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고령, 대가야유적지와 우륵박물관
2017.11.14
2017년 6월 15일 주일로 교회설립 50주년을 맞은 마산삼일교회가
그 옛날 교회 개척의 중심인물인 정주성 목사님과 함께 믿음생활을 시작했던 역정의 용사들로
삼일사랑회를 창립, 지난 11월 13일 1박2일 일정으로 그 첫 모임을 가졌다. 이 삼일사랑회는
마산삼일교회의 첫담임교역자이자 첫번째 당회장이셨던 정주성 목사님이 마산삼일교회를 시무하셨던
1967년부터 1980년까지 사이의 마산삼일교회를 섬겼던 성도들 중에서 본 모임을 원하는 성도들로서
모임을 가졌는데 이번 첫 모임에서는 약 40여 명이 마산삼일교회에 모여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
부곡 레인보우호텔로 가서 구수한 옛이야기들과 은혜받은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다음날인 14일은 마산삼일교회가 제공하는 교회버스로 대가야의 얼이 고여있는 경북 고령으로 옮겨
대가야박물관과 대가야고분군, 그리고 대가야를 빛낸 위대한 악성인 우륵을 기념하는 우륵박물관 등을
관람한 후 마산삼일교회로 되돌아가, 내년 11월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대가야박물관과 고분군 그리고 우륵박물관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옮겨 실어 본 것이다.
대가야박물관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대가야로 1203번지의 이곳 대가야박물관에는 대가야시대의 각종 유물과 함께
7백 여기의 대가야고분이 바로 뒤에 있는 주산의 온 산을 가득 메우고 있다.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경상도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 등의 6가야가
병존하던 시절, 왕이 죽으면 가까이서 모시던 신하와 비빈, 궁녀들까지 함께 산채로 묻혀 순장을 하였다고 한다.
대가야의 수도였던 이곳 경북 고령지역에서 대규모 고분이 발견되었는데 발굴해 보니 실제로
왕의 무덤과 함께 여러 개의 순장무덤과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당시 무덤을 덧널이라고 했는데
왕의 무덤인 으뜸덧널은 너비 1.2 미터에 높이 2 미터 정도로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5.6:1이다.
상부의 돌벽과 덮개돌을 구덩이 위로 올라오게 만든 반지하식의 구조로써 바닥에 꺽쇠가 있어 나무 널을
넣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많은 겨묻거리가 도굴로 인해 사라졌지만 장신구, 문구, 말갖춤,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먼저 장신구인 금동제 관모장식과 금은재 귀걸이는 왕이 직접 착용한 것으로 보인다.
무구로는 철판토구, 비늘갑옷, 쇠창, 큰칼, 작은 칼, 화살촉 등이 있다. 말갖춤으로는 말얼굴가리개, 재갈,
금동과 쇠로 만든 발걸이, 기꽂이, 꾸미개 등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쇠낫과 살포, 꺽쇠 등이 확인된다.
토기로는 바리모양 그릇받침을 비롯 짧은 목항아리,두껑접시, 굽다리손잡이 달린 항아리, 두껑 등이 있다.
그 외에 가락바퀴가 1점 출토 되었는데 아마도 왕을 모시기 위해 순장된 시녀의 것으로 추정된다.
어린 왕자가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동관
고령지역 도요지 출토 유물들
반룡사 다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17호)
이 석탑은 검은색의 정판암으로 된 납작한 옥개석(지붕돌)만 층층이 포개놓은 모양으로써
가장 위에는 석영으로 된 탑장식이 있고, 모두 12층의 옥개석과 그 아래에 연꽃이 돋을새김된
기단 덮개들이 2매 있다. 탑을 받치는 기단은 화광석을 이용하였다.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보여진다.
말을 탄 무사
대가야인의 옷차림
석등
문인석 기타출토품
철의 왕국 대가야
대가야가 국력을 키우고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데는 철의 생산과 유통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대가야는 '철의 왕국'으로 불릴만큼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하였고, 이를 통해 여러가지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했으며 수출까지 하였다. 대가야의 주요 철산지는 합천 야로와 쌍림면 용리 등 미숭산(734미터)
기슭으로 추정된다. 특히 야로의 철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나라에 세공을 바쳤을 만큼 품질이 좋았다.
지금도 야로와 쌍림의 제철유적에서는 철광석을 녹이기 위한 제련로의 파편과 철광석을 녹일 때 나오는
슬래그(쇠똥)가 많이 흩어져 있고 철의 우너료가 되었던 철광석과 사철 등이 채취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철을 제련하던 '제철로'의 모형이다.
고령 지산리 고분군(사적 제79호)
지산리고분군은, 고령읍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고령의 진산인 주산의 남동쪽 능선과 가지능선을 따라
줄지어 축조된 대형분과 경사면에 축조된 중,소형분 등 7백여 기가 밀집 분포되는 가야지역 최대규모의 고분군이다.
주산 정상부에는 대가야시대의 석축산성인 주산성이, 동쪽 기슭에는 대가야 궁성지가 위치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대가야의 왕과 왕족, 귀족들의 무덤이 분포하는 핵심고분군이 분명하다. 1977년 지산리 44호분과 45호분을 시작으로
봉토분 10기와 주변지역에 대한 발굴조사로 고분군의 성격이 일부 밝혀져 대가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특히 지산리 44호분은 으뜸돌방을 중심으로 남쪽과 서쪽에 딸린 돌방과 그 둘레에 32개의 순장덧널이 배치되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확인된 규모의 순장무덤이다. 45호분에서도 11기의 순장 덧널이 확인되어 순장문화를
실증적으로 밝혀주고 있다. 발굴조사를 통해 금동관과 금동관장식품, 금귀걸이 등의 화려한 장신구와 함께
철제무기류, 마구류, 토기류 등 소위 '고령양식'의 유물들이 출토되어, 예술성과 실용성을 겸비한
대가야문화의 우수성과 세계문화유산으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지산동 30호분
지산동 30호분은, 주산 남동쪽 능선 자락의 끝에 단독으로 자리잡고 있는 고총고분으로써
5세기 중엽 대가야 지배층의 분묘이다. 크기는 동서 18 미터, 남북 15 미터이며, 남아있던 봉토의 높이는
1.5 미터였다. 1994-95년에 영남문화재연구원에의해 발굴조사 되었는데 그결과 으뜸돌방 및 딸린 덧널이
Τ자 모양, 순장덧널 3기가 ㄷ자 모양으로 동남북쪽에 배치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특히 가야지역 고분에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 으뜸돌방의 바닥 아래에 하부덧널이 확인되었다.
남동쪽 경사면 등고선 방향으로 구가 둘러져 있는데 이곳에서 발견된 토기는 제의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유물들은 바리모양 그릇받침과 목긴 항아리, 손잡이 딸린 항아리,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류와
덩이쇠, 말갖춤새, 금도오관 등 다양하다. 한편 하부덧널 덮개돌에 새겨진 바위 그림은 선사시대까지
신앙의 대상이었던 바 위그림이 더 이상 신상대상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하였음을 추정케 한다.
우륵박물관
고령지역은 남해안에서 낙동강을 이용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어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중요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교역을 원할하게 할 수 있었고 선진문물의 흡수도 다른 가야국들에 비해 빨라서
5세기 후반경에는 가야의 여러 소국들 중에서 가장 강력하게 성장하였다. 대가야의 중요교역품은 합천 야로지역에서
생산되는 쇠와, 안정된 농업기반을 바탕으로 생산된 농산물 등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음악예술을 향유하였다.
우륵은 이러한 대가야가 배출한 우리나라 최고의 악성이자 고구려의 왕산악, 조선 세종 때의 박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악성으로 꼽히는 위대한 인물이다. 우륵박물관은 대가야박물관에서 2 ㎞쯤 떨어진 곳에 있다.
금장지(가야금을 만들던 곳)
우리 국민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전통악기 중의 하나인 가야금은 1천5백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전통악기로
대가야 사람의 전통과 얼이 담겨 있다.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연주한 이곳은 정정골이라 불리는데
우륵과 제자들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우륵박물관이
위치한 이곳,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가야금길 98번지는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고 연주했던 곳이다.
악성 우륵
우륵은, 대가야 가실왕과 신라 진흥왕(534-576) 당시 악사로 활약한 가야금의 명인이자 시조이다.
대가야 성열현에 살다가 가실왕의 부름을 받아 도읍(고령)으로 옮겨 궁중악사로서
가야의 음악과 춤, 노래 등을 통합발전시켰다. 우륵은 당시 전해지고 있던 여러 형태의 현악기를
오늘과 같은 가야금으로 만들었으며 가야 각 지역의 향토성 짙은음악을 고급예술로 승화시킨 악성이다.
대가야가 매우 혼란해지자 신라로 망명한 우륵을 진흥왕은 국원(충주)에 안치시키고
신라의 음악과 춤, 노래 등을 신라의 궁중음악인 대악으로 채택하여 우리 음악의 큰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마산삼일교회 첫 담임교역자이셨던 정주성 목사님(좌)과 본회 초대회장이자
개척당시 고등학생 신분의 동네주민으로써 교회를 출석하였고 고려신학교를 졸업, 목사가 되신 최용근 목사님
나에게 있어서는 당시 내가 맡아서 해왔던 주보 필경 및 발행의 바톤을 이어받아 준 고마운 후배이다.
신창동 현악기유물들
18현 가야금
25현 가야금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