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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석각을 찾아서
▣ 일 시 : 2024년 08월 16일(금)~18(일)
▣ 코 스 : 광점동-방장문-영랑대-천왕봉-장터목-삼신봉-세석-창불대-영신대-곧은재-백무동
▣ 인 원 : 2명(2일차 합류 1명)
▣ 날 씨 : 맑음
세간에 풍문으로 떠돌던 천왕봉 의병 석각의 실체가 최근 지리산국립공원 경남사무소(소장 김종식)에 의해 밝혀졌다. 1903년(계묘)1) 겨울 지리산 내원골에 들어와 은거했던 권상순(權相舜, 1876~1931)2) 공의 손자 권맹호(權孟虎, 1941년생) 선생이 지난해 11월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공단에 천왕봉 석각 조사를 의뢰하였다. 공단에서 지난 4월부터 조사를 착수하여 비계를 설치한 후, 3D 스캐너 작업과 탁본을 하고,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 최석기 명예 교수님과 한학자 이창호 선생께서 석각 명문(銘文)의 판독과 국역을 하였다.
注 1) 청하(淸河) 권병국(權秉局)의 『청하일감(淸河日鑑)』 附「춘심동기(春深洞記)」에 '내가 계묘년 겨울 허다한 명구를 버리고 이 산에 들어온 것은 어째서인가?[ 余癸卯冬 棄許多名區 入此山 何也]' 계묘년은 1903년이다.
2) 권상순의 출생년은 일부 자료에 1865년으로 되어 있으나, 안동권씨 서령공파(署令公派) 세보의 1876년(병자)을 좇았다. 『청하일감(淸河日鑑)』의 묵희(墨熙, 1875~1942)가 쓴 「淸河號敍(청하호서)」에 “淸河以號之者 吾友權君秉局也[청하를 호로 삼은 사람은 나의 벗 권군 병국이다.]”라는 문구를 보고, 의아해서 족보를 확인했다.
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석각 명문은 폭 4.2m 높이 1.9m의 바위에 세로 16자 25행으로 전체가 392자이다. 앞부분은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을 기술하고, 뒷부분은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내용이다. 끝에서 2행은 석각을 새긴 1924년(갑자) 7월 1일(임자)[崇禎六甲子秋七月壬子朏]이고, 마지막 1행은 글을 찬(撰)한 사람과 글쓴이의 이름이다. 권맹호 선생은 조부 권상순(權相舜) 공의 필획으로 알고 있었으나, 석각 명문을 판독한 결과 고죽인(孤竹人) 묵희(墨熙, 1875~1942)3)가 찬(撰)하고 화산인(花山人) 권륜(權倫)4)이 쓴(書) 것으로 밝혀졌다. 고죽과 화산(안동)은 두 분의 본관이다.
注 3) 묵희(墨熙, 1875~1942) : 본관은 고죽(孤竹), 자는 정회(正晦), 호는 경산(敬山),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 노백헌(老白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 경남 거제 장목면 출신으로 고성군 동해면에 살았던 유명한 서예가
4) 권륜(權倫) : 청하(淸河) 권병국(權秉局)의 맏아들. 『청하일감(淸河日鑑)』에 아들 권륜(權倫)에게 주는 「경도문(警導文, 깨우쳐 가르치는 글)」이 있음.
청하(淸河) 권병국(權秉局)의 『청하일감(淸河日鑑)』5)에 묵희가 지은 「청하일감서(淸河日鑑序, 1924)」와 「청하호서(淸河號敍, 1923)」 2편과 7언절구 '답간기(答簡寄)' 한 수가 실려있다. 명원정사(明源精舍) 향사록(享祀錄)5)에 따르면, 1922년 9월부터 1931년 3월까지 10년 동안 내원골의 명원정사에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 13대 황제 신종(神宗) 만력제(萬曆帝)와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의 제사를 지냈다. 명원정사(明源精舍) 계해년(1923) 봄 향사록(享祀錄)에 묵희(초헌관)의 이름이 있다. 권륜의 이름은 향사록에 13번이나 나온다. 권륜은 권병국의 아들이다. 추가 조사를 통해 확인이 필요하겠지만, 천왕봉 석각은 내원골 명원정사(明源精舍)에서 향사를 지낸 사람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된다. 앞으로 권상순(權相舜, 1876~1931)과 권병국(權秉局)이 동일 인물임이 밝혀져야 한다.
注 5) 『청하일감(淸河日鑑)』과 『명원정사 향사록』 은 권상순 공의 손자 권맹호 선생이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다.
천왕봉 석각은 지리산의 시간을 잠시 100년 전으로 돌려놓았다.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南嶽: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만세 천왕(天王)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100년 전 천왕봉 아래 절벽에 새겨진 광복을 염원하는 의병들의 절규를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이다. 끝.
□ 천왕봉 「孤竹墨熙撰 花山權倫書」 석각
『서경』 「제전(帝典)」(「순전(舜典)」)에 “만이(蠻夷)1)가 중하(中夏)2)를 어지럽혔다.”라고 하였으니, 중하와 오랑캐가 사방을 경계로 한 것이 분명하고도 오래되었도다. 『춘추』의 대일통(大一統)3)은 곧 양(陽)을 부지하고 음(陰)을 억제하며 왕도(王道)를 존숭하고 패도(覇道)를 내치는 것으로 화하(華夏:중화문명)를 숭상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충량(忠良)을 현양(顯揚)하고 난적(亂賊)을 주벌(誅罰)하는 것이 그것이니, 그 중하를 존숭하고 오랑캐를 물리친 것이 또한 늠름하지 않은가.
대개 황극(皇極)4)이 나라를 창업하고 왕도(王道)를 행할 재주를 가진 사람이 받들어 전하였는데, 총 얼마 동안의 기년(紀年)5)이 지난 뒤에는 성인이 태어나 천하를 책임지고서 임금과 스승이 되었으니, 이것이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가 삼황(三皇)6)의 기년이 되며 모두 상고시대의 여러 해이다. 소호씨(少昊氏)·전욱씨(顓頊氏)·제곡씨(帝嚳氏)·당요씨(唐堯氏)·우순씨(虞舜氏)가 덕으로 서로 계승하였으니, 이것이 오제(五帝)의 기년이며 모두 몇 년이다.
하후씨(夏后氏)가 순(舜)임금의 선양(禪讓)을 받았고, 상(商)나라 탕(湯)임금이 우(禹)임금의 하(夏)나라를 계승하였으며, 주무왕(周武王)이 탕임금의 상나라를 정벌하였으니, 이것이 삼왕(三王)7)의 기년이며, 모두 몇 대 몇 년이다.
한고조(漢高祖)가 주나라 천자가 쇠미해진 틈을 엿보고서 일어나 황제가 되어 몇 세대를 전했는데, 조만(曹瞞)8)이 유궁후예(有窮后羿)9)와 왕망(王莽)10)을 이어 잠시 신성한 기물을 훔쳤다. 그러나 촉한(蜀漢) 소열황제(昭烈皇帝)11)가 의기를 떨쳐 잘 끝마쳤으니, 총 몇 년이다.
진무제(晉武帝)12)가 염흥(炎興)을 만나13) 나라를 일으켜 면면이 몇 년을 이어갔다. 오호(五胡)14)가 중화를 어지럽혀 송(宋)나라·제(齊)나라·양(梁)나라·진(陳)나라가 겨우 명맥과 지위를 보전하여 총 몇 년을 내려왔다. 隋나라가 통일하여 몇 년을 지배하였으며, 이연(李淵) 부자가 스스로 일어나 唐나라를 건국하여 여러 세대 몇 해를 전했다.
조씨(趙氏)의 송(宋)나라는 평안하게 다스려진 때가 또한 몇 년이다. 그런데 북방의 여러 오랑캐가 송나라를 침범하여 마침내 타무르(鐵木兒)15)를 만나 그에게 멸망 당하였다. 대명(大明:명나라)은 천명을 누려 몇 세대 몇 년을 전했으나 누르하치(努哈赤)16)에게 멸망 당하여 거의 명맥이 끊어졌다.
아! 천도가 그릇된 것인가? 옳은 것인가? 어찌하여 황호(皇昊)17)가 떨치지 못한단 말인가. 혹 영력(永曆)18)이 이어지려는 것일까? 그러나 사해가 텅 비었고, 온갖 오랑캐가 발호하고 있으니, 또한 어느 때나 안정될 것인가? 장차 6만 년을 전해 온 문화가 이에 금수(禽獸)의 지경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천지가 크게 닫혔다고 하는데, 다시 열리는 기미는 언제쯤일까? 오랑캐를 크게 통일하여 문명이 밝게 빛나고 넓게 퍼져가는 날을 반드시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울분과 원통함을 금치 못하고서 피를 토하고 울음을 삼키며 이 남악(南嶽:지리산) 천왕봉(天王峯)에 올라 만세 천왕(天王)의 대일통을 기록한다. 아! 슬프다.
숭정(崇禎) 후 여섯 번째 갑자년(1924) 가을 7월 임자일 초하루 나라를 잃은 유민 고죽(孤竹) 묵희(墨熙)19)가 짓고, 화산(花山:안동) 권륜(權倫)이 쓰다.
注 1) 만이(蠻夷) : 중국 황화문명권을 중심으로 동쪽의 오랑캐를 夷, 서쪽의 오랑캐를 戎, 남쪽의 오랑캐를 蠻, 북쪽의 오랑캐를 狄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사방의 오랑캐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였다.
2) 중하(中夏) : 중국 황하 문명권을 가리킴. 中華 또는 華夏라고 한다.
3) 『춘추』의 대일통(大一統) : 공자가 魯나라 역사를 취해 微言大義를 붙여 『춘추』를 저술하면서 드러낸 크게 하나로 통일된 문명권을 말하는 것으로, 天命을 받은 천왕(天王:天子)이 모월을 正月로 하는 책력을 만들어 천하에 반포해서 하나로 통일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4) 황극(皇極) : 『서경』 「洪範」에 보이는 말로 大中至正한 큰 표준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天王을 가리킨다.
5) 기년(紀年) : 세월 또는 年歲를 가리킨다.
6) 삼황(三皇) : 伏羲, 神農, 黃帝를 가리킨다.
7) 삼왕(三王) : 夏나라 禹王, 商나라 湯王, 周나라 文王·武王을 가리킨다.
8) 조만(曹瞞) : 후한의 정승으로 삼국시대 魏나라를 세운 曹操를 가리킨다. 조조의 어릴 적 이름이 阿瞞이었기 때문에 그를 비하하여 부른 칭호이다.
9) 유궁후예(有窮后羿) : 夏나라 때 활을 잘 쏘던 인물로 하나라 임금 相을 내치고 천자의 자리를 찬탈한 인물이다.
10) 왕망(王莽) : 前漢 말 哀帝를 폐위하고 平帝를 세웠다가 독살한 뒤 찬탈하여 新나라를 세운 인물이다.
11) 소열황제(昭烈皇帝) :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을 세운 유비(劉備)를 가리킨다.
12) 진무제(晉武帝) : 司馬懿의 손자로 魏元帝로부터 선양을 받아 晉나라를 세운 司馬炎을 가리킨다.
13) 염흥(炎興)을 만나 : 炎興은 蜀漢 後主 劉禪의 아들 劉諶의 연호로, 염흥 원년(263)에 魏나라가 대거 침입하자, 유심은 항복하지 않고 자결하였다. 여기서는 蜀漢이 망한 때를 만났다는 말로 쓰였다.
14) 오호(五胡) : 晉나라 말 북방의 匈奴族·鮮卑族·羯族·氐族·羌族 등 중국 북방을 침략하여 北朝를 세운 다섯 胡族을 가리킨다.
15) 타무르(鐵木兒) : 元나라를 일으킨 타무르를 가리킨다. 帖木兒, 鐵穆兒로 표기하기도 한다.
16) 누르하치(努哈赤) : 淸나라를 일으킨 누르하치를 가리킨다. 奴兒哈赤, 奴兒合赤, 老乙可赤 등으로 표기한다.
17) 황호(皇昊) : 위대한 천왕의 권위를 가리킨다.
18) 영력(永曆) : 명나라 말의 永明王(1647-1662)의 연호.
19) 묵희(墨熙, 1875-?) : 老白軒 鄭載圭(1843~1911)의 문인으로, 자는 正晦, 본관은 孤竹, 일명 묵근자(墨根子),구절산인(九節山人)이다. 固城 구절산 아래 章基(현 고성군 동해면 장기리)에 살았다.
국역 :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 최석기 명예 교수님
○ 석각 내용 요약
이 글은 한말 경상우도의 유학자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1843~1911)의 문인 묵희(墨熙, 1875~1942)가 짓고, 권륜(權倫)이 글씨를 써서 1924년(갑자) 7월 1일(임자일)<양력 8월 1일> 지리산 천왕봉 밑의 바위에 새긴 것이다. 글자수는 모두 392자이다.
이 글의 요지는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 天王의 예악문물이 널리 미쳐 천하가 하나로 크게 통일되는 세상)을 주제로 하여, 천왕(天王)을 상징하는 지리산 천왕봉의 위엄을 빌어 오랑캐(日帝)를 물리쳐 밝고 빛나는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면서 나라를 빼앗긴 울분을 비분강개한 어조로 토로한 것이다.
이 글에는 동아시아 역대 왕조가 일어났다가 망한 것을 간추려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제가 강점한 암울한 시대는 반드시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역사를 돌아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역사를 회고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역대로 전한 성인의 문명, 공자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지키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글은 한말의 유학자들이 지리산 천왕봉을 천왕으로 여기면서 ‘성인이 다스리는 문명국’이라는 자존의식을 잃지 않으려는 정신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2024년 월 일
최석기(한국선비문화연구원 부원장)
1611년 유몽인의 「유두류산록」에 "비로봉은 동쪽에 있고.....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다시피 비로봉 위로 올라갔지만 추워서 오래 있을 수 없었다."
첫댓글 [아! 슬프다." 광복절 79주년을 맞아 100년 전 천왕봉 아래 절벽에 새겨진 광복을 염원하는 의병들의 절규를 우리 모두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말씀 가슴 깊게 새기겠습니다.
수고하셨고
감사드립니다.
아래 글을 쓴 분(권륜)을 찾았습니다.
기존 자료와 뉴스에 권상순의 입산한 해(1894)년은 오류입니다.
권상순 생년도 1865년으로 나와 있는데 1876년(병자)입니다'
춘심동기에 계묘년 1903년입니다.
일몰 일출이 멋지네요
지리 야생화도 이쁘고
그 옛날 의병들의 함성도 들리고
언제나 그리운 지리
멋집니다
천왕봉 석각의 실체를 밝힌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실제 그곳에 서면 100년 전
지리산에 독립을 염원하는 의병들의 함성이 들립니다.
🎋지리역사 탐구산행과 지리지명 바로 세우기에 많은 노려과 열정으로 이루어내신 도솔산인님
그 열정에 박수와 찬사을 보냅니다
글구 ㅡ이번 천왕봉 아래 392자의 석각에 대한 많은정보와 설명 감사 드립니다
영랑대에서 만남 넘 좋아습니다
영랑대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특정한 카페의 지리산이 아닌 우리 모두의 지리산입니다.
지명은 언어의 화석입니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창지개명된 이름들이
이제 바로잡혔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도솔산인 선생님 그동안 잘지내셨습니까~^^ 여러 매체를 통해서 천왕봉 석각복원 소식은 전해들었습니다. 도솔산인 선생님의 풍부한 지식과 노련한 경험이 일조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뵐 기회가 또 생기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늘 도솔산인 선생님의 건강과 안전한 지리산행을 기원드립니다.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에 묻힐 천왕봉 석각의 비밀을 공단에서 풀었습니다.
세 번째 간 날은 발판을 철거해서 헬기 작업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 산에 다닐지 모르지만
빠루님은 꼭 산에서 뵙기를 바랍니다.
늘 안전 산행하시고 건강하세요.
잘계시지요
오늘 동릉으로 천왕봉 오르고 하산때 석각에 다녀왔습니다
그때의 울분을 느꼈고 감동이 밀려 왔습니다
지리의 장엄함속에 민족의 역사가 흐르는 지리산에 케이블카 가 생긴다는게 너무나 아쉬울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