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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통하여 인간 본성에 접근 / 백남오
- 이은희 《화 화 화》 (2022, 선우미디어)
1.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을 기다리며
2004년은 수필계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사건 하나가 있다. 이은희의 수필〈검댕이〉가 제7회 동서커피문학상 대상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다. 필자는 이를 수필계의 찬란한 희망의 불빛으로 보고 있다. 시, 소설, 등 전 장르를 총망라하는 공모전에서 다른 장르를 제치고 수필이 대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상당한 상금까지 걸린 대표적인 공모전이기에 장르를 초월하여 수많은 작가들이 몰려드는 현실에서 1등을 한다는 것은 가벼운 일이 아니다. 이런 공모전에서 수필은 언제나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타 장르를 물리치고 수필이 당당히 대상을 차지했음은 시, 소설, 극이라는 견고한 3분법의 벽이 허물어지는 신호탄이다. 이는 이은희 개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한국수필계의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예고하는 중대한 변곡점이다. 그렇다면 〈검댕이〉는 어떤 작품인가.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고 김시헌 작가와 김우종 교수의 심사평을 보자.
대상으로 선정된 이은희의〈검댕이〉는 한국의 수필문학이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입증할만한 수작이었다. 문장력뿐만 아니라 수필이 갖춰야 할 예술로서의 문학적 기법에서 특히 우수성을 나타냈다. 작품의 소재는 곤충 한 마리인 사슴벌레의 관찰기에 속한다. 그것을 구입하고 기르다가 잃어버리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재미있다. 그렇지만 이야기의 재미보다도 그 벌레를 통해서 작가 자신의 인생을 깊이 있게 짚어보고 보다 값진 삶의 길을 발견한 것이 귀중한 성과다. 사슴벌레가 자유를 찾기 위해 철망 상자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성공한 방법을 통해서 자신보다 더 귀중한 삶의 길을 찾았다는 얘기는 큰 암시를 준다. 즉 사슴벌레는 나라는 인생의 상징적인 소재로 쓰임으로써 상상을 통한 비유법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수필의 예술성을 확보한 것이다.
중대고비마다 예술성 시비에 휘말리던 수필이 이은희의〈검댕이〉에 와서는 수필이 예술성을 확보했다고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은희는 오랜 세월 기다리던 수필계의 백마 타고 온 초인이 될 수 있다. 그로부터 이은희는 그 기대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저 높은 곳, 수필의 성좌를 향하여 성큼성큼 대도를 걸어간다. 그는 2004년, 이 작품으로《월간문학》에 공식적으로 등단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그다음 해부터 작품집이 쏟아져 나온다. 2005년 첫 수필집《검댕이》, 2007년 수필집《망새》, 2009년《버선코》, 2011년《생각이 돌다》, 2014년 포토에세이집《결》, 2014년 수필선집《전설의 벽》, 2017년《문화 인문학》, 2017년 테마 사진 수필집《결을 품다》, 2022년《화 화 화》까지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이 문학적 역량을 뿜어내고 있다.
이렇게 나온 작품집은 그 반응 또한 폭발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작품집에 대한 문학상이 잘 뒷받침해 준다. 2007년 제물포수필문학상을 시작으로 2010년 충북수필문학상, 2012년 신곡문학상, 2013년 충북여성문학상, 2015년 김우종문학상, 2018년 구름카페문학상, 2019년 에세이포레문학상, 박종화문학상 등 굵직굵직한 문학상을 휩쓴다는 말이 옳다. 문학상이 문학성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도 문학상을 주는 주최 측의 입장에서는 거듭 고심하고 선별해서 최적의 문인에게 수상의 영예를 안겨주는 것이 사실이다. 1967년생인 이은희는 이러한 문학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문단활동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2005년 충북수필문학회 감사, 한국문협 회원, 청주문화원 부원장, 2012년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2013년 에세이포레문학회 회장, 2014년 계간 에세이포레 편집장, 2020년 스마트경영포럼 문화예술지원분과 위원장 등의 직책을 맡아 사명감을 불태우고 있다. 그의 주업은 ㈜대원 전무이사이다. 여성의 몸으로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그야말로 문학에 대한 열정은 초인적이라 할 만하다.
실제로 수필은 문학의 큰 갈래인 서정, 서사, 극, 교술 중 교술의 중심에 있다. 어떤 측면에서도 그 영역이 확고하다. 수필은 디지털 문화 환경에 매우 적합한 매체다. 절제된 언어와 서사적 재미, 극적인 스릴까지 모든 장르의 장점을 두루 갖추었다. 다양하면서도 개인중심적인 첨단 스마트시대에서는 추상적인 관념을 고도의 비유로 노래하거나, 허구적이고 고루한 삶의 얘기는 독자들의 관심이 멀어질 것으로 본다.
수필은 15매 전후의 형식 속에 한 영혼의 깊고 미세한 풍경을 고스란히 그려낼 수가 있다. 때로는 짧아서 아쉬운 시와 너무 길어서 읽기 힘든 소설의 지루함까지 15매 속에 녹여낸다. 우주를 표현할 수 있고 인류의 정신사까지 담을 수 있음도 물론이다. 15매라는 틀 속에 문학의 다양한 미적 장치를 구비하여 깊게, 때로는 폭넓게 감동을 준다. 이 얼마나 매력 넘치는 문학인가. 나는 이것을 매력을 넘어선 수필의 마력이라 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현실은 시, 소설, 희곡이라는 3분법의 벽이 너무나 견고하다. 오늘날 수필가들은 이 3분법의 벽을 반드시 넘어야한다. 그래야 수필을 문학의 본류에 세우고 문학성 시비를 잠재울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치열한 작가정신과 열정이 우선되어야 한다.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가 쓰는 수필을 뛰어넘어야 함은 물론이고 이들 장르를 앞서야 한다.
예리한 메시지와 신선하고 매력적인 소재를 찾고 표현방법에 대해 고민해야하며, 미적인 울림이 감성과 이성의 눈을 뛰어넘어 본질적 깨달음에 도달하는 영적(靈的) 경지까지 승화되어야 한다. 새롭고 실험적인 수필로 독자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래야 문학의 본류로 미래문학의 중심으로 서게 될 것이다. 이제는 수세기 동안 문학사를 지배해온 견고한 3분법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수필이 새로운 세기를 이끌어갈 장르로 부각하고 있다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고무적이다. 그 구체적인 신호가 있다면 바로 이은희 수필가가 그 중심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2. 이은희 수필의 본질
그렇다면 이은희에게 수필에 대한 이런 열정적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의 수필의 본질은 무엇일까. 2020년《수필 미학》겨울호(통권 30호)에서 작가 집중탐구로 이은희 수필가를 기획특집으로 대서특필한 적이 있다. 이 기사에서 그는 살아온 시절을 회고하고 등단 계기와 과정, 문학공부와 관련 영향을 받은 인물이나 만남, 추구하는 문학세계 등을 매우 상세하게 밝힌 바가 있다. 이은희 수필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부분을 요약해 본다.
마당을 보면 눈물이 납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이 아닌 마당과 함께 흔적 없이 사라진 소중한 것들에 바치는 사모의 눈물입니다. 그나마 작가가 되어 회고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요. 나의 유년의 기억은 요즘 흔하지 않은 넓은 마당에서 시작됩니다. 어머니의 남다른 생활력 덕분에 뒷마당은 사십여 마리의 돼지와 셰퍼드와 토끼, 닭 등을 키워 동물농장 같았고, 축사 옆으로 바지랑대에 빨랫줄이 매인 마당에는 붉은 고추가 무량하게 널려 있었죠. 고추건조장에서 쪄낸 물고추를 마당에 널어 투명한 햇볕에 바싹 마르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희나리를 가리러 오십니다.
작가가 되어 푸른 시절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는 글감으로 불러왔지요. 수필집 제목인〈망새〉와〈버선코〉입니다. ‘망새’는 아버지가 지붕에 앉아 기와를 손수 올리던 모습은 수호신인 불새로 형상화하였고,‘버선코’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버선발의 코가 이불 밖으로 보여 잊히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유년시절 머물렀던 동네는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소중한 부모님과 할머니도 제 곁에 머물지 않습니다. 눈앞에 있던 대상들이 흔적 없이 사라져 뇌리의 잔상으로만 남아 더욱 그립습니다.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을 무시로 들춰봅니다. 기와집 마당에서 가축을 기르며 겪은 자매들의 소소한 경험과 동네 어르신들의 귀동냥으로 얻은 인생사 등 향수 어린 기억은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작가의 길은 전혀 상상치도 못한 길입니다. 돌아보니 돌아가신 어머니가 문학의 길로 인도한 건 아닌가 싶습니다. 등단 무렵, 그리움의 절정에 달했던 것 같아요. 36살에 정신적 지주인 친정어머니를 여의고 마음을 붙일 곳 없어 부유하는 듯한 삶이었죠. 우연히 딸의 백일장에 따라갔다가 상을 받은 것이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지요. 이어 공모전 여러 곳에서 수상하며 재능이 있는가 싶어 글에 미친 듯 몰입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 내 안의 이야기를 풀어놓게 한 것 같아요. 아홉 권의 작품집 중, 첫 수필집에서 네 번째 수필집까지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이 배어 있답니다.
저는 오래된 물상을 좋아합니다. 틈만 나면, 우리의 전통 문화재를 찾아 사찰 기행을 떠납니다. 나를 찾는 사색의 공간으로 사찰만큼 좋은 곳이 없답니다. 절집을 오래 서성이며 물상이 주는 고유한 결을 느끼며 사유하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습관은 일상에서 부딪는 모든 것에서도 숨결을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수필집《결을 품다》에 실린 ‘꽃결, 사색의 결, 바람의 결, 전통의 결, 삶의 결’은 길 위에서 만난 무량한 숨탄것들의 ‘결’의 집합입니다. 더불어 인간의 마음결을 어떻게 다듬어 가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글입니다.
요약하자면, 이은희는 넓은 마당이 있는 시골 대가족의 7남매 맏이로 태어나서 성장한다. 할머니, 부모님, 형제들과 가축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군식구들까지 정말 대식구들이다. 아무리 가족이 많다고 해도 이들 한명 한 명과 특별한 추억과 사연을 간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할머니와의 웃지 못할 추억, 태산 같았던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무량한 사랑, 아등바등 자라며 새겨진 동생들과의 약속, 가축들을 키우며 맺어진 한 마리 한 마리와의 애환들,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이러한 과정의 모든 것이 이은희 수필의 자양분이요 뿌리다. 그중에서도 36세에 맞이한 어머니와의 영원한 이별은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다. 어머니는 간절한 그리움이라는 슬프고도 황홀한 문학이라는 선물을 주고 떠나셨다. 어머니를 향한 절절한 그리움이야말로 이은희 문학의 출발점이자 종착점이다. 그가 펴낸 십여 권의 수필집 중에서 첫 수필집을 포함한 4권은 모두가 어머니를 향한 애절한 그리움이 배어있을 정도라고 고백하고 있다.
노을빛 손톱이 탄생하였다. 손톱에 봉숭아 꽃물들임은 그리움의 선물이다. 저문해가 산허리로 넘어갈 즈음 서편하늘은 주홍빛으로 곱게 물든다. 산 그림자 누운 강물도 물들고 강물을 바라보는 내 얼굴도 점점 붉어진다. 두 눈에 노을이 넓게 퍼지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진다. 눈앞에 지나간 추억이 아롱거리고 세상을 등진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라서다. 특히 울 밑에 핀 봉숭아 꽃잎을 조심스레 따던 당신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손톱 위에 가만가만히 꽃물을 들이던 친정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이 몹시 그립다. -〈잠 못 이룬 밤에〉 부분
노을과 주홍빛 봉숭아 꽃물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잘 형상화된 작품이다. 그 어떤 시적표현이나 소설적 서술보다도 아름답다. 이토록 섬세한 한 영혼의 모습을 볼 수 있음이 축복이라 생각할 정도다. 특히 저녁이라는 시간 배경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루의 끝인 저녁이면 슬픔이 밀려오고, 일 년의 석양인 가을은 우수에 젖어드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다. 하루해가 지는 노을빛 무렵에 어머니가 더욱 그립고 공연히 슬퍼짐은 어찌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어머니와 함께했던 그 시절은 다시 볼 수 없는 풍광들이고 되돌아갈 수 없는 젊음이기에 추억마저도 서러워지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왈칵 그리움이 되어 밀려들고 있다.
그렇다. 나 역시도 실체도 없는 그리움 때문에 젊음을 애태우고, 밤을 지새우며 아파하기도 했다. 지금도 그 병이 다 나았다고 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리움이야말로 서정성의 핵심이요, 창작의 원천이라 생각한다. 또한 문학의 핏줄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작가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또는 최대한의 덕목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은희 수필의 본질은 바로 그리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3.수필집《화 화 화》독법
미래수필의 큰 방향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깊은 사유를 확장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전문적인 삶의 현장을 담은 수필시대가 열릴 것으로 본다. 야생화를 탐색하는 일, 산을 노래하는 일, 바다를 탐구하는 일, 평생을 종사한 직업적 체험, 등이 핵심적인 소재의 방향이다. 이것저것 백화점식 나열과 무명작가의 사소한 일상에 독자들은 흥미가 없다. 대하소설처럼 대하수필도 나와야 한다. 이것은 전 장르에 해당되는 담론이기도 하다.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 조정래의《태백산맥》, 이병주의《지리산》, 김주영의《객주》, 최명희의《혼불》을 생각해 보면 그 답은 명확해진다. 이들은 생애를 바쳐 이 소설의 완성에 바쳤고 그 결과 이 작품들은 우리 문학의 커다란 산맥을 이루어 문학사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수필도 이 같은 작품이 요구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본다.
이러한 흐름에서 볼 때 이은희의 수필집 《화 화 화》는 꽃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두고 집중적인 사유와 탐색을 펼치고 있는 작품집이다. 작가는 청주시 24층 복층아파트에 살고 있다. 안방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거실에서 저무는 노을을 볼 수 있는 자연을 품은 집이다. 작가는 테라스 같은 이 공간을 하늘정원이라 부르며 선물 같은 집이라고 만족해한다. 멀리 녹음에 휩싸인 상당산성 성벽이 희끗거리고 가까이엔 청주의 정기를 품은 우암산을 마주한다. 그는 복잡한 일상과 고된 하루를 이겨낼 수 있는 기운을 이 하늘정원에서 얻는다. 하늘정원은 그리움의 공간이다. 친정어머니처럼 틈나는 시간을 쪼개어 토종 꽃과 나무를 가꾼다. 봉숭아꽃과 채송화, 도라지꽃과 나팔꽃, 백합이 정원에서 피어난다. 새벽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하늘정원에 오른다. 몸을 숙여 풀을 뽑고 물뿌리개에 물을 받아 천천히 물을 주며 식물에게 말을 건다. 매일 맞는 동살이 새롭고 이슬 맺힌 비비추가 싱그럽다. 24층까지 날아와 난초 잎 틈새에 고요히 잠든 무당벌레와 바지런한 꿀벌과도 친구가 된다. 한껏 부풀어 터질 듯한 도라지꽃 봉오리와 밤새 한 뼘 이상 줄기가 자라 나뭇가지를 단단히 휘감은 더덕 줄기를 대견스럽게 바라본다. 자연을 섬기니 절로 무념무상이다. 하늘과 바람, 산, 그리고 그가 키운 꽃과 나무가 바로 처방약이다. 일상에서 불쑥 일어난 뿔 같은 화도 금세 스러진다. 꽃과 대화를 수시로 나누니 마음의 궁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된다. 풍경소리 청량하고 도량 가득 달빛이 내리니 무엇이 부족하랴. 산사의 산승처럼 홀로 정원에 서있는 날이 많다.
①삶이 윤택해지려면, 매일 가슴 뛰는 일을 하란다. 오늘 내 가슴을 심히 뛰게 한 건 한 송이 나팔꽃이다. 흙 한 줌 없는 24층 하늘정원 자갈밭에 꽃씨를 뿌린 적 없는데 새싹이 돋아 신기하다. 목을 길게 줄기를 늘이더니 빛깔고운 꽃을 피운 것이다. -〈가슴 뛰는 일〉부분
②작은 햇불처럼 피어오른 파꽃이 인상적이다. 꽃대가 꿋꿋이 하늘 향하여 길고, 꽃봉오리는 엄지와 검지 끝을 동그랗게 모았을 때 크기 정도다. 갓 피어난 봉오리는 속내를 보이지 않으려고 얇디얇은 천으로 감싼 듯 신비한 기운마저 감돈다. 바로 곁에는 여러 갈래로 갈라져 노란 수술들이 너도나도 보란 듯 얼굴을 내민다. 그 모습은 마치 성스러운 성화 같기도 하고, 불단을 밝히던 촛불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파꽃처럼〉부분
③여전히 나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불볕더위에서 노랑꽃을 지켜내고자, 생애 좋은 작품을 남기고자, 애면글면한다. 이 모든 행위는 시어처럼 사랑덕분이다.‘당신이 아닌 누구도/치유할 수 없는/내 불치의 병은/사랑’이다. 글을 좋아하니까, 꽃을 사랑하니까 열병을 자처하여 앓는다. 가슴에 상처가 덧나도 이 일을 원한다. 열병 속에서 까맣게 피어난 나만의 언어로 열매를 맺어 뭇사람과 나누고 있다. 미래에도 꽃을 보고 또 보고, 글을 쓰고 또 쓰고, 이 행위는 평생 이어지리라.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누구도 못 말릴 그리움의 열병을 토한다. -〈해바라기 연가〉부분
작품 ①은 인간도 힘겨워하는 불볕더위를 견뎌내고 꽃을 피운 나팔꽃에 대한 예찬이다. 강인한 생명력에 치하를 보내며 꽃잎이 으스러질까 보듬을 수도 없어, 너 참 장하고 귀하다고 혼잣말만 속삭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삶이 윤택해지려면, 매일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사유가 압권이다. 작품 ②는 파꽃의 생애를 톺아본 작품이다. 파꽃은 매운 냄새를 풍긴다. 남들은 향기로운 냄새로 벌과 나비를 부르는데 그의 곁은 누가 지키겠는가. 마당 한 귀퉁이에서 무심히 피어나는 꽃, 화려한 색감도 그 흔한 잎도 돋지 않으니 무엇으로 시선을 사로잡을까. 작가는 속이 텅 빈 연한 줄기로 무거운 씨앗주머니까지 이고 있으니 이 또한 사랑의 힘이라고 강조한다. 작품 ③은 해바라기 꽃을 작가 자신에 비유하여 형상화하고 있다. 멀대 같이 키가 크고, 누렇게 뜬 얼굴빛이 그렇고, 노란 옷이 잘 어울려서도 그러하다. 꽃을 사랑하고, 운명적으로 글을 써야 하고, 자신만의 언어와 색깔을 찾아 평생 열병을 앓아야 함도 해바라기와 닮아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끙끙거리다 심장에 종종 불꽃이 일어난다. 그 불꽃은 쉬이 사그라지지 않아 몸속 구석구석에 반점처럼 부어올라 처방약을 달고 산다. 화火로 달궈진 심장을 서서히 잠재우는 대상은 역시, 꽃이다.(중략) 지인은 번거로운 일을 왜 좌초하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나도 나에게 묻는다. 내 안에 체증인 불[화火]를 꽃[화花]으로 다스린다는 응답이다. 일상에서 맞닥뜨린 상심에 솟은 화火를 자분자분 잠재우는 화花. 내가 전념하는 일은 직장생활과 글쓰기에 덤으로 식물 가꾸기와 그 식물을 지인에게 공유하기다.(중략) 이웃과 마음을 나누는 일은 더없는 기쁨이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은 향기로운 조화를 낳는다. 꽃[화花] 덕분에 마음이 맞는 분들과 살뜰한 정을 나누는 기회를 만든다. 마음속 불[화火]의 화신이 낳은 아드레날린은 자연이 만든 신선의 꽃[화花]으로 잠재우고, 그 꽃을 SNS에 공유하니 세상과 조화[화和]롭다. -〈화 화 화〉부분
틱낫한 스님은〈화〉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화는 모든 불행의 근원이다. 화를 안고 사는 것은 독을품고 사는 것과 같다. 화는 나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하며, 인생의 많은 문제를 닫히게 한다. 화를 다스릴 때 우리는 미움, 시기, 절망과 같은 감정에서 자유로워지며 타인과의 사이에 얽혀있는 모든 매듭을 풀고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가 있다. 분노는 평화를 깨트린다. 살아가면서 성인이 아닌 이상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으니 분노가 치민다 해서 그대로 표현했다가는 후회할 일만 생긴다. 그러므로 화를 잘 다스려서 억제할 수 있도록 스스로 훈련해야 한다.
작가는 “화火로 달궈진 심장을 서서히 잠재우는 대상은 역시, 꽃”이라 하고, “꽃[화花] 덕분에 마음이 맞는 분들과 살뜰한 정을 나누는 기회를 만든다.”고도 한다. 마음속 불[화火]의 화신이 낳은 아드레날린은 자연이 만든 신선의 꽃[화花]으로 잠재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화의 근원을 꽃으로 다스리고 있는 그는 이미 속인의 경지를 벗어나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4.결국은 사람이다.
이은희는 수필집《결》과 《결을 품다》이후 결의 작가로 불린다. 이번 작품집은 꽃의 결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세계를 이루는 주된 정서는 그리움이라 했다. 수많은 그리움들 중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핵심을 이룬다. 이번 작품집 《화 화 화》역시 꽃을 소재로 하고 꽃 이야기만 집중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의 잠재된 무의식 세계는 그리움에 대한 간절한 몸부림이다. 꽃은 그리움의 매개물일 뿐이다. 꽃이 아름답게 필수록 함께 볼 사람이 그립다. 그렇다. 그의 문학은 결국은 사람으로 귀결된다는 얘기다. 이것은 인간탐구라는 문학 본령과도 맞닿아 있는 덕목이기도 하다. 문학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문학의 최종 지향점이 인간이 아닌가.
꽃 중의 꽃은 사람 꽃이란다. 꽃이 저마다 고운 빛깔과 향기를 뿜어내듯 우리네 삶도 제각기 내면의 향기를 지닌다. 꽃의 모양과 종류가 다르듯 인간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다양한 모습과 성향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꽃처럼 순수성을 잃지 않고 헛된 욕망을 꿈꾸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아귀다툼은 없으리라. 개성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면, 지구 상에 전쟁은 사라질까. 꽃의 세계에선 서로의 다양성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같다. -〈꽃 중의 꽃〉부분
세상에 불로초는 따로 없다. 선암사 꽃길을 걸으며 불로초는 인간이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른다. 내 곁에서 꽃이 진 자리를 애잔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가슴이 울렁인다고 말하는 벗이다. 아니 봄 한철 격정의 인내를 겪고 하르르 스러지는 봄꽃이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고 읊은 시인이다. 꽃과 나무처럼 순리대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로초다. -〈꽃잎별곡〉부분
결국 꽃 중의 꽃은 사람이라고 실토하고 만다. 꽃과 나무처럼 순리대로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로초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든든하다.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지향점도 결국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만약 이은희가 꽃을 통해서 또 다른 새로운 세계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면 어쩐지 공허했을 것이다. 유토피아란 끝도 없는 양파 까기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의 과정에서 어떤 꿈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더 큰 목표가 저만치서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큰 것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일시적인 목표에 불과할 뿐 가야 할 길은 언제나 아득하기만 할 것이다. 나 역시도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들을 왜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오르려 했을까. 왜 밤잠을 설쳐가며 그 험한 산길을 걷고 또 걸으며 미지의 계곡 속으로 빠져 들었을까. 왜 젊음을 송두리째 바치며 그 기나긴 세월을 지리산에서 육체적 가학을 통하여 위안을 얻으려 했을까. 깊은 내면, 이상향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 때문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렇게도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찾았을까. 그것은 어쩌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길이 아닌가. 꿈꾸던 유토피아가 현실화되는 순간에 이미 유토피아가 아니라 현실 그 자체가 되고 마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이상향이 그리움으로 손짓해 오던 것이 아니던가. 유토피아는 마음속 깊이 내재된 영원한 안식처를 향한 원초적 슬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은희가 경쟁을 해야 할 대상은 수필가가 아니다. 그의 앞에는 시, 소설, 극이라는 3분법의 벽을 허물어야 할 과제가 주어졌다. 그리하여 시인, 소설가, 극작가들이 쓰는 글보다 더 아름답고 문학성이 짙은 작품을 생산해 내야 한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 그것이 우리 수필계가 그에게 거는 기대이자 희망이다. 그래야 그는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길에는 지금보다도 더 외롭고 고통스러운 난제들이 기다릴지도 모른다. 각종 창작기금의 수혜 등 행정적인 실무에서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참고 기다리고 능력으로 이겨내야 한다. 그의 어깨에는 수필가들의 꿈이 걸려 있다. 수필집《화 화 화》는 물론이거니와 그의 모든 작품집 일독을 권하고 싶다. 수필가 이은희와 함께 가는 수필의 길은 반드시 새롭게 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첫댓글 꽃을 통하여 인간 본성에 접근한 이은희 《화 화 화》에 대한 백남오 선생님의 평론.
감명깊게 필독 하였습니다.
수필계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으로 평을 해 주셨네요. 앞으로도 이런 휼륭한
문인들이 속출해야겠고, 우리 문인들도 모두 각고의 노력으로 휼륭한 대작
을 남겨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셨네요. 이용수 운영자님 이렇게 휼륭한 평론 게재
해 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늘 문운과 건승을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