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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리가 날아간 날의 무늬
이 홍사
붉게 물든 황혼의 노을이 일출보다 찬란하고 아름다울 때도 있다.
H는 지천명을 넘기고 하늘의 뜻을 읽으며 느지막하게,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그 사실을 피부로 깊숙이 느꼈다.
H는 책상머리에 앉아 일출과 황혼에 대해 다시 정리하며 짚어본다.
일출은 언제 보아도 장엄하다. 그러나 황혼의 노을도 일출 못지않게 찬란할 때도 있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인생 또한 마찬가지다. 젊은 날보다, 늙어가며 완벽한 인간으로서 사유와 품위를 갖춘 이들을 황혼의 아름다움에 비유되곤 한다. 건강하고 탄탄한 육체적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으로 완숙해지고 인간으로서의 품위와 도리를 다 할 때 비로소 그 황혼이 아름답다는, 미학적인 비유가 가능하다.
인생을 하루에 대입시킨다면 자신의 해는 지금 어디쯤 걸려있을까?
H는 갑자기 그게 궁금해졌다. 정오는 벌써 넘었을 것이고 오후 서너 시쯤? 아마도 그 언저리일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괜히 서글퍼진다.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가 제 일에 빠져 H에게 눈길을 주는 이가 없다. 관심이 없다는 얘기고 예전과 달리 눈치를 보는 직원이 없다는 말이다. 이제 봄이 세 번만 오면 이 사무실에서 보따리를 싸야 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었는데 해를 넘기자 코앞에 닥쳤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곤 한다. 이게 무슨 심정일까? 갱년기 증상인가?
담배나 한 대 피고 올까?
H는 의자에 입혀놓은 재킷을 벗겨 걸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재킷은 이런 봄날 담배쌈지 노릇만 할뿐이다. 넓은 복도가 휑하니 비어있다. H는 자신의 슬리퍼 끌리는 소리를 데리고 계단을 내려선다. 신청사로 옮기고 나서 달라진 게 있다면 담배 피우러 가는 길이 멀어졌다.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서 삼층을 내려가야 한다. 청사를 리모델링하기 전에는 커피 자판기가 있는 옥상에 흡연실을 따로 만들어두었는데 새 단장을 하고나서 금연 건물로 지정하는 바람에 그 마저도 없어졌다. 일층까지 내려가 건물 옆구리에 붙은 간이 휴게소 화단가에 서서 담배를 피워야한다. 보통 불편한 게 아니다. 처음 발령받았을 땐 나이가 많은 면서기들은 사무실 앉은자리에서 민원인들과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누었는데 사십 년 사이에 세상 참 더럽게(?)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관 옆구리 문으로 빠져나와 건물모퉁이를 돌아가니 젊은 직원 둘이서 나무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우다가 H가 나타나자 일어서서 고개만 까딱거리며 인사를 하고 피우던 담배를 끄고 슬금슬금 사라졌다. 안면은 있는데 어느 부서에 근무하는지 모르겠다. 젊은 직원들이 사라지고 혼자서 담배를 꺼내 무니 이름 모를 소외감이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다. 아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다, 라고 생각을 고치며 어깨에 내려앉는 소외감을 털어내고 쳐지는 마음을 달래본다.
갑자기 오늘 내가 왜 이렇게 민감해졌지?
H는 자신이 갑자기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자 담배를 피우는 손놀림마저도 어색했다. 어색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혼자서 담배를 피운다는 행위 자체가 혼자 먹는 밥처럼 한없이 처량하게 느껴져 담배 맛이 별로다.
근무하고 있는 작은 공단 도시는 인구 오십만을 코앞에 두고 있다. 사십만 대에서는 빠른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지금은 좀 주춤하고 있는 상태다. 오십만이 되면 행정구역을 재편성해서 구區를 갈라야 한다. H는 예견하건데 재임 중에 구를 가르는 일은 없지 싶다.
지금 본청과 출장소, 읍, 면, 동, 산하기관에 근무하는 식구가 천오백 명이 넘는다. 그 중 사무관만 팔십여 명이 된다. 경쟁은 치열했지만 재작년에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H보다 일찍 승진한 또래도 있지만 아직 계장 꼬리표를 달고 있는 또래들이 더 많다. 지금 사무관 적체현상을 보이니 정년까지 계장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퇴직하는 또래들이 더 많지 싶다. 현재 직원구조로 미루어 그렇다. 도시가 커지고 통합되면서 기현상이 생겼다. 천오백 명이 근무하는 시청과 산하 기관의 직원들 중에서 사십대는 거의 찾아보기 힘이 든다. 신생 공단도시라 그런지 베이비붐 세대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왕창 들어오고 거의 십오 년간 기술직을 제외하고는 공채로 단 한명도 모집하지 않았다가 정년으로 결원이 생기자 들어온 직원들은 지금 삼십대 들이다. 그 삼십대들은 거의가 사무관을 넘어서 국장 자리도 바라볼 것이다. 시대를 잘 만난 인재들이다. 이 조직은 두 부류로 명확히 분류된다. 오십대이거나 삼십대 이하, 신생도시의 특이한 공무원 조직현상이다. H는 국장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라는 걸 스스로 안다. 국장자리는 겨우 넷이다. 도시 건설 국장과 경제 통상 국장은 해당사항이 없으니 H는 겨우 두 자리, 행정과 복지 환경, 두 자리를 바라보고 있지만 두 자리의 국장들도 아직 정년이 이 년이나 남았으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국장으로 승진한다면 정년이 이 년 연장되는데, 오르지 못할 고개라고 생각하니 한숨이 나온다.
뒤를 보고 살아야지, 아직 계장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는 동기들도 많은데 치열한 국장은 그냥 꿈이다. 생각에 잠겨 언제 다 피웠는지 손가락엔 빈 꽁초가 끼어져있었다.
불이 없는 빈 꽁초를 내려다보며 H는 자신이 빈 꽁초와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불이 꺼진 인생, 더 빨아먹을 게 없는 물건, 곧 버려야 할 대상, 퇴물, 그러기에 과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지만 계장부터 시작해서 눈치를 보는 직원들은 아무도 없다.
꽁초를 버리고 담배를 다시 물었다. 언제 다 피웠는지 모르는 한 개비로는 양이 차지 않는 모양이다. 다시 담배를 물고 먼산바라기를 하다 보니 조금 서글퍼졌다. 재임기간에 첫째가 결혼을 했으면 좋으련만 이 년의 계집애는 목석도 그럼 목석이 없다. 서른셋이 넘도록 그 흔한 애인하나 데려오는 걸 보지 못했다. 맞선은 여러 번 보았지만 모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들어오는 애프터 신청을 모두 사양한 눈치다. 직업은 둘째로 본 상대가 좋고, 얼굴은 네 번 째 본 상대가 마음에 들고, 키는 첫째 본 상대가 적당하고, 매너는 일곱 번째, 배경은 다섯 번째,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제 나이는 생각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해대며 부아를 지르고 있다. 결국 둘째인 아들놈을 작년에 혼인시켰지만 이 년의 말대로라면 인간하나를 완전히 제 눈에 맞도록 조립해야 한다. 눈높이를 어디에다 설정했는지 이 계집애가 구하는 인간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 눈에 차는 인간을 구하려면 다섯 놈을 분해하여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하나로 조립해야 완벽하다고 할 것이다.
H가 딸의 결혼을 조급해하는 이유는 계집애 나이도 나이지만 속셈이 따로 있다.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적에 혼인을 시켜야 축의금이 적당히 들어와 결혼비용 부담이 줄어든다. 그나마 이 자리를 떠나면 부조가 반으로 줄어들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면서기부터 시작해서 공무원 사십 년 동안 부조지출이 얼마인데, 그 본전을 뽑아야 하는데 눈치가 없는 딸년은 천하태평이다. 서른셋이면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제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눈에 차는 인간이 없다니 제 엄마 푼수를 어찌 그리 닮았는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우둔한 인간이 자신을 읽을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했는데 이 년은 뭘 먹고 그리 제 자신을 과대평가하는지 모르겠다. 우체국 창구를 지키는 말단 공무원인 주제에. 툭 하면 독신을 들먹여 H의 심사를 꼬아 놓는다.
딸년을 생각하자 심사가 뒤틀린다.
뒤틀린 심사로 먼산바라기를 하다 보니 도로 건너 번개시장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저거? 불난 거 아냐?
H는 재떨이에 꽁초를 던졌다. 아무리 보아도 뭘 태우는 건 아니고 불이 난 것이 분명하다. 고층 아파트에 가려있지만 분명 번개시장 쪽이다. 시장에 불이 나면 소방차 진입이 용이하지 못하다.
-저건 분명히 불인데?
H는 지름길인 후문으로 향했다. 후문을 나서니 청소과 직원들도 연기를 보았는지 우르르 나서고 있었다. 모두가 아는 인물들이다. 직원들은 H를 보고 고개만 까딱 거리며 인사를 하고 종종걸음으로 앞장을 서 도로를 건너갔다.
H는 사무관으로 진급을 하고 사무관 중에서 가장 힘들다는 청소과장을 이 년이나 했었다. 청소과는 본청과 동떨어진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그 건물은 옛날 등기소 건물인데 등기소가 신시가지로 새 청사를 지어서 옮기고 그 부지와 건물을 시에서 편입시켜 청소과로 쓰고 그 마당을 청소를 하는 특수 장비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H가 청소과장을 할 적에 시의회 의결을 받아 독일에서 수입한 고가의 장비들이다. 일반 청소차는 시청 체비지를 사용하여 서너 군데, 구역별로 나누어 주차하지만 고가의 특수 장비는 청소과 마당에 주차를 한다. 청사를 따로 갖고 있으니 시청 직원들 더러는 청소과가 아니라 ‘청소청’이라고, H를 두고 청소청장이라고 비꼬아서 부르기도 했다.
흘깃 보니 특수 장비는 한 대도 서있질 않다. 모든 장비가 작업을 나간 모양이다. 등기소 부지를 편입하여 청소과 단독으로 사용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피곤한 이유 때문에 사무관을 달면 청소과장을 기피한다. 시에 소속된 이백 명 가까이 되는 환경미화원은 청소과 소관이다. 시설관리공단으로 떠넘기자고 여러 차례 이야기가 있었고 시의회에서도 그렇게 하자고 했지만 환경미화원 대부분이 노조에 가입하고 있는 터라 그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실정이다.
환경미화원들은 매일 새벽 두 시 반에 청소차가 있는 자기할당구역에 집결이다. 운전기사가 조장이 되어 사 인 일조로 자기 구역의 쓰레기를 쓰레기 수거하여 새로 만든 소각장으로 옮기고 그 할당구역 청소를 한다. 마치는 시간이 대충 오후 한두 시, 하루의 일이 끝나는 시간이다. 바로 퇴근하면 좋으련만 끼리끼리 모여 술을 마신다. 매일 마시는 술값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눈치를 보니 쓰레기 중에서 박스가 나오면 따로 분리수거를 하여 고물상에 팔아서 술값을 충당한다. 그것까지는 좋다. 술을 마시고는 청소과 사무실을 찾아와 푸념을 늘어놓고 행패를 부린다. 매일 누가 찾아와도 찾아온다. 냄새나는 작업복을 그대로 입고 한두 명씩 술이 취해서 찾아오면 그때부터 업무는 마비가 된다. 청소과장인 H가 데리고 나가 달래고 술대접을 하고 푸념을 들어주어야 한다. 그게 청소과장으로서 가장 힘든 일이다. 사무실에서 행패를 부리던 환경미화원도 술잔을 앞에 놓으면 고분고분해지며 존경하는 우리 과장님! 어쩌고 하며 아첨을 한다. H가 청소과장을 하는 동안 근무일에 술을 먹지 않은 날이 거의 없을 정도이고 얼굴 모르는 환경미화원은 몇 명이 되지 않을 정도다. 그 청소과장을 이 년이나 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나는 이 년이었다.
청소과장 이 년에 마침표를 찍고 주민복지과로 발령을 받아오니 마치 자신이 냄새나는 청소복을 벗은 기분처럼 홀가분했다. 과장이라고 다 같은 과장이 아니라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사무관으로 승진하면 읍, 면, 동장을 거쳐야하지만 사무관 적체라 H는 동사무소에 나가보지 못했다. 한적한 곳에 동장이나 면장으로 나가 호젓하게 있다가 정년을 하고 싶지만 세상사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청소과장 면한 것에 만족을 해야지.
길 건너 번개시장 부근의 연기는 더 검게 오르고 있다. 벌써 누가 신고를 했는지 소방차 사이렌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들어보니 한두 대가 오는 게 아니라 꽤 여러 대가 출동하는 모양이다. 올해는 봄 가뭄이 심해서 관내에 산불이 두어 군데 나자 산림과는 완전히 비상이다. 이럴 때 보면 산림과장도 청소과장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렇게 불이 나면 주민복지과는 완전히 불구경 팀이다. 주민의 집이 소실되어 거주할 곳이 없으면 뒤늦게 거처를 알선해주면 된다. 하긴 주민들도 영세민이 아니면 다들 알아서 원룸으로 임시 거처를 옮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제도는 있는데 한 번도 이용한 적이 없다.
H도 도로를 건넜다.
도로 건너 아파트단지 울타리엔 개나리가 활짝 피어있다. 그걸 보고 즐길 여유는 없다. 재킷은 걸쳤지만 실내 슬리퍼를 그대로 신고 있어서 달리지는 못하고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단지 울타리를 돌아서니 불난 곳이 보이기 시작했다. 번개시장이다. 어디서 나왔는지 도로에는 벌써 인파가 깔려있다. 차량이 통제되고 소방차가 지그재그로 서서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연기는 처음보다 많이 줄었다.
H도 군중들 틈에 끼었다.
들리는 소리에 의하면 이층 세탁소에서 발화가 되어 옆에 붙은 미용실과 사진관으로 옮겨 붙은 모양이다. 상가건물은 이층짜리라 일층은 말짱하다. 불길은 위로 솟지 아래로 내려오진 않는 까닭이다. 일층은 물바다가 되었을 뿐이지 말짱하고 인명피해는 없단다. 다행이다. 불길은 금세 잡혔다. 일층은 돼지국밥집을 비롯한 식당이 대부분이고 이층은 편의시설이다. H도 입맛이 없는 날이면 구내식당을 이용하지 않고 점심을 먹으러 나오는 곳이고 청소청장으로 있을 적에 행패를 부리는 환경미화원을 데리고 자주 오던 곳이라 번개시장의 구조가 손금 안에 들어있다. 시장 앞 노점이 열리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소방차 진입이 용이했던 모양이다. 대형화재는 아니다.
H는 돌아섰다. 그리고 인파속에서 빠져나왔다. 아파트를 올려다보니 아파트 창문마다 사람들이 붙어 서서 불구경을 하고 있다. 그 사람들 모두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행동거지가 부자연스러워졌다.
H가 서둘러 돌아선 이유는 변의 때문이었다.
H는 묵직한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몇 년 전부터 장이 안 좋은지 변비와 설사가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사무관 승진을 앞두고 생긴 증상인데 병원에서는 과민성 대장 증상이라고 했다. 청소과장을 하며 정도가 심해졌다.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술을 마시지 말라고 병원에서 얘기했지만 세상사가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오늘 아침에도 화장실에서 용만 쓰다가 변을 보지 못하고 출근했다. 오늘부터 일주일 정도는 변비로 고생할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면 설사기운이 있어 하루에 화장실을 대여섯 번 드나들어야 할 것이다. 장에 좋다는 약을 두루 먹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변비로 낑낑거리다가도 변의를 느끼면 바빠진다. 변비가 있는 날이면 아무런 전조도 없이 변의가 느닷없이 찾아온다. 하여, 화장실이 멀리 있으면 불안해진다.
청사 화장실에 갈 동안 참을 수 있을까? 가늠해보았다.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 번개시장 화장실을 이용하려니 온통 인파고 물바다다. 이거 입장이 난처하데? H는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인파를 뒤로 하고 종종걸음으로 청사를 향했다. 슬리퍼를 신어 뛸 수가 없고 또 변의가 심하면 뛸 수가 없는 까닭에 종종걸음이다.
고층 아파트 왼쪽은 단독주택단지다.
거의가 같은 시대에 지어서 집 모양이 비슷비슷하다. 아무래도 괄약근이 버텨주지 못할 것 같다. 아랫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H는 단독주택단지 골목으로 들어섰다. 급하다. 아무 집 대문이나 밀어보았자만 잠겨있었다. 급기야 다리를 꼬아야할 지경에 이르러 단독주택 대문이 열린 집을 발견했다. 무작정 들어섰다. 그런 단독주택은 마당이나 화단가에 단독 야외화장실을 갖추고 있다. 아직까지도 본채 따로 세를 놓는 아래채 따로 있는 집이다. 원룸이 보편화되고부터 그런 아래채는 세를 놓기가 힘들어 거의가 철거를 하고 화단이나 주차장으로 쓰는데 그 집은 아래채가 그대로 있다. 집의 구조로 보아 화장실 찾기는 어렵지 않다. 세를 놓는 아래채 구석에 화장실이 있었다. 실례를 할 수밖에 없다.
급하게 허리띠를 풀고 대장의 소요물을 배출했다. 소요를 일으키는 대장을 비워내며 떠올린 말이 해우소라는 절에서 쓰는 말이다. 근심을 푸는 장소, 정말이지 그 말을 몸소 실감하는 순간이다. 화장실은 잘 쓰지 않는지 거미줄투성이지만 화장지까지 갖추고 있었다.
아랫배와 괄약근에 평화가 깃들었다.
집과 청사에서 비데만을 쓰다가 화장지를 보니 꺼림칙했으나 이게 어디냐. 비데는 언감생심이지. 뒤처리를 깔끔하게 한다고 화장지를 접다보니 이상한 소리가 그의 고막으로 밀려들었다. 신음소리. 아니, 교성嬌聲이 분명하다. 들어올 적에는 급하고, 용변을 보면서 힘을 쓰느라 듣지 못했지만 교성은 바로 옆, 허술하게 지은 갓방에서 들리고 있었다.
여자의 신음이 잦아진다. 이윽고 숨넘어가는 교성이다.
멀건 대낮! 이 시간에 뭔 일이야?
의혹이 일었지만 공단에서 삼교대로 야간 근무하는 근로자의 신혼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교성을 맘껏 지르며 욕정을 불태우는 모양이다. H는 그 교성을 귀로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
물 내리는 소리가 방안까지 들릴까봐 변기의 물을 내리지도 않고 있었다. 이거 꼼짝없이 화장실에 갇히는 것 아니야? 화장실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워낙 급하게 들어오느라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글 틈도 없었다. 화장실 문은 소리 없이 열린다. 교성은 더 크게 들려온다. 여자의 자지러지는 교성과 남자의 거친 호흡까지 고스란히 H의 고막을 자극한다. 방안의 농염한 기운이 문을 뚫고 터져 나올 기세였다. 빠져나가야 한다. 이렇게 절정에 올라 정신이 없을 때 발소리를 죽이고 나가면 되겠다 싶어 발소리를 죽여 방문 앞을 지나오는데, 이런! 재킷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벨이 울리는 것이었다. 정말이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던 선전문구가 떠올랐다. 다급한 대로 스마트폰이 든 주머니를 감싸 쥐고 후다닥 대문을 나섰다. 방안에서 전화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미안하고 죄지은 기분이다. 대문을 벗어나서 확인하니 근무시간에는 좀처럼 전화를 하지 않는 아내의 전화였다. 아내의 전화인 것을 확인하자 맥이 탁 풀어지는 기분이었다.
-근무시간인데, 왜?
전화를 받는 H의 목소리는 퉁명스러웠다. 위기의 순간에 벨소리 때문에 어지간히 당황을 했던 모양이다. H는 그 말을 하면서도 방안의 남녀가 벨소리와 발자국 소리에 방해받지 않고 교접에 열중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어, 어머님이 이상해요.
-왜, 무슨 일이야?
-요양병원 구급차로 지금 C병원으로 옮기고 있는데 C병원으로 빨리 오세요.
-C병원 어디로?
-어디긴 어디야? 응급실이지.
응급실? 그때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내의 전화기에서 들려오는 구급차의 사이렌소리와 방안의 남녀가 교성을 지르는 소리가 귀에서 뒤엉켜 잠시 혼란스러웠다.
전화를 끊으니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봄날의 나른한 햇살이 골목을 비추고 있었다. 갑자기 나른해진 건 어머니의 소식 때문도 아니고 날씨 탓도 아니라 긴장이 이완되었기 때문이리라. 괄약근에 힘을 주고 화장실을 찾느라 긴장했었고 또 그 절정의 분위기를 방해하지 않고 빠져나오느라 잔뜩 긴장한 것이 갑자기 이완된 게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H는 나른함을 추스르고 종종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실내에서 신는 슬리퍼가 바쁠 적에는 참 불편하다는 생각만 들었을 뿐 어머니에 대한 감정은 없다. 골목을 빠져 나와 뒤를 흘깃 돌아보았다. 들어갈 땐 급해서 몰랐지만 골목 깊숙이 들어간 모양이다. 주택 모양새가 비슷비슷하여 화장실을 이용한 집을 다시 찾아가라면 더듬거려야할 것 같다.
C병원이면 이 작은 도시에서 몇 안 되는 종합병원인데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큰길로 나와 청사로 가다가 택시를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늘린 게 빈차인데 급하니 그런지 오늘따라 보이질 않는다. 작은 도시에 택시가 포화상태라 개인택시 증차를 멈추고 법인택시는 폐차기간이 되면 신규로 대차해주지 않는 상태인데 택시 잡기가 쉽지 않았다. 청사까지 들어가 차를 가져갈까 생각하다가 병원에서 주차 공간 찾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 차도까지 내려서서 손짓을 하니 반대편으로 가던 빈 택시가 신호등 앞에서 불법 유턴을 하여 H앞에 멈추었다.
택시 뒷좌석에 올라타고 C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가 대답도 없이 룸미러로 H를 힐끗 보았다. 기본요금 거리라 불법 유턴한 것이 못 마땅한 모양이다.
-미안합니다. 급해서 그럽니다. 응급실 앞에 좀 세워주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H는 미안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응급실로 실려 가니 당연히 그렇게 급한 척 행동해야하는 게 도리일 것 같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 어머니는 H를 낳아주지도 않았고 길러주지도 않았다. 단지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버지와 팔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H가 군에 있을 적에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저혈압으로 의한 심장마비였다. 정말이지 어느 날, 졸지에,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H는 첫 휴가를 관보를 받고 위로휴가로 나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실감나지 않았다. 그 때 아버지 연세가 오십 전이었다. 세 번째 휴가를 나오니 집에 어머니라고 불러야할, 키가 작달막한 아줌마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마지못해 어머니라고 부르긴 했지만 속정은 없었다.
두 분이서 오래 살면 좋았겠는데 딱 팔년을 사시다가 이번엔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때 H는 막 결혼을 했고 일 년 할부로 끊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면서 면서기를 하고 있었다. 아버진 췌장암이었는데 일 년을 병석에 누워계셨다. 아버지께선 자신의 병마를 치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짐작하시고 유언을 하셨다. 조부모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제사는 H의 형더러 모시라고 하시고, 새로 들어온 어머니의 봉양은 H에게 하라며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새어머니의 몫인 강변의 콩밭 서마지기를 H앞으로 지정해주셨다.
콩밭 서마지기와 새어머니를 H에게 남기고 아버지는 떠나셨다.
그게 벌써 이십오 년 전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고향집을 지키는데 공무원 박봉으로 두 집 살림을 하려니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H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내린 마지막 명이었으니 거역하지도,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건강 체질이 아니었다. 수시로 약을 타다 나르고 반찬을 만들어 나르지만 혼자 스스로의 몸을 지탱하기 버거울 지경이었다. H는 그저 보고 있지만 혼신을 다해 어머니를 챙기는 아내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세월은 H에게만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새어머니에게도 흘러 몸이 부실해져 혼자서 조석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사년 전에 H의 아파트로 와서 일 년 반을 얹혀살다가 몸이 더 부실해져 대소변 가리기가 힘들어지자 관내에서 시설이 가장 좋고 싸다는 시립요양병원으로 H가 손을 써서 새치기로 끼워 넣었다.
요양병원으로 들어가자 아내는 일주일에 한번, H는 한 달에 한 번씩 문안차 둘러보러 갔었다. 복지과장이 되자 시립요양병원이 H의 관리가 되어 평일에 가도 무단 외출이 아니라 업무의 연장인 것이다. 요양병원에 가면 원장부터 만나고 요양원 전반을 둘러보고 어머니를 보고 오곤 했다. 그렇게 하니 어머니는 알게 모르게 병원에서 특별대접을 받게 되었다. H가 요양병원에 가서 내색을 한 적은 없지만 거기에 있는 원장과 복리사가 알아서 모시는 것이다. 요양원에서 그렇지만 시청에서도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굳이 H의 입으로 밝힐 이유도 없었다.
택시가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H가 내려서 보니 응급실 유리에 붙어 섰던 아내가 H를 먼저 보았는지 유리문을 나오고 있었다. 집에서 입던 평상복 차림이었고 화장도 하지 않은 맨얼굴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몰라요. 지금 숨을 안 쉬어요. 사진 찍으러 들어갔어요.
H가 앞장서서 응급실 쪽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응급실 옆에 붙은 촬영실에서 가운을 입은 남자 직원 둘이서 바퀴가 달린 침대를 밀고 나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얼굴까지 흰 천으로 덮여있었다.
-운명하셨습니다.
H와 눈이 마주친 젊은 남자간호사가 아무런 감정이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H의 팔을 잡았지만 H역시 아무런 감정이 없다. 다만 몸피가 참 작구나, 천을 들추면 비쩍 마른 한 마리의 왜가리가 그곳에 있을 것만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여태 모신 것은 아버지와 팔년을 살았던 여자가 아니라 한 마리의 왜가리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병원에 영안실이 있습니다. 여기서 모시겠습니까, 아니면 사망확인서 받아서 전문 장례식장으로 가시겠습니까?
대답이 준비되지 않은 기습적인 질문이었다.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해둔 바가 없다. H는 그런 문제보다 빨리 슬리퍼를 벗고 구두로 바꾸어 신고 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아내가 올려다보며 물었다. 뭘 묻는지 모르겠다.
-글쎄.......
-내 생각으로는 아주버님 손님이 많을 거 같으니 전문 장례식장으로 옮겨 가는 게 어때요? 당신 손님도 장난이 아닐 거고?
응, 그거 묻는 거였구나,
-어디가 좋을까?
건성으로 그렇게 묻는 H의 귀에는 조금 전에 들었던 교성이 풀어지고 있었다. H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그래도 귀에 맴도는 여자의 숨넘어가는 교성, 이게 왜 이 지랄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보았다. 그럴수록 교성은 H의 고막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H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고개를 옆으로 크게 흔들어보았다. 그래도 그 교성은 끈덕지게 귓속에서 일고 있었다. 여자의 자지러지는 교성, 그 숨넘어가는 신음소리가 더 또렷하게 귀에서 풀어지고 있었다. 이거 미치겠구먼, 속으로 중얼거리며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귀를 찰싹찰싹 때려보았다. 그래도 귀에서 선명하게 이는 교성, H는 돌아서서 복도의 흰 벽을 두 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이고 크게 흔들어보았다. 그럴수록 더 크게 울리는 교성, 이번에는 더 나아가 방안의 성교풍경까지 상상이 되며 여자의 허벅지가 눈에 어른거렸다. 정맥 줄기가 어렴풋이 보이는 허연 허벅지 속살! 허공으로 거꾸로 쳐들고 있는 여자의 매끈한 허벅지가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었다. 누구의 허벅지인지 모르겠지만 허벅지 안쪽의 정맥줄기가 도드라지게 선명하다. 살결도 매끈하고 뽀얗다. 너무 선명하게 눈에 어른거려서 환장하겠다.
미치겠네! 이럴 때 애국가를 불러야 하나? 반야심경을 외워야하나?
벽을 짚고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 누가 H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 왜 그래요? 사실만큼 사셨어요. 정신 차려요.
그게 아닌데.......
아내는 H에게 주의를 주고 침착하게 돌아서서 흰 가운을 입은 직원들에게 전문 장례식장으로 모시겠다며 사망확인서를 떼어달라고 했다. H가 결정한 게 아니다. 다만 아내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H는 직원에게 또렷이 그 말을 하는 아내를 보며 미리 준비되었던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는 이런 상황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준비했는지도 모르겠다.
직원은 알았다며 아내에게 의료보험증을 받아서 유리문 안으로 사라졌다. 전문 장례식장으로 옮기겠다고 하니 바퀴가 달려 왜가리가 실려 있는 침대는 그대로 응급실 앞 복도에 방치되었다.
사이렌을 울리며 급하게 구급차에 실려 왔지만 응급실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흰 천으로 덮여있는 왜가리! 복도에 막연하게 방치되고 있는 왜가리!
가련하다는 연민이 일었지만 H는 천을 들추어보지 않았다. 두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급하게 응급실 앞 유리문을 밀치고 나왔다.
응급실 모퉁이 화단가에 서서 담배를 빼어 물었다. 심호흡을 하며 서너 모금 빨고 나니 거짓말처럼 귀에 울리던 고약한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H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마치 자신이 격렬한 성교를 마친 듯 그의 이마에는 진땀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담배를 물고 내려다보니 신고 있는 슬리퍼가 눈에 거슬렸다. 신발을 바꾸어 신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상황이 아니다. 담배를 끄면서보니 아내가 응급실 유리문에 붙어 서서 어디론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아마도 형수님에게 전화를 하는 모양이다.
형님은 재작년까지 이 도시에 살다가 맞벌이하는 조카 내외의 아이를 봐주기 위해 작년 봄에 대전으로 이사를 가셨다. 연락을 받고 내려오려면 서둘러도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형님이 내려오면 장례절차를 상의해야 할 것이다.
요즘은 정년을 하면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건 바로 손자, 손녀를 양육하는 일이다.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세무공무원으로 정년을 하고 일 년을 쉬다가 대전으로 불려 올라가면서 살던 아파트까지 정리를 했다. 낯선 곳에서 친구도 없을 텐데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지 모르겠다. 형님내외가 대전으로 가기까지는 조카며느리 입김이 한몫을 했다. 정년을 했으니 저희들이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모신다? 말을 모시는 것으로 위장했지 가정부를 초빙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H는 생각했다. 형님이 대전으로 올라가시고 H에게 불편한 점이 있다면 아버지, 어머니 기일과 조부모님 기일에 제사를 모시러 대전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 날이면 아내는 낮에 기차를 타고 올라가 제수를 장만하고 H는 퇴근을 하고 차를 가지고 올라가서 제사를 모시고 오밤중에 내려와하니 몸도 마음도 혼란스럽다. 명절은 더 복잡하다. 대전으로 올라가 차례를 지내고 고향인 이 도시로 내려와 선산을 둘러보아야 했기에 차량이 막히는 명절의 대가족 이동은 그야말로 집안의 북새통이다.
아내는 또 다른 곳으로 전화를 하는 모양이다. 연락할 곳이 많은 모양이다.
H는 응급실 유리 안으로 눈길을 던졌다.
응급실 복도에는 왜가리 혼자 방치되고 있다. 저러다 왜가리가 정신을 차리고 큰 날개를 펄럭이며 덮고 있는 흰 천을 물고 훨훨 날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나 염려가 일었다. 정말 그렇게 날아 가버리고 난 뒤에 형님이 도착하면 뭐라고 설명을 하지?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정말로 희고 커더란 왜가리 한 마리가 유리문으로 나와 하늘로 너울거리며 날아가는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라? H는 팔을 뻗어 허공을 저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왜 왜가리로 여겨졌을까? 모르겠다. 빨리 슬리퍼를 바꾸어 신고 와야지! 아니다 전화를 해서 신발을 좀 가져오라고 해야겠구나.
휴대폰으로 사무실 전화번호를 눌렀다. 누르고 생각하니 그 전화번호는 자신의 책상에 놓인 전화였다. 받은 사람은 가정 복지를 담당하는 김 계장이었다. H는 좀 더듬거리면서 왜가리, 아니 어머니가 여차여차 해서 여차여차하니 책상 밑의 신발을 가지고 C병원 응급실로 좀 오라고 했다. 김 계장은 알았다며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자 휴대폰을 붙들고 있는 아내의 뒤편에서 나타난 병원의 구급차가 후진으로 응급실 입구에 꽁지를 들이밀어 넣었다. 아내는 후딱 전화를 끊고 응급실 앞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H는 그저 보고만 있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가운을 입은 젊은 직원이 왜가리가 실린 침대를 밀고 나와 구급차에 대고 미니 침대바퀴가 자동으로 접히며 실려다. 그거 참,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적에 구급차 뒷좌석에 올라탄 아내가 빨리 타라며 손짓을 했다. H는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왜가리침대를 중앙에 누이고 아내와 구급차 뒤에 마주 앉았다.
문이 밖에서 닫히고 바로 출발이다. 가운의 입은 젊은 직원의 모습이 작은 유리로 보이며 멀어져갔다. 그때서야 H는 아내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K 전문장례식장, 아내의 입에서 짤막한 대답이 나왔다. K 전문 장례식장이라면 고향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드디어 큰 도로에 들어선 모양이다. 구급차가 사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H는 눈길 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구급차 뒤에 달린 작은 유리너머로 눈길을 주었다. 유리너머로 봄날의 아득한 경치가 밀려가고 있었다. 뭐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득한 풍경, 유리창이 액자처럼 보이며 그 액자의 풍경은 수시로 바뀐다. H는 그 풍경이 왜가리가 날개를 접은, 아니 날아간 봄날의 무늬라고 여기며 가슴의 앨범에 담고 있었다.
잠시 머물다 간 왜가리의 무늬란 분명 이런 것인가? 의문이 일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받아보니 김 계장이었다. C 병원이라고 했다.
-김 계장, K 전문장례식장으로 옮기고 있어. 미안하지만 그리로 좀 와!
전화에 대고 그렇게 말하고 사각 액자를 통해 실시간 바뀌는 무늬를 가슴에 담기에 바빴다. 훗날. 문득 이 무늬가 떠오르면 왜가리가 날아가던 봄날의 무늬라고 명명해야지. 아니, 새어머니의 무늬라고 기억해야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액자 속의 변하는 무늬에 눈길을 던져놓고 있는데 구급차가 어느 쪽으로 급하게 방향을 트는지 사각 액자의 방향이 바뀌었다. 투명한 햇살이 들어오는데 H는 그 햇살이 노을처럼 여겨졌다. 찬란한 왜가리의 노을! 속으로 그렇게 외치자 노을 속으로 날아가는 한 마리의 왜가리가 H의 눈에 선명하게 일고 있었다. 아, 왜가리가 날아간 하늘의 무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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