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16
환갑 세월을 함께한 낭만과 역사의 다리 세월교
<낭만과 피서의 다리>
춘천은 물안개의 고장이다. 서늘한 아침이면 으레 소양강 위에는 물안개가 핀다. 물안개 핀 세월교는 춘천의 지역 상징[랜드마크]이었다. 춘천사람뿐 아니라, 여행객들도 세월교의 낭만을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았다. 흐르는 물과 무네미 다리, 밤 물의 시원한 느낌이 가져다주는 이미지가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앗아갔다.
연인, 가족, 친구, 그리고 낚시꾼들이 늘 세월교를 사랑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세월교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장마철 강물이 넘치면 세월교는 또 다른 낭만을 이루었다. 그 광경을 보려고 사람들은 비를 맞으며 찾았고, 무더위가 한창일 때는 피서 인파로 가득했다. 물살이 세어 겨울에 얼음이 얼지 않기에 빙어와 송어 낚시터로도 유명했다. 그렇게 보면 천변만화하는 참 멋진 풍경을 간직한 다리가 세월교였다.
그런 세월교는 춘천인의 마음속에 잔잔히 피어나는 물안개처럼 정든 추억이 되었다.
<춘천인의 삶을 고스란히 품은 역사의 다리>
세월교가 있는 소양강 나루는 워나리나루였다. 워나리에 얽힌 이야기는 참 많다. 조선지지자료(1911)에는 한글로 ‘워나리’, 한자로 ‘원진(元津)’이라 했다. 옛 맥국시대 원님이 건너던 ‘원나루’였는데 강원도 사투리로 ‘워나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증거로 동면 지내리에서 세월교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를 정승고개, 그곳에 있는 치성터를 정승고개 서낭당이라 하며, 월곡리에 있는 능산(陵山) 또는 능뻔지는 맥국시대 왕과 정승의 묘가 있던 장소라 한다. 으뜸 나루로 옛 고조선 때 쓰던 아리수(水), 아리하(河)가 변해서 워나리로 되었다고도 한다. 옛날 춘천이 강을 중심으로 나라를 발전시킨 근본이 되는 강이어서 으뜸 원(元)자를 써서 ‘으뜸이 되는 나루’라 원진(元津)이라 했단다. 또 이 나루에 원앙새가 많아 원앙새 원(鴛)자를 써서 원앙새 나루인 원진(鴛津)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소금배가 한강을 타고 올라와 춘천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던 장소이다. 인제에서 내려온 뗏목이 보매기 여울을 지나 도지거리에서 갈보들과 술을 한 잔씩 하던 장소였다. 옛 샘밭장이 서던 장터였다. 보매기를 지나면 기우제를 지내던 지내리 미역바위를 지나고, 할미여울과 지내리 솔밭을 거쳐 워나리를 벗어났다. <춘천 뗏목아리랑>에 그 상황이 고스란히 전승되고 있다.
<현장에서 사라진 기억>
세월교는 소양강댐 건설(1967.4.17.~1973.10.15.)을 할 때 놓은 다리이다. 그 모양이 사람의 콧구멍처럼 생겼다고 해서 일명 콧구멍다리라 부르기도 했다. 소양강댐을 건설할 때 모래와 자갈이 필요하자, 지내리와 장학리와 율문리 일대 소양강 바닥을 파서 댐 공사를 했다. 이때 모래와 자갈을 나르던 다리가 세월교였다. 벌써 환갑이 지난 할아버지 다리가 되었다. 그 때문일까. 세월교 바로 위에 워나리교를 건설하면서 콧구멍다리는 부수어 버렸다.
역사를 간직한 장소는 정말 소중하다. 장소가 있기에 기억할 수 있고, 장소가 있어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관광지는 장소 중심으로 활용된다. 참 역사 교육도 장소 위주로 가르침이 주어진다. 장소마케팅이란 말이 있다. 장소를 어떻게 경영하느냐에 따라 후인들의 경제적 바탕과 삶의 여건이 달라진다. 춘천시에서는 콧구멍다리를 부수고 기억의 장을 마련한다고 했는데, 참 아쉽다. 마치 강촌의 명소 출렁다리를 허물고, 기억의 장으로 모형 출렁다리를 만든 사례와 같다. 원래 모습이 사라지면 사람들의 관심도 멀어진다. 아무도 찾지 않는 기억의 장소는 거미줄 쳐진 버려진 박물관과 다르지 않다. 보존과 파괴가 가져올 효과를 왜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워나리교를 꼭 그곳에 건설해야 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