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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금관(金冠)에 관한 연구
권 현 주 호원대학교 패션뷰티학부 교수
A Study on Shinla Golden Crowns Hyun-Ju Kwon Professor, Division of Fashion & Beauty, Howon University (2009. 11. 2 접수 : 2009. 12. 3 채택) Abstract In this paper I first observe several golden crowns found in Gyeongju area. It has generally been recognized that the golden crowns originated from Siberia and flowered gorgeously in Gyeongju area of Shinla. I investigate their historical background and characteristics.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As for the origin of Shinla golden crowns, I advocate the hypothesis that they were introduced from Siberia accompanied by the southward immigration of Xiongnu to Gyeongju area. I argue that the culture of Shinla golden crowns was finally formed, based on elementary level of gold work culture and technology once developed early in Gyeongju area, by applying elaborated skills of immigrant Xiongnu brought after the mid 4th century to the prototype of golden crowns previously introduced from Siberia, as a result of which those gorgeous golden crowns were reincarnated in Shinla. The Xiongnu who moved to Europe, regarded as the Huns, left designs and patterns that appeared on Shinla gold crowns on other remains, but they did not seem to have left any golden crowns. I claime that they returned to the east after their empire perished and eventually settled down in Gyeongju area after the mid 5th century with their gold work culture and new technology. I argue that this can account for the great increase of golden remains and the much more exquisite and refined gold work skills at that particular time of the history. Key words : Shinla golden crowns(신라 금관), Xiongnu(흉노), diadem with ornaments(대륜식입식관), feathered trim(조우식)
Ⅰ. 서 론
고대 신라의 황금문화는 한국 고대사 중의 가장 화려한 꽃이라 할 수 있는데, 경주 황남대총에서 금 관총에 이르는 5∼6세기의 숱한 황금 유물들이 부장 자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장되어 발견되었다. 황 금 유물들 중 크게 눈길을 끄는 것 중의 하나는 금관 이다. 전 세계에서 10여점의 금관1)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의 6점2)이 신라의 무덤에서 발견된 사실은 신라가 금을 숭상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고 있 는 바로, 유목민족은 금(金)을 숭상하였고 농경 민족은 옥(玉)을 숭상하였는데, 유독 삼국 중 신라만
이 금을 숭상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북방 유목
민족이 신라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신라와 흉노가 관련이 있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는데, 최근에 이러한 주장을 다
시 옹호하는 학계의 발표가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3)
특히, 신라 금관은 구조적인 면에서 대륜(臺輪)에
입식(立飾)을 세우는 구조로 특색을 갖고 있는데, 이
러한 수목(樹木)형 입식 양식, 수목 위의 새, 녹각(鹿
角) 양식의 원형이 몇 세기 이전의 북방 중앙아시아
의 사르마트나 아프카니스탄 금관에서도 발견4)되고
있어 신라 금관과의 연관성과 그 기원을 규명할 필
요성이 대두되었다.
본 연구는 신라 금관이 시공의 차이에도 불구하
고 바로 시베리아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전래설
을 옹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
리 막연한 전래설보다는 신라의 황금문화가 북방민
족 즉, 흉노와 훈족의 유입에 따른 직접 전달임을 주
장하려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일반적으로 시베리
아에서 기원하였다고 인식되는 금관이 어떻게 신라
경주 지역에서 그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특성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금관의 연구 범위로는 용어 사용에 있어 재료면
에서 순금으로 만들어진 ‘금관(金冠)’과 ‘금동관(金
銅冠)’으로 구분하였으며, 형태면으로 ‘대륜식입식
관(臺輪式立飾冠)’, 금관의 내관(內冠)으로 인식되어
졌던 ‘변형모(弁形帽)’와 변형모에 꽂은 새 날개형의
금제 관식(冠飾)을 ‘조우식(鳥羽飾)’으로 구분하였
다. 또한, 경주 지역에서 발견된 몇 점의 금관에 주목
하고, 그 기원과 유래 및 그 연관성에 관련된 관모와
관식을 다루고자 한다.
Ⅱ. 역사적 배경
역사적으로 4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쳐
경주를 중심으로 한 사로국(斯盧國)은 고대 국가의
기반을 다져가고 있었고,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지증왕 4년(503)에 이르러 정치, 사회적 기반을 다져
신라(新羅)라는 나라이름을 확정하게 되었다. 이후
법흥왕(514~540)대에 하나의 본격적인 왕권 국가
체계를 수립하기 시작하였고, 낙동강 유역의 금관가
야와 백제의 영역이었던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하여
더욱 기틀을 튼튼히 하여 마침내 문무왕(661~681)
대에 소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5)
그런데 신라의 왕은 처음 박(朴)씨에서 석(昔)씨
를 거쳐 김(金)씨로 교체되었다. 4세기 후반 신라는
앞의 시기와는 뚜렷이 다른 성장을 보이는데, 특히
17대 내물왕(356~402)은 왕의 칭호도 이사금(尼師
今)에서 마립간(麻立干)
6)으로 바꾸었다. 그래서 마립
간 시대에 기마민족 유입에 의한 왕족 교체가 일어
났다는 설과도 얼추 부합한다.
최병현7)은 이 부분에 대해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부터 일어난 동아시아 기마민족 대이동의 와중에서
한 여파가 밀려온 결과로 보았는데, 사마염의 진(晋:
316년 멸망)이 약화되면서 5호 16국의 각축 시기에
경주까지 남천(南遷)하여 김씨(알타이) 왕조를 세웠
다는 것이다. 또 일부는 서천(西遷)하여 유럽의 헝가
리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고도 한다.
8) 본 연구자는 이
와는 약간 달리 시기적으로 350년 흉노 대학살 이후
이들의 경주 남천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유럽 훈족
의 주축이 된 흉노도 350년 이후에 서천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훈족이 375년
부터 유럽의 민족 대이동을 촉진시켰다고 알려져 있
기 때문이다.
내물왕은 바로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인데, 문무왕
(661~681) 자신이 흉노 김일제(金日磾)의 후예라고
기록을 남기고9) 있는 것에서도 추론할 수 있다. 한
무제(漢 武帝)가 흉노 휴도왕을 살해하고 휴도왕의
아들인 김일제(와 그의 가족들)를 거두어 김씨 성을
하사했다. 이후 김일제 집안의 후손인 왕망이 세운
신(新)국(8~23)이 멸한 후 김일제의 일족이 경주로
피난을 한 것10)으로 보고 있다. 다른 일족은 고향인
휴도국으로 도주하여 성을 王씨로 바꾸어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 왕망이 북의 흉노를 적대적으로 대했
기 때문에 경주 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더 안전했
을 것이다.
이들 중 <삼국사기>에 나오는 김알지11)가 바로
석 탈해(57~80) 이사금에 의해서 발견되었다는(60
또는 65) 인물이며, 김알지의 7대 손인 미추 이사금
(262~284)이 13대 왕으로 등극하는 과정을 거치면
서 김씨 흉노족은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워왔을 것
이다. 그래서 350년 흉노의 대학살을 피해 경주로 남
제 7 권 제 2 호 권 현 주 63
하한 흉노족은 그들보다 이전에 정착한 김씨 흉노
왕족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결국 신라의 김 내물왕
(356~402)을 등극하게 만들었다.
한편, 김일제의 원래 성은 모(募,慕,牟)씨였다는
설이 있는데, 김일제의 후손들이 모씨를 김씨로 대
체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2차 남천 때 도래한 흉
노 지도층도 성으로 김씨를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
다. 이로써 4세기 후반 신라의 약진은 외래인 즉 또
다른 흉노의 진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자연스런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는 마치 신라의 삼국통일 후
일본에 한반도로부터 주로 백제 출신의 도래인이 출
현하여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사실과도 부합한다.
위에서 훈족은 350년 흉노 대학살 이후 유럽으로
서천한 흉노족이라고 언급하였다. 유감스럽게도 훈
족은 유라시아 지역에 그 광대하고도 강력한 제국을
형성(375~469)했음에도 이들에 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근래 신라와 적어도 훈족 중
의 주류 몽골계와 모종의 관련이 있다12)는 주장이
있다. 실제 독일의 공영방송 ZDF TV의 역사 다튜멘
터리 시리즈에서 Beherend and Schmitz는 훈족의 기
원에 대하여 놀라운 주장13)을 하는데, 그 훈족의 고
향이 아마 아시아의 최동단에 있는 현 한국일 것이
라고 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증거들 중의 하
나는 금령총이나 김해 대성동에서 출토된 동복
(cauldron)이라 불리는 청동 솥인데, 이것은 아시아
에서 카탈루냐 평원에 이르는 훈족의 이동 경로에서
만 발견되는 유물이다. 몽고의 노인 울라(Noin Ula)
에서 발견된 것도 하나의 표본적인 것이다. 훈족의
머리띠 장식이나 금장식품의 문양도 한국에서 발견
된다. 그 외에도 각배(角杯)라든지 편두도 공통점을
더해준다. 훈제국은 마지막 왕 아틸라(Attila)가 453
년 횡사한 후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 급속하게 멸망
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리하여 유럽에 잔존한 일파
들을 뒤에 두고 훈족은 결국 뿔뿔이 흩어져 중앙아
시아를 거쳐서 원래의 고향인 동아시아까지 이동하
였을 것으로 본다. 이들의 귀환 길은 평소 활이나 화
살을 아시아에서 들여오는 것을 비롯하여 유럽 진출
이후에도 꾸준히 동쪽의 흉노족과 교류를 해왔을 것
이기 때문에14) 새롭게 길을 개척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무렵 중국은 위진남북조 시대(439~559)
에 각축을 벌였던 혼란의 시기여서 이러한 틈을 타
경주지역까지의 여정은 비교적 용이했을 것이다. 로
마로부터 매년 엄청난 양의 황금을 공물로 받았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귀환한 훈족들이 막대한 양의 황
금을 가져왔을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추론일 것이다.
귀환한 훈족의 영향력이 얼마나 지속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신라의 변화무쌍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추측해 볼 뿐이다. 한 가지 예를 들면, 김씨 왕실 내
의 투쟁으로 보이는 시조교체이다. 문무왕이 김성한
(金星漢)을 시조로 삼은 반면에, 내물왕 이외에도 혜
공왕(765~780)대에는 미추왕(262~284)을 시조로
삼았다.
15) 이는 다른 시조를 내세움으로써 훈족 계열
의 집단이 득세한 것을 시사해 주는 것으로 여겨진
다. 이러한 변화는 제1차로 이주한 김알지계 흉노와
이후 제2차로 이주한 내물왕계 흉노, 그리고 제3차
로 이주한 유럽 훈족 집단들이 김씨 왕실에서 서로
각축을 벌이는 분파를 형성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본 논문의 주장에 타당성을 더해 준다. 원
성왕(785~798)릉으로 보는 괘릉과 흥덕왕(826~
835)릉에 서역인 석상이 있는 점 등도 훈족의 영향
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신라 금관의 출현은 금동관보다 조금 더 늦다. 이
한상의 <신라 관의 편년표>
16)에 따르면 금관은 5세
기 3/4전반에 황남대총 북분에서 시작하여, 5세기
4/4전반 금관총, 5세기 4/4후반 서봉총, 6세기 1/4 금
령총과 천마총의 순으로 편년되었다. 반면, 금동관은
좀 더 이른 5세기 1/4 복천동 10, 11호에서 부터 시
작하여 6세기 2/4까지 이른다. 이러한 금관과 금동관
의 차이는 흥미롭게도 흉노의 제2차 이주와 훈족의
제3차 이주의 시기적 차이와 잘 들어맞는다.
초기 금동관(金銅冠)의 출현은 흉노의 제2차 이주
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후 화려하고 장식적인 금
관의 출현은 훈족의 제3차 이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
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훈족의 제3차 이주와 밀
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는 또 다른 것
은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 출현 이전의 금동관들은
수목(樹木)형 입식(立飾)에서 시작하여 출자(出字)형
인데 반해, 황남대총 북분의 금관부터는 녹각(鹿角)
형 입식이 추가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녹각형 입식 장식이 나타난다는 것은 새
로운 양식의 개발 및 제작기법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훈족의 제3차 이주와 관련을 지울 수 있다
고 본다. 요컨대 기존 연구의 출토 금동관 및 금관에
대한 편년 결과는 둘 간의 출현 시기의 차이 및 새로
운 녹각형 양식의 출현 등의 관점에서 본 논문에서
주장하는 흉노, 훈족 이주설과 잘 일치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신라 금관은 수목형 입식,
녹각형 입식, 곡옥(曲玉)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나, 한 가지 예외로 취급되는 금관이 있으니 바
로 경주 교동 출토 금관 <그림 1>이다. 이 금관이 문
제가 되는 이유는 이것이 금관이 나오지 않는 초기
금동관의 시기에 나온다는 것이며, 그 양식에 있어
서도 신라 금관의 전형적인 형식인 출자형에 가까운
수목형 입식이나 녹각형 입식이 없다는 점이다. 이
교동 금관은 입식의 형태에서 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보다 더 소박하고 단순한 고식인 것으로 보아 황남
대총 남분보다 더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며,
비교적 소형(小形)이라 소년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
다. 그러나 이 금관은 도굴 후 압수된 것이라 정확한
출토 상태나 시기를 파악하기 곤란하므로 학술자료
로 적극 활용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17)
앞으로 미발굴 묘들의 출토물을 확인한다면 더 나은
일반화를 얻을 수 있겠지만, 연구자는 입식(立飾)의
양식에서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교동 금관처럼 5세
기 초반에도 초기 수준의 금관이 제작되었다고 본다.
신라 금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내리
지 못하거나18)
,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에 기원
을 두거나19) 아니면 자생한 것20)이라는 주장이 분분
한 것을 보면 아직 정설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본
연구자는 시베리아 기원설에 가능성을 더 두고자 한
다. 신라의 금관이 시베리아 쪽과 연관되었다는 주
장에는 나뭇가지(樹木), 사슴뿔(鹿角), 곡옥(曲玉) 등
의 기본 이미지가 공통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그림
7~11 참조).
Ⅲ. 금관의 유형과 특성
사실 금장식 문화는 고대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사르마트, 흉노, 선비, 거란족 등의
무덤에서 금관을 비롯한 금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우선 고구려에서 발굴된 금동관(그림 2)
21)은 화려한
입식 장식이나 곡옥이 없어 신라 금관과의 관련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금관은 아니나 금제 관 장식이 선
<그림 1> 경주교동 금관(5세기),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 p. 102.
<그림 2> 고구려 금동관, 국립중앙박물관,
p. 23.
비족의 보요관(그림 3)
22)에서도 발견된다. 이 관장식
은 고구려의 것과 거의 비슷하게 나뭇가지 모양으로
장식하고 그 끝에 또는 끝과 중간 중간에 심엽형 달
개를 매달았다. 그러나 이한상23)은 선비족 황금문화
가 신라 황금문화와 시기적으로 가장 근접한 것이기
는 하나, 선비족의 금제 관식은 입식 장식이 간단하
고 관모 꼭대기에 장식되는 달개와 이마에 장식되는
네모난 투조판 위주여서 신라 금관과는 관련성이 없
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금이라는 재질과 나뭇가지
에 심엽형 달개를 달아 머리에 장식하는 기본 아이
디어는 고구려, 선비족, 신라에 공통된 것이다.
제작 연대가 기원 전후로 추정되어 신라금관에
비해 약 400~500년 이상 빠른 사르마트 금관(그림
4)은, 신라금관과 형식상에서 차이가 있지만, 그 기
본 문양에서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주목되는 것은
생명수로 파악되는 나무와 사슴이 관테 위에 사실적
으로 장식되어 있고, 관테에는 곡옥 모양의 장식 등
이 촘촘하게 드리워진 것이다. 바로 신라 금관의 원
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제 7 권 제 2 호 권 현 주 65
a. 서하지방 보요관
b. 방신촌 보요관
<그림 3> 선비족 보요관, 황금의 나라 신라, p. 54,
2000년전 우리 이웃, p. 74.
사르마트 금관과 비슷한 것으로 아프가니스탄의
틸리아 테페 6호분에 출토된 금관(그림 5)도 있다.
나뭇가지 입식이며 또 여기에 매달린 달개들, 그리
고 새 및 옥 등은 바로 신라 금관에서 찾아 볼 수 있
는 주제들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1~2세기로 추정
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기원전 3세기경 서시베리아
지역의 꿀라이 문화 청동상(그림 6)이 있는데,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관이 주목을 받고 있다. 관테 위에는
세움장식이 3개 있고, 나뭇가지와 사슴뿔의 문양이
있어 신라 금관과의 유사성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
나 위의 세 관(冠)들은 신라 금관과 시간과 공간의
차가 너무 커서 연구자들이 서로 계승관계를 인정하
는 것을 매우 부담스럽게 여기기도 한다.
24)
한편으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로 간의 시
공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신라의 금관과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고대 유목민족들이 남긴 금관 및
관장식 유물들 간에는 부인할 수 없는 공통된 기본
주제들이 존재한다. 즉, 나뭇가지, 사슴뿔, 곡옥 등이
<그림 4> 사르마트 금관, 황금의 나라 신라,
p. 50.
<그림 5> 아프가니스탄 금관, 황금의 나라 신
라, p. 51.
<그림 7> 황남대총 북분 금관, 국립중앙박물관, pp.
34-35.
다. 황남대총 북분 금관(그림 7)
25)
, 금관총 금관(그림
8)
26)
, 서봉총 금관(그림 9)
27)
, 금령총 금관(그림
10)
28)
, 천마총 금관(그림 11)
29)이 그것이다.
싸카(Saka) 이즈크 고분 출토 금관은 높은 봉우리
의 두 산 위에 나무가 둘 서 있고, 출자형 나무 위에
각각 새가 같은 방향으로 앉아 있다. 마치 우리의 솟
66 신라 금관(金冠)에 관한 연구 패션과 니트
<그림 8>금관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고고
관, p. 103.
<그림 9> 서봉총 금관,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 p. 105.
<그림 10> 금령총 금관, 우
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
다, 도판.
<그림 11> 천마총 금
관,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 p. 107.
대와 비슷하다. 이렇게 금관의 원형에는 나뭇가지
위에 새가 앉아 있는데, 신라 금관에는 보통 그 자리
에 심엽형 문양이 나타난다. <그림 9>서봉총 금관에
는 여전히 나뭇가지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앉혀두었
다. 심엽형 문양은 버섯이나 돔 모양 같기도 하고, 나
무의 움 모양이나 나뭇잎 같기도 하다. 그러나 아직
금관의 심엽형 문양에 대한 해석은 거의 없다. 자생
설 하에서 단순히 나무의 새순인 움을 형상화한 것
이라는 견해30)도 있으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에서 기원한 것이라면 다른 설명이
요구된다.
벨기에 헨쩨 교수는 신라 금관이 시베리아 일대
의 샤먼 신앙을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금
관 앞면의 출자형 입식은 나뭇가지 모양을 도안화
한 것이고, 측면의 녹각형 장식과 함께 생명과 초인
간적인 힘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악했다. 그는 금관
의 나무는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세계수(천상과 지상
을 연결하는 나무)에 해당하며, 이 세계수 꼭대기에
는 새가 앉아 있다고 했다. 금관의 녹각형 장식도 시
베리아 지역의 샤만이 쓰는 관의 녹각장식과 같다고
했다.
31) 이에 따라 김원룡32)은 신라 금관은 시베리아
샤만관의 계통이면서 그 형식이 신라에서 정리 개발
된 독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본 연구자는 세계수
와 사슴뿔은 천신이나 샤만의 영혼(Soul)이 천상과
지상을 오르내리는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김열규33)는 새와 사슴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
켜주는 상서로운 동물의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연구자는 신라 금관의 나뭇가지 끝에 있
는 심엽형 문양은 결국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가 앉
는 자리이므로 신(하늘, 절대자)과의 교통을 통한 감
응을 상징한다고 본다.
34) 또한 사슴뿔 가지 끝에도
이 심엽형 문양이 있는데, 결국 동일한 상징을 나타
낸다고 보는데, 실제로 사르마트 금관에는 사슴이
매달려 있다.
신라 관 장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날개형의
금제 관식(冠飾)인 조우식(鳥羽飾)이다(그림 12, 13
참조).
조우식은 <그림 14, 15>와 같은 변형모에 꽂아 장
식을 더해주며, 새의 깃털에서 새의 날개로 더욱 발
전되어진 형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금관의 내
관(內冠)으로 인식되어지기도 했는데, 독립된 별개
의 관으로 이 자체만으로도 금관으로 불려지기도 한
다.
요컨대 신라의 금관 문화는 언젠가 형성된 경주
지역의 초기적 수준의 금세공 문화와 기술의 바탕
제 7 권 제 2 호 권 현 주 67
<그림 12> 금관총 금제 조우
식, 국립경주박물관 고고관,
p. 107.
<그림 13> 천마총 금제 조우식,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도판.
<그림 14> 천마총 금제
변형모, 국립경주박
물관 고고관, p. 109.
<그림 15> 금관총 금제 변형
모, 우리 금관의 역사를
밝힌다, 도판.
위에 전래된 시베리아 금관의 원형이 4세기 중엽 이
후의 도래한 흉노에 의한 보다 나은 기술들이 융화
되는 과정들을 거쳐 결국 그 화려한 금관으로 환생
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천한 유럽의 훈족이
신라 금관에 보이는 문양을 다른 유물에 남겨놓기는
하였지만, 그들이 금관을 남겼다는 보고는 아직 없
는 것 같다. 그러나 이들이 금세공기술을 비롯한 다
른 신기술들을 가지고 5세기 중엽 이후 경주에 이주
했다면, 그 시기에 신라 황금유물의 양이 갑자기 증
가했고 금세공술도 더 정교하고 세련된 사실을 잘
설명할 수 있다.
Ⅳ. 결 론
본 논문은 경주 지역에서 발견된 몇 점의 금관에
주목하고, 일반적으로 시베리아에서 기원하였다고
인식되는 금관이 어떻게 신라 경주 지역에서 그 화려
한 꽃을 피우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아울러
특성에 대해 연구하였으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경주 지역에 이주한 흉노, 훈족은 크게 먼저 1세
기 중엽 이후 김알지 대의 제1차 흉노 이주를 시작으
로, 4세기 중반 제2차 흉노 이주, 그리고 5세기 중반
이후 훈족의 제3차 이주를 역사적 근거를 들어 구별
하였다. 제1차 이주에 대해서는 학계의 의견과 일치
하며, 제2차 이주에 대해서는 기존의 연구에서와는
달리 더 정확히 350년 이후로 재조정하였으며, 훈족
의 제3차 이주는 연구자의 새로운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3단계 이주설은, 기존 연구의 출토 금
동관 및 금관 편년 결과를 바탕으로, 초기 금동관의
출현은 흉노의 제2차 이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
후 화려하고 장식적인 금관의 출현은 훈족의 제3차
이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으
며, 황남대총북분의 금관부터 녹각(鹿角)형 입식(立
飾)장식이 추가되어 나타난다는 것은 훈족의 제3차
이주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점에
서 그 타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신라 금관의 기원에 대해서는 시베리아 지역에
기원을 둔 직접 전래설을 옹호하였다. 그래서 신라
의 금관 문화는 시베리아 지역에서 금관의 원형이
유래하여 여러 북방 유목민족들 사이에 전파되었는
데 주로 흉노에 전해진 황금문화가 크게 세 차례에
걸친 흉노, 훈족의 경주 이주를 통해 직접 전래, 발전
된 것으로 보았다. 특히 훈족의 귀환은 금관이 경주
를 종착지로 하여 어떻게 하여 가장 세련되고 화려
한 모습을 띄게 되었는지를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다.
마지막으로 아직까지 해석이 잘 내려지지 않았던
금관의 나뭇가지나 사슴뿔 가지 위에 있는 심엽형
68 신라 금관(金冠)에 관한 연구 패션과 니트
문양에 대해서도, 단순히 나뭇가지의 움이 아니라 하
늘로부터 내려온 새가 앉는 자리를 나타내며, 신과의
교통을 통한 감응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보았다.
신라의 찬란한 황금문화는 결국 신라인들이 그들
의 타고난 우수성과 외래문화에 대한 수용력을 바탕
으로 외래 선진 기술들을 융화하고 응용하는 뛰어난
재창조 능력을 발휘하여 이룩한 것이라 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금관에 한하여 다루었으나, 앞으
로 신라 무덤에서 출토된 다른 유물들에까지 연구의
폭을 넓혀서 그 기원 및 북방민족과의 관련성에 대
한 계속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