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위선 / 양선례
좀 추워도 운동은 꾸준히 해야 해. 아니야, 이번 주엔 학기 초라 몸이 너무 고단했어. 쉬는 게 더 나아. 막말하는 저 국회의원은 공천하면 안 돼. 젊은 날 말실수한 게 평생 족쇄가 되면 억울하겠어. 그의 가능성과 능력을 봐야지. 수필과 동화를 동시에 하려니 힘들어. 2학기에는 수필은 끊고 동화에만 전념해야겠어. 이미 8학기나 했잖아. 그래도 글벗과 정이 많이 들었어. 만나면 즐거운 이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지 못 한다고? 그건 너무 서운해. 무엇보다 숙제가 없으면 글을 쓰지 않잖아. 마감이 글을 쓰게 한다는 말이 딱 맞아. 2학기에도 <일상의 글쓰기>는 하는 게 맞아.
하루에도 몇 번씩 두 마음이 다툰다. 이럴까, 저럴까. 그 경계는 단단하지 않아서 백지장보다 가볍다. 옆에서 누가 살짝만 거들어도 쉽게 흔들린다. 이번에도 그랬다. 부러워서 질투하는 고까운 마음과 그런 마음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위선이 동시에 일었다.
주말 주택에서 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어이, 이번 방학에는 어디 안 나간가? 인도네시아로 여행 가세.” 한껏 들뜬 목소리의 주인공은 둘째 시누이다. 큰 시누이와 그 자녀들이 함께 모인 망년회 자리에서 여행 이야기가 나왔고, 내친김에 비행기표까지 예약했단다. 그런데 잡힌 날짜가 바로 한 달 뒤다. 이제 1주일 후면 겨울방학 시작이다. 간만에 여행 계획 없는 한가한 방학이라 사흘씩 하는 집합 연수를 두 개나 신청해 둔 터였다. “아니, 송 씨들이 가족여행 가는데 우리가 왜 들러리를 서?” 말을 전하자 남편은 일언지하에 잘라 말했다. 그 말도 일리는 있다. 둘째 시누이 가족(시누이 부부, 큰조카 부부와 손녀, 작은조카)만 여섯이다. 잠시 들떴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시누이에게 우린 함께하기 어렵겠다고 답을 보냈다.
그런데 며칠 후 ‘김씨 문중’ 단톡방에 일정이 뜬다. 자카르타, 반둥, 발리까지 여행지에 들어있다. 패키지에는 나오지도 않는 자카르타와 반둥도 그렇지만 세계적인 휴양지 발리까지 이어진다고? 게다가 반둥은 자유여행이 아니고서는 가볼 수 없는 곳 아닌가. 욕심이 생긴다. 마흔 넘어서 결혼한 큰 시누이 딸이 인도네시아에 자리 잡은 지 올해로 13년째다. 조카사위는 결혼 전부터 그곳에서 사업을 해 왔고, 한국인이 많이 사는 찌까랑이라는 도시에 집을 지은 지 오래다. 10명 이상의 대가족이 모두 묵어도 될 정도로 집이 크다고 했다. 1년에 한 번씩 아이들과 들어와서 약 한 달을 친정에 머물다 가는 조카는 그때마다 삼촌(남편)이나 숙모(나)도 꼭 한번 놀러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간다, 간다 하면서도 서두는 사람이 없어서 날을 잡지 못했다.
결국 몇 번의 의견 조정 끝에 내년이면 팔순이 되는 큰 시누이를 선두로 시누이 셋과 남편, 또 시누이의 아들, 며느리, 손녀 등 3대에 걸쳐 무려 열한 명이 인도네시아로 날아갔다. 찌까랑에서 하루를 묵고, 조카 부부에 아이 둘까지 더해 열다섯이나 되는 대가족이 버스 한 대를 빌려서 온천 휴양지인 반둥에서 이틀을 묵었다. 발리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다시 자카르타로 나와야 했다. 인구 2억 7천만인 인도네시아의 새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나흘 앞둔 날이라서 도로는 말할 수 없이 막혔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깃발을 들고 알아들을 수 없는 구호를 외쳤다. 막바지 선거 유세가 열리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호텔까지 가면서 방콕과 더불어 아시아 최고라는 이 도시의 교통 지옥을 경험했다. 앞과 뒤, 옆에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오토바이 행렬로 도로는 이미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이 나라에서는 운전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열 번도 넘게 들었다.
결국 목적지를 800미터쯤 남겨 두고 버스에서 내렸다. 숙박지인 리츠칼튼은 위에는 호텔과 리조트지만 아래는 퍼시픽 플레이스 소핑몰이었다. 버스가 와야 짐을 들고 체크인할 수 있기에 그때까지는 이곳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지하에 있는 커다란 슈퍼에서 저녁에 먹을 과일도 사고, 반둥에서 거하게 우리를 대접해 준 조카사위의 티셔츠도 하나 샀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 우리와 함께 있던 둘째 시누이의 며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단톡에 사진 한 장이 떴다. 쇼핑몰 1층 루이비통 귀빈실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며느리 모습이 담겨 있었다.
둘째 시누이는 작년에 칠순이었다. 그 기념으로 봄에는 뉴질랜드, 가을에는 북유럽을 부부가 다녀왔다. 아들이 셋이지만 큰아들이 여행비 대부분을 댔다고 했다. 이번에도 그럴 테니 대신 시아버지가 며느리 명품 가방을 하나 사 주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큰아들에게서 들어왔다.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친가 쪽으로만 돈을 쓰니 아내한테 좀 미안하더란다. 그리하여 똥 시리즈의 가방을 며느리가 골랐는데, 하필 우리나라에는 들어오지 않는 디자인이란다. 인맥을 총동원하여 수소문한 끝에 호주에서 보낸 것을 바로 이곳에서 받는다고 했다.
한편의 무용담 같은 둘째 시누이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슬슬 벨이 꼬인다. 직장 생활 35년 넘게 했으나 변변한 가방 하나 없는 나는? 그 며느리, 시집 와서 겨우 딸 하나 낳아 키운 것 말고는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래, 착한 건 나도 인정! 시부모나 시동생에게 잘하는 것도 알겠어. 그래도 나처럼 직장 생활을 해 봤어, 시어머니를 모셔 봤어, 아이를 셋이나 키워 봤어? 가정주부로 지내면서 겨우 아이 하나 키우는 일, 누군들 못하겠어. 흥!
그래도 째째하고 속 좁은 티를 내면 안 되겠지? 아니, 누가 가방 사지 말랬냐고? 외국 나갈 때마다 들어간 여행비 5분의 1만 썼어도 가방 몇 개는 샀겠다. 그거 살 돈 있으면 차라리 견문을 넓히겠다고 큰소리친 게 누구더라. 오픈 런(명품 등의 원하는 물건을 사려고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자마자 달려 들어가는 것) 하는 여자들을 속없다고 비웃은 적도 많았지. 내 돈 내어 사 주는 것도 아니면서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도 얼굴은 평정심을 유지할 것. 이럴 때는 사회생활 오래 한 게 도움이 된다. 버스는 1km도 안 되는 거리를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호텔에 도착했다.
저녁에 실물을 영접했다. 오, 가방이 내 마음에 쏙 든다. 우리나라에서 구하기 어렵다더니 명품을 잘 모르는 내 눈에도 세련되고 고급스럽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나도 슬쩍 묻어서 주문할걸. 살짝, 아니 많이 후회가 인다. 시아버지한테 5백만 원 넘는 명품 가방 받는 그녀가 부럽다. 무겁고 허리에 안 좋아서 가죽으로 된 가방은 저만치 던져 버리고 천으로 된 에코백만 들고 다니는 나는 어디로 가 버리고 없다. 이참에 나도 하나 저질러? 똑같은 걸로 고르면 속 보이겠지? 그래도 내 돈으로 사는 거랑 선물 받은 게 어디 같냐고.
내 고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첫댓글 하하하, 진짜 진짜 재밌습니다.
뭐 어때요. 똑같은 것 사면.
하하하. 미래의 작가님이 재밌다고 해 주시니 기운납니다.
펄펄.
하하하, 황선영 선생님 말처럼 진짜 재미있네요. 시아버지한테 500만원이 넘는 가방 받는 사람 나도 부럽다. 내 돈이 안 들어 가잖아요.
그러게요.
가방 손잡이에 손바닥 만한 꽃무늬 수건이 감겨있던데, 그것도 35만 원 한다더군요.
허가받은 도둑이 아닐까요? 히히
글이 정말 술술 읽혀요.
지현씨, 고마워요.
@이팝나무 저 선생님 글에 댓글들이 너무 훈훈해요.질투가 솔직하게 드러나서 더 글이 빛나는 것 같아요.
명품 가방 꼭 사야 되나요? 우리네도 어찌어찌해서 그 명품을 하나 사줬는데
한 두번 가지고 나갔나 싶네요.
하하. 그런 생각으로 저도 안 샀는데 진짜로 저런 생각이 들어서 저도 당황스러웠답니다.
아마 가식을 떨고 축하해 주었지만 알아챈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네. 고맙습니다.
그때의 심정을 사실대로 썼더니 그런 모양입니다.
글 주제와 어울리게 재미있게 썼네요.
진짜로 제 맘이 그랬답니다.
명품은 선물로 받아야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인도네시아 여행도 궁금하네요.
쓸 날이 오겠지요?
글감과 연관되면 써 보려고요.
특별한 여행이었지요.
잘 먹고, 고급으로 자고, 그러나 일정은 별로인.
명품가방 받으니까 좋더라구요.저는 100은 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좋았는데 500은?
술술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100이 안 넘는 명품도 있군요.
500이 확실하게 넘었습니다.
@이팝나무 저한테는요. 100도 명품이었답니다.하하하
진짜 재밌습니다. 질투와 위선이 고스란히. 하지만 귀여운 질투와 위선이네요.
당시의 제 맘을 솔직하게 드러냈더니 다들 재밌어 하시네요.
우리 시누이 님이 볼까 무섭네요. 하하.
들고 다닐 자신있다면 까짓 확 질러야지요. 아직 삼년은 들겠네.
하하. 정확히는 3년 11개월입니다.
들고 다닐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아요.
어깨에 메고 다니는 걸 더 좋아합니다.
선생님은 이미 명품을 가졌으면서 모르고 계셨네요. 저는 조카며느리가 받은 명품 가방보다
선생님의 명품 열정과 패기가 더 탐납니다. 솔직한 마음이 선생님답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힘납니다.
글로 쓰긴 했는데 저 위에 등장하는 누가 볼까 걱정됩니다.
옆에세 얘기 듣는 듯 부담없이 술술 읽었네요. 질투와 적당한 위선 사이 어느 것.
솔직하게 표현하니 다들 재밌다고 하는군요.
하하하!
인도네시아 여행가고 싶네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