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4 사순5주간 월 – 133위 109° 김 우르시치나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133위 109° ‘하느님의 종’ 김 우르시치나
이름 : 김 우르시치나,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 妻
출생 : 1842년
순교 : 1868년 7월(음), 교수, 죽산
김 우르시치나[1][1.1]는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의 아내로, 그와 혼인한 뒤 죽산 용천[1.2]에 정착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2] 그러다가 1868년 7월에 부부가 함께 죽산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김 우르시치나의 남편인 조치명 타대오는 본디 귀가 어두운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포교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래서 포교가 ‘신자들과 친척들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면서 무수한 형벌을 가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에 김 우르시치나는 포교에게 ‘남편은 귀가 어둡다.’고 설명하였고, 이 말을 들은 포교는 남편 조치명 타대오를 놓아주는 대신 김 우르시치나만을 압송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꾸어 조치명 타대오를 김 우르시치나와 함께 죽산 관아로 압송하였다.
죽산으로 압송된 우르시치나 부부는 곧장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받아야만 했는데, 이때 그들 부부는 함께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는 “빨리 죽기만을 바란다.”고 대답하였다. 그런 다음 함께 옥에 갇혀 지내다가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김 우르시치나의 나이는 26세였고, 남편 조치명 타대오의 나이는 29세였다.
한편 김 우르시치나 부부가 투옥된 뒤, 열 살 된 아들[2.3]이 밥을 구걸하여 옥으로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자 김 우르시치나는 그 밥을 함께 갇혀 있던 교우들과 나누어 먹곤 하였으며, 밥이 부족할 때에는 자신이 굶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우르시치나는 아들을 불러 “우리는 이제 곧 죽게 될 것이니, 더 이상 부모를 생각하지 말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당부하였다. 이 말대로 그의 아들은 고향으로 갔다가 얼마 뒤 다시 부모를 만나려고 죽산 관아로 갔는데, 그때는 이미 우르시치나 부부가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뒤였다.[3][3.1]
[註]__________
[1] 기록에는 김 우르시치나의 세례명이 ‘우보로시나’로 나온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430번; 『병인치명사적』, 6권, 62-63면). 그러나 우보로시나라는 세례명은 없으므로 ‘우르시치나’의 오기로 보인다.
[1.1] 우르치나노 : 우르시치누스(Ursicinus) 이름을 가진 성인은 몇 분이 된다. ‘하느님의 종’ 김 우르시치나의 세례명은 아마도 순교 성인인 이탈리아 라벤나(Ravenna)의 우르시치누스(Ursicinus, 67년 순교, 축일 6월 19일)를 여성형으로 바꾼 쓴 우르시치나(Ursicina)일 것이다. 순교행전(Acta Martyrum)[1.3]에 따르면, 성 우르시키누스(또는 우르시치노)는 이탈리아 서북부 리구리아(Liguria) 출신의 의사였다. 그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신앙 때문에 투옥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마침 라벤나를 방문한 밀라노의 성 비탈리스(Vitalis, 4월 28일)에 의해 다시 용기를 내어 순교를 받아들였다. 그가 참수된 후 성 비탈리스가 그의 시신을 수습해 라벤나에 묻었다.
[1.2] 용촌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湧川里) 793 일원에 용천(湧泉)이 흐른다. 죽산 뒷산에서 샘이 솟아오름으로 이를 보고 용천수(湧泉水)라 한데서 마을명이 유래되었다. 《‘하느님의 종’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2018년) 중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 약전에 ‘용촌’으로되어 있으나 ‘용천(湧泉)’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
[1.3] 순교자에 대한 교회의 작품은 2세기 중엽부터 쓰여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작품에는 《순교행전》, 《순교록과 수난기》, 《성인전기》등 세 종류가 있다. 《순교행전》에는 순교자들이 체포당했을 때의 상황과 심문조서, 재판기록과 판결문 등이 기록되어 있는데, 심문내용은 주로 간단한 질문과 대답으로 되어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증언에서 보듯이 《순교행전》은 초기교회 전례서에서 인용되었다. 대표적인 순교행전으로는 《성 유스티누스와 동료 순교자들의 순교행전》(로마에서 165년경에 순교), 《쉴리움의 순교자들의 행전》(카르타고에서 180년경에 순교), 《성 치프리아누스의 순교행전》(카르타고에서 258년경 순교) 등이 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순교를 ①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은사, ②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완전한 동참, ③복음에 대한 완전한 실천, ④사람이 하느님께 드리는 가장 고귀한 제물, ⑤세상을 정화하며 구원 대한 확실한 보증, ⑥세례 이후에 지은 모든 죄를 가장 완전하게 용서받는 기회로 여기며 순교를 세례보다 더 위대한 것으로 여겼다. 이처럼 순교는 초대교회 신자들은 신앙인의 가장 든든한 기둥이며 대들보이며 복음적 이상(理想)과 바람(希望)으로 여기며 순교의 기회가 오면 언제나 망설임 없이 기꺼이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다. 박해가 끝나자 순교의 기회를 더 이상 갖지 못하자, 신자들은 내적 목표를 상실한 듯했다. 순교보다 더 큰 그리스도의 은사가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순교에 버금가는 그리스도인의 복음적 삶을 동정·은수생활에서 발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은수생활은 그 삶의 특수성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 가령 이교들의 침입과 의식주 문제, 개인의 영적 성장 기회와 가능성의 한계 등의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동정녀생활도 현실적인 난제들과 위험이 있기는 은수생활과 대동소이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로 선택하신 것이나 복음의 교회성 등을 성서를 통해 발견하면서 체계적인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생활이 출현하였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현행 교회법전은 은수자·동정녀, 수도회·재속회를 동등하게 복음적 서원을 하고 일생 그리스도를 보다 가까이 따르며 봉헌하는 삶으로 인정하고 있다.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429.430번; 『병인치명사적』, 6권, 62면. 김 우르시치나 부부의 거주지를 ‘직산 농촌[2.1]’(현 충남 천안시 성환읍 와룡리[2.2])으로 증언한 기록도 있다(『병인치명사적』, 1권, 145면).
[2.1] 농촌(農村) : 와우(瓦宇, 성환읍 외룡리 172-3 일원) 북쪽에 있는 마을. 농토가 좋아서 농사를 많이 짓고 있다.
[2.2] 와룡리(臥龍里) : 직산군 삼서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농촌(農村)과 우리 평택군 동면 와야동 각 일부가 병합하여 와우리(臥龍里)의 와(臥)자와 농촌(農村)의 농(農)자를 따서 와농리(臥農里)라 하다가 농(農)자가 좋지 못하다 하여 농(農)자를 룡(龍)으로 바꾸어 와룡리(臥龍里)라 하고 성환면에 편입되었는데 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성환읍 와룡리(臥農里)가 되었다.
[2.3] ‘직산조씨 조치명 타대오 집안 순교 가계도’(☞‘하느님의 종’ 조치명 註 [3.1])로 볼 때 ‘조현우(趙顯禹)’일 것이다.
[3] 『치명일기』, 정리 번호 429.430번; 『병인치명사적』, 1권, 145-146면; 6권, 62-63면.
[3.1] 註 [2] : 직산 농촌(農村, 천안시 성환읍 와룡리)에서 죽산관아(안성시 죽산면 죽산리)까지 100리 길이었다. 용인 백암면 용천(龍川, 용인시 백암면 용천리)에서 죽산관아까지는 30리 길이다.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의 10살짜리 아들 조현우가 혼자서 죽산관아까지 왕래하기는 100리 길(성환 농촌) 보다는 30리 길(백암 용천)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인치명사적』, 1권, 145면’의 기록대로 ‘하느님의 종’ ‘조치명 타대오’와 ‘김 우르시치나’가 체포 당시 거주지가 직산 농촌(農村, 성환읍 와룡리)이었다면 보호자나 동행자가 있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