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뒷짐 져도 좋다
영락없는 내 그림자다. 머리 위에서 사선으로 쏟아진 빛에 밀린 그림자가 따라오는 듯하다. 내 키의 절반에 가까운 축소판이다. 뒷짐 진 내 뒤에서 손자 역시 뒷짐 지고 따라오고 있다.
“닮아도 저리 닮을까? 외할아버지 뒷짐 지는 것까지 닮다니.”
외손자가 와서 바닷가를 한 바퀴 돌고 왔다. 앞서가는 나를 뒤따르는 아이의 뒷짐 진 모습이 하도 재밌어서 할망이 폰사진으로 잡은 모양이다. 그 사진을 내게 디밀며 추궁이다. 그림 속의 할배와 손자는 누가 봐도 ‘피는 못 속여’ 하며 한소리하게 생겼다. 실루엣이 똑같고, 디테일한 모양새마저 그렇게 유사할 수가 없다. 머리는 치켜들고, 어깨는 굽었으며, 팔은 뒤로 돌려 마주 잡은 꼴이 너무나 닮아 웃음까지 치밀게 한다.
제 어미도 어렸을 때는 그랬다. 애비를 따라 뒷짐 지고 다녀 아내는 늘 성화였다. 아내는 여자아이가 뒷짐 지는 게 영 싫었던 모양이다. 두 부녀가 같은 모습으로 걷고 있다며 내게 타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흉내 내도록 그러고 다닌다는 투정이었다. 평소 아내의 이야기를 무시하거나 듣기 싫어한 것도 아닌데,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 덕에 한참을 지청구 속에서 지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사랑채에서 서책을 보다가 몸에 무리가 오면 뜰로 내려 마당을 서너 바퀴 걷는 것으로 굽은 허리의 긴장을 풀었다. 몸의 바른 자세를 위해 수시로 걸으면서 뒷짐 진 자세를 허용했다. 그러나 자주 그런 자세를 드러내거나 어른 앞에서 보이면 단호히 꾸지람이 있었다. 어쩌면 어른들의 의식 속에는 ‘배’는 불경,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배가 맞다’, ‘배가 아프다’, ‘배를 내민다’, ‘배를 앓는다’, ‘배를 튕긴다’, ‘배알이 꼴린다’, ‘배알이 뒤집힌다’, ‘배가 남산만 하다’, ‘배를 채운다’와 같이 ‘배’는 불경과 직결되어 있었다. 유교의 잔 그늘이 남은 탓인지는 몰라도 점잔을 챙기는 분들은 이토록 뒷짐 지는 자세를 거북해하며 멀리하고자 했다. 속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린 어른들은 어지간하면 참아내는 것이 된 사람의 길이라 여겼다. 젊은 것이 배까지 내밀고 뒷짐을 졌으니 꼴불견으로 보았을 게 뻔하다.
나의 뒷짐 지기도 나이 들며 점차 뜸해졌다. 취업하여 선임자들의 눈치 속에서 지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없어졌다. 그들은 젊은것이 버르장머리 없이 뒷짐 진다며 힐난했다. 팔을 뒤로 돌리고 배를 쑥 내민 젊은 놈의 꼬락서니는 불경한 자세였을 것이다. 어른 앞에서는 반드시 손을 앞으로 모으고 허리는 조금 굽혀 조아리는 다소곳한 자세이길 원했다. 바로 ‘공손’ 자세이다. 양손을 들어 배를 감추고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그 손도 남녀가 유별하여 남성은 왼손을, 여성은 오른손을 위로하여 맞잡은 자세를 요구했다.
그러던 것이 서양의 제식 문화가 일본을 통해 들어오면서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동안 어른 앞에서 뒷짐 지지 못하도록 요구해 왔는데, 갑자기 이를 허용하는 문화가 도래했다. 학교에서는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가장 어른이신 교장 선생님 앞에서 ‘열중쉬어(뒷짐 져)’를 하도록 요구했다. 어른 앞에서 철벽같이 지키길 요구하던 공손 자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집에서는 어른 앞에서 뒷짐 지면 불호령이고, 학교에서는 구령으로 뒷짐 지기를 명령하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이 혼란 속에서도 아주 슬기롭게 대체해 온 민족이다. 요구하는 장소에 따라 적절히 맞추며 우리의 문화를 지탱해 왔다. 착각으로 반대쪽 행동을 취하여 곤란에 빠지는 무례함은 없었다. 맹목적으로 서양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 숭배하지 않았고, 우리의 것을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 물리치는 법도 없었다. 기존의 문화에 칼을 들이대는 어리석음이 없었고, 외래문화의 길목에 차단기를 내리는 옹고집 또한 없었다.
월드컵 축구를 보면서 아주 새롭게 바뀐 자세를 만난다. 상대를 이기겠다는 마음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선수들이 뒷짐을 지고 있다. 이 자세는 멈춤의 자세로, 움직여야 하는 선수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세이다. 최대한 빨리 움직여 공을 차지하고 상대의 골문을 흔들어야 하는 선수가 불구경이나 하듯 뒷짐 지고 있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생소하다. 상대 선수가 문전까지 쳐들어와 날뛰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런 모습은 이번에 처음 보았다.
물론 수비하다가 핸들링이라도 범하면 골과 매한가지인 페널티를 상납해야 하기에 미리 방지하려는 차원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전에는 보지 못하였던 모습이기에 이유를 찾아 나선다. 이 같은 핸들링의 위험성은 예전에도 있었다. 그때도 지금과 똑같은 처지였는데 그들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긴 시간을 두고 외국의 수비 방법을 받아들이기 위해 검증하였을 거다. 검증의 결과를 숙고하여 받아들인 수비자세이다. 상황에 따라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최고의 결과물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하다. 뒷짐 지기 수비 자세는 우리의 실용적이고 과학적인 판단의 결과물이다. 판단이 서면 상황에 따라 적절히 받아들이는 슬기가 있는 민족이 우리다.
지난 세월의 관습이나 행동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시대가 부르는 것이라면 ‘열중쉬어’도 해 보고, ‘뒷짐 지어’도 하면서 변화를 도모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타인에게 뒤처지지 않는 지혜이다. 욕심 하나 보탠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기존의 문화와 절충하며 상호보완을 위해 좀 더 슬기와 노력을 한데 모으는 부지런함이 있었으면 좋겠다. 변화된 세상을 읽지 못하고 언제나 같은 것만을 고집한다면 틀림없이 ‘꼰대’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나도 손자 녀석에게 ‘꼰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이제부터는 뒷짐 지는 것을 탓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학교에서 돌아와 댄스 교실에 가고, 골프 교실에 가는 손자에게 무슨 공손 자세를 요구하랴. 그 아이가 나보다 훨씬 변화에 잘 적응하고 있는데.
교수님 수필
첫댓글 뒷짐, 잘 읽었습니다. 불경이라는 유교적인 관습에서 벗어났지요. 학교에서 편안히 선자세, 축구에서 범실 막으려는 수비자세 등 실용적인 변화,
괜찮다는 글에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