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책이 꼭 필요한 이유
학회에 참석하였다가, 다른 교수님들과 요즘의 문서추세 등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한 교수가 앞으로 학회 논문집이 종이책이 아닌 PDF파일로만 형성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앞으로는 종이책이 없어질 것이며, 모든 것이 PDF 전자문서로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 교수는 그 이유를 다양하게 설명하였다. 가령 “종이책을 만드는데 돈과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든다.” “도서관에 보관하기도 무척 어렵다.” “어차피 사람들은 앞으로 편리한 노트북이나 테블릿 등으로 손쉽게 볼 것이다”는 등의 이유를 말했다.
사실 이 말은 백번 맞는 말이다. 나 역시 많은 경우 논문을 쓰고 저술 작업을 할 때는 종이책을 사용하지 않고, 다운 받는 PC 속의 PDF자료를 이용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그 만큼 여러 가지 잇점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이책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사라져서는 안 된다. 종이책이 필요한 이유는 두세 가지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책을 읽는 다는 것, 즉 독서는 다만 ‘논문을 쓰거나’ ‘저작을 하거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유용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도 있겠지만, 독서란 어떤 의미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혼란한 정신을 휴식하게 하고 또 그 자체로 여가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나는 가끔 컴퓨터 작업에 싫증이 나면 책을 펴든다. 예전에 내가 읽었거나 쓴 것들을 다시 흩어보면서 내 눈길을 끄는 부분, 밑줄 친 부분 등을 다시 읽고 음미하면서 여유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거기다가 커피한 잔을 곁들이면 그 자체로 무언가 멋이 있고, 품위가 있음을 느낀다. 하지만 한 번도 컴퓨터 안의 PDF로 된 책으로 독서를 해본 기억은 없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둘째, 만일 모든 책들이 PDF의 문서로만 남아 있고 종이로 된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논문이나 책을 분명히 출간하였는데, 그 문서들이 바이러스나 헤킹 등의 이유로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직접 발표하거나 출간한 적이 있음을 증명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내가 쓴 책의 원본이 컴퓨터 기호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면, 이는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너무 손쉽게 그 내용을 변형할 수가 있을 것이다. 표절시비나 부적절한 용어나 개념을 사용하였다고 문제를 제기할 때, 혹은 날짜가 지난 것을 제시했다는 등의 이의를 제기한다면 증거자료를 제출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언제든지 변경 가능한 것이 PDF자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원본을 제출했을 때, 원래 것과 다르게 변경하였다고 하였을 때, 나의 결백함을 증명할 방법이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와 출간 일자가 분명히 명시된 종이책 한 권만 있다면 이 모든 갈등이나 다툼들이 해결 될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반드시 종이책은 존재하여야 하는 것이다.
셋째, 이러한 실질적인 아유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인간은 기계도 아니고 다만 이성적인 존재도 아니다. 인간은 감성을 가진 존재이고 느끼는 존재이다. 아무것도 없이 컴퓨터만 덩그러니 있는 서재나 책상은 삭막하기 그지없다. 비록 잘 읽지는 않아도 책상머리나 곁에 작은 책꽂이나 책장을 두고 내가 애호하는 서적 몇 권을 꽂아 둔다는 것은 심리적 정신적 건강에 매우 좋은 것이다. 비록 진하지는 않겠지만 은은한 책 향기는 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는 분위기를 제공한다. 그래서 반드시 종이 책이 존재해야하는 것이다. 아마도 모든 것을 전자 자료로 남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 속에는 그래서 그러한 모든 정보를 모든 것을 자기 손에 틀어쥐고 사람들을 볼모로 삼고자 하는 -- 그런 사람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이나 행동을 감히 누가 할수 있을겠는가! -- 무의식적인 권력욕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도 해 불 수 있을 것이다.
그 교수는 자기 학과의 대학원생이 논문을 PDF자료로만 제출하면 된다고 해도 학과사물실에 인쇄본을 제출하였다면서 그 학생에 대한 푸념을 늘어 놓았지만, 나로서는 그 학생이 백분 이해가 된다. 자신이 쓴 것을 정확하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무슨 자동차 보험도 아니고 평생을 좌우할 학위논문이라면 막연한 컴퓨터 속의 '일종의 가상의 실재'로 남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실재로서 남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야 안심이 되고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러한 인간의 자연적인 욕구나 권리를 무시하려고 하는지 현대의 기술은 참 이해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