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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88
10월20일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연중 제29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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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1)한 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
가끔씩 해외선교를 꿈꾸는 형제들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나 좋은 생각이다. 꼭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같이 노력하자.”며 용기를 불어넣어줍니다.
얼마 전 이 세상의 가장 오지로 파견된 한 형제가 기억납니다. 이제야 막 사제로 서품된 형제입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 풋풋한 젊은이입니다. 가족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교지에서 겪게 될 갖은 고초가 손에 잡힐 듯이 떠오릅니다. 물설고 낯 설은 이국땅, 풍토병, 지독한 더위, 입에 댈 수조차 없는 음식, 외로움, 무엇보다도 끝까지 괴롭히는 언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를 쓰고 선교사를 지망합니다. 저희 입장에서도 사실 아깝습니다. 오랜 기간의 수도자 양성 끝에 이제야 ‘써먹을 사람’ 한 사람 생겼는데, 한 번도 써먹지 못하고 고스란히 넘기자니 허탈합니다.
그러나 ‘한명의 해외 선교사가 파견되면 열 명의 성소자가 들어온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아깝지만 기꺼이 파견합니다.
오늘 모든 교회는 전교주일을 맞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역시 해외선교사들로부터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노고는 오늘 우리 교회의 소중한 밑거름이 된 것입니다.
한 형제가 해외로, 그것도 가장 낙후된 오지로 파견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한 형제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꿈이 생겨난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오직 복음 때문에 이역만리 머나먼 땅에서 ‘쌩고생’들을 하고 계십니다. 복음의 힘이 얼마나 강렬한 것인지 새삼 실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안정된 기반을 기꺼이 포기하게 하며, 불확실한 미지의 생활로 투신하게 하며, 결국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복음의 매력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예수님의 권고를 따라 보다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안에 선교사로서의 열망이 활활 불타오르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땅에 오셔서 청춘은 물론 평생을 헌신하신 선교사들을 바라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고국에 한 번씩 들르시지만 워낙 오래전에 떠나왔기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그쪽에서도 이방인입니다.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쪽에서도 어쩔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어쩌면 그분들은 영원한 이방인, 영원한 타향살이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그들의 노고를 다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사무치는 외로움을 다 보고 계실 것입니다. 그들의 복음을 향한 열정을 다 파악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언젠가 반드시 수백 배, 수천 배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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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이웃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요,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지독한 독감이 손님처럼 찾아와서, 한 며칠 끙끙 소리까지 내며 앓았습니다. 나중에는 열도 오르고 정신도 혼미해져,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가까운 시골 의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진료해주신 의사 선생님께서 얼마나 자상하고 친절한 분인지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힘드셨냐? 조금 빨리 오시지 그랬냐? 우선 열이 너무 많이 나니 수액부터 놔드리겠다. 제일 중요한게 푹 쉬시는 거다 등등.
너무나 따뜻한 말씀에 저는 그만 눈물이 왈칵 할뻔 했습니다. 이제 갱년기가 왔는지. ㅎㅎㅎ 아무튼 그 친절한 의사 선생님을 처음 뵙는 순간부터 저는 벌써 제 몸에서 지독한 독감이 빠져나가고 있음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의사 선생님께서는 저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의원을 매일같이 찾아오시는 단골 손님 할아버님 할머님들에게도 얼마나 큰 기쁨과 행복을 주시는지 또한 놀랐습니다. 치료를 끝내고 귀가하시는 어르신들 얼굴 마다에 환한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정신을 조금 차리고 나서 보니, 진료 대기실 벽 한 가운데에는 십자고상이 딱 달려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 의사 선생님은 이 세상 그 어떤 선교사들보다 훌륭하게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전교 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는 오늘 우리 교회에는 다양한 유형의 선교사들이 필요합니다. 청춘을 바치고 목숨을 바치며 머나먼 타국으로 건너가, 그 나라 백성들에게 또 다른 그리스도가 되고, 그 나라 땅에 뼈를 묻는 위대한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저희 같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을 쉽게 풀어서 양떼들에게 전하는 유랑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어깨띠를 두르고 직접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행인들을 교회로 초대하는 적극적인 가두 선교사들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닙니다. 실제 삶속에서, 자신이 행하는 매일의 직무 안에서, 이웃들에게 감동과 기쁨, 희망과 위로를 선사하는 일상의 선교사, 삶 속에서의 선교사도 필요합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이나 단체, 각종 모임에서 기쁘게 희생하고 봉사하십니까? 모임 안에서 이방인이나 걸림돌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겸손한 리더로서 헌신하고 있습니까? 어떻게서든 조직이 복음적이고 인간적으로 돌아가도록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습니까? 모임 안에서 친교와 나눔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더없이 비관적이고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눈부시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크게 칭찬하실 위대한 선교사이십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숱한 도전들과 걸림돌들이 즐비한 여행길이지만, 마치 소풍 나온 소녀처럼 환하게 웃으며 걷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역시 훌륭한 선교사이십니다.
이웃 전교는 우리가 지은 죄를 보속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요,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향기로운 선물입니다. 선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인으로서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필수 사항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신앙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대상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는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며, 그토록 염원하던 하느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억만금을 준다하더라도 버리지 말아야 할 대상, 우리 삶 속에서 첫번째 가치가 곧 신앙인 것입니다. 이토록 좋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웃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에게 전하지 않고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전교 주일인 오늘, 용기를 한 번 내보면 좋겠습니다. 주변에 지금 누가 홀로 외로워하며 울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좋은 선교의 대상입니다
주변에 누가 갑작스런 병고나 사고로 힘겨워하고 있습니까? 그는 가장 시급한 선교의 대상입니다.
주변에 누군가가 세상의 냉혹함 앞에 크게 상처 입고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는 지금 우리가 내미는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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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부활을 본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유튜브에 있는 한 개신교 신자 간증을 들어보았습니다. 전직 유명한 무당이었던 김여은 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무당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내림을 받지 않으면 가족 중 누군가는 받아야 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대대로 무속집안이었던 것입니다. 가족 대부분이 어렸을 때부터 귀신, 혹은 마귀를 보고 목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무당들은 그놈들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전하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놈들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족에 해를 끼쳐서 집안을 풍비박산을 나게 만듭니다. 그래서 김여은 씨도 어쩔 수 없이 신내림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받은 신은 천신으로 무속의 신들 중에서는 급수가 매우 높다고 합니다. 같은 무당들도 존경하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무당의 말년은 참혹하다고 합니다. 대부분 비참한 최후를 맞습니다. 마귀들은 쓸모없게 된 몸뚱이를 가진 자신들의 숙주들을 가차 없이 짓밟아놓고 떠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무당의 일을 멈출 수 없었고 결국 신들을 정성껏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김여은 씨가 신을 섬기던 중 자신도 모르게 계속 “아멘!”이라는 말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몇 번 교회에 갔던 적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에 갈 때 독사에게 물렸었는데도 멀쩡했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김여은 씨는 목숨을 걸고 탈출하여 세례를 받고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마귀들이 단체로 달려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정말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그러다 ‘나는 죽었고 내 안에 예수님께서 주인으로 사시는데 내가 왜 싸우고 있지? 그분께 맡기면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더니 자신의 입을 통해 성령께서 신령한 언어로 마귀들을 다 쫓아냈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평생 보이던 마귀들이 더 이상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영원히 사는 것을 아니까요. 저희 집안 대부분이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아무렇게나 살아도 행복해요."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가 있는 날입니다. 소위 전교주일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신앙인의 소명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만큼 큰 사랑이 없기에 복음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도 구해주지 않는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지 못합니다.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음을 잘 전하고 있을까요? 이전보다는 활기차지 못한 것 같습니다. 시대의 변화도 영향이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믿음이 점점 더 약해지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걸 안다고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닐 때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3년씩이나 따라다니며 온갖 기적을 본 제자들도 결국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다 도망쳤습니다. 기적을 보고 말씀을 배운다고 온전한 믿음에 도달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직 부족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해야만 비로소 복음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의심하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전한다 해도 가짜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인데 부활이 없는 복음은 십자가밖에 안 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는 복음은 남에게 짐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김여은씨가 마귀를 모시는 사람에서 주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의 부활이 없었다면 어떤 기쁜 소식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복음 때문에 기뻐야 그 복음을 기쁘게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십일조에 대해 그나마 이야기할 수 있는 이유는 부활체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1학년 때부터 십일조를 바치고 나서 단 한 번도 돈이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흘러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꼭 그것을 위해 십일조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십자가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온다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열심히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주일에 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유학 가서도 주일에 꼭 쉬었습니다. 그랬더니 효과가 매우 좋았습니다. 시간이 여유 있어지고 공부도 더 빨리 끝낼 수 있었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십자가처럼 매우 힘든 시간입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나면 반드시 부활이 따라옵니다. 그런 것들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부활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야 부활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 것을 두려워하며, 사람들에게 멸시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아직 부활신앙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지니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복음은 내가 십자가를 지며 피를 흘리고 있어도 부활할 것을 믿어 이미 기쁜 사람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면서도 항상 부활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먼저 십자가를 져보고 부활 체험을 합시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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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은 전교주일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선포이다. 복음선포를 통하여 모든 민족들이 복음화 되어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룩하기로 결심하는 날이다. 더욱이 우리는 분단의 현실을 갖고 있다. 오늘 이 미사를 통해 온 민족의 염원인 평화적 통일을 기원하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하겠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선교 2항) 선교야말로 교회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확실한 이유임을 분명하게 천명한 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선교 역사에서 길이 기억될 공의회로 남을 것이다. ‘본성상 선교해야 하는 교회’라는 말 안에는, 교회는 “믿지 않는 만백성의 빛이 되고 구원이 되기 위해 파견된 자”임을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교회는 예수님과 열 두 사도들의 복음선교 활동에서 생겨났고, 그 활동의 당연한 결과요, 그 활동이 원한 것이며, 그 활동에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그 활동에서 볼 수 있는 결과가 교회인 것”이다.(현대의 복음선교15항) 이와 같이 교회는 예수님과 같은 사명 완수를 위해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되는 것이며, '떠나셨지만 머물러 계신' 예수님의 새로운 현존에 대한 명백한 표징으로 계속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같은 곳). 다시 말해서 교회는 성령의 인도 아래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 세상에서 계속 수행하기 위해 불린 것이다. 그리스도 파견의 연장(延長)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하니 이것은 성부의 계획을 따라 교회가 성자의 파견과 성신의 파견에서 그 기원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교회는 성부의 구원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파견되며, 궁극적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신 성부의 '원천적 사랑'을 파견의 최종 근거로서 인식하며,마르지 않고 끊이지 않는 샘인 이 '원천적 사랑'에서 끊이지 않고 활력과 열성을 길어내는 것이다.
“선(善)은 자기 확산성(自己擴散性)을 지닌다.”(Bonum est diffusivum sui) “샘 같은(원천적) 사랑”이신 하느님의 사랑이 끊임없이 자신(사랑)을 확산시켜 나가기를 바랄 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왜 성부의 “원천적(샘 같은) 사랑”이 선교의 최종 근거가 될 수 있는지,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지 않은가? 조금 더 들어보자. “선은 자기를 확산시킨다.”고 했다. 그러므로 선하면 선할수록 자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가야 마땅하다.
따라서 하느님은 선의 최상의 결과를 위해서 자신을 최대한으로 확산시켜야 했다. 그런데 하느님이 할 수 있는 선의 최상의 결과는 무엇일까? 인류의 구원사업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최대한으로 쏟아 부으며 최상의 결과를 기대할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하느님의 자기확산>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자기확산인 선교는 <선=사랑=하느님>에 너무 잘 어울리고, “기원을 갖지 않으시는 기원”이신 성부의 사랑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귀속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선교의 최종 근거는 결국 성부의 자기 확산적인 “샘 같은(원천적) 사랑”에 귀착된다.
하느님은 만선의 근원이요 사랑 자체이시다. 지선(至善)하신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본성상 선과 사랑을 확산시키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다. 선과 사랑은 합일시키고 합성시키는 힘일 뿐 아니라 동시에 자신을 확산시키는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최고선이요 최고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자기확산의 일환으로 하신 최상의 사업이 바로 “만민 구원”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만민 구원”은 하느님의 “샘 같은(원천적) 사랑”에서 나오고, 하느님은 당신 사업의 성취를 위하여 최선의 방법으로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시게 되는 것이다.여기서 교회의 파견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하느님은 ‘선교하는 하느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교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이들이 하느님을 우리와 같이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한 형제요, 자매로서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복음: 마태 28,16-20: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라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릴래아에 나타나셔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침으로써 만민을 제자로 삼으라고 명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세상 끝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셨듯이, 이제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느님의 새 백성인 교회 공동체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 임마누엘”(1,23)이시다. 그러기에 교회는 모든 민족들을 주님의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고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 자신의 본분과 책임, 의무를 다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이 시기는 그것이 더 필요한 때이다. 특히 오늘 우리의 삶과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보며 복음화의 소명을 새롭게 하도록 하자. 이러한 모든 은총을 주님께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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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교회는 전교 주일을 맞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거행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마치시고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에도 권능을 지니시고 가르치셨으며 또 귀신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 우주의 통치권을 지니신 분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명령이 곧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곧 교회의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전교나 선교라고 불렀고, 그 의미는 복음화된 지역에서 하느님을 믿지 않는 지역으로 복음을 운반하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교나 선교 대신 복음화라는 표현을 씁니다. 복음화가 선교와 다른 것은 단순히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 역시 복음화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부터 복음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리고 복음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복음화는 우리가 받은 부르심을 깊이 생각하고,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신앙을 새롭게 이해하며, 주님의 부르심에 다시 응답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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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 선포>
신앙생활은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기쁨과 행복은 죽은 다음에 저 세상에 가서야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기쁨과 행복은 신앙인이 될 때 시작되고,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시작된 ‘영원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교활동은 그 기쁨과 행복을 함께 누리자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활동입니다. (기쁨을 나누면 그 기쁨이 두 배로 커진다는 옛말 그대로입니다.) 우리는 ‘내가 지금 기쁘니까’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선교활동을 합니다. 사실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은 저절로, 그리고 아주 빠르게 퍼지는 법입니다.) 반대로 생각하면, 자기 안에 기쁨도 없고, 행복하지도 않은 사람은 선교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의무감으로, 억지로 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기쁨이 없고, 기쁨이 없으니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의 신앙생활은 강제노동과 다르지 않습니다.
공동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공동체가 기쁨에 가득 차 있으면, 그래서 그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다면, 따로 선교활동을 하지 않아도 그 모습 자체가 선교활동이 되고, 저절로 신자 수가 늘게 됩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진리입니다.) 반대로, 분열과 갈등을 겪고 있고, 공동체 구성원들끼리 서로 다투고 있다면, 아무리 선교활동을 해도 성과가 없고, 신자 수가 점점 더 줄어듭니다. 만일에 부패하고 타락하거나, 어떤 나쁜 일이라도 생기면, 구성원들이 다 떨어져 나갈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내가(교회가) 먼저 변화되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병든 세상을 치료하려면 내가(교회가) 먼저 건강해야 합니다.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내가(교회가) 먼저 복음 정신대로 살아야 합니다. 선교활동이 잘 안 된다면, 안 믿으려고 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먼저 반성해야 합니다. ‘복음 선포의 힘’은 복음 정신에 투철한 ‘삶’에서 나옵니다.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그리고 철저하게 하는 것 외에는 선교활동을 잘할 수 있는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모두 흩어졌습니다. 말하자면 공동체가 붕괴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금방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겪은 충격은 바로 회복되었습니다. 당시 교회 공동체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일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유다의 배반과 이탈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배반자가 나온 공동체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고, 그 상태로는 세상 사람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승천 후에 사도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유다 대신에 새 사도를 선출하고 사도단을 재구성해서(사도 1,15-26) 배반자 때문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하기 전에 먼저 공동체의 건강 회복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처 입고 병든 공동체는 그 상태 그대로는 선교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우선 먼저 상처를 치유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공동체만이 선교활동을 잘할 수 있습니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6-20)
여기서 ‘열한 제자’ 라는 말은, 배반자가 떨어져 나감으로써 공동체에 생긴 상처가 아직 치유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더러는 의심하였다.” 라는 말은, 일부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뜻인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문에 받은 충격과 슬픔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 제자들의 공동체는, 또 교회 공동체도, 그렇게 상처 입고 병든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그 공동체가 완전히 치유되고 건강을 회복하게 된 것은 성령 강림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제자들 자신들도 노력했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했고’(사도 1,14), 마티아를 사도로 뽑아서 공동체를 복구했고, 성령을 받을 준비를 했습니다. (성령 강림 때에는 모든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고 있었을 것이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확고해진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회복되고 변화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선교활동을 지시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말씀은, 당신이 ‘만물의 주님’이고 ‘메시아’ 라는 것을 선언하신 말씀인데,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라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에 연결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고, 당신의 계명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지시는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지시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한 사람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말씀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모든 신앙인들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선교활동을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자체를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선교활동이란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도와드리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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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은, “함께, 곁에”라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버림받고, 위험에 빠지고, 불신의 늪에 빠졌을 때, 누군가가 “내가 곁에 있어 줄게.”, “내가 너를 지켜 줄게.”,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신뢰와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면서 말없이 곁에서 손을 잡아 주며 함께 아픔을 견뎌 줄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아님을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삶을 마치시고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고 명하십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은 누렸지만, 예수님 없이 자신들만의 믿음으로 복음을 전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 자리에서조차 더러 의심하고, 불신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의 두려움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을 해 주십니다. 이 약속은 협조자 성령을 보내셔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선포하게 하시며, 교회를 성장시켜 주심으로써 성취됩니다. 성령의 현존은 바로 예수님 약속의 보증이십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바오로 사도는 고백합니다.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해 주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법입니다.
내 믿음도 부모님이나 친구, 지인들의 안내와 전교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내 믿음의 멘토(스승)나 후견인이 필요했듯이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믿음의 멘토이자 후견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교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외침처럼 우리 안에서 먼저 복음의 기쁨이 움터 나올 때 가능함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내 주변에 믿음을 잃고 있는 교우는 없는지 먼저 찾아보고 그들을 향해 달려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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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변승식 요한보스꼬 신부님]
<그들의 소리는 온 땅으로, 그들의 말은 누리 끝까지 퍼져 나갔다>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이사 2,3)
우리가 전교를 말하면서 떠올리는 희망은 아마도 위와 같은 장면일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길을 함께 걷는 세상,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시길 바라는 기도와 같은 희망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 18)
승천을 앞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그러한 희망을 어떻게 이루어가야 하는가 하는 방향을 일러줍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이 일에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격려하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려고 할 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이 말씀은, ‘남 앞에서 잘난 체 하지 마라’,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는 우리 처세의 상식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다른 이의 믿음이나 가치관, 사상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는, 함께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원칙도 벗어나는 듯하여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르침이요, 진리니까’,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너의 구원과 행복을 위한 것이니까’라는 생각도, 결코 내가 남보다 낫다는 오만한 태도를 정당화하거나 사상적 강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해소하지는 못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지만 그 깊이와 가치를 누가 판단할 수 있습니까? 세례를 받고도 신앙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금방 쉬는 신자가 되어 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우리의 말솜씨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교회를 찾았다면, 진리를 알고 배우게 되었다 해도 그것이 온갖 유혹과 어려움을 이기고 신앙을 지킬 만한 힘을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체험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구원을 얻은 것은 체험을 통한 믿음이었고 응답이었기 때문입니다.
볼품없는 삶이라 해도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이 세상과는 다른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었을 때, 그들은 복음을 체험하고 이끌리게 됩니다.
그런 그들을 초대하여 교회로 이끄는 것, 이것이 우리의 전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 1, 17)
전교주일을 맞아, 내 삶의 모습이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을 통한 ‘다른 세상’을 보여주고 있는지 반성해봅시다. 우리에게서 풍기는 은은한 그리스도의 향기가 세상 모든 이를 주님의 나라로 이끄는 가장 아름다운 힘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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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충 F. 하비에르 신부님]
<선교의식을 새롭게>
가정방문을 갔을 때의 일이다. 한 자매께서 “신부님, 제 남편 성당에 나갈 수 있게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신부님께서 말씀하셔야 다닐 것 같습니다.”
“성당에 나가자고 권유한 적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10년 동안 한 번도 성당에 나가자고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남편 성격이 성당에 나가자고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또 한번은 예비자 환영식 때의 일이다. 예비자 중 한 사람이 한 형제를 보더니 매우 기뻐하면서 인사를 했다. 그 형제는 예비자가 2층에 세들어 사는 집 주인이었다.
5년 동안 그 집에 살았는데도, 주인이 성당에 다니는지 몰랐다고 한다. 전교주일을 맞아 우리의 선교의식이 어느 정도인지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 15,16) 주님께서는 왜 나를 택하셨겠는가? 그것은 당신 일이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계속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께서 공생활 초기 때부터 “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을 하도록 나를 보내셨다”(루카 4,43)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사명은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 일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일이고 사명이다.
예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마태 28,19) “온 세상 사람들에게”(마르 16,15) “땅 끝까지”(사도 1,8) 파견하셨다. 또한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라고 하신다. 이러한 우리의 사명을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전도자로서 파견되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마 10,14.15)라고 파견 받은 자로서의 사명과 기쁨을 표현한다.
초대교회가 선교함으로써 생명력을 키워 갔듯이 오늘날 예비자 감소, 냉담자 증가라는 교회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로부터 파견 받은 자로서 복음을 전해야 할 사명을 깊이 깨닫고, 선교의식을 새롭게 해야 한다.
단순히 교세확장으로서가 아니라 자신과 교회의 모습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비추어 참다운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생활로 끊임없이 바뀌어 나갈 때 선교의 결실은 더 충실히 맺을 수 있다.
선교의 결실은 우리가 결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충실히 따르고, 어느 누구도 배제없이 이웃을 찾아가고, 기도와 희생과 노력을 아끼지 않을 때 성령께서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 20)라고 하신다.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1코린 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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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복음 선포는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마태오 28,16-20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그때에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 선포는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광고 전단 뿌리듯이 하느님에 대한 일단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 선포는 시기와 질투로 얼룩진 세상에 사랑을 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불신으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세상에 믿음을 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 속 절망에 놓여있는 세상에 희망을 심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어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고자 버둥거리다가 결과적으로 모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이 세상에 하느님께서 주신 참 삶, 참 생명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화려한 미사여구나 감언이설로 전해질 수 없습니다. 복음은 복음을 사는 사람들을 통해서 보여 질 뿐입니다. 복음을 보여주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언어입니다. 온갖 유형무형의 폭력과 억압으로 자신의 권력을 움켜잡으려는 사람이 어떻게 더불어 사는 ‘평화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가난한 이의 작은 것마저 빼앗으려 혈안이 된 사람이 어떻게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내어놓는 ‘섬김과 나눔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추악함을 감추는 것도 모자라 악을 선이라고, 더러움을 깨끗함이라고, 어두움을 빛이라 강변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리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어느 것도 줄 수 없는 기쁨, 희망, 사랑, 정의, 평화를 복음 안에서 찾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보여 주지 못하는 사람이 단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믿음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신앙생활로 초대하는 것은 위선이며 사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를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복음 선포의 사명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복음화 된다는 것은 단지 성사생활이나 개인적인 신심생활, 또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수행하는 다양한 사도직활동에 충실한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복음화 된다는 것은 복음을 사는 것입니다. 개인적 집단적 이기심과 탐욕을 버리고 더불어 함께 사는 것입니다. 개인적 사회적 악에 희생되고 고통 받는 이들과 연대하여 선과 정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재물과 권력의 우상숭배를 단호히 거부하고 하느님만이 주님이시라고 힘차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스스로 쳐놓은 거룩함과 안락함의 울타리를 허물고 세상을 복음으로 물들이는 것입니다.
복음 선포는 사람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단지 사회 제도 몇 가지를 바꾸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변화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끝이 보이지 않는 머나먼 길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 그러나 완성의 그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야 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일구어나가는 고된 여정입니다. 이 여정 한 가운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대로 이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부르셨기에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통해 복음을 드러내야 합니다. 오늘은 주님께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 것을 기억하기에 기쁘고도 감격스러운 날입니다. 동시에 아직도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복음과는 거리가 먼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부끄러운 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믿으시며 희망하시기에 복음 선포라는 거룩하고 귀한 사명을 맡기신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우리 자신이 나날이 복음화 되어 온 누리 모든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온 삶을 정성껏 봉헌하기를 다짐하는 또 하나의 첫 날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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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하느님의 선물이자 은총으로….
제가 첫 주임 사제로 광주 월산동 성당에서 신자들과 함께 사목할 때, 25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선교 활동하시다가 처음으로 한국으로 휴가를 나오셨습니다.
부탁을 드려서 미사 중에 특강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미사 시간에 제일 앞자리에 백발에 노인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수녀님의 아버님이셨습니다.
그러자 그 수녀님의 특강 첫 마디가 그 백발노인을 가리키며 “저는 주님 때문에 저 아버지께 불효한 자식입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수녀님의 아버지는 아내를 일찍 세상을 떠나보내고, 오직 사랑하는 딸을 위해서, 그 딸 하나만을 바라보며 남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딸은 아버지에게 있어 아버지의 생명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집가야 할 나이에 그 딸이 아버지께 “수녀가 되어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나고 싶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 순간에 아버지는 정신 줄을 놓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정신을 차리고 어떤 말로도 딸을 설득시킬 수 없었고, 딸의 뜻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딸이 수녀원에 입회(들어갈 때) 때 찾아가서 그곳에 계신 수녀님들과 딸을 앞에 놓고 한탄하십니다.
“무엇이 저렇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도대체 무엇이 딸의 가슴에 불을 저질렀을까요?
사람이 한 짓이요? 하느님이 한 짓이요?
하지만 사람이 한 짓은 분명 절대 아니요. 그렇다면 분명 하느님 짓이요. 내 딸의 가슴에 불을 저지른 것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그러니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그 수녀님은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으신 후에 25년간 아프리카에서 살면서 그 지방에 생기는 모든 병에 걸리고 뱀에게도 불리고 전갈에도 물었답니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습니다.
그래서 아프고 힘들고 어려워서 포기하고 싶을 때는 아버지가 한 말을 기억했답니다.
“내 딸의 가슴에 불을 놓은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요.”
하오니 오늘 저와 고운님들이 믿는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항상 함께 계심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저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셨고, “저희와 약속하신 내용”을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저희가 해야 할 일이란?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을 “임마누엘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시면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악마를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에,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날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해 힘들었던 절망적인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좌절과 실망을 안고 고향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들려주시고, 빵을 나누어 주셨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지금 고운님들 중에 실망과 좌절을 갖고 계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또한, 남모르는 십자가의 고통을 안고 사는 고운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23편을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예수님을 만나서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고통과 기쁨의 길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고통과 기쁨은 한 몸입니다. 고통의 길 안에 기쁨이 있고, 기쁨의 길 위에 고통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고통의 길도 기쁜 마음으로 걸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낮은 하루의 절반, 밤도 하루의 반쪽, 그래서 낮과 밤이 합하여 하루가 됩니다.
손바닥과 손등이 합하여 손이 되고, 동전 앞 뒷면이 합하여 화폐가 됩니다.
장점은 분명 장점인데 뒤집으면 단점이 되고, 분명 단점인데 또 뒤집으면 장점이 됩니다.
고통과 기쁨은 한 몸,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합하여 선을 이루는 하느님의 선물이자,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중요한 것은 “이 하느님의 선물, 하느님의 은총이 죽는 순간까지도 고운님들에게 베풀어진다.”라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매 순간 고운님들 모두에게 감사가 넘치는 시간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세상 끝날까지 하느님의 선물을 받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으니, 고운님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자녀들의 회복을 위한 치유의 은총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께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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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90)
♧♧ 시편 56편 5절….
"하느님 안에서 내가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의지하여 두려워하지 않으니 살덩이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 그분의 말씀을 찬양하고...
여기서 ‘그분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선택하신 백성의 하느님이 되시고, 당신의 백성이 당신에게 부르짖을 때 반드시 응답하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지금 자신이 환난 가운데 처해 있지만, 이것도 하느님의 섭리의 결과이며, 따라서 언젠가는 자신을 환난 가운데서 건져 내실 것을 굳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자세는 의인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역사를 믿는 굳건한 신앙인의 자세이므로 그러한 이에게는 늘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천양이 끊이지 않기 마련입니다.
* 살덩이가 나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살덩이가...’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비되는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나약한 인생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다윗을 핍박하는 원수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은 자신을 위협하는 많은 필리스티아인들에게 둘러 싸여 지내면서도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살덩이 가진 자, 즉 나약한 인간일 뿐이므로 그들이 다윗에게서 취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윗의 육체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불 때, 다윗은 이미 자신의 목숨을 하느님께 내어 맡긴 순교자적 마음 자세를 지니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오 10장 28절).”라는 말씀이 다윗의 신앙 자세였던 것입니다.
♧♧ 시편 56편 6절….
"그들은 온 종일 제 말에 트집을 잡으며 그들의 모든 생각은 저를 해치려는 것뿐입니다."
이 구절은...다윗에 대한 필리스티아인들의 적대감을 잘 나타내 줍니다. ‘트집 잡다...’라는 말은 본래 ‘비틀다,’ ‘불쾌하게 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즐겁지 못한 격정이나 흥분, 근심, 괴로움 등으로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는 것, 즉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혼란하게 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이마도 필리스티아인들은 다윗이 아키스에게 무슨 말을 하든 그 뜻을 의심하며 나쁜 쪽으로 해석하려 들었을 것입니다(사무엘 상권 29장 1-11절. 참조).
♧♧ 시편 56편 7절….
"함께 모여 엿봅니다. 저의 목숨을 노리면서 그들이 제 발자국을 살핍니다."
* 함께 모여 엿봅니다. 저의 목숨을 노리면서...
‘엿보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다리다.’ ‘기대하다.’라는 의미로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계속적으로 줄기차게 참으며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필리스티아 사람들이 다윗의 생명을 해하려고 줄기찬 노력을 계속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 제 발자국을 살핍니다...
‘제 발자국...’은 ‘발뒤꿈치의 움직임’ 또는 ‘종적’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원수들이 다윗의 일거수일투족을 늘 지켜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필리스티아 사람들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24시간 내내 다윗의 행위를 감시하며 비방할 거리를 찾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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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님]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오늘의 복음이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실천이 이제부터는 하늘을 위해서나 땅의 모든 민족을 위해서나 하느님을 향한 결정적 길이라고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배워 실천하면서, 예수님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치겠다는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의 결의(決意)도 담긴 오늘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宣敎)에 대해 생각하는 날입니다. 유럽중세 사회는 그리스도신앙을 근본 이념(理念)으로 받아들인 사회였습니다. 유럽 사회가 아시아를 알게 된 것은 16세기, 교역(交易)을 위한 상선(商船)과 더불어 선교사들이 중국과 일본에 오면서였습니다. 그 시대 유럽의 기술 문명은 아시아의 것보다 우월하였습니다. 유럽 출신의 선교사들은 기술 문명의 우월함과 백인이라는 민족적 우월감에 젖은 시선으로 아시아 현지의 종교들을 보았습니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 중세의 격언(格言)은 그들에게 만고(萬古)의 진리로 생각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보기에 아시아의 종교들은 모두 미신(迷信)에 불과하였습니다. 선교는 구원받지 못할 불쌍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말씀을 전하는 시혜(施惠)적인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들의 복음 선포는 우월감에 젖어 있었고,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오늘도 거리나 전철 안에서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독선적 태도에서 우리는 그 우월감과 그 권위주의의 잔재(殘滓)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우월감과 권위주의는 19세기에 들어오면서 타민족을 지배하는 식민주의(植民主義)로 표현되었습니다. 유럽 각국은 경쟁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식민지로 삼으면서 그것이 원주민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19세기에 유럽 문물(文物)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한국과 중국을 식민지화하려 했던 것은 유럽의 식민주의에서 한 수 배운 소행이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식민주의가 퇴색하면서, 유럽의 신앙인들은 처음으로 편견 없이 아시아의 문화권을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술문명에 있어서는 유럽 사회보다 뒤졌었지만, 정신문화에 있어서 아시아는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같이 열등하지 않을 뿐 아니라, 깊은 영적 가치들이 살아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유럽중세의 격언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도 발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에만 구원이 있다는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거부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하느님 안에 하나로 모으지 못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을 보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목자 없는 양떼 같다.’(마르 6, 34)고 비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사람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믿고 가르쳤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죄인이고 하느님이 버리신다고 가르치던 유대교였습니다. 예수님은 그 죄인들과도 어울리면서, 옹졸하고 배타적인 유대교의 집단(集團)이기주의(利己主義)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셨습니다. 예수님에게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위하고, 아끼고, 배려하는 아버지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신앙인이 아니면서도 신앙인보다 더 관대하게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보살핌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선교(宣敎)는 사랑과 섬김이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고, 보살핌을 실천하는 데에 인간의 참다운 자유(自由)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입니다.
어느 종교(宗敎) 혹은 어느 교파(敎派)에 속하는 신앙인이 되느냐는 문제는 각자가 사는 환경과 관계있습니다. 길에서 보험 가입을 권유하듯이 신앙으로 유인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사랑과 섬김의 실천, 곧 보살핌을 스스로는 실천하지 않으면서, 이웃에게 신앙을 권할 수도 없습니다. 복음화(福音化)는 교세확장(敎勢擴張)이나 신자배가(信者倍加) 운동과 같은 단어로 표현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업이 기업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사세확장(社勢擴張)하고, 제품 판매 배가(倍加)운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교나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사랑과 섬김을 배워서 실천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위해 사랑과 섬김을 표현하고 있는지, 또 보살핌을 실천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국방부(國防部)가 알아서 결정하고 만들 해군기지(海軍基地) 조성을 가로막고 나서서 시위하면서, 그것이 신앙인의 의무(義務)라고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국방이나 국제 관계 전문가가 아닙니다. 특정 기업(企業)의 노사(勞使) 문제에 개입하고, 소요(騷擾)를 부채질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의 행동 양식은 사랑과 섬김입니다. “사랑은 너그럽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1고린 13,4)는 바울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성토하고 비난하는 폭력은 정치적 편법(便法)입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마태 5,13) 결과가 어떻게 된다는 복음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강자(强者)가 승리하고, 다스리고, 통치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배려와 보살핌을 소중히 생각합니다. 동물에서 진화(進化)하여 인류가 출현하는 데에 배려와 보살핌이 결정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최근 어느 진화론 학자의 연구 발표도 있습니다. 보살핌이 인류 진화를 이끈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는 배려와 보살핌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는 배려가 하느님이 인간을 판단하시는 결정적 기준이라고도 가르쳤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루가 10, 29-37)는 궁지에 빠진 이웃을 정성껏 보살펴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신앙 공동체는 이웃을 위한 배려와 보살핌을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화를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내세(來世)를 위한 보험가입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현세에서도, 내세에서도 잘 살아 보겠다는 처세술(處世術)도 아닙니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노력하는 신앙인은 하느님이 사랑이고 섬김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에게 배워서, 이웃을 보살피는 실천을 하면서 그것이 인간 생명을 참으로 자유롭게 사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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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이 책의 작가처럼 특별한 내용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남들과 다른 생각이 담겨 있지 않는다면 어느 출판사에서도 그 글을 받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즉,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만약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직장에 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들었다.’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만 계속 반복되면 어떨까요? 자신의 특별한 생각 없이 이렇게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만을 반복한다면 어느 출판사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의 관심을 끌만 한 특별한 내용이 있어야 책도 낼 수 있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겠지요. 우리의 생각에 대해 떠올려 보셨으면 합니다. 내 생각들은 책으로 낼만큼 소중한 것일까요?
사실 쓸데없는 생각으로 우리는 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특히 내 이야기가 아니라 남 이야기를, 좋은 이야기가 아닌 부정적인 나쁜 이야기를 머릿속에 담곤 합니다. 이런 생각들을 과연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생각을 내가 만드는 것이라면 이제 다른 생각들로 내 머릿속을 채워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까지도 다 헤아리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생각에 관심을 가지고 봐주실까요? 따라서 어떤 생각을 간직해야 할지를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기쁘게 보실만한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의심이나 미움 등의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굳은 믿음과 따뜻한 사랑 등의 긍정적인 생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승천 직전에 제자들을 만나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결정적인 부활까지 목격했지요. 그런데도 그들 중에 “더러는 의심하였다.”라고 복음 사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까지 목격했어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의 나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부인한 베드로나 달아난 다른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인데도 가만히 둡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명을 주시지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한 제자들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사명을 주시지요. 포기하는 마음으로 그냥 하신 말씀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충분히 가능하므로 해야 할 일을 직접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용기의 말씀을 해주신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기에 우리는 어떤 것도 다 할 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생각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몸을 통해 가장 멋진 이야기를 주님과 함께 만들어내야 할 것입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나열되는 나쁜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세상 끝까지 선포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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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
이 세상에 악이 너무 많다면서 불평불만을 던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서 왜 하느님께 이 악을 그냥 놔두냐고, 혹시 하느님께서 너무 약하고 무능한 분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악령도, 악한 것도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라는 선물로 그분께 대항하는 타락한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스스로 악해지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로 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는 곧 하느님 것이 아닌 것을 선택하는 행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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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동생과 함께 작은어머니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작은어머니는 장롱 위에서 사브레 과자를 꺼내서 하나씩 주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1975년도에 출시되었다고 합니다. 맛있는 과자는 한꺼번에 먹기보다는 하나씩 맛을 음미하면서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가격도 비싸지만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어릴 때는 ‘보물’도 많았습니다. 깡통에 가득 담긴 구슬, 종이 상자에 담긴 딱지, 정성스레 모았던 우표도 보물이었습니다. 그걸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그걸 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좋은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꺼번에 하룻밤에 다 읽는 것도 좋겠지만, 어떤 글은 다 읽어가는 게 아쉽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담으며 천천히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입니다. “강을 막고 산을 깎아 돌진하는 것만이 인생은 아니다. 여기저기 묻혀 있는 소중한 것을 정성껏 파내어 쌓는 것 또한 인생이다.”
‘포노 싸피엔스’를 읽으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는 생활에 도움을 주는 도구(어플, 앱)들이 많습니다. 새롭게 배우는 것이 귀찮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적응하기가 어려워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도구를 찾아서 스마트 폰에 저장하니 생활이 편해졌습니다. 처음에 저장한 도구는 우버였습니다. 택시를 잡기도 어렵고, 말로 설명하기도 어려운데 우버는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면 왔습니다. 신용카드로 결제되기에 말썽의 소지도 없습니다. 몇 번의 손놀림이 가져다준 선물입니다. 다음에 저장한 도구는 ‘MTA(기차 탑승권 구매)'입니다. 한국의 코레일 어플과 비슷하였습니다. 굳이 역으로 가지 않아도 손놀림 몇 번으로 원하는 기차를 예약할 수 있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오늘은 전교주일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이웃에게 전하는 겁니다. 복음의 기쁨은 신문과 방송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인터넷 검색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신문, 방송, 인터넷은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를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저의 글도 인터넷이라는 고속도로에 올라가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빠른 속도와 많은 정보가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런 방법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하는 건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인터넷 검색으로 복음의 기쁨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검색으로 정보를 알 수는 있지만, 검색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변화시키기는 건 쉽지 않습니다.
복음의 기쁨을 전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삶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삶으로 드러내는 겁니다. 이 방법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효과가 금세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고, 사도들이 배운 방법이고, 선교사들이 전한 방법입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삶입니다. 친구가 오 리를 가자고 하면 십 리를 가주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는 삶입니다.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는 삶입니다.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는 삶입니다. 용서받기보다는 용서하는 삶입니다. 화려한 꽃이 되기보다는 어두운 땅속에서 양분을 찾는 뿌리의 삶입니다.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지만 열매를 맺는 분은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갖는 삶입니다.
진실한 삶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자매님 생각이 납니다. 시부모님을 정성껏 모셨습니다. 시부모님도 며느리 자랑을 늘 하였습니다. 아이들을 잘 키웠습니다. 마음도 반듯하고, 생각이 깊고,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남편이 결혼기념일에 꼭 갈 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근사한 식당을 예약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간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남편은 결혼기념일 선물로 예비자 교리 신청서를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당신이 시부모님을 정성껏 모셨고, 우리 아이들을 잘 키워주어서 고마웠습니다. 그런 당신이 가장 기뻐할 선물은 내가 당신을 따라 성당에 가는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비자 교리 반에 등록했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선물이 고마웠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남편이 세례를 받기까지 18년이 걸렸습니다. 엄마의 발표를 뒤에서 응원하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손녀를 키우면서 복음을 전하던 어르신도 생각납니다. 어르신은 동네에 누가 이사 오면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간단한 선물도 준비하였습니다. 새댁이 이사 왔으면 살림에 관한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입니다. 물난리가 났고, 어르신은 손녀를 업고 가재도구 청소를 도왔습니다. 우연히 방송에서 할머니의 모습이 전해졌습니다. 부산에서 살던 며느리가 남편에게 창피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어머니에게 전화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봉사하는 건 좋지만 손녀를 업고 하지는 마세요.” 어머니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싫으면 아이를 데리고 가라. 이 아이가 어려서 남을 돕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느냐?.” 아들과 며느리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이기적이었던 자신들의 마음을 반성했다고 합니다. 할머니의 등에 업혔던 손녀가 지금은 누군가를 위해서 짐을 들어줄 것 같습니다.
우리는 미사 때 이런 말을 많이 듣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응답을 합니다. ‘또한, 사제의 영과 함께!’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들과 함께 계셨는지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 장애인, 죄인, 이방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께 대접할 것도 별로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들에게 보답을 받으신 것도 없었습니다. 사제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했던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신자들도 바로 주님께서 함께했던 사람들과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민족의 복음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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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위대한 복음 선포의 사명>
-아름다운 선교사의 삶-
오늘은 연중 제29주일이자 제93차 전교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너 나할 것 없이 우리 믿는 이들의 참으로 위대한 사명이 복음 선포의 사명입니다. 참으로 우리 모두 아름다운 선교사의 삶으로 불림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
사랑할 때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사랑의 선교사들이 아름답습니다. 참으로 인생을, 교회를, 세상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교회, 아름다운 세상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랑의 선교사들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어제 아름다운 ‘사랑의 선교사’ 자매님의 진솔한 메시지도 감동이었습니다.
-“아멘, 떠오르는 태양의 무한한 기를 받아 저도 행복을 전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좀 더 성숙하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저이기를! 예수님 편에서 믿음을 담대히 전 할 수 있는 저이기를! 사랑하는 신부님! 덕분에 저도 사랑을 전하는 수산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의 삶에서 존재 자체로 행복을 전하는 이가, 사랑을 전하는 이가 참으로 위대한 복음 선포의 사명을 다하는 아름다운 선교사입니다. 제 주변에는 이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랑의 선교사 자매들이 많습니다. 우리 요셉 수도원을 사랑하는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 코이노니아 자매회 자매들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저에게 오늘 날 최고의 아름다운 선교사 한 분을 꼽는는다면 지체없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꼽을 것입니다. 참으로 존재 자체가 한결같은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선교사의 삶입니다. 제93차 전교 주일 교황 성하의 담화문 일부를 소개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느님, 곧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맺는 친교를 통하여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한 생명은 상품이 아니라-우리는 개종 권유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내어 주고 전달하며 선포할 보화입니다. 바로 이것이 선교의 의미입니다.
저는 언제나 선교사이고, 여러분도 언제나 선교사입니다.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선교사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멈추어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에게 매료되며 또 다른 이들을 매료시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을 다른 이들에게 내어 주어 생명을 낳는 관계를 맺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그 어떤 쓸모없고 무의미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열매이기에 모두 세상의 선교사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선교사의 삶입니까? 이것이 우리 삶의 본질적 존재이유입니다. 안으로는 제자요 밖으로는 사도입니다. 안으로는 수행자요 밖으로는 선교사입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선교사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배우십시오.
공부하십시오.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평생학인이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모습이 공부하는 모습입니다. 우리 삶은 사랑의 학교이자 배움의 여정입니다. 무엇보다 필생공부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공부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이런 평생 공부를 통해 무지로부터 비로소 해방됩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그러니 자주 규칙적으로 끊임없이 모이십시오. 모여 하느님의 가르침을, 말씀을 배우십시시오. 이사야서 말씀은 그대로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 지금 미사가 거행되는 여기가 주님의 산이자 하느님의 집이고, 시온이자 예루살렘입니다. 우리 민족들 사이에 재판관이 되시고 모든 백성들 사이에서 심판관이 되시는 주님께서 몸소 집전하시는 미사입니다. 이사야의 빛나는 평화의 꿈은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둘째, 부르십시오.
기도하십시오. 고백하십시오. 사랑하는 주님을 부르십시오. 사랑하는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주님을 고백하십시오. 매일, 평생, 끊임없이 말입니다. 함께 부르고 기도하고 고백하면서 형성되는 형제애의 친교 공동체입니다.
이런 형제애의 친교 공동체는 그 자체가 빛나는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교회공동체, 수도공동체가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고백은 얼마나 고무적인지요!
“우리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셨다고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곧 마음으로 믿어서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습니다.
유다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중국인 사이에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에서 제외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에게 활짝 열린 구원의 문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우리 수도공동체는 하느님께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를 거행하고 주님을 부르고 노래하며 주님께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고백합니다.
오늘 화답송 시편 98장은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이렇게 매일 하느님을 부르며 찬미와 감사의 기쁨으로, 하느님 맛으로, 말씀 맛으로, 기도 맛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이런 찬미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사랑의 찬미와 감사입니다. 이런 사랑의 찬미와 감사가 참으로 아름다운 형제애의 친교공동체를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닫게 해주니 저절로 그 공동체 자체가 복음 선포가 됩니다.
셋째, 전하십시오.
자연스런 전개 과정입니다. 친교와 선교는 함께 갑니다. 친교는 선교의 꽃으로 피어나고 선교는 친교를 더욱 촉진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교회의 숨통입니다. 선교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아니 교회가 아닙니다. 사랑과 생명은 나눠야 하며 나눌수록 풍성한 기쁨과 행복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선교사로 삶의 현장에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선교를 명령하십니다. 우리 모두에 대한 하느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담박 드러납니다. 아마 하느님은 물론 예수님의 소원은 이 하나일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모든 민족들이 그 대상이며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하십니다.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닌 순리대로, 당장 세례나 개종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항구히 기다리고 인내하며 복음 선포의 본질적 사명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큰 위로와 격려는 마지막 확약 말씀입니다.
“보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어지는 교황님의 담화문도 은혜롭습니다.
“새로운 성령강림은 교회의 문을 활짝 열어 주어 어떠한 문화도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어떠한 민족도 고립되지 않으며 신앙의 보편적 일치에 열려있게 해 줍니다. 어느 누구도 자아도취에, 자기 민족과 종교의 아집에 갇혀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파스카는 세상과 종교와 문화가 편협함을 깨고 인간의 존엄성을 더욱 존중하도록 요청합니다.”
공존해야 생존입니다. 복음을 전함으로 사랑의 공존과 생존의 구원이 동시에 실현됩니다. 강은 흘러야 삽니다. 우리 믿는 이들 역시 부단히 주님께 배우고, 주님을 부르고, 그리고 주님을 전해야 삽니다. 생명과 사랑의 강처럼 복음을 전하면서 풍요로운 더불어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 은총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당신 사랑과 평화의 선교사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갑시다!”(이사2,5)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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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당신께서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또 하나의 그리스도이고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세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영세를 받은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있다면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많은 꽃들이 있습니다. 밤나무도 있고, 은행도 있습니다. 하찮게 여겨지는 들풀도 일 년에 한 번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 년에 한번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기를 희망합니다.
‘선교’를 하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나는 말주변이 없다. 아는 게 없다. 교리 지식이 없고 신앙이 부족하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런데 축구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축구를 해야 합니다. 공을 가지고 놀아야하고 훈련이 필요합니다. 피아노를 잘 치려면 그만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 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도 자꾸 읽어야 합니다.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선교를 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선교할 수 없습니다.
선교는 성령의 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교를 잘 하려면 선교를 해야 합니다. 주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사람을 안내하다 보면 안내하는 방법도 알게 되고 경험이 쌓이게 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심이 깊어지고 교리지식도 풍부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씀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필요이상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여러분, 삼척동자를 아세요? 잘난 척, 똑똑한 척, 있는 척입니다. 삼척동자는 전교의 걸림돌입니다. 이웃을 만날 때는 진심이 있어야 합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나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지식과 신심으로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13장 11절에서는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하고 선언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1코린1,17) 결국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
선교를 잘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풍기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믿음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을 보면서 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영양을 섭취하기 위해서 미사참례를 기도의 첫 자리에 놓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생명의 빵을 먹으면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하신 주님의 약속을 새롭게 일깨우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2장 4절에 보면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해야 합니다.
끝까지 인내롭게 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은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몇 번이고 반복해야합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 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교사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주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가정에 가끔은 ‘여호와의 증인’이 방문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대응하십니까?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나시기 바랍니다.
한 때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 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 하고 있고, 부유해 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홍보나 공연, 작품 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도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하느님을 전하는 것은 이웃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만이라도 남편도 좋고, 아내도 좋고, 친구에게도 좋고 이웃도 좋고 누구에게든 주님을 알리고 하느님에 관해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상대방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배려할 때 나의 가치도 존중받기 때문입니다. 안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부모와 함께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네 살짜리 꼬마가 말했습니다.
“엄마, 저는 나중에 신부가 되고 싶어요!”
“그래? 좋지! 그런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했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당에서 지루하게 가만히 앉아있는 것보다는 서서 떠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을 것 같아요!” @@
강론준비는 참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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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전교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들은 모든 세례받은 이들의 정체성을 일깨워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마태 28,17)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분부하신 산에서 스승과 제자들이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 공생활 시기에 함께할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친밀감에 앞서 경외감의 최고 예우를 드리는 걸 보니,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기점으로 인간 예수님의 신성이 더욱 강하게 각인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마태 28,18)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으셨지요. 그분은 엎드린 제자들을 다독여 안심시키고 일으키셨을 겁니다. 아마도 부활하신 당신이 예전에 함께 동고동락하던 "그"임을 다정히 확인시켜 주셨겠지요. "다가감!" 죽음과 생명이라는 신비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스승과 제자 사이의 거리감을 좁혀 줍니다. 또한 이 "다가감"은 파견될 이들이 배워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마치 빗장을 여는 단계로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모르던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분의 사람이 되는지를 반어적 의문문을 반복해 설명합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듵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10,14-15)
골자만 정리하자면, 파견된 이가 있어야 기쁜 소식이 선포되고, 그래서 누군가 그 기쁜 소식을 들을 수 있어야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받들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음화의 과정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의 다가감, 파견된 이의 다가감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에게, 모세에게,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하셨듯이 구원을 위한 선제적 초대이고 그분의 주도적 권한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제1독서는 세월이 흐른 미래 어느 날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환시 내용입니다.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 ... 모든 민족들이 그리로 밀려들고 수많은 백성들이 모여 오면서..."(이사 2,2-3)
참으로 희망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활기 가득한 장면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로, 그분의 성소에로 몰려들 모든 민족들은 "주님의 길, 주님의 가르침, 주님의 말씀"(이사 2,3)을 고대합니다. 한때 다윗 시대와 솔로몬 시대에 잠시 누렸던 영화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구원의 방향성이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을 세상의 중심이라 여깁니다. 그곳은 자기 민족을 선택하신 유일신, 창조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곳이기에 성역화와 치장, 보존과 수호에 힘을 쏟고 그 자부심도 대단했지요.
세계 만방에 하느님의 이름이 전해지는 벅찬 날을 꿈꾸되, 그런 지극히 높으신 분을 하느님으로 모신 선택된 민족, 자신들의 우월성도 드러나야 하고, 자기들 율법의 탁월함 역시 고스란히 지켜져야 하지요. 이처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모아들이고 끌어들이는 방향성은, 민족과 언어와 인종과 문화의 경계를 뛰어넘고 나아가서 이방 민족을 하느님의 자녀로 아우르는 예수님의 다가가는 방향성과 분명 결이 다릅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오늘의 이사야서 대목 안에서 그러한 민족중심주의가 극복되는 말씀이 눈에 띄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이사 2,4)
전쟁과 학살의 철제 무기가 더 이상 불필요한 세상, 살상 도구가 생명을 키우는 농기구로 거듭나는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리라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벅찬 광경인지요! 이 평화의 상태는, 일부 이기주의적 자본가와 권력가들의 폭력으로 침해받고 상처 입은 가치지만, 신구약을 막론하고 온 인류, 모든 이들의 바람이고 기원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이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둠, 선과 악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당신의 권한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의 권능은 닿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고 그분의 영광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화답송)
이 기쁨에 찬 초대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제자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 사람만이 아니라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즐거워하며 환호하라 하십니다. 차별도 구분도 소외도 배척도 없는 만물의 주인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다가가 전하고 함께 환호하며 찬미합시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셨으니 두려워말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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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매력 발산>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라."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감수하고 꾸준히
선교할때 복음의 씨앗이 쑥쑥 자라지요.
"성당 같이 가 볼래요?" 하며 ~
내가 복음 선포자라는 의식을 갖고 생활한다면
파견받은 사람의 향기가 자연스레 납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매력있어
뭔가 달라 ~ 나도 가볼래ᆢ하고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신앙의
빛이 되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이 교회의 매력이 되고
교회의 매력이 나의 매력으로 풍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복음은
폭발적으로 전파됩니다.
"예수님 닮은 매력 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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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라."(마태 28, 19)
어떤 기쁨
어떤 행복을
바라십니까.
하느님과 함께하는
복음의 기쁨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먼저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입니다.
거절할 수 없는
하느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복음화는
하느님 백성인
교회의 사명이며
교회의 존재목적
이기도 합니다.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는
그리스도의
최대 명령입니다.
복음화의 주체는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믿음을 따르고
나누는 것입니다.
바뀔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가치입니다.
구원의 신비는
이렇듯이
복음과 회개
믿음의 여정을
반복하며 우리를
이끕니다.
행복은 복음처럼
예수님처럼
나눔에 있음을
기억하는 은총의
전교주일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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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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