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05.
정릉을 산책할 결심
바리
아파트 단지와 상가로 이어진 언덕을 올라 정릉에 다다랐다. 24살 아래의 청소년은 무료, 65세 이상의 노인도 무료. 양례와 나는 익숙한 듯이 공짜 표를 받아든다. 정릉의 출입구를 통과하면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통과한 것처럼 더위가 멈추고 개운한 바람이 솨아 불어온다. 나무향과 풀향이 거침없이 콧속으로 쑥 들이닥친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다가오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할머니 양례의 느린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으면 시냇물도 흔들리는 나무도 주변 사람들의 모습도 느긋한 속도로 눈에 담긴다. 정릉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조성된 깔끔한 공원이자 자그마한 숲이다. 이 공간은 집에만 있는 양례를 데리고 나와 산책시키기에 딱 좋다.
양례는 오늘도 이틀 만에 집 밖에 나온다. 버스 세 정거장 거리만큼 이사를 오니 세 정거장 전에 모여 살던 동네 친구들이 통 양례를 보러 놀러오지를 않는다. 양례는 주로 집에서 무한히 재방송되는 트로트 가수의 노래 방송을 보며 앉아있거나, 빨래를 하고 바닥을 쓸고 닦으며 집을 치운다. 무료하고 답답하지만 따로 취미나 놀 거리가 없으니 손녀 딸인 내가 놀러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할머니 양례의 일상을 알기 때문에 양례가 심심할 것을 걱정할 때가 많다. 의무감과 미안함이 뒤섞인 채로 오늘도 양례를 끌고 나와 정릉에 데리고 간다. 양례의 집에서 정릉까지는 내 걸음으로 10분, 양례의 걸음으로 20분이다. 양례는 오랜만에 바깥에 나들이하는 기분을 내려고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세미 정장 바지와 사촌오빠가 사준 하늘색의 깨끗한 카라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아직은 푸르른 나무 길을 따라가면 왼편에는 시냇물이 얇게 흐르고 왼쪽을 머얼리 바라보면 높은 곳에 동그란 무덤이 아이스크림을 퍼놓은 것처럼 자리 잡고 있다. 흙바닥을 자박자박 걸어 작은 돌다리를 건너 항상 양례와 앉아 쉬는 평평한 돌 벤치에 앉는다. 널찍한 벤치에 양례와 나란히 앉으면 정릉을 처음 온 것 같은 젊은 연인과 익숙한 듯 돌아다니는 나이든 사람들과 아이를 데리고 온 가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참깨같이 발발 돌아다니고 어르신들은 어디든 마음껏 누워있거나 맨발로 걷는다. 아니면 신발이나 모자를 아무 곳에나 내러두고 마음대로 몸을 움직여 스트레칭한다.
“할머니, 시원하고 좋지?”
“진짜여~”
양례의 말버릇은 말끝마다 ‘진짜여’를 붙이는 것인데,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나는 공감이 된다는 뜻이다. 양례는 스스로 이런 말버릇이 있는 줄을 모른다. 우리가 앉아있는 벤치 뒤로는 도토리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 있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통통한 도토리가 머리맡에 떨어져 토독 토독 구른다. 양례는 몸을 일으켜 상수리를 주워 잘 여물었나 만져본다. 손에 단단하고 둥그런 촉감이 느껴진다. 도토리가 많이 떨어지네, 하니 양례는 도토리가 아니라 상수리라고 정정해준다. 동그란 모양이 도토리이고 도토리보다 길쭉한 모양은 상수리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도토리가 많이 떨어지면 흉년이 온다고, 어린 시절의 양례가 들었던 옛 어른들의 말이 몇 십년의 세월을 건너 단숨에 나에게로 온다. 그렇구나, 삼삼하고 담백하게 배부른 식사를 한 것처럼 기분이 슬슬 좋다.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양례는 기분이 좋아 보인다. 시원하네, 하고 저 멀리 먼 곳을 바라보거나 가까이 다가온 아이들을 귀여워라 한다. 우리 사이에는 별 말이 없지만 서로의 마음에 한 칸 바람이 드나드는 것을 느낀다. 양례의 작은 리본이 달린 분홍색 신발 근처로 개미들이 도골도골 돌아다닌다.
“개미가 드글거리면 곧 비가 오는거여. 비가 올 줄 알고 위쪽으로 도망오는거지”
“그런건 어떻게 알았어?”
“모르지~ 옛날에 어른들이 그랬어”
“신기하네”
“그지? 진짜여...”
양례에게도 양례보다 어른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양례는 꼭 다 알려줘놓고 모른다고 한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로 온갖 정보를 접하는 나와 달리 양례가 아는 것은 온통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다. 가끔 이런 순간에는 양례의 세상과 나의 세상이 겹쳐져 있지 않은 것만 같다. 지난번에 양례와 함께 ‘장수상회’를 볼 때에도 그랬다. 이 영화는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에 관한 영화인데, 같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온갖 나라에서 만든 온갖 시대의 영화를 접한 내게 ‘장수상회’는 단순하게 느껴졌다. ‘아주 눈물을 쏙쏙 뽑는구만! 신파가 따로 없어’라는 생각을 하며 양례에게 재미있냐 물으니, 양례는 울먹울먹한 목소리로 고관절이 부러진 치매에 걸린 친척 할머니 이야기를 한다.
“그 할매가 고관절도 부러졌잖여. 치매는 절대로 걸리면 안되겠더라. 진짜여~”
괜히 양례를 슬프게 만든 것 같아 후회가 됐다. 이렇게 슬픈 내용일 줄 알았으면 다른 영화를 골랐을텐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양례의 반응을 수시로 살폈다. 양례가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마다 조급한 마음에 계속 부연설명을 덧붙이게 됐다. 양례가 이해할만큼 충분히 영화가 친절하지 않을까봐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 영화는 모든 복선을 명료하게 설명해주었다. 재미있는 부분에서는 내가 더 크게 웃어서 양례를 웃게 만들었다. 양례는 내가 웃으면 아이처럼 따라 웃기 때문이다. 양례가 한국영화 특유의 시트콤스러운 개그에 환하게 껄껄 웃으니 마음이 놓였다. ‘장수상회’가 따뜻하게 끝이 나자 양례는 눈물 콧물을 휴지로 훔치며 말했었다.
“재미있는 한국영화는 꼬옥 이렇게 슬퍼. 진짜여. 그래도 조금 슬퍼야지 재미가 있는 법이야”
양례가 돌 벤치에서 끄응차 일어나며 이제 가자고 한다. 양례는 바닥을 유심히 살피며 걷는다. 바닥에 떨어진 상수리 중에 통통히 잘 여문 것은 줍고, 속이 썩거나 푸르게 덜 익은 것은 다시 바닥에 내려놓으며 돌아오는 길. 양례는 오늘 잘 여물어 단단한 상수리 두 개를 주웠다.
“그걸로 뭐하게?”
“도토리 묵이나 해먹을까? 호호홍”
양례가 광대를 반질반질하게 들썩이며 웃는다. 자그마한 상수리 두 알을 혹여 떨어뜨릴세라 한 손에 꼭 쥐고 정릉 언덕 아래 집까지 걸어 내려온다. 가까우니 혼자서도 정릉에 자주 산책 가고 그러라고 말하지만 양례는 나 없이는 정릉에 오르지 않을 것을 안다. 양례는 상수리가 바닥에 굴러 떨어지지 않게 티비 옆에 살포시 내려놓는다. 돌아온 양례의 집 안에 온통 훈훈한 온기가 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