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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지도서(輿地圖書) 慶尙道 禮安縣
〔新增〕 郭趪。 以淸儉明恕爲治。 李滉之刱立易東書院也, 趪爲置田畝, 又出官店良賤以屬之, 一鄕人士至今稱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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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록 2 / 유편(類編) / 향리에서의 생활
선생은 시골에 있을 때 나라의 세금이나 부역이 있으면 반드시 평민보다 앞서서 바쳐 한번도 늦어진 일이 없었다. 마을의 아전들도 선생의 집이 고관의 집인 줄 몰랐다. 선생이 언젠가 시냇가에 나와 앉았을 때, 마을의 아전들이 와서 말하기를,
“금년 잣나무 숲 감독은 진사 댁에서 맡아야 합니다.”
하자, 선생이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잣나무 숲이 시내의 동쪽에 있어서 선생의 집으로 하여금 지키게 한 까닭이었다. -김성일-
곽황(郭趪)이 선성(宣城 예안(禮安))의 수령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남에게 말하기를,
“이 고을의 세금이나 부역에 대해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 이 선생이 온 집안사람을 거느리고 남보다 먼저 바치니, 마을의 백성들이 선생의 의리를 두려워해서 서로 앞 다투어 바치면서 혹 뒤질까 두려워하므로, 한번도 독촉하지 않아도 조금도 모자람이 없으니, 내게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하였다. -우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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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서원(尼陽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다. 1707년(숙종33)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여 곽안방(郭安邦, ?~?)과 곽지운(郭之雲, 1498~1551)을 배향하고, 1786년~1871년 사이에 곽규(郭赳, 1521~1584)와 곽황(郭趪, 1530~1569)을 추가 배향하면서 이양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곽재우(郭再祐)의 5대조를 배향함으로써 곽씨 전 문중을 포괄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다.
명철한 것으로 일컬어졌고 : 곽황(郭趪, 1530~1569)을 말하는 듯하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호는 탁청헌(濯淸軒)이다. 1556년(명종11)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3년(명종18) 예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재임 시 선정을 베풀었으며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어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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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재집 별집 제4권 / 서(序) / 현풍 곽씨 가승 서문〔玄風郭氏家乘序〕
나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이 벼슬로 집안을 유지하여 국내에서 혁혁한 명성이 있었던 자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평범한 것일 따름이다. 선대로부터 매우 고귀하고 현달함이 없으며 옥당(玉堂)ㆍ금마(金馬)의 귀함과 좋고 화려한 수레를 타는 고관의 영화가 있지 않으면서 여러 세대에 걸쳐 높은 관을 쓰고 긴 옷자락을 끌며, 학교에서 읍양(揖讓)하고 주선(周旋)하여 성대하게 한 시대의 선비들이 공경하고 심복하는 바가 되며 또 혹 후세에 사당에 제향되는 존숭을 받는 것 같음은 그 문학(文學)과 행의(行誼)와 충효와 명절(名節)이 보통 사람들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지 않다면 결단코 이와 같이 할 수 없다. 이것의 어려움은 또한 어찌 저것(고관대작)의 10배일 뿐이겠는가. 내가 이 때문에 세상에서 이른바 명족(名族)도 이보다 낫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지금 현풍 곽씨(玄風郭氏)의 가승(家乘)을 보니 더욱 그것이 진실로 그러함을 볼 수 있겠다.
대개 방어사(防禦使)로부터 진사공(進士公)에 이르기까지 4대 동안에 유명한 지위에 있었던 자로 드러난 사람은 군사(郡事) 벼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러 현자들이 칭술한 글에 드러난 그들의 언행과 사적(事蹟)을 고찰해 보면 대부분 빛나서 볼만한 것이었다.
이양서원(尼陽書院)과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에 제향된 네 분의 현자는
혹자는 청백으로 드러났고
청백으로 드러났고 : 곽안방(郭安邦)을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주(汝柱)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익산 군수(益山郡守) 등을 역임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올랐다.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오르고, 관직에 있을 때 정사를 공정하게 다스리고 청빈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
혹자는 명철한 것으로 일컬어졌고
혹자는 삼옥(三玉)으로 일컬어지고
혹자는 적개(敵愾)로 알려져
사림들에게 숭보(崇報)받은 것이 이미 저와 같았다. 그 외
정재(定齋),
죽재(竹齋),
성재(省齋),
태허정(太虛亭)
등 여러 공(公)은 드러나지 않은 덕과 숨은 빛남이 모두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있다. 대개 대대로 아름다움을 잇고 훌륭한 점을 계승하여 그 문호를 유지함이 우뚝하여 고관대작의 벼슬아치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대저 곽씨에 존재(存齋)와 망우당(忘憂堂) 두 선생이 있음은 곧 열성(列星) 가운데 북두(北斗)와 장경(長庚)이 있는 것과 같다.
대저 한 문중에서 삼강(三綱)이 나란히 서고 또 한 가정에서 네 명의 효자가 나란히 배출되어 그들의 거주지인 솔례촌(率禮村)에 전후로 정려(旌閭)를 받은 사람이 열둘이라는 많은 숫자에 이르렀다. 우리 동방의 사대부 집안이 많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오직 연봉 이씨(蓮峯李氏) 집안의 8정려(八旌閭) 외에는 누가 다시 여기에 비길 수 있겠는가. 다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한 가지만 들어도 곽씨가 지금까지 사대부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고 시대가 멀어짐에 따라 사적(事蹟)이 쉽게 없어져 버린다. 그러므로 반드시 현명한 자손이 배출되어 가승(家乘)에 상세하게 드러내고 갖추어 실은 이후에야 바야흐로 후세에 드리워 신빙할 수 있다. 지금 이 책을 편집한 사람은 곧 죽재(竹齋)의 후손 세한(世翰)으로, 편집할 때 엄중하고 삼감을 지극히 하였다. 무릇 세계(世系)의 내력과 소목(昭穆)의 분파(分派) 그리고 고을과 묘소가 있는 장소 등을 모두 드러내 빠뜨리지 않았다. 전의(傳疑)한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은 또한 사실을 좇아 기록하여 한번 책을 펴면 내용을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것이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또 입가(立家)의 규범에 대한 몇 조목을 쓰고 인하여 이 뜻으로 자서(自叙)를 써서 서두에 내걸어 후손들이 이것에서 고증하여 믿고 따라 실행하도록 하였다. 그 마음 씀씀이가 매우 정성스러우니, 현명하지 않고서야 능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세한 씨의 당숙 무(堥)가 이 책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고 서문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드디어 내가 마음에 느낀 점을 가지고 그 집안의 세덕(世德)을 역력히 서술하여 우리나라 명문 집안이 저기(고관대작)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다는 것을 보인다.
[주-D001] 금마(金馬) : 한(漢)나라 궁궐 문인 금마문(金馬門)의 준말로, 동방삭(東方朔)ㆍ주보언(主父偃)ㆍ엄안(嚴安) 등 문인들이 황제의 조서(詔書)를 기다리던 곳인데, 뒤에는 조정을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주-D002] 좋고 화려한 수레 : 원문 ‘주륜화곡(朱輪華轂)’은 바퀴에 붉은 칠을 하고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로, 한나라 때 왕후(王侯) 등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이 탔다고 한다.[주-D003] 학교 : 원문 ‘횡상당숙(黌庠黨塾)’의 뜻이다. 《예기》 〈학기(學記)〉에 “옛날의 가르침은 25가(家)에는 숙(塾)이 있었으며, 당(黨 500가)에는 상(庠)이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횡(黌)’과 ‘상(庠)’과 ‘숙(塾)’은 모두 학교를 말한다.[주-D004] 선비 : 원문 ‘금패(衿佩)’는 푸른 옷깃과 푸른 패옥(佩玉)을 말하는 것으로, 푸른 복장(服裝)을 한 청년 학도를 가리킨다. 《시경》 〈정풍(鄭風) 자금(子衿)〉에 “푸르디푸른 그대의 옷깃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왜 소식을 계속 전하지 않는고. 푸르디푸른 그대의 패옥이여, 길이 생각하는 내 마음이로다. 비록 나는 가지 못하나, 그대는 어이하여 오지 않는고.[靑靑子衿, 悠悠我心. 縱我不往, 子寧不嗣音? 靑靑子佩, 悠悠我思. 縱我不往, 子寧不來?]”라고 한 데서 옷깃[衿]과 패옥[佩]을 합친 말이다.[주-D005] 이양서원(尼陽書院)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대리에 있다. 1707년(숙종33)에 청백사(淸白祠)를 건립하여 곽안방(郭安邦, ?~?)과 곽지운(郭之雲, 1498~1551)을 배향하고, 1786년~1871년 사이에 곽규(郭赳, 1521~1584)와 곽황(郭趪, 1530~1569)을 추가 배향하면서 이양서원으로 개칭하였다. 이후 곽재우(郭再祐)의 5대조를 배향함으로써 곽씨 전 문중을 포괄할 수 있는 위치를 갖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뒤에 복원되었다.[주-D006] 도동서원(道東書院) 별사(別祠) : 도동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求智面) 도동리(道東里)에 있는 서원이다. 1605년(선조3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1607년(선조40)에 도동(道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고, 1678년(숙종4)에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배향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별사에는 곽승화(郭承華, ?~?), 원개(元槩, ?~?), 배신(裵紳, 1520~1573)이 배향되어 있다. 곽승화의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실(子實), 호는 규헌(睽軒)이다. 현풍에 거주하였으며, 1477년(성종8) 진사에 합격하였다. 김굉필(金宏弼)과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유학하였고, 청개(淸介)한 인품으로 사우(士友)들의 추앙을 받았다.[주-D007]
청백으로 드러났고 : 곽안방(郭安邦)을 말한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주(汝柱)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익산 군수(益山郡守) 등을 역임하였고 봉렬대부(奉列大夫)에 올랐다. 1467년(세조13)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담하여 공을 세워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오르고, 관직에 있을 때 정사를 공정하게 다스리고 청빈하여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주-D008]
명철한 것으로 일컬어졌고 : 곽황(郭趪, 1530~1569)을 말하는 듯하다.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경정(景靜), 호는 탁청헌(濯淸軒)이다. 1556년(명종11) 문과에 급제하였다. 1563년(명종18) 예안 현감으로 부임하여 이황(李滉)의 제자가 되었다. 재임 시 선정을 베풀었으며 역동서원(易東書院)을 창건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어 고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주-D009]
삼옥(三玉)으로 일컬어지고 : 곽지운(郭之雲)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여우(汝雨), 호는 연일당(燕日堂)ㆍ삼옥당(三玉堂)이다. 곽안방(郭安邦)의 증손자이다. 1524년(중종19) 문과에 급제한 뒤, 관직은 예조 좌랑에 이르렀는데 학행과 문장이 탁월하였다.[주-D010]
정재(定齋) : 곽월(郭越, 1518~1586)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시정(時靜), 호는 정재이다. 곽승화(郭承華)의 증손자이며 아들은 곽재우(郭再祐)이다. 1546년(명종1)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6년(명종11)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청송 부사(靑松府使)에 이르렀다. 무재(武才)를 겸비하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큰일을 맡길 만하다 여겼다.[주-D011]
죽재(竹齋) : 곽간(郭趕, 1529~1593)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원정(元靜), 호는 죽재이다. 1546년(명종1)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 정(宗簿侍正)과 강릉 부사(江陵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의병 활동을 했으며, 전란 중에 사망하였다.[주-D012]
성재(省齋) : 곽근(郭赾, 1554~?)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치정(穉靜), 호는 성재이다. 곽안방(郭安邦)의 후손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을 지냈다.[주-D013]
태허정(太虛亭) : 곽홍지(郭弘祉, 1600~1656)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자구(子久), 호는 태허정이다. 1624년(인조2) 진사에 합격하고 1635년(인조13) 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와 예조 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경사자집(經史子集) 외에 의약ㆍ복서ㆍ산수 등에도 통달하였다.
[주-D014] 고관대작의 벼슬아치들 : 원문 ‘잠영헌사(簪纓軒駟)’의 뜻이다. 잠영은 관(冠)에 꽂는 비녀와 매는 갓끈으로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이르고, 헌사는 사마헌거(駟馬軒車)의 준말로 지위가 높고 귀한 이가 타는 사마(四馬)가 끄는 높은 수레인데, 역시 고관대작을 말한다.[주-D015] 존재(存齋) : 곽준(郭䞭, 1551~1597)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김면(金沔)의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황석산성을 지키던 중 아들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황암사(黃巖祠)와 예연서원(禮淵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16] 망우당(忘憂堂) : 곽재우(郭再祐, 1552~1617)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유(季綏), 호는 망우당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만년에 낙동강가에 은거하였다. 1709년(숙종35) 병조 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저서로 《망우당집》이 있으며 현풍(玄風) 예연서원(禮淵書院)에 제향되었다.[주-D017] 장경(長庚) : 금성(金星)의 별칭이며 태백성(太白星)이라고도 하는데,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다.[주-D018] 한 …… 이르렀다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솔례에 영조 때 세운 현풍곽씨십이정려각(玄風郭氏十二旌閭閣)이 있다. 1598년(선조31)부터 영조 때까지 곽씨 일문(郭氏一門)에 포상된 12정려(十二旌閭)를 한곳에 모은 것이다. 정려된 12명은 다음과 같다.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한 곽준과 두 아들 곽이상(郭履常)ㆍ곽이후(郭履厚), 곽준의 며느리 열부(烈婦) 거창 신씨(居昌愼氏), 출가 후 남편을 따라 자결한 곽준의 딸 열부 곽씨이다. 또 임진왜란 때 왜적으로부터 병환 중인 부친을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곽재우의 사촌 동생인 곽재훈(郭再勳)의 아들 4형제 즉 곽결(郭潔), 곽청(郭淸), 곽형(郭泂), 곽호(郭浩)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순결을 지키기 위해 강으로 투신해 자살한 곽재기(郭再祺)의 부인 광주 이씨(廣州李氏), 강도가 들어와 남편을 해치려 하자 대신 죽은 곽홍원(郭弘垣)의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 결혼 후 1년도 못 되어 남편이 병으로 위독하게 되자 대신 죽기를 주야로 기원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남편을 잃게 되자 식음을 전폐하여 따라 죽은 곽수영의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주-D019] 연봉 …… 8정려(八旌閭) : 연봉(蓮峯) 이기설(李基卨, 1556~1622) 집안의 8정려를 말하는데, 서울 숭례문 밖 자연암(紫煙巖)에 있었다고 한다. 이기설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조(公造), 호는 연봉이다. 이지남(李至男)의 아들이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에 발탁되고 당상관으로 승진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죽었다.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정문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연봉집(蓮峯集)》이 있다. “청풍 군수(淸風郡守) 이기설(李基卨)은 어버이를 섬기고 사람을 대함에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법도를 그대로 준수하였다. 향교(鄕校), 구동(舊洞)의 여러 명망 있는 사람들이 공(公)의 극진한 행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인조가 특별히 포장(褒獎)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정문(旌門)에, ‘효자와 더불어 공의 할머니 절부(節婦) 안씨(安氏), 아버지 효자 참봉(參奉) 영응(永膺) 선생 지남(至男), 어머니 절부 정씨(鄭氏), 형 효자 수재(秀才) 기직(基稷), 누이동생[昧妺] 효녀 이씨(李氏)와 함께 한집에서 여섯 정문(旌門)이 있는 것은 세상에 없는 일로서 혁혁(赫赫)하게 빛나니 일세에서 칭찬하고 감탄하노라.’ 하였다. 나라에서 ‘효자삼세(孝子三世)’라는 액(額)을 내렸다.”라고 한 말이 있다. 《練藜室記述 別集 12卷 政敎典故 旌孝》 또 이기설의 아들 돈오(敦五)와 돈서(敦敍) 및 돈오의 처 김씨는 병자호란 때 강화에서 순절(殉節)하여 모두 정려되었다. 《燃藜室記述 第18卷 宣祖朝儒賢 李至男》[주-D020] 세한(世翰) : 곽세한(郭世翰, 1760~1789)으로, 일명 세헌(世憲)이며,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가헌(可憲), 호는 낙와(樂窩)이다.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의 아들이다. 문학과 재행(才行)이 뛰어나 사림(士林)들이 흠모(欽慕)하였다. 이회근(李晦根), 최흥벽(崔興壁), 박문국(朴文國) 등 제현과 같이 지은 《남귀창수록(南歸唱酬錄)》과 자신의 유고(遺稿)가 있다.[주-D021] 전의(傳疑)한 것 : 역사를 기록하면서 임의대로 취사하지 않고 의심스러운 일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을 말한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 환공(桓公) 5년 조에 “춘추의 의리는 미더운 것은 미더운 대로 전하고 의심스러운 것은 의심스러운 대로 전하는 것이다.[春秋之義 信以傳信 疑以傳疑]”라고 하였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김숭호 송희준 (공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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