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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2월 22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다.
본문: 요한복음 15장 1절~10절
요 15:1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2 내게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잘라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손질하신다. 3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말한 그 말로 말미암아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4 내 안에 머물러 있어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물러 있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과 같이,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 7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어서 내 제자가 되면, 이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10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다.
1. 「わたしはまことのぶどうの木、わたしの父は農夫である。2.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がら、実を結ばない枝はみな、父が取り除かれる。しかし、実を結ぶものはみな、いよいよ豊かに実を結ぶように手入れをなさる。3. わたしの話した言葉によって、あなたがたは既に清くなっている。4.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さい。わたしもあなたがたにつながっている。ぶどうの枝が、木につながっていなければ、自分では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ければ、実を結ぶことができない。5. わたしはぶどうの木、あなたがたはその枝である。人がわたしにつながっており、わたしもその人につながっていれば、その人は豊かに実を結ぶ。わたしを離れては、あなたがたは何もできないからである。6. わたしにつながっていない人がいれば、枝のように外に投げ捨てられて枯れる。そして、集められ、火に投げ入れられて焼かれてしまう。7. あなたがたがわたしにつながっており、わたしの言葉があなたがたの内にいつもあるならば、望むものを何でも願いなさい。そうすればかなえられる。8. あなたがたが豊かに実を結び、わたしの弟子となるなら、それによって、わたしの父は栄光をお受けになる。9. 父がわたしを愛されたように、わたしもあなたがたを愛してきた。わたしの愛にとどまりなさい。10. わたしが父の掟を守り、その愛にとどまっているように、あなたがたも、わたしの掟を守るなら、わたしの愛にとどまっていることになる。
이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영원토록 사람답게 살게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게 복음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람답게, 아름답게, 행복하게, 그리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진리인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나와서 이렇게 귀한 영적 잔치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으로 우리가 속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교회를 통해서 주님의 임재를 배우고, 또한 체험하며 인생을 살면서 영생을 살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이기신 부활의 복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직 모든 것이 생각대로 믿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분명 우리를 구원하신다고 약속하신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 말씀과 메시지를 통하여 속죄의 복음과 임재의 복음으로 인생과 영생을 회복하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사순절은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지키는 부활절을 기다리는 기간입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강림절기를 지키듯이 부활절을 기다리며 사순절을 지킵니다. 특별히 사순절의 기간에 교회에서의 신앙생활은 물론, 일상에서도 주님을 바라보는 연습에 좀 더 특별하게 매진하는 기회를 연습하는 기간입니다. 언행을 조금씩 절제하며 주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확인하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단 한가지 태도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 안에 주님과 함께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묵상하며 주님께서 주신 메시지 중에서 세 가지의 주제를 통하여 함께 도전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첫 번째 메시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메시지는 주님께 머물러 있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 안에 머무는 것이 주님께 머무는 것이라는 메시지 입니다. 물론 이 외에도 강물과 같이 넘치는 은혜와 통찰이 있었지만, 가장 강력하게 기억해야 할 이 세가지 주제를 기억하며 은혜로운 사순절을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가장 먼저 기억하고자 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의 삶에서 열매를 구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속의 처세술도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실패자로 여기게 끔 가르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성공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사랑의 쟁취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다못해 아이들은 장난감이나 먹을 것이라는 열매를 얻기 위해서 나름 열을 올립니다. 각자 열매 맺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만 우리의 열매를 기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열매를 기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본문의 시작에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참 포도나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인데요. 포도나무는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과실수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이나 지중해성 기후의 지방에서 포도는 매우 흔한 과실이지만, 매우 유용한 과실입니다. 물이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즙이 풍부한 포도를 수확하여 그 즙을 짜서 음료를 만들어 마셨습니다. 국가형성이 되기 전인 사사시대부터 포도즙을 짰다(기드온)는 기록이 있습니다. 무화과와 함께 포도는 아주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음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스라엘의 풍요로운 생활을 상징할 때 포도즙 틀에 포도가 넘친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중에도 참 포도나무라고 예수님은 스스로를 소개하십니다. 우리에게 풍요로운 인생을 약속하시는 분이 예수님 외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된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과 그 농부이신 하나님께서 열매를 더 많이 맺게 하시려고 포도나무 가지를 손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잘라서 불에 태울 정도로 열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을 읽고 그저 자신은 열매가 없으니 불에 태워지겠구나… 하며 자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농부들이 그렇게 하듯이 열매에 관심이 많으셔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농부인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를 손질하십니다. 여기서 손질하다는 말이나 정결하게 하다는 말이 원어로 같은 단어라고 성경의 각주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와 성도인 우리는 이미 깨끗하다, 곧 하나님의 손질이 끝난 존재라고 알려 주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죄를 정결하게 하고, 죄로부터의 구원은 이미 하나님께서 끝내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죄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능력의 관점에서도 그렇지만, 시간적인 관점에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더 잘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앞당기거나,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해야 더 훌륭한 구원을 얻는다던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나의 믿음이 구원을 받게 하는 어떤 능력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열정적인 믿음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의 완성을 이룩해 놓으신 하나님의 그 역사하심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붙어있는 가지를 손질하셔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원칙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할 바에 의해서 이제부터 완수되어야 할 어떤 공로의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미 우리는 깨끗하다고 선언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용기를 얻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우리의 구원을 바라고 계셨습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를 통해 열리는 열매를 구하셨고, 기대하시고, 기다리셨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 시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기대하시고, 원하시는 열매가 바로 우리의 구원인 것이 믿어지시길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기억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 번 이상 반복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머무르다’는 단어입니다. 헬라어로는 ‘메노-’라고 발음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머문다, 이어진다, 생존한다, 혹은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일본어성경 중에 신공동역 성경은 앞부분은 つながる로 후반부에는 とどまる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신개역 성경은 모두 とどまる로 번역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도 포도나무가 가지에 붙어 있다, 즉 연결되어 있다는 말에 메노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다섯 번이나 반복(4,5,6,7,9절)하여 우리에게 주님께 머물러 있으라고, 주님과 연결되어 있으라고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세 번은 내 안에 머물라고 하셨고, 7절에서는 말씀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고, 마지막에는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를 하면서 큰 은혜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마 이번 사순절 특새를 통해 우리교회에 예비하신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열매를 보여주실 것 같은 기대감이 커져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성도와 교회의 삶의 이유에 대해서 다시 점검함으로 말미암아 소망을 다시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이 강단에 서 있는 제가 먼저 그 소망을 다시금 회복하고 있습니다. 물론 살아가는 이유를 세속적인 것보다 말씀에서 찾고 있고, 또한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기도회의 말씀을 준비하면서 교재를 먼저 읽고 정리하고, 말씀을 전하는 도중에 성령께서 강하게 부어주시는 은혜가 있음을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욥이 고백하는 것처럼, 사도 바울이 고백하는 것처럼, 히브리서 기자가 고백하는 것처럼 믿음에 대한 생각과 의지가 남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주님께서 부으셨던 그 촉촉한 단비와 같은 은혜, 생수와 같은 은혜가 다시금 체감된다고 할까요… 물론 그 때와 똑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때 제게 역사하셨던 성령께서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왠지 제가 무슨 신령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신내림 같은 것이라도 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저는 육신의 사람인 것에는 틀리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끄는 삶의 목적이 내가 나름 준비한 삶의 목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으로 체감되고 있다는 것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론은 사순절 특새가 끝나고 부활절을 맞이하면서 우리 모두에게도 체감될 정도 드러나게 될 것을 믿으며 기대합니다.
특새를 통해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임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이번 특새가 끝나면 주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믿어지고, 확고하게 체감될 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것을 그토록 기대하셨고, 약속하셨고, 완수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안 믿어지시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주님은 다 알고 계시며,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뛰어 넘어 역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안 믿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안 믿어져도 사실인 것, 진리인 것, 존재하는 것, 그리고 활동하는 것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도, 내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안 믿어도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가려져 있어도 그것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고집을 피우고 받아들이지 않아도 그것은 이미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길 원하고, 그리고 나의 태도만 바꾼다면 그 진리가 믿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입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보다 우리의 열매를 더욱 갈급해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보다 더 우리가 잘 되고, 강건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워지고, 사람답게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은 계속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님 안에 머물라고 명령하시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마치 포도나무와 그 가지와 같은 관계처럼 붙어있고, 머물러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 주제 하나만으로도 수 많은 메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우리가 함께 꼭 기억하기를 바라는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 머무시며, 나와 함께 연결되어 계시기를 내가 그렇게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바로 그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머물며 일상생활을 살기를, 예수님께서 내 일상에 머물러 사시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며 기다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너무 분주하게 살지 말고, 분명하게 주님이 주시는 목적에 머물러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머문다는 것은 바로 그 말씀과 그 사랑에 머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 머문다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게 머물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보를 그저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내 삶에 머물고 계시고, 내 삶이 예수님께 머물고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눈에 볼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7절과 9절은 우리가 예수님께 머물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머문다는 것을 두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그 말씀에 머무는 것이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같은 표현으로 내가 예수님의 그 말씀에 연결되어 있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기본적으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몸에 배이게 한다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꼭 지식을 학습하는 것만을 배운다고 하지 않고, 뭔가 실수를 통해서, 갈등과 난관을 통해서도 배운다고 하지 않습니까? 몸에 익숙하게 하는 것입니다. 반복하는 것입니다. 몸에 침투하도록 계속해서 따라 하는 것입니다. 흉내 내는 것입니다. 말도 그렇게 배우고, 삶의 지혜도 그렇게 배웁니다. 스승을 따라 하고 스승의 흉내를 내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길과 나름의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지요. 즉 주님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은 가장 먼저 기초적으로 읽고 듣고 반복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한 두 번 읽고, 아니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도 그 말씀을 따라서 연습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예수님은 형제를 향해서 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농담으로라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합니다. 왜죠? 욕하지 말아야 할 그 기회에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실습해 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거짓으로 말하지 말아야 할 그 기회에 거짓을 말함으로 그 배울 기회를 날려 버린 것은 아닐까요? 남의 눈에 티를 떼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들보를 먼저 봐야 할 기회에 남의 티를 빼느라고 내 눈의 들보를 그대로 방치한 것은 아닐까요?
배운다는 것이 단지 지식을 쌓는다는 것으로 오해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이나 교리가 아닌 삶이 바뀐다는 것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안 된다고 주님도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못한다고 주님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서툴러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주님이 세상의 창조를 멈추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주님의 역사를 완성해 가고 계십니다. 다만 내가 그 주님의 경륜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배우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법, 세속의 노하우, 지금까지의 경력보다 주님의 방법을 배우려는 겸손을 훈련하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을 믿기를 권유합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집사들과 기도회를 하면서 함께 나눌 이야기인데, 이제 다른 형제교회들이 주시는 후원금을 받지 않기로 합의할 것입니다. 물론 그 후원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것일 수도 있지만,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 그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현실의 과제인 교회당 구입에 대한 것도 해결하고, 선교의 지평도 넓히고, 영적 인물도 세우고,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세속적인 형편보다 크신 하나님께 기대하는 믿음을 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주님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하신 것에 실제로 순종을 실습하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이 사랑하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내 마음에는 안 드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속적인 방법은 그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안 보기 위해서 피하거나, 관계를 파괴하려는 유혹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속적으로 갈등이 일어나면 우리는 피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사람이 관계를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세속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으로 원수를 대하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때의 결과와 열매는 바로 하나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왜냐하면 나보다 더 그 관계의 회복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소망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보혜사 우리 안에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성령님이십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내가 껄끄럽게 생각하는 그 이웃과 가족과 친구와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나보다 더 기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회와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며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갑시다. 말도 안 되는 그런 상황이 앞에 놓여 있더라도 당황하지 맙시다. 우선 주님께 고백하고 그리고 기다리며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지혜를 구합시다. 반드시 그 지혜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고, 그 말씀이 내 안에 머물러 계시면 반드시 치유와 치료와 문제 해결의 역사가 기적처럼 우리 눈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듯이 사는 것이 예수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머물러 살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단 한가지, 우리와 함께 일상을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사는 일상이 바로 천국이요, 승리요,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랑에 의지하여 일상생활을 사는 것이 바로 예수님 안에 사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예수님과의 일상을 연습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예수님과 함께 일상을 살 수 있는 조건은 이미 하나님께서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그저 교회생활을 통하여,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그 사랑에 붙어있기만 하면 됩니다. 지금 당장 내 눈에 결과가 드러나지 않아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완성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시고, 주와 한 살에서 밥을 먹고,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함께 취미 생활하고, 주님과 함께 봉사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함의 열매, 성령의 열매가 반드시 맺힐 것을 믿습니다. 이런 귀하고 복된 기회를 잡으신 여러분과 저의 이번 주간 일상도 말씀과 사랑의 열매가 풍성히 맺히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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