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꽃이 피었습니다 / 곽주현
볕이 잘 드는 창가에 화분 하나 놓여 있다. 막 피어난 동전 크기만 한 노란 장미꽃이 앙증맞게 얼굴을 내민다. 이 녀석을 키우느라 애 좀 썼다. 작게 개량한 품종이어서 컵라면 크기의 화분에서도 곧잘 자란다. 키가 겨우 15센티미터 정도다. 지난봄 한창 왕성한 시기에는 여러 송이 꽃이 아파트 거실을 환하게 밝혔다. 뜨거운 여름을 힘겹게 견디고 가을이 되자 다시 잎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 애는 3년 전에 우리 집으로 왔다. 딸내미가 어버이날을 축하한다며 사 온 것이다. 날마다 물을 주고 가지가 무성해지면 잘라 주었다. 1년마다 분갈이도 했다. 겨울에는 농장으로 가져가 땅에 묻었다. 그리고 봄이 되면 다시 파내서 키웠다. 이렇게 추위를 이겨낸 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싱싱하게 자란다. 정성껏 보살펴 주니 해마다 예쁜 꽃을 피웠다.
올봄에 이 화분을 내가 아이들 돌보미로 주중에만 머무는 딸 집으로 가지고 갔다. 손주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다. 날씨가 서늘해지자 다시 꽃이 피기에 식탁에 올려놓았다. 손주들이 예쁘다며 손뼉을 치고 발을 동동 구른다. 꽃잎을 만져 보기도 하고 향기가 난다며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기도 한다. 이때다 싶어 일곱 살 손녀에게 “네가 날마다 물을 주면 어떠냐?”라고 물었다. 어릴 때부터 식물을 가까이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다. 그렇게 하겠다고 밝게 대답한다. 며칠은 잘 주는가 싶더니 꽃이 시들자 점점 멀어졌다. 휴일에는 전화로 잘 보살피고 있는지 확인하면 손녀는 깜짝 놀라면서 아직 물을 주지 못했다며 이런저런 핑계를 댔다. 어린애들은 애완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에는 큰 관심을 두지만, 변화가 적은 식물에는 그러지 못하나 보다. 그러다가 지난 추석 연휴에 그만 실수하고 말았다. 명절이라 며칠간 모두 집을 비우면서 화분 관리가 잘못되었다.
연휴 전날 미리 화분을 비닐 주머니에 담아 충분히 물을 채워 두었지만 여러 날을 견디지는 못했다. 흙이 말라 잎과 줄기가 고사(枯死) 직전이다. 날씨가 시원해지자 꽃대가 올라오는 중이어서 더 많은 수분이 필요했을 것이다. 세숫대야에 넣고 푹 잠기게 물을 채웠다. 한 시간쯤 지나자 축 늘어졌던 잎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잎이 모두 살아나지 못하고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식물을 오래 키우다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이 수분 조절이다. 흙이 어느 정도 말랐으면 물을 주고, 그 양은 얼마큼이어야 하는가를 판단하기는 의외로 쉽지 않다. 식물의 종류와 계절도 고려해야 한다. 나는 손가락을 흙에 대 보고 습기를 짐작하기도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시든 잎을 따 주고 우유를 마시고 난 컵에 물을 부어 영양을 보충해 줬다. 그러나 봉곳하게 올라오던 꽃대는 모두 시들고 말았다. 이틀이 지났는데 이번에는 진딧물이 생겨서 나무 전체를 새까맣게 뒤덮었다. 농약이 없어 모기약을 뿌려주고 지켜봤다. 조금 좋아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벌레들이 많이 보였다. 다음 날 다시 약을 치고 비닐 주머니로 감쌌다. 한 시간 후에 그것을 벗기고 다시 창가에 놓아두었다. 두어 시간 지나 살펴보니 잎이 푸른빛을 띠며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이렇게 빨리 회복될 줄 몰랐다. 식물의 생명력이 놀랍다. 2주 후에는 노란 장미꽃이 다섯 송이나 피어났다. 외람되게도 내가 장미꽃을 창조한 것 같은 기쁨을 맛보았다.
그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이다. 그러려면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부족, 불편, 어려움 등을 찾아 도와주는 행위로까지 이어져야 한다. 나는 남의 집을 방문하게 되면 맨 먼저 주인이 가꾸는 화분부터 살핀다. 물, 햇빛, 거름이 부족하거나 넘치면 식물이 금방 눈에 보인다. 그 댁과 서로 임의로운 사이라면 곧 물을 떠다 부어 준다. 식물을 좋아한다며 이런저런 나무나 꽃을 베란다에 키우고 있지만, 비실비실한 것들을 보면 속으로 ‘이건 아닌데.’라고 말한다.
시외로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꽃집 앞에 멈췄다. 가을의 꽃이라는 국화가 한창이다. 예쁜 화분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잘 가꾼 국화 송이가 그릇 전체를 거의 덮고 있다. 어떻게 이렇게 잘 키워 내는지 감탄이 절로 나온다. 몇 송이만 피어 이제 막 개화가 시작된 한 그루를 골랐다. 이런 것을 사야 꽃을 길게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냥 두면 안 된다. 물을 충분히 주는 것은 기본이고 오전에만 햇빛이 드는 곳에 자리하게 하고 가끔 영양분도 보충해 주고 약도 뿌려야 한다. 그 많은 꽃대가 다 피우지 못하므로 잎 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따 주는 것이 좋다. 아깝다고 그냥 두면 전체가 쉽게 시들어 버린다. 이렇게 잘 관리하면 한 달 가까이 꽃을 즐겨 볼 수 있다.
요즈음 아침에 창문을 열면 제법 싸한 공기와 마주한다. 가을이 곁에 있다. 나들이하고 있다면 돌아오는 길에, 집에 머물고 있다면 길 건너 꽃집으로 나가 예쁜 국화 한 그루 골라 집 어디에 놓아 보자. 아니 두 그루를 사는 게 좋겠다. 하나는 책상에 다른 하나는 식탁에. 작은 것은 두 개에 만원이면 된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꼭 그렇게 하자. 가을 하늘이 더 파랗고 더 높아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