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 바르바라(1805〜1839)
o 일명 ‘진주의 모친’
o 1805년 : 시골 농부의 딸로 출생
o 1839년 : 전옥서에서 병사로 순교
김 바르바라는 성과 세례명만 알려져 있으며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교우들 사이에서는 친주의 모친’ 으로 불리던 과부 순교자로, 진주는 그녀의 딸 이름이었다. 그녀의 순교 날짜와 당시의 상황은 “1839년 음력 4월 옥중에서 염병으로 선종”248: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옥은 곧 형조에 딸린 전옥서 (典獄署) 를 말한다.
당시 포청 옥이나 전옥서에 갇혀 있던 신자들은 형벌보다 더 무섭다는 굶주림과 갈증으로 고통을 받아야만 하였고,더없이 불결했던 옥중에 만연할 수밖에 없는 염병 (染病,장티푸스) 에 걸려 신음 속에서 죽어가곤 하였다. 곤장에도 주뢰에도 굴하지 않았던 그들이 옥살이의 고통에 스러져 간 것이다.249〉
바르바라는 어 느 시 골250〉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 어 났다. 본성이 순수하고 진실한 데다가 믿음성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일찍이 천주 교리를 접하기는 했으나 이를 독실하게 봉행하지 않았고,바르바라도 이러한 상황에서 성장하다가 12세가 되어 서울의 황 마리아라는 부유한 교우 집 에 식모로 들어 가게 되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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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기해일기』,102쪽.
249)Ch. Dallet 저,안응렬 • 최석우 역주,『한국 천주교회사j 상,분도출판사, 1979, 111쪽.
250)최근에는 바르바라의 출생지를 ‘시흥 봉천’ (현 서울 봉천동) 으로 기록하 는 경우도 있는데.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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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라가 천주교의 진리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녀는 얼마 안 되어 천주교에 입교하였고,이후 5〜6년 동안 열심히 수계생활을 하는 동안 그녀의 마음속에는 동정을 지키겠다는 결심이 자리 잡게 되었 다. 그러나 그녀의 부친은 이미 바르바라의 혼처를 결정해 놓고 있었다.
어느 날 바르바라를 찾아온 부친은 그녀에게 "훌륭한 혼처가 나와 승 낙을 해두었으니, 시집갈 준비를 해라.”고 말하였다. 그녀가 “저는 동정 을 지키려고 합니다.”라고 자신의 결심을 말씀드렸지만, 부친은 "혼인하 여 부부가 함께 천주교를 봉행한다면 방해를 받는 일도 없을 것이고, 네 자신이나 부모나 동생들을 위해서도 유익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마치 상대자가 열심한 교우 청년인 것처럼 꾸며댔다. 그리고 이리 저리 집 주 인 황 씨와 딸을 달래면서 동정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러한 부친의 강권 때문에 그녀는 결국 집으로 돌아와 혼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교우라고 생각하였던 남편은 아주 완고한 비신자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바르바라는 남편을 입교시키기 위해 예로써 그를 섬기면서 권면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15년이 홀렸지만 남편은 요지부동이 었다. 그러므로 아들딸을 여 럿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 사이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았고,이로 인해 바르바라는 형언키 어려운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결국 남편은 개종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객사하고 말았다.
이후 바르바라는 천주교로 개종한 딸 진주만을 데리고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면서 평화롭게 생활하였다. 또 마침 조선에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 들을 만나 성사를 받는 은총도 누릴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녀의 열심은 배가 되어 더욱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2월(음력)에 바르바라는 공 소로 쓰이는 고마청골^”의 이광헌(아우구스티노) 회장 집으로 가서 판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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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고마청골〔雇馬廳洞〕: 현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에 있던 경기감영 옆의 마을 (『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회차 71, 1884. 4. 28, 김 요아킴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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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를 받고 이뭇골252)의 이문우(요한) 회장 집으로 가서 묵다가 체포되었다. 2 5 3 》 이내 포도청으로 압송된 그녀는 ‘배교하고 교우들의 이름을 대 라 .’ 는 포도대장의 명을 거절함으로써 주뢰 형을 당하고 곤장을 맞아 팔 이 부러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믿음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포도청에서는 바르바라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를 형조 로 이송토록 하였고,여기서도 그녀는 결코 곤장과 주뢰에 굴하지 않고 시종 일관 자신의 신앙만을 고백하였다. 이윽고 전옥서에 갇힌 그녀는 형벌로 인 한 상처뿐만 아니라 옥살이의 굶주림과 갈증과도 싸워야만 하였다. 그러다 가 3개월 만에 염병에 걸려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 34세였다.254>
김 바르바라의 순교일에 대해서는 부연 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기해일기』에는 그 순교일이 ‘1839년 음력 4월’로만 나오는데, 103위 성인 명단에는 ‘5월 27일(음력 4월 15일) ’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거 자료를 찾을 수는 없다. 그 순교 시기가 5월 26일(음력 4월 14일) 포도청에서 장살로 순교한 장성집 (요셉), 5월27일 포도청 옥에서 병사로 순교한 이바르바라와 거의 같았으므로 여기에 맞추어 김바르바라의 순교일을 기록한 것은 아닐까 ?
한편 김 바르바라의 순교일과 순교 상황을 "음력 2월에 체포되어 3개 월 이상 옥살이를 하다가 전염병으로 옥사했다.”고 기록한 경우도 있다 (A. Daveluy,『조선 순교사 비 망기』(전사본),393쪽 및『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8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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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이뭇골(이문동) : 현 용산구 후암동과 중구 남대문로 5가 사이에 있던 마 을(이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j 회차 77. 1884. 5. 14, 김 프란치스 코의 증언).
253)『기해 • 병오박해 순교자 증언록』회차 13, 1883. 5. 17. 황 마리아의 증언.
254)『기해일기』,102쪽 :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슨e(전사본), p. 393쪽 :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de(전사본),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p.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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