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가엾은 비눗갑들 / 이선영
비눗갑 속에 담긴 문드러진 비누의 몰골을 볼 때면
지금 그 비눗갑이 느끼고 있을 슬픔을 알 것 같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대부분의 새 비눗갑들에
처음 얹혀지는 비누는 탄탄한 비누여서
보기에 따라서는 비누가 비눗갑 안에 담긴 것이 아니라
비눗갑의 숨통을 누르고 앉은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마치 몸에 잘 맞는 아내를 얻은 듯 그때 비눗갑은 얼마나 행복해 보이던가?
그러나 뭇사람의 손때가 묻고 물만 닿아도 녹아나는
비눗갑이 일찍이 상상해본 적이 없는 비누의 허약한 체질은
얼마나 비눗갑을 놀라게 하고 실망에 빠지게 했을 것인가?
나날이 작아지는 비누들 나날이 풀어지는 관념의 물컹한 살집들
오, 가엾은 비눗갑들이여, 그들은 비누에 대해
얼마나 순진한 기대와 어리석은 집념을 품고 있었던가?
한 개의 비누만을 담았던 비눗갑이란 이 세상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더러, 젊거나 어린 나이에, 불의의 사고로 망가지는 비눗갑은 유감스럽지만 흙 속 깊이 버려지곤 한다
경험이 많은 비눗갑들이여, 온갖 비누 치레에 닳아빠지고 몸을 더럽힌
그럼에도 오래 건재하는 비눗갑들이여, 그때쯤이면 평안할 수 있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