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고 물 건너 / 조미숙
초등학교 친구들 단톡방이 새롭게 열렸다. 동창회 활동을 전혀 하지 않기 때문에 망설이다가 기존 방을 제쳐두고 굳이 새로 연 게 궁금해 들어가 봤다. 친구가 아파서 호스피스 병동에 있으니 도움의 손길을 부탁한다는 말이었다. 이름을 알기는 하나 누군지 모르겠다. 워낙 사람 기억을 못 하기도 하지만 졸업하고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이다. 초등학교 옆 동네에 살았다고 한다. 그래도 친구인데 매몰차게 모른 척할 수 없어 성의를 표했다.
우리 초등학교는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야 갈 수 있다. 어린 나이에 입학하고선 무덤가를 지나는 게 무섭다고 며칠 만에 그만뒀다 한다. 지금 생각하니 난 나이가 두 살이나 많게 되어 아마도 여섯 살이 아니었나 싶다. 다시 제 나이에 다녔다. 신작로에서도 많이 들어선 마을에서 출발해 들판에 섬처럼 떠 있는 작은 동산을 지나 꼬불꼬불한 논 사이를 한참 가다 보면 작은 개울이 나온다. 그곳을 지나 다시 낮은 산기슭 언덕과 마을을 또 뒤로 보내면 제법 너른 냇가를 만나 낮은 다리를 건너면 우리 학교다. 폐교된 지 오래됐다고 하는데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흔적이나 남아 있을까 싶다.
기억은 오래되어 파편화되고 왜곡되어 믿을 수가 없지만 어느날 학급에서 받은 빵을 책상 서랍에 고이 간직해 둔 일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부모님께 드릴 생각이었는지 동생에게 주려고 그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아까워서 먹지 못한 것 같다. 그런데 그 빵이 청소하고 왔더니 사라져 버렸다. 얼마나 억울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어느날 6학년 교실앞에서 작은언니를 기다리느라 서성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넓적한 노란 빵을 하나 가져다주었다. 그 아까운 것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몇 번인가 더 갔던 것 같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가자면 냇가가 우리를 붙잡는다. 옷이 다 젖은 채로 두 손을 물속에 넣고 수풀 사이를 헤집으면 모래 속에 묻힌 큼지막한 민물조개가 잡힌다. 우리는 그것을 ‘맙’이라 불렀는데 정확한 이름(인터넷을 찾아보니 말조개라고 나와 있다.)은 모르겠다. 먹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물장구치고 놀거나 맙을 잡다 보면 여름 해가 짧기만 하다. 그 넓은 냇가에서는 여러 동네 아이들이 모여 놀았는데, 낮은 언덕을 넘어 온 작은 개울에서는 아직 갈 길이 먼 아이들끼리 오붓하게 놀 수 있었다. 가재도 잡고 물웅덩이도 만들며 깔깔거리다 보면 뜨거운 여름이 끝난다.
그렇게 6년을 보내고 다시 중고등학교도 1시간 거리를 산(아니 공동묘지 근처를 지나) 넘고 물 건너서 다녔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그 공동묘지를 지척에 두고 오른편으로 꺾으면 물귀신이 붙잡는다는 다리를 건너야 한다. 어쩌다 늦게 하교하는 날은 그야말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일을 각오해야 한다. 그 냇가는 작천면과 병영면을 가로지르며 우리 병영동초등학교 앞을 지나 장흥 탐진강으로 흐른다. 비가 많이 오던 여름에는 초등학교 앞 다리는 낮아서 여기까지 돌아서 학교에 가야만 했다. 이 다리도 비에 잠기길 바랐지만 먼 거리를 비 뚫고 왔다고 칭찬은 받았다.
중고등학교 근처에 병영장이 열린다. 장이 서는 날은 풀빵(국화빵-팥이 들어가지 않은 정말 풀같이 생긴 빵)을 사 먹으러 간다. 10원(하나에 10원이었던가?)에 몇 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들 가난한 시절이라 그런 푼돈이라도 주머니에 있는 이가 거의 없다. 뜨겁지만 보들보들해서 한입에 꿀꺽해 버리면 금방 사라진다. 어쩔 때엔 그냥 그 앞에서 군침만 흘린다. 그때는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국화빵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배불러도 꼭 한입 입에 물어야 직성이 풀린다.
장을 지나 실개천을 건너 동네를 하나 지나면 너른 들이다. 남의 밭에서 이것저것 손에 닥치는 대로 따거나 캐서 먹으며 갖은 해찰을 부리면서 가야 출출함도 지루함도 잊는다. 큰길에서 지나가는 경운기나 트럭 등 탈것이라면 뭐든지 붙잡고 태워달라고 떼를 쓰기도 한다. 지금이라면 절대 못 할 일이다. 모른 척 지나가면 아는 욕이란 욕은 죄다 퍼붓는다. 꼭 타겠다는 의지가 있다기보다는 장난에 가깝다. 운 좋으면 경운기에 앉아 신나게 소리지르며 갈 수도 있었다.
큰 길을 벗어나면 냇가를 건너 넓게 펼쳐진 들판을 꼬부랑 길을 돌고돌아 가다 보면 옆 동네의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 정자가 우리를 반긴다. 우리의 2차 놀이터다. 평상에서 노닥거리며 다리도 쉬어 가고 시간도 축내 본다. 그 동네 사는 친구 집에 가서 잠깐 놀기도 한다. 집에 가면 일거리만 기다릴 게 뻔하다. 거기서도 깔딱고개 하나 넘고 다시 이어지는 잔등에 올라 서야 우리 집이다.
언젠가 옆 동네 참외밭에 서리하러 간 적이 있다. 아니 서리는 해 보지도 못하고 들통나는 바람에 주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개울에서 놀다가 동네 언니들이 가라는 바람에 뭣도 모른채 나서다가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동생을 들처업고 도망을 가다 밭매는 엄마를 만나 아이를 맡기고 숨은 곳이 글쎄 뽕나무밭이었다. 마침 뽕나무를 잘라 쌓아놓은 곳이었다. 뽕나무 가지가 낭창낭창하게 온몸으로 휘감아 들었다. 난 다음 날 학교에 가지 못했다. 인심 사나운 사람으로 소문난 이에게 제대로 걸렸다. 그가 학교까지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다. 원두막이 있던 정겨운 고향은 아니었다.
그런 고향에서 20년을 보내면서 수 많은 길을 오고 갔다. 그때 함께한 친구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른다. 잘 살고 있는지 행여 아프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살기 바빠서라고 핑계 대기에는 너무 뻔한 변명이지만 어쩔 수 없다. 정지용의 <향수>가 생각난다. 이제는 그 개울을 따라 멀리 떠나버린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만 남았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그리움만 문뜩문뜩 실려 올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