청 등으로 구분하여 공간을 마련하였다. 안향청은 숭릉의 전례에 따라 온돌 2칸에 마루 4칸으로 구성하여 총 6칸에 팔작지붕 형태로 조성하였다. 집사청은 온돌 4칸, 마루 2칸, 중문 1칸으로 총 7칸 규모이며, 참봉청은 전퇴를 포함하여 12칸 반 규모였다.
본래 수릉관과 시릉관은 가재실에 거처하면서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관례였으나, 숭릉의 전례를 따라 가재실의 규모를 40여 칸으로 줄여 조성하였다. 재실은 소실되어 남아 있지 않지만, 『익릉지(翼陵誌)』에 수록된 재실의 간가도(間架圖)를 통해 그 구성과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1681년(숙종 7) 2월 19일에 빈전을 열고 다음 날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했으며, 같은 달 22일에 현궁에 재궁을 안치하여 장사 지냈다[『숙종실록』 7년 2월 22일].
참고문헌
『[인경왕후]산릉도감의궤([仁敬王后]山陵都監儀軌)』
『익릉지(翼陵誌)』
김왕직, 「조선왕릉 8칸 정자각 고찰」,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신지혜,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 『건축역사연구』65집, 2009.
정정남, 「조선시대 산릉의 가재실과 정재실의 운영」, 『한국건축역사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정정남, 「조선후기 산릉의궤를 통해본 정자각의 도배와 포진」, 『한국건축역사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2008.
인릉(仁陵)
정의
조선 순조와 비 순원왕후(純元王后)김씨(金氏)의 합장릉.
개설
오늘날 서울특별시 서초구 대모산(大母山) 남쪽 기슭, 헌릉(獻陵)과 같은 경역에 자리하고 있다. 1834년 11월에 순조가 승하하자 능호(陵號)를 인릉이라 하였으며, 1857년(철종 8) 8월에 순원왕후가 승하한 뒤 순조의 능침 동쪽에 합장하여 하나의 봉분을 조성하였다. 능상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고, 봉분 주변에는 3면에 곡장(曲墻)을 설치했으며, 양석과 호석을 2쌍씩 배치하였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두었는데, 혼유석마저 하나로 합설되어 있어 겉으로 보기에는 단릉(單陵)처럼 보인다.
조성 경위
순조는 1834년(순조 34) 11월 13일, 경희궁의 정침인 회상전에서 재위 34년 만에 승하하였다. 같은 달 19일에는 능호를 인릉으로 정했으며, 산릉을 조성하기 위해 좌의정 홍석주(洪奭周)를 총호사(摠護使)에 임명하여 산릉도감(山陵都監)을 설치하였다. 12월 4일부터 산릉의 터를 찾기 위해 세 차례의 간심(看審)의 절차를 진행하여 한 달여 시간을 들여, 결국 12월 28일에 파주 옛 장릉(長陵) 좌측 언덕으로 결정하고 봉표를 세웠다. 산릉의 공역이 시작되자 봉분이 위치할 곳에 옹가와 수도각을 세우고 정자각의 터 닦는 공사와 석재 반입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듬해인 1835년(헌종 1) 2월 25일에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하교에 따라 작업을 중단하고, 산릉 터를 교하에 자리한 장릉의 좌측 언덕으로 옮겨 능침을 조성하고 4월 19일에 장사를 지냈다[『헌종실록』 1년 4월 19일]. 어렵게 터를 정하고 인릉이 완공되었으나, 풍수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결국 1855년(철종 6) 천봉을 결정하였다. 천릉을 총괄하는 총호사의 직임은 김흥근(金興根)이 맡았다. 이듬해 10월 11일에 현재의 위치인 대모산 아래 헌릉의 오른쪽 언덕에 옮겨 모셨다[『철종실록』 7년 2월 22일].
정자각·비각·수라간·수복방·재실 등을 지었는데, 수릉(綏陵)을 천릉한 뒤 남은 정자각의 부재와 옛 인릉의 비각 및 재실의 철거 목재를 이용하여 천릉 과정에서 생겨날 민력 고갈과 목재 수급의 어려움을 극복하였다. 또 새 인릉 터 주변에는 옛 희릉의 빈터가 있었는데, 희릉을 천봉한 뒤 묻어 둔 석물을 발굴하여 양석 1쌍과 마석 1쌍, 장명등의 덮개돌, 망주석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망대구(望臺臼) 1쌍을 옮겨 와 재사용하였다. 천봉을 마치고 정자각 동쪽에 표석을 세웠는데, 철종이 직접 글씨를 써서 음각하였다[『철종실록』 7년 8월 25일]. 그 뒤 1899년(광무 3)에 순조가 숙황제(肅皇帝)로 추상되면서 비석을 세워, 오늘날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1857년(철종 8) 8월 4일에 순원왕후가 창덕궁 양심합에서 승하하자 순조의 능침 동쪽에 합부하였는데, 이로써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으로 완성되었다. 순원왕후의 능침을 조성하기 위해 조직된 산릉도감은 총호사를 맡은 우의정조두순(趙斗淳)이 총괄하였다. 그런데 이때 봉분을 합해 하나로 조성하였으므로, 능침 주변에 배치하는 석물과 혼유석 등은 모두 순조를 위해 배설한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여러 건물 또한 이미 순조의 제사를 모시던 정자각 등이 있으므로, 삼년상을 치를 동안 사용할 가정자각과 가재실 등의 임시 건물만 건립하였다. 따라서 순원왕후가 합장된 뒤에도 1856년(철종 7)에 천봉하면서 조성한 모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성 상황
오늘날에는 정자각 남쪽에 위치한 수라간과 수복방이 소실되었으며, 안향청과 전사청도 사라지고, 재실만 정면 6칸 규모로 남아 있다. 그러나 재실마저도 한국전쟁 이후에 이루어진 농지 개간으로 인해 능역에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순원왕후]인릉산릉도감의궤([純元王后]仁陵山陵都監儀軌)』
『[순조인릉]산릉도감의궤([純祖仁陵)山陵都監儀軌)』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仁陵薦奉山陵都監儀軌)』
문화재청, 『순조 인릉 정자각과 비각 수리보고서』, 문화재청, 20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능묘』,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2010.
인수궁(仁壽宮)
정의
원래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이었으나 이후 후궁들의 거처가 되면서 비구니원으로 변모된 궁방.
개설
인수궁(仁壽宮)은 원래 태종이 세자로 있을 때 거처하던 곳인데, 선왕의 후궁들이 거처하면서 점차 불당으로 변모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명종이 기존의 인수궁을 수리하여 선왕 후궁들의 거처로 삼으면서 인수궁 내에 정업원(淨業院)을 설치하였다. 이후 인수원으로 불리다가 1661년(현종 2) 자수원(慈壽院)과 함께 철폐되었다.
변천 및 특징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인수궁은 원래 태종이 세자 시절 거처하던 곳이었다. 이후 인수궁은 선왕의 후궁들이 머무는 궁방으로 유지되었다. 태종이 세상을 떠난 직후 태종의 후궁들은 일제히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세종실록』 4년 5월 20일], 이때부터 인수궁은 비구니가 된 왕실 여인들의 궁방이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수궁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516년(중종 11) 중종이 이명필(李明弼)의 집을 인수궁과 서로 바꾸어 질병가(疾病家)로 삼으라고 명한 기사이다[『중종실록』 11년 1월 9일]. 질병가는 왕실의 후궁이나 나인 등이 병이 들었을 때 요양을 하는 시설을 말한다. 이 기사를 통해 인수궁이 왕실 비빈들의 피접처(避接處)로 이용돼 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수궁은 문정왕후의 섭정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1545년(명종 즉위) 인수궁을 중창하면서 연산군에 의해 폐사된 정업원을 인수궁 내에 다시 설치하도록 명하였다[『명종실록』 1년 7월 26일]. 인수궁의 중창은 사실상 비구니원의 설치를 위한 토목 공사였기 때문에 조정의 신하들은 인수궁 토목 공사를 중지할 것을 줄기차게 호소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인수궁 공사를 예정대로 강행해 1551년(명종 6) 정업원 터에 인수궁을 완공하고, 인수궁의 부속 불당을 정업원이라 칭하였다.
조정 신료들의 반대 속에 완공된 인수궁은 이후 왕실 비구니원으로 기능하면서 유생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566년(명종 21)에는 유생들이 인수궁에 불을 지르려다 적발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명종실록』 21년 4월 20일]. 선조가 즉위한 직후에도 유학자 관료들은 인수궁의 혁파를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선조는 대왕대비인 인종비 인성왕후와 대비인 명종비 인순왕후가 반대한다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절했다. 한편 1574년(선조 7) "처음에는 이름을 인수궁이라 하였다가 그 뒤에 정업원으로 불렀다."[『선조실록』 7년 5월 20일]는 기록으로 볼 때 선조대에는 인수궁이 아예 정업원으로 칭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인수궁은 임진왜란의 발발 후 불에 타 없어졌는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인수궁에 관한 내용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런데 조선전기의 인수궁 건물은 사라졌지만 비구니원으로서의 인수궁은 계속 유지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인수궁 비구니들은 창덕궁 인근에 초막을 짓고 인수원이라는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이후 인수궁은 1661년(현종 2) 자수궁과 함께 혁파되었다. 현종은 비구니원으로 출가한 왕실 비빈이 한 명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거하도록 명했다[『현종개수실록』 2년 1월 5일]. 인수원과 자수원이 철폐되면서 인수원의 자재는 옮겨다 질병가를 짓는 데 사용하도록 하고, 자수원의 재목과 기와는 성균관의 학사를 수리하는 데 쓰도록 하였다[『현종개수실록』 5년 윤6월 14일]. 이때는 인수궁 대신 인수원이라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인수원’이라는 명칭이 나오는 것은 이때의 기록이 유일하다. 또한 조선후기의 승려인 백곡처능이 현종에게 올린 상소문 「간폐석교소(諫廢釋敎疏)」에서도 인수원과 자수원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처능은 「간폐석교소」에서 두 비구니원의 철폐를 반대하며 억불 정책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인수궁은 선조대 이후 정업원으로 불리다가 점차 인수원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김용국, 「자수궁과 인수궁」, 『향토서울』, 서울특별시, 1966.
탁효정, 「조선시대 왕실원당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2.
작헌례(酌獻禮)
정의
사당이나 능원에서 술잔을 올리는 예식.
개설
작헌례(酌獻禮)는 사당이나 능에 나아가 술잔을 올리는 간략한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은 정기적인 제향 이외에 성현(聖賢)이나 조상을 알현할 때 베푸는 의식이다. 유교에서 제향은 정해진 시간에 규정된 법식에 따라 거행해야 하는 의식이다. 정해진 시간을 벗어나 자주 제향을 올리는 것을 번독(煩黷)한 것이라며 경계하였다. 그러나 제향을 벗어나 신과 인간의 만남의 계기는 다양하게 존재하였다. 이러한 만남은 제향보다 단순하면서도 일정한 형식을 필요로 하였다. 작헌례는 이러한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의식이다. 작헌례는 희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간략한 제수(祭需)와 술잔을 한 번만 올리는 단헌(單獻)의 절차를 특징으로 하였다. 조선후기로 갈수록 선조의 사당을 자주 찾는 것은 효의 실천이란 의식이 확산되면서 작헌례의 시행은 빈번해졌다.
연원 및 변천
작헌례는 왕 또는 왕세자의 거동과 관련이 있다. 조선전기 작헌례의 대표적인 사례는 성균관문묘(文廟)의 성현에게 거행하는 것이었다. 『국조오례의』에 실려 있는 ‘왕세자작헌문선왕입학의(王世子酌獻文宣王入學儀)’나 ‘작헌문선왕시학의(酌獻文宣王視學儀)’는 입학이나 시학(視學)을 위해 성균관에 행차한 왕 또는 왕세자가 문선왕(文宣王)공자에게 예를 표하는 부수적인 의식이었다. 조선전기 대부분의 작헌례는 이렇게 문묘 의례와 연관되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면 작헌례는 선왕 또는 생친(生親)을 위한 주요한 의식으로 등장하였다. 숙종대 선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永禧殿)과 선원전(璿源殿), 영조대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모신 사당인 육상궁(毓祥宮), 정조대 사도세자를 위한 경모궁(景慕宮) 등의 건립은 인정(人情)과 효(孝)를 강조하며 왕으로 하여금 선조의 사당에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 이때마다 작헌례로 정성을 표현하였다. 특히 영희전에서는 3년에 한 번씩 왕이 직접 작헌하는 친향작헌례(親享酌獻禮)를 거행한다는 규정까지 마련하였다. 이렇게 작헌례는 복잡하고 권위적인 제향에서 벗어나 친밀한 효의 실천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 국가 제사는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아뢰고, 세 번의 술잔을 드리고, 음복주를 마시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이다. 그러나 작헌례는 이 모든 절차를 생략하고 술잔을 올리는 것으로만 이루어진 단순한 의식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술잔을 올리는 것도 한 번으로 마쳤다. 이러한 형식은 기고제와 비슷하지만 그에 비교하면 작헌례는 축문을 읽는 독축도 생략하였다. 그리고 작헌례는 제사와 달리 시간적 제한이 없었다. 제향은 한밤중에 거행하는 것이 정식이지만 작헌례는 낮 시간에도 가능하였다[『정조실록』 2년 1월 21일]. 이런 이유로 작헌례는 왕의 행차와 결합하여 더 자유롭게 설행할 수 있다.
참고문헌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장릉(長陵)
정의
조선 인조와 원비(元妃) 인렬왕후한씨의 능.
개설
1635년(인조 13)에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가 승하함에 따라 이듬해 파주 운천리에 처음 조성되었고,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승하하자 함께 안장되었다. 그러나 장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에 따라 천장 논의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1731년(영조 7) 3월에 장릉에 벌레와 뱀[蟲蛇]이 나타난 일을 계기로 마침내 1731년 3월 19일 능을 옮겨 모실 계획을 정하였고 그해 8월 30일에 오늘날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조성 경위
인조는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다. 인열왕후는 서평부원군한준겸(韓浚謙)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에 당시 능양군(綾陽君)이던 인조와 혼인하여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으로 봉해졌으며, 인조가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제17대 왕인 효종과 소현세자(昭顯世子)·인평대군(麟坪大君)·용성대군(龍城大君)을 낳았으며, 1635년(인조 13) 12월 9일 병이 위독해져 승하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침 자리도 함께 계획해 두었는데, 1649년(인조 27)에 향년 55세로 승하하여 인열왕후 곁에 묻혔다. 그러나 장릉의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는데, 결국 1731년 8월에 천장하여 오늘에 이른다[『영조실록』 7년 8월 30일].
조성 상황
장릉은 처음 조성될 당시에는 파주 소재지로부터 북쪽 20리 거리에 있었다[『인조실록』 인조대왕 묘지문]. 1636년(인조 14) 2월 13일에 총호사(總護使)홍서봉(洪瑞鳳) 등이 파주의 산릉에 가서 묘좌유향(卯坐酉向)으로 혈을 정했다.
1649년 5월 8일, 인조가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승하하자, 생전의 뜻대로 장지는 인열왕후의 능이 있는 장릉으로 정하였다. 그런데 미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장릉의 자리가 좋지 않다는 상소가 올라왔다[『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하지만 장릉은 인조가 생전에 미리 정해 둔 장지였기 때문에 쉽게 바꿀 수 없었다.
1649년(효종 즉위) 7월부터 가정자각(假丁字閣)을 짓기 시작해, 그해 9월 20일에 묘좌유향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다[『효종실록』 즉위년 9월 20일]. 인조는 인열왕후의 국장 때 자신의 사후 능침 자리를 고려하여, 곡장(曲墻)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고 정자각도 중앙에 짓게 하였다. 이는 또한 능역을 새로 조성하느라 백성을 거듭 번거롭게 하는 일을 방지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한편 장릉이 길하지 않다는 주장과 천장에 관한 논의는 인조의 생전에도 있었는데, 이는 인조의 국장을 치른 뒤에도 여전하였다. 1687년(숙종 13) 10월에는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의 아들 영풍군(靈豊君) 이식(李湜)이 상소를 올려, 장릉 풍수의 흠을 말하고 길한 자리를 다시 정하도록 청했다. 이듬해 9월 13일에 다시 장릉의 풍수에 결점이 있다는 상소가 올라오자, 결국 천장을 주장하는 자들을 모두 벌하였다.
그에 따라 장릉의 천장 문제는 마무리되는 듯했으나, 40여 년 뒤인 1731년에 다시 논의가 진행되었다. 장릉의 능침 사이에 뱀이 출몰한다는 소식과 더불어, 세간에서는 능을 처음 개광할 때 뱀이 출몰했으나 당시 총호사였던 김자점(金自點)이 이를 숨기고 그대로 능을 봉했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아 그해 3월 16일에 천릉 문제를 논의하게 된 것이다. 그 뒤 실제로 신하들이 장릉을 시찰했을 때도 뱀이 출몰하고, 석물이 갈라지는 변고를 보게 됨에 따라 결국 천장하기로 결정하였다. 5월 28일에는 총호사홍치중(洪致中) 등이 새 능지를 살피고 돌아와, 능지 주변의 형세와 혈(穴) 자리가 매우 좋다고 아뢰었다[『영조실록』 7년 5월 28일].
새 장릉은 합장릉의 제도를 따랐는데, 치수가 맞지 않는 병풍석·난간석·혼유석·장명등 등만 새로 만들고 나머지 석물은 옛 능에서 옮겨 와 그대로 사용하였다. 원경 및 석물의 배설은 영릉(英陵)을 따르고, 방위는 이전과 같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8월 30일에 마침내 천장을 거행하였다.
변천
장릉이 천장되기 전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능의 흙을 파헤치는 일이 있었다. 그 뒤 큰비에 곡장이 무너지기도 하고, 1730년(영조 6)에는 능 위에 불이 나기도 했다. 천장 이후에는 석물이 손상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지만[『영조실록』 8년 3월 3일], 큰 변고는 없었다. 그러다가 1838년(헌종 4) 12월에는 재실이 불에 타는 사건이 일어났고, 1914년 11월에는 홍살문이 바람에 전복되어 개건하였다. 1974년과 1985년에 각각 재실을 보수하였으며, 1999년에는 능역의 병풍석과 재실 일곽을 보수하였다.
관련 사항
1749년(영조 25)에 영조는 장릉의 동북쪽 기슭을 자신의 산릉 터로 정하였다[『영조실록』 25년 2월 10일]. 1731년에 장릉을 천장할 때 이미 내맥에 ‘왕(王)’ 자의 형상이 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왕을 장사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만큼 좋은 자리임을 확인한 바 있었다. 이처럼 영조는 장릉 경내에 묻히길 원했으나, 실제로는 동구릉 내에 안장되었다.
장릉을 천장한 기록은 1789년(정조 13)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隆陵)을 경기도 양주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장할 때 참고가 되었다.
참고문헌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인조대왕산릉의궤(仁祖大王山陵儀軌)』
『인조대왕천릉등록(仁祖大王遷陵謄錄)』
『장릉도이(長陵圖而)』
『장릉선생안(長陵先生案)』
『장릉제기년한책(長陵祭器年限冊)』
『장릉지(長陵誌)』
『장릉직원이동부(長陵職員移動簿)』
『장릉천봉등록(長陵遷奉謄錄)』
『장릉천봉시분원일기(長陵遷奉時分院日記)』
『장릉천봉시산능도감의궤(長陵遷奉時山陵都監儀軌)』
『장릉천봉의주등록(長陵遷奉儀註謄錄)』
『천릉도감부청의궤(遷陵都監部廳儀軌)』
『천봉도감등록(遷奉都監謄錄)』
『천장등록(遷葬謄錄)』
장릉(章陵)
정의
조선 추존왕 원종과 비 인헌왕후(仁獻王后)구씨(具氏)의 능.
개설
원종은 1580년(선조 13) 6월 22일에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1587년(선조 20년)에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다. 1615년(광해군 7) 왕위에 불안을 느낀 광해군에 의해 아들 능창군(綾昌君)이 유배를 당했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 뒤 병이 깊어져 1619년(광해군 11)에 4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경계와 재촉 때문에 장례마저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임시로 급히 장사하였다. 1623년에 인조가 반정으로 즉위한 뒤 정원군을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이었던 구씨는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진봉하고 계운궁(啓運宮)이란 궁호를 내렸다.
인헌왕후는 1626년(인조 4) 1월 경희궁 회상전에서 49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김포 성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이때 인조는 원종의 묘를 흥경원(興慶園)으로, 인헌왕후의 묘는 육경원(毓慶園)으로 격상시켰다. 이듬해에는 임시로 장사했던 원종의 묘를 천장하여 인헌왕후와 나란히 쌍릉으로 다시 장사지냈다[『인조실록』 5년 8월 27일]. 1632년(인조 10)에는 정원대원군의 시호를 올리고, 능호를 장릉이라 하였다.
조성 경위
원종은 1580년 6월 22일 경복궁 별전에서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에 11세의 나이로 가례를 올렸고, 1604년(선조 37)에는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2월에는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는데, 광해군은 평소 원종의 아들 능창군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들어 왔다. 더욱이 원종의 새문동 사제와 원종의 어머니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선영에 왕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으로 항상 의심하였다. 심지어는 원종의 집을 빼앗아 허물고 경덕궁을 지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1615년(광해군 7), 황해도 수안군수(遂安郡守)신경희(申景禧) 등이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무고를 계기로 커다란 옥사가 일어났다. 그로 인해 능창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광해군일기』 7년 11월 17일]. 그 뒤 원종은 몸져누워 1619년 12월 29일, 40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광해군이 장기(葬期)를 재촉하고 사람을 시켜 조문객을 기찰하게 한 까닭에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장사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12월 29일].
인헌왕후는 능안부원군구사맹(具思孟)의 딸로, 1578년(선조 11) 4월 17일에 태어났다. 정원군과 가례를 올리고 연주군부인에 봉해졌다. 인조가 즉위한 뒤 연주부부인으로 진봉되었고, 1626년 1월 14일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5월 18일 김포 성산 언덕에 안장되었다. 왕의 어머니로 승하했으나 원종이 추숭되기 전이므로, 묘호를 육경원이라 하였다. 1627년(인조 5)에는 임시로 조성한 원종의 묘를 천장하여 인헌왕후와 나란히 안장하였고, 1632년에는 정원대원군을 ‘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으로, 연주부부인을 ‘경의정정인헌왕후(敬毅貞靖仁獻王后)’로 시호를 올리면서 정원대원군의 묘호(墓號)인 흥경원(興慶園)을 장릉이라 하였다[『인조실록』 10년 3월 11일].
조성 상황
광해군은 왕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원종과 그의 후손을 지목하고 항상 경계했는데,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에 원종이 죽자 장례마저 편히 지낼 수 없게 하였다. 그 때문에 원종은 양주 곡촌리에 임시로 묻히게 되었다.
1623년에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원종의 부인 구씨는 계운궁이란 궁호를 받았다. 1626년 1월 14일에 계운궁이 세상을 떠나자, 인조는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려 하였다. 그러나 원종이 왕으로 추존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극구 반대하였다[『인조실록』 4년 1월 20일].
그해 3월에 능(陵)과 원(園)은 모두 왕과 왕후의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계운궁의 묘호(墓號)를 ‘묘(墓)’로 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묘호(墓號)를 원(園)으로 정할 것을 명하였다. 이어 4월에는 아버지 원종의 묘부터 흥경원이라 정하고, 계운궁의 묘는 육경원이라 하여 5월 18일 김포에 안장하였다. 이때 흥경원을 천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1627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나 천장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그해 8월 27일에 실행되었다. 흥경원은 천장 당시에는 왕릉의 격식을 갖추지 못했는데, 1632년(인조 10) 4월 23일에 장릉으로 격상됨에 따라 도감을 설치하여 능역의 석물을 다시 마련하였다. 장릉의 석물은 경릉(敬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수석만 각각 2개씩 배설하였으며, 얕은 호석으로 봉분을 둘렀다.
변천
장릉은 조성된 이후 인조대에 기록된 화재만도 3건이 있었다. 이후 1698년(숙종 24)에는 방화범을 잡아 정형에 처했는가 하면, 1755년(영조 31)에도 왕후의 능상에 불이 난 일이 있었다. 1796년(정조 20)에 장릉을 관찰하고 수개하였고, 1827년(순조 27)에는 정자각을 수리하였으며, 1831년(순조 31)에는 사초를 수개하였다.
오늘날 장릉의 능역에는 정자각과 수복방,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는데, 비각에는 1753년(영조 29)에 ‘조선국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元宗大王章陵仁獻王后祔左)’라고 새긴 비가 세워져 있다.
재실 영역은 재실과 행랑채,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재실은 동남향을 하고 있다. 이 재실은 원래 현재 재실 서쪽에 있는 연지(蓮池)의 동북쪽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재실의 이축 또는 중수 과정이나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문채의 종도리에 1859년(철종 10)에 상량한 기록이 남아 있다.
관련 사항
인조는 1632년(인조 10) 5월 3일에 인헌왕후의 본관인 능성현(綾城縣)을 능주목(綾州牧)으로 승격시켰다[『인조실록』 10년 5월 3일]. 이는 세조의 비(妃)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예를 따른 것인데, 세조는 즉위한 뒤 파산(坡山)을 왕후의 본관이라 하여 현(縣)에서 주(州)로 승격시킨 바 있었다.
참고문헌
『장릉지(章陵誌)』
『희릉태릉효릉강릉장릉표석영건청의궤(禧陵泰陵孝陵康陵章陵表石營建廳儀軌)』
문화재관리국, 『문화재대관-사적편』상, 문화재관리국, 1975.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