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털보 조양동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정벌을 시작하면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할 수 없소. 경 들은 짐이 부드러운 말로 달래 주고 번왕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하라고 하는데, 그럼 이 일을 이대로 끝내야 되겠소?]
문화전(文華殿) 대학사 대객납(押客納)이 말했다.
[황상께서 혜아려 살피옵소서. 오삼계가 운남을 지킨 이래 그곳이 편안 해지고 오랑캐가 소란을 피우지 않아 본조(本朝)에 와서 남방은 아직 아무런 변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요동으로 옮겨 놓는다면 운남 성과 귀주성 일대에 어떤 변고가 생길지 모르는 일입니다. 조정에서 번 왕을 제거하지 않으면 오삼계는 감격해서 보답을 할 것이고 경정충과 상가희 두 번왕과 광서성 공씨 집안의 군사들도 황은에 감격할 것이며 천하는 태평해질 것입니다.]
강희는 말했다.
[경은 번왕들을 물러나게 하면 서남쪽에 대군이 없어지므로 어쩌면 변 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이오?]
대객납은 말했다.
[그러하옵니다. 오삼계의 군사는 정예부대이며 평소 위세를 떨치고 있 으므로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순종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을 움직인 다면 화가 될 것인지 복이 될 것인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소신의 의 견으로는 한 가지라도 일이 많아지는 것보다 적어지는 것이 좋다고 생 각합니다.]
호부상서(戶部尙書) 미사한(米思翰)이 품했다.
[자고로 거룩하신 왕이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중시하는 것은 황로지술 (黃老之術)이라고 했습니다. 서한(西漢)이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바 로 나라 안의 정치를 잘하고 전쟁을 하지 않는 데 있었습니다. 황상께 서는 거룩하고 밝으시며 덕망에 있어서 삼황(三皇)에 못지않으시며 한 나라나 당나라 때 위세를 떨치던 황제들도 좀처럼 견주기 어렵습니다. 황상께서는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오르시고 정사를 살피신 이래 백성들과 동고동락하시며 사방의 오랑캐들과 잘 지내오셨으니 천하가 그 은덕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신의 천박한 견해로는 세 번왕의 일은 옛 규칙대로 처리하되 따로 죄를 물을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풍우가 잔잔해 질 것이고 국태민안(國泰民安)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천자(聖天 子)께서 삼가 정성을 다하여 나라를 다스리니 더 이상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봅니다.]
강희는 대학사 두립덕(杜立德)에게 물었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두립덕은 말했다.
[세 번왕을 세운 것은 본디 그 공로를 치하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 늘날까지 세 번왕은 큰 과오가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을 제거한 다면 혹시 사정을 잘 모르는 자들이 조정이 선조의 공신들을 용납하지 못했다고 말하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혹시 황상의 밝은 정사에 금이 갈까 걱정이 됩니다.]
왕공대신들은 서로 설왕설래하였으나 모두가 주장하는 것은 세 번왕을 그대로 두자는 의견이었다. 위소보는 여러 사람들의 하는 말이 문자를 쓰는 말들이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주장들이 하나같이 번 왕을 철수시키지 말자는 데 있는 것을 알고 속으로 초조하게 생각했다. 재빨리 색액도에게 눈짓을 하면서 살며시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이 것은 그에게 다른 사람들과 반대되는 말을 하라는 뜻이었다. 색액도는 그가 고개를 흔드는 것을 보고 그 뜻을 오해했다. 그는 세 번 왕을 철수시키는 데 반대하라는 줄로 잘못 알았다. 그는 황상의 참된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오로지 위소보일 뿐이고 또 강희가 여러 사람들의 의논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을 보자 소 황제가 감히 오삼계와 싸움을 일으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하고 말했다.
[오삼계와 상가희, 그리고 경정충 세 사람은 모두 용병술에 뛰어난 인 물들입니다. 만약 조정에서 세 번왕을 철수시킨다면 세 번왕은 항명하 여 운남, 귀주, 광동, 복건, 광서 등 다섯 성에서 동시에 군사를 일으 킬지도 모르며, 어쩌면 다른 반역자들이 출병하여 그에 호응할지도 모 르는데 그렇게 된다면 대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소신이 볼 때 오삼계 와 상가희는 나이가 많아 이 세상에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몇 년 더 기다려서 두 사람이 수명을 다해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 을 듯합니다. 세 번왕을 따라 수없이 싸움을 해 은 늙은 병사들과 장수 들도 태반이 죽게 될 것이며 그때 가서 번왕을 철수시키기는 쉬울 것입 니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경은 신중을 기하자는 것이군.]
색액도는 황상이 칭찬의 말을 하는 줄로 알고 절을 하며 사은(謝恩)의 말을 했다.
[소신은 국가대사에 충성을 다하기 위하여 생각하고 대책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희는 대학사 도해(圖海)에게 물었다.
[경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고 삼도육략(三埇六略)에 깊이 통달했을 뿐 아니라 용병술에 뛰어난 사람이니 이 일을 어떻게 보시는지 말해 보시 오.] [소신은 재주와 지혜가 평범한데 황상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이끌어 주 시었습니다. 황상께서는 만 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지 않습니까? 조정의 병마들은 매우 뛰어나 세 번왕이 만약 불측한 마음을 가진다 해도 큰일 을 이룰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세 번왕이 거느리고 있는 수십만 명 이나 되는 사람들을 일제히 요동으로 옮기는 것은 조금 걱정이 됩니 다.]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된다는 것이오?] [요동은 우리 대청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이며 역대 조상들의 능침이 있 는 곳입니다. 세 번왕이 만약 신하로서 복종할 뜻이 없어 수십만 명이 요동에서 반란을 일으킨다면 방비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해는 다시 말했다.
[세 번왕이 군대를 원위치에서 철수시킨다면 조정에서는 따로 병마를 운남, 광동, 복건성으로 보내 주둔시켜야 할 것입니다. 수십만이나 되 는 대군이 동쪽으로 올라오고 또 수십만 명의 대군이 남쪽으로 올라오 게 되면 많은 군비가 들 것이고 지방을 시끄럽게 할 것이 틀림없습니 다. 세 번왕이 거느리고 있는 군사들과 그곳의 백성들은 잘 지내고 있 고 어떤 충돌이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 광동과 복건성의 언어 는 매우 야릇하고 특이해서 새로운 군사를 보내면 서로 말이 잘 통하지 않고 습관이나 풍속이 달라서 어쩌면 백성을 자극하여 반란을 일으킬지 도 모르니, 이렇게 되면 황상께서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하시는 거룩한 뜻을 손상시키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위소보는 들으면 들을수록 다급해졌다. 그는 소황제가 번왕을 물러나도 록 할 결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왕공대신들은 하 나같이 담이 적고 큰일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자기는 관직이 낮고 나이가 어린 까닭에 조정에서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 다. 강희는 병부상서(兵部尙書) 명주(明珠)에게 물었다.
[이 일은 병부에서 관리할 일인데 경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명주는 말했다.
[성상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총명함을 지니고 계실 뿐 아니라 먼 일을 내다보시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신하들보다 백배나 뛰어나십니다. 소 신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 번왕을 철수시키는 것은 그것대로 이득이 있고 철수시키지 않으면 또한 그것대로 이득이 있어 마음속으로 정말 결정하기가 힘들어 며칠 동안 계속 잠도 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 갑자기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하고 마음을 놓게 되었으며 어젯밤부터 는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소신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은 황상께서 생각이 치밀하시고 상세하여 일을 헤아림에 있어서 실수가 없다는 사실 입니다. 조정의 신하들이 생각하는 일은 이미 황상께서 짐작하고 계실 것입니다. 소신들이 생각하는 계책이라는 것이 아무리 고명하다 해도 황상의 가르침만 못합니다. 소신은 그저 황상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일 을 처리하며, 황상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면 죽어라 하고 받들어 앞으로 나아가며 용기있게 일을 처리한다면, 최후에 가서는 반드시 크게 길하 고 크게 덕을 볼 것이며 만사가 뜻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소보는 그 말을 듣자 탄복하여 속으로 생각했다. (조정의 문무백관들 가운데 벼슬아치 노릇을 하는 재간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따를 수 없구나. 이 사람의 아첨을 떠는 재간은 정말 대단하다. 나는 그를 사부로 모셔야겠다. 이 녀석은 이후 크게 출세할 것이며 부귀공명은 혜아릴 수 없을 정도겠다.) 강희는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나는 경의 생각을 말해 보라고 했지 내 덕을 칭송하는 말을 듣고 싶었 던 것이 아니오.]
명주는 절을 했다.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옵소서. 소신은 공덕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있 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병부에서 세 번왕이 불온하다 는 소문을 들은 후 소신은 주야로 걱정을 하며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해 왔습니다. 만일 군사를 쓰게 된다면 어떻게 군사들을 움직이고 장수들을 파견해야 이길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했으며, 주군으로 하여 금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리 생각해 봐도 주군께서는 너무나 거룩하시고 밝으신 반면 소신들은 형편없는 사람들이지요. 우리들이 애써서 생각해 낸 방책은 황상께서 아무렇게나 생각해 내시는 것에 결코 미칠 바가 못됩니다. 성천자께서 는 하늘 위의 자미성이 하강하신 것이라 우리와 같은 범속한 신하들로 선 미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소신은 황상께서 분부하신 일이라면 하늘 이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설사 소신들이 일시 알아차리지 못한 다 해도 애써서 일을 처리하기만 하면 나중에는 끝내 확연히 깨닫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대신들은 여러 사람들 앞에서 아첨하는 그가 너무나 뻔뻔하다고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 역시 입으로는 그 말에 찬성하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강희는 입을 열었다.
[위소보, 그대는 운남에 가 보았으니 그대가 말해 보게나. 이 일을 어 떻게 하면 좋지?]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 밝게 살피시옵소서. 소신은 국가대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 습니다. 다만 오삼계는 소신에게 한마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위 도통, 이후 어떤 변고가 있다해도 그대는 걱정을 하지 마시오. 그대의 도통 직위는 오로지 올라갈 뿐 아래로 내 려가지는 않을 것이오.' 소신은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물었습니다. ' 이후에 어떤 변고가 있습니까?' 오삼계는 말했습니다. '때가 되면 자연 히 알게 될 것이오.' 황상, 오삼계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입니 다. 이 일은 절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아마 지금쯤 용포(龍袍)도 만 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맹호에 비유했으며 황상을 꾀 꼬리에 비교했습니다.]
강희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물었다.
[뭐가 맹호고 꾀꼬리인가?]
위소보는 절을 한 후 말했다.
[오삼계 그 녀석은 대역무도한 말을 했습니다. 소신은 감히 그 말을 그 대로 옮길 수가 없습니다.]
강희는 말했다.
[말하도록 하게. 그대가 스스로 말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오삼계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습니다. 그는 그 세 가지 보물이 좋기는 하나 애석하게도 부족한 점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의 보배 는 비둘기알만한 커다란 흥보석(紅寶石)인데 마치 닭의 볏처럼 붉은 그 보석을 모자에 박고 그는 말했습니다. '보석은 매우 크지만 애석하게도 모자가 너무 작구려.']
강희는 코웃음을 쳤다. 대신들은 서로 쳐다보며 하나같이 생각했다. (보석은 매우 크지만 애석하게도 모자가 너무 작다는 말은 바로 머리 위에 황곤(皇冠)을 쓰고 싶다는 말이 아닌가?) 위소보는 말했다.
[그의 두 번째 보물은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있는 하얀 호랑이 가죽 이었습니다. 소신은 궁 안에서 황상을 시중들었지만 한 번도 하얀 호랑 이 가죽을 본 적이 없습니다. 오삼계는 이와 같은 하얀 호랑이는 수백 년만에 한 번 볼까말까하며 과거 송태조 조광윤이 잡은 적이 있고 주원 장도 잡은 적이 있으며 조조와 유비도 잡은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는 하얀 호랑이의 가죽을 의자 위에 깔아놓고 말했습니다. '이 하얀 호 랑이 가죽은 구하기 힘든 물건이지만 애석하게도 이 의자가 너무 평범 한 것 같구려.']
강희는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우습게 생각했다. 그는 위소보가 제멋대 로 오삼계를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학문이 없기 때문에 조조가 황제까지 한 줄로 여기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위 소보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세 번째 보물은 대리석 병풍인데 거기에 그려진 그림에는 몇 마리의 작은 꾀꼬리들이 나무 위에 앉아 있고 나무 아래에는 커다란 호랑이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말했지요. '병풍은 매우 진귀한 것이나 애석하게도 맹호가 나무 아래에 앉아 있고 작은 꾀꼬리들이 높은 가지 위에 앉아 있구려.']
강희는 말했다.
[그의 말은 비유에 지나지 않으며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있다고 는 볼 수 없지 않을까?]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는 너그러운 마음과 커다란 아량으로 신하들을 아끼고 사랑하 십니다. 오삼계가 만약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었다면 그 은혜를 고맙게 여기고 보답을 할 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애석하게도 조정의 왕공대신들에게 예물을 줄 줄만 알고 있습니다. 이분에게는 황금 일천 냥을 주고 저분에게는 백은 이만 냥을 주는 등 씀씀이가 크지요. 그런 데도 그 세 가지 보물을 황상께 바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의 그런 물건을 탐내는 것이 아니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지요. 오삼계는 언제나 조정에 향은을 달라고 하고 군사들에게 포 상할 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은자를 손에 쥐면 태반은 북경에 남겨 두고 문무백관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래서 소신은 말했습니다. ' 왕야, 그대가 금을 조정의 대관들에게 선물하는데 그 씀씀이가 너무 커 서 내가 왕야를 대신해서 배가 아플 지경입니다.' 오삼계는 웃었습니 다. '소형제, 이 금과 은은 잠시 그들의 집에 맡겨두어 그들로 하여금 하나같이 나를 도와 좋은 말을 하도록 하려는 것일세. 몇 년이 지나면 그들은 자연히 이자까지 보태서 나에게 되돌려줘야 할 것일세.' 소신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해 물었습니다. '왕야, 재물이 그 사람의 손에 들어간 이상 어찌 왕야에게 되돌아온다 는 것입니까? 이것은 왕야가 스스로 그들에게 선물한 것이고 상대방은 왕야에게 빌린 것도 아닌데 어쩨서 이자까지 쳐준다는 말입니까?' 오삼 계는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저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고 조그만 비 단 주머니를 저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소형제, 이것은 소왕이 그대에 게 주는 조그만 뜻일세. 아무쪼록 그대는 황상 앞에서 나를 위해 좋은 말만 해주게. 황상께서 번왕을 철수코자 할 때 그대는 번왕을 철수시켜 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씀드려 주게나. 하하하! 그대는 안심하게. 이 물건들은 내가 장래 그대에게 되돌려 달라고 하지 않겠네.']
위소보는 말을 하면서 품속에서 비단 주머니를 꺼내 손에 들더니 높이 쳐들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주머니에 평서왕부라는 붉은 글자가 수놓 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위소보는 그 주머니를 풀어혜치더니 거 꾸로 들었다. 그러자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진주, 비취, 미옥(美 王) 등 수십 개나 되는 진품(珍品)들이 대전에 흩어져서 주광보기(珠光 寶氣)가 눈부시게 빛났다. 이 구슬 가운데는 오삼계가 선물한 것도 있 지만 어떤 것은 위소보가 다른 곳에서 뇌물로 받은 것이다. 그런데 다 른 사람들이 어찌 분간할 수 있겠는가? 강희는 웃었다.
[운남에 한 번 갔다오더니 많이도 얻었군 그래.] [이 진주는 소신이 감히 가질 수가 없으니 황상께서 다른 사람에게 하 사하도록 하십시오.]
강희는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오삼계가 그대에게 준 것인데 내가 어찌 다른 사람에게 내린단 말인 가?] [오삼계가 소신에게 준 까닭은 황상 앞에서 결코 번왕을 철수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짓말을 하라고 준 것입니다. 소신은 황상을 향한 충성심이 강하기 때문에 하찮은 금은재보를 욕심내어 반적을 충신이라고 말씀드 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다면 오삼계의 물건을 받고 그에게 미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찌되었든 천하의 금은재보는 모두 황상 의 물건입니다. 황상께서 누구에게 하사하시든 황상의 은덕이니, 오삼 계가 이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 환심을 사도록 할 필요는 없는 것 입니다.]
강희는 껄껄 소리내어 웃고 말했다.
[하하하! 그대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는군. 그렇다면 그 진주보석들은 내가 그대에게 다시 하사한 것으로 하게나.]
강희는 주머니에서 서양 용수철로 만들어진 금시계를 꺼내서 내밀었다.
[그대에게 또 다른 서양 보물을 내리도록 하겠네.]
위소보는 재빨리 꿇어엎드려 큰절을 하고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서 두 손으로 금시계를 받아들었다. 눈치가 빠른 대신들이 두 군신의 이와 같은 짓을 보고도 어찌 강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대신들은 모두 오삼계의 뇌물을 받은 적 이 있었다. 그리고 최근의 예물들은 위소보가 건네준 것이 아닌가? 그들은 마음속으로 자기들이 혹 분수를 모른다면 위소보가 운남에서 준 물건이 얼마얼마였다고 털어놓게 될 것이고, 그러면 황상께선 진노하시 어 바깥쪽의 번왕들과 내왕하며 불측한 일을 도모했다는 죄명을 씌울 것이며 결국 감투를 잃을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다. 위소보가 오삼계를 모함하는 말들은 실로 유치하여 가소로울 지경이었다. 오삼계가 진짜 반란을 일으킬 마음이 있다 해도 결코 황제가 보낸 흠차 대신 앞에서 드러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조정대신들에게 준 금과 은을 장래 밑천과 더불어 이자까지 합쳐 거두어들인다는 생각을 하더라 도 자기가 이후 반란을 일으켜 성공을 하게 되고 황제가 되었을 때 각 대신들에게 금과 은을 되받겠다는 암시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야말로 세상을 모르는 어린애 생각이지, 오삼계같이 노련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 어찌 약간의 금과 은을 선물한 것을 따지겠는가? 위소보의 그와 같은 말을 단번에 반박하여 위소보를 곤경에 처하도록 할 수는 있었지만 위소보의 뒤를 황상이 밀어 주고 있는 이 마당에 그 누가 감히 쓴맛을 자초하여 나서겠는가? 명주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라 즉시 입을 열고 말했다.
[위 도통은 젊은 영재로서 모든 일을 명백히 예견하며 또 황상에 대해 서는 층성을 다하여 오삼계의 소굴로 깊이 들어가 진상을 캐내었으니 진정 탄복할 일입니다. 만약 황상께서 먼저 통찰하시고 위도통을 친히 보내 알아보도록 파견하지 않았다면, 서울에서 일을 처리하는 우리들이 오삼계 그 늙은 것이 나라에 깊은 은혜를 입고도 속으로 반란을 일으킬 작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이 한 마디의 말은 강희와 위소보를 추켜올리는 동시에 자기와 조정백 관들을 슬쩍 변명해 주는 한편, 오삼계의 죄를 확실히 했다고 할 수 있 었다. 태화전의 모든 사람들은 이 몇 마디의 말이 모두 그럴싸하다고 생각했다. 대신들은 가슴이 서늘해져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제서 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강친왕과 색액도는 원래 위소보와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래서 그 들은 자연히 위소보의 뜻을 알고 우물에 떨어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듯 오삼계의 허물을 크게 들추어내 떠들었다. 대신들도 너나없이 한마디씩 하게 되었고 모두 번왕을 철수시켜야 한다 고 했으며 스스로 자기가 멍청했다고 크게 꾸짖는 한편 다행히 황상께 서 깨우쳐 주시어 구름을 헤치고 햇살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방책을 내놓기까지 했다. 번왕들을 어떻게 철수 시키고 오삼계를 어떻게 잡아서 북경으로 데려와야 하며, 또 어떻게 그 의 가산을 몰수해야 하는가를 말하기도 했다. 오삼계의 재물은 한 나라와 버금가니 그의 가산을 몰수한다면 대단히 국물이 많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느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때 그 일이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걱정했다. 그 일에 나섰던 사 람들이 그 가산을 몰수하기 전에 오삼계가 먼저 그 사람의 머리를 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강희는 사람들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말했다.
[오삼계는 비록 불측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행 동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니, 이곳에서 오늘 있었던 말들은 한마디도 누 설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에게 잘못을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될 기회를 주어야 할 것이오.]
대신들은 일제히 황은이 망극하다고 했으며 진정 인자하기 이를데 없다 는 등의 말을 했다. 강희는 품속에서 누런 종이를 꺼내며 말했다.
[이 유시가 적절한지 그대들이 한번 봐 주시오.]
파태(巴泰)가 허리를 굽히고 받아 두 손으로 받쳐들고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봉천승운황제조왈(奉天承運皇帝詔曰), 자고제왕평정천하(自古帝王平定 天下) 식뢰사무신력(式賴師武臣力) 급해우녕밀(及海宇寧謐) 진려반사 (振旅班師) 휴식사졸(休息士卒) 비봉강중신(卑封疆重臣) 우유이양(優游 吏養) 상연혁세(賞延奕世) 총고하산(寵固河山) 심성전야(甚盛典也)!]
그는 여기까지 읽고 잠시 말을 멈추었다. 대신들은 일제히 웅성거리며 혀를 차는 소리를 냈다. 황상의 뛰어난 문장을 칭송하는 소리였다. 파 태는 나직이 기침을 하더니 마치 한(韓), 유(柳), 구(歐), 소(蘇) 의 절묘한 문장을 감상이라도 하는 듯 음성을 길게 빼며 다시 읽기 시 작했다.
[왕숙독충정(王夙篤忠貞) 극터유략(克攄猶略) 선로육력(宣勞戮力)진수 암강(鎭守巖彊) 석짐남고지우(釋朕南顧之憂) 궐공무언(厥功懋焉)!]
그는 여기까지 읽더니 잠시 여유를 두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말 훌륭한 문장이군!]
색액도가 말했다.
[오삼계가 조금이라도 인성(人性)이 있는 사람이면 이 유시를 받아 읽 었을 때 황상의 천은에 감복하고 말 것입니다.]
파태는 다시 읊었다.
[단념왕년치이고(但念王年齒已高) 사도폭로(師徒暴露) 구주하황(久駐遐 荒) 권회양절(眷懷良切) 금이지방저정(禁以地方底定) 고윤왕소청(故允 王所請) 반이안삽(搬移安揷) 자특견모모(玆特遣某某) 모모(某某) 전왕 선유짐의(前往宣諭朕意) 왕기솔소속관병(王其率所屬官兵) 취장북래(趣 裝北來) 위짐권주(慰朕眷注) 서기단석구지(庶幾旦夕購止) 군신해락(君 臣偕樂) 영보무강지휴(永保無疆之休) 지일응안삽사의(至一應安揷事宜) 이칙소사칙비주상(巳飭所司飭庇周詳) 왕도일(王到日) 즉유녕우(卽有寧 字) 무이위념(無以爲念) 흠차(欽此).]
파태는 음조가 낭랑한 편이었고 더구나 유시를 읽을 때 높고 낮게 잘 띄어 가면서 읽었다. 낭독이 끝나자 신하들은 모두 칭찬해 마지않았다. 명주는 말했다.
[단석구지 군신해락이라는 여덟 글자는 정말 사람을 감격하게하는군요. 그 유시를 들으니 소신들의 마음까지 훈훈해집니다.] [가장 좋기로는 오삼계가 명을 받들고 조정에 귀의하는 것이오. 그렇게 되면 백성들은 전쟁의 재난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이오. 그러므로 반드 시 말을 잘하는 사람을 운남으로 보내 유시를 선포하고 짐의 뜻을 전해 야 할 것이오.]
대신들은 황제의 말을 듣고 모두 다 위소보를 바라보았다. 위소보는 사 람들의 시선을 받고 당황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야단났구나. 이 일은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지난 번 며느리를 데려 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이번에 번왕을 철수시킨다는 임 무를 띠고 가면 오삼계가 어찌 흠차대신을 죽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운남으로 가면 아가를 만나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한편 그는 목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 다. 명주는 위소보의 안색이 흙빛이 되는 것을 보고 그가 감히 갈 엄두 를 못 낸다는 사실을 알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굽어 살피십시오. 말 잘하는 사람으로는 도통 위소보가 가 장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 도통의 위인됨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오삼계가 황상께 불경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를 뼈속까지 미워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중 팔구 오삼계를 만나게 되면 대뜸 그를 꾸짖어 일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소신의 의견으로는 차라리 예부시랑(禮部侍郎) 절이긍(折雨肯), 한림원 학사 달이례(達爾禮) 두 사람을 운남으로 보내 유시를 선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두 사람은 점잖고 덕망을 갖추고 있으니 고집스러운 오 삼계를 감화시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강희는 그 말을 듣자 무척 마음에 드는지라 즉시 절이긍, 달이례두 사 람에게 운남으로 가서 유시를 선포하도록 일렀다. 대신들은 황제가 번 왕을 철수시킬 뜻을 이미 굳히고 유시도 미리 써서 몸에 지니고 있었다 는 사실을 알고 오삼계를 좋게 평가했던 것을 깊이 후회해 마지않았다. 이제 사람들은 말투를 바꾸어 오삼계의 있지도 않은 죄상을 늘어놓으면 서 오삼계는 그야말로 간악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오삼계가 나쁘기는 하나 그 정도로 나쁘지는 않을 것이오. 모두들 매 사에 증거를 찾도록 하고 일을 조심스레 처리하도록 하시오.]
그는 몸을 일으켜 위소보에게 손짓을 한 후 그를 데리고 후전으로 갔 다. 위소보는 황제의 뒤를 따라 어화원으로 갔다. 강희는 웃으며 말했 다.
[소계자, 그대는 정말 대단해! 만약 그대가 진주보배를 꺼내서바닥에 늘어놓지 않았다면 제기랄! 그 늙은 녀석들은 여전히 오삼계에게 좋은 말만 하고 있었을 것이네.] [황상께서 먼저 번왕을 철수하는 것이 좋다고 말씀을 하시기만한다면 모두 하나같이 번왕을 철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할것입니다. 하 지만 그들 스스로 그와 같은 말을 하도록 하는 것이더 재미있는 일이 죠.]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늙은녀석들은 매사에 신중을 기하려는 것이니 완전히 틀렸다고 말할 수야 없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오삼계는 언제나 손을쓰고 싶을 때 손을 쓰게 될 것이고 모든 것은 그가 내키는 대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 니 우리에게는 크게 불리한 일일세. 우리가 먼저그를 번왕에서 물러나 게 한다면 그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셈이 되지.] [그렇지요. 오삼계로 하여금 전주가 되도록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황상께서도 몇 번 주사외를 던져야죠.] [그 비유는 맞았네. 자꾸만 그에게 전주 노릇을 시킬 수는 없지. 소계 자, 우리들은 이번에 주사위를 던진 셈이네. 그러나 오삼계라는 녀석은 정말 상대하기 어렵단 말일세. 그 휘하의 장수나 병졸들은 모두 전쟁에 서 많은 경험을 쌓은 무서운 인물들이네. 그가 군사를일으켜 반란을 도 모하고 만약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그에게 호응한다면 야단이 나는 것 일세.]
위소보는 근년에 각지로 떠돌아다니면서 한인들이 오랑캐를 욕하는 말 을 숱하게 들어왔으며 한인들의 사람 수가 많아 백 명의 한인에 만주인 은 한 사람도 되지 않는 사실도 알았다. 만약 한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다면 만주인들은 수를 쓰더라도 감당할 수 없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랑캐를 욕하는 사람들도 많기는 했지만 오삼계를 욕하는 사람 들은 더욱더 많았다. 그는 이 점을 생각하고 말했다.
[황상께서는 안심하십시오. 천하의 한나라 사람들 가운데 오삼계를 좋 아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자기의 심 복 외에는 아무도 그를 받드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 점을 생각했었지. 전에 명나라 계왕이 면전으로 도망을 쳤 을 때 오삼계가 그를 잡아서 죽였네.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야 말로 한나라를 일으켜서 만주 사람들에게 대항한다고 말할 수 없지. 그 러므로 청나라를 반대하고 무찔러서 명나라를 세우겠다는 말은 하지 못 할 것이네.]
거기까지 말했을 때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다.
[명나라 숭정 황제가 언제 죽었지?]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긁적하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건....소신이 그때 아직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라 잘....잘 모르겠군 요.]
강희는 껄껄 웃었다.
[그야말로 맹인에게 길을 물은 셈이군. 그때 나도 세상에 태어나지 않 았네. 그렇군. 그의 제삿날이 되면 나는 몇 명의 친왕과 패륵들을 보내 숭정의 능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나에게 고맙 게 생각하도록 하고 속으로 오삼계를 통한히 여기도록 하겠네.] [황상의 신기묘산입니다. 그러나 숭정 황제의 제삿날이 되기도 전에 오 삼계가 먼저 반란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하지요?]
강희는 몇 걸음 서성거리더니 미소를 짓고 말을 바꾸었다.
[그 동안 그대는 성지를 받들어 일을 처리하면서 적지 않게 고생을 했 네. 오대산, 운남, 신룡도, 요동 등 그리고 최후에는 나찰국까지 갔다 오지 않았는가? 이번에 나는 그대를 좋은 지방으로 보내서 기분을 전환 시켜 주겠네.] [천하에서 가장 좋은 곳은 바로 황상의 곁입니다. 황상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고 황상을 쳐다볼 수만 있으면 저는 온몸에서 기운이 솟아나고 마음속이 말할 수 없이 편안해진답니다. 황상, 이 말은 결코 아첨을 떠는 것이 아닙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사실이네. 나와 그대, 우리 군신 사이는 정말 의기투합하고 있 으니 이 또한 연분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대와 더불어 어릴 적부터 싸 우면서 사귄 적이 있기 때문에 남들과는 다르지. 나 역시 그대를 만나 면 무척 기쁘다네. 소계자, 반 년 동안 그대의 소식을 듣지 못했을 때, 그대가 바다에 빠져 죽은 줄로 알고 나는 줄곧 그대를 위험한 곳에 보 내 모험하게 한 것을 후회하며 여간 슬퍼하고 괴로워하지 않았다네.]
위소보는 마음속이 뿌듯하여 말했다.
[아무쪼록....아무쪼록 제가 한평생 황상을 시중들 수 있기를 바랍니 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음성은 어느덧 목이 메어 있었다.
[좋아, 나는 육십 년간 황제 노릇을 할 테니 그대는 육십 년 동안 대관 노릇을 해주게. 우리 군신 두 사람은 그야말로 서로 은혜를 베풀며 의 리를 지켜 끝까지 변함이 없도록 하세.]
황제가 신하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한다는 것은 지극히 희귀한 일이었다. 강희는 나이가 어려 말하는 것이 솔직했고, 그와 위소보는 역시 총각지 교(總角之交)인지라 서로가 진정으로 대하고 있었다.
[황상께서는 백 년 동안 황제가 되십시오. 전 백 년 동안 심부름꾼이 되겠습니다. 대관이 되고 안 되고는 개의치 않습니다.] [육십 년간 황제 노릇을 하는 것도 부족하다는 것인가? 소계자, 사람은 적당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하네.]
그는 잠시 여유를 두었다가 말했다.
[소계자, 이번에 나는 그대를 양주로 파견하겠네. 그대로 하여금 금의 환향하도록 해주겠네.]
위소보는 양주로 보낸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쿵쿵 뛰는 것을 느끼며 물 었다.
[뭐가 금의환향인가요?] [그대가 북경에서 대관이 되었으니 고향으로 돌아가 친척이나 친구들을 만나 보며 위세를 떨치는 것도 좋고 특히 고을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대를 부러워하게 만든다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대가 부하를 시켜 상소문을 한 장 올리도록 한다면 그대의 부친이나 어머님께도 조정에서 어떤 직책을 내리게 될 것이니 매우 그럴싸하지 않은가?] [황상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강희는 그의 안색이 겸연쩍어지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그대는 싫은가?]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무척 좋습니다. 하지만....하지만 저는 저의 친아버지가 누군지 도 모른답니다.]
강희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자기의 부친이 오대산에서 출가한 것을 생각하고 자기와는 어느 정도 동병상련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대가 양주로 가거든 천천히 찾아보도록 하게. 어쩌면 하늘이 불쌍히 여겨서 그대 부자로 하여금 해후토록 해줄는지도 모르지. 소계자, 이번 에 양주로 내려가서 할 일은 정말 수월한 일일세. 나는 그대를 파견해 충렬사(忠烈祠)를 하나 짓게 할 참이네.]
위소보는 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말했다.
[충렬사라니요? 황상께서 사당을 짓고 싶으시다면 어디든지 지어도 될 것이 아닙니까? 하필 많고많은 곳을 남겨 두고 양주로 가서 세울 것은 없지 않습니까?]
강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소계자는 역시 학문이 없단 말이야. 충렬사라는 것은 아무 곳 에나 세우는 것이 아니야. 그곳에서 층신이나 열사(烈士)가 나와야만 세우는 것일세.]
위소보는 웃었다.
[소신은 우둔해서 잘 모르겠군요. 그러니까 결국은 관제묘(關帝廟)와 같은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청나라 군사가 중원으로 들어온 이후 양주와 가정(嘉 定)에서 너무나 심한 살육을 하여 양주십일과 가정삼도라는 말이 생겨 나지 않았는가? 나는 이 일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이 불안해진단 말일 세.]
위소보는 말했다.
[그때는 정말 매우 비참하게 사람들을 죽였다고 들었습니다. 양주성 안 도처에 시체가 뒹굴었고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우물이나 냇물에서 죽은 사람의 해골과 뼈를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아직도 이 세 상에 태어나기 전이고 황상께서도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니 우리 탓은 아닙니다.] [말은 그렇지만 나의 조상들이 한 일이니 역시 내가 한 일이지. 당시에 사가법(史可法)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데 그대는 들은 적이 있 는가?] [사각부(史閣部) 사 대인은 양주를 사수한 분으로서 그야말로 아주 훌 륭한 충신입니다. 우리 양주의 어르신들은 그를 들먹일 때 언제나 눈물 을 흘리지요. 우리 기녀원에서도 그분의 영위를 모시고 있는데 거기에 는 구문룡사진지영위(九紋龍史進之靈位)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초 하루와 보름에 모두 그 영위를 향해 절을 하지요. 사람들에게 들은 이 야기인데 기실은 그 영위가 사각부의 영위인데 그저 관가를 속이기 위 해 그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층신 열사는 언제나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서 사랑을 받고 있지. 원래 백성들이 구문룡 사진의 영위를 모시고 향을 태우고 배례를 올리는 것 은 실제로 사가법을 기리는 것이었군. 소계자, 그 기녀원은 어느 기녀 원이지?]
위소보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황상, 이 일을 말하자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저의 집에서는 여춘원이 라는 기녀원을 차리고 있는데 양주에서는 첫째 가는 대기녀원이랍니 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말 끝마다 시정잡배의 말을 하는 것을 보고 내 이미 그대가 선비 집안 의 출신이 아님은 알았다. 그러나 네 녀석은 나에게 꽤나 충성스럽다. 그와 같이 추악한 일도 속이지 않는군.) 사실 기녀원을 차렸다는 것은 위소보가 크게 허풍을 떨고 있는 것이었 다. 그녀의 모친은 그저 기녀에 불과했지 기녀원의 안주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희는 말했다.
[그대는 나의 유시를 받들고 양주로 가서 사람들이 듣도록 낭독하는 것 이네. 나는 사갑법이 충성을 다해 나라에 보답을 했으며 군주에 충성을 다하며 백성을 사랑했으니 그야말로 훌륭한 층신이며 커다란 호걸이라 고 칭찬의 말을 하겠네. 우리 대청나라는 충신과 의사들을 높이 사며 반역도와 역적을 업신여기네. 나는 사가법을 위해 훌륭한 사당을 지어 주고 양주에서 그 당시 성을 지키다가 죽은 충신과 용장들을 모조리 그 사당에다가 모시도록 하겠네. 그리고 다시 삼십 만 냥의 은자로 양주와 가정 두 성의 백성들을 구조하도록 하겠네. 그 다음 다시 성지를 내려 서 그 두 지방으로 하여금 삼 년 동안 전량(顚糧)을 면하도록 해주겠 네.]
위소보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황상, 이번에야말로 제게 정말 커다란 은혜를 베푸시는군요. 저는 황 상께 진정으로 큰절을 몇 번 해야겠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서 쿵쿵 소리가 나도록 세 번 절을 했다. 강희는 웃으 며 물었다.
[그대는 옛날 나에게 큰절을 하였을 때 진정으로 한 것이 아니었나?] [어떤 때는 진심과 성의를 다했고 어떤 때는 얼렁뚱땅 넘겼습니다.]
강희는 껄껄 웃으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속으로 생각했다. (나를 향 해 큰절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백 명이면 아마도 구십구 명은 얼렁뚱땅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말은 오로지 소계자만이 할 수 있을 것이 다.)
[황상, 황상의 이 계책은 그야말로 화살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쏘는 격이군요.]
강희는 웃었다.
[뭐가 한 대의 화살로 두 마리의 새를 쏘는 것인가? 그것은 일석이조라 고 해야 돼. 그런데 어째서 두 마리의 새를 잡는다는 것이지?] [그 충렬사를 짓는다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황상께서 백성에게 잘 대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은 오랑....청나라 군사들이 양주와 가정에서 한나라 사람을 마구 죽인 데 대해서 황상께 서 미안하게 여기시고 방법을 강구해서 보답을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 겠죠. 그래야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키거나 혹은 상가희와 경정충 등이 반란을 일으켜서 명나라인가 뭔가 하는 것을 찾겠다고 한다면 백성들은 청나라가 뭐가 나쁜가? 황제께서는 매우 훌륭하시지 않은가? 하고 말하 게 될 것입니다.]
강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네. 소인의 신분으로 군자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군. 사 실 내가 양주십일과 가정삼도의 사건을 생각해 볼 때 확실히 측은하게 느끼는 바가 없지 않네. 구혈금을 내리고 전량을 면하는 것도 인심을 수습하는 방법이지. 그런데 두 번쩨의 새는 어떤 것이지?]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서 그 사당을 짓는다면 모두들 층신의사는 훌륭한 사람임을 알 게 될 것이며 반역질을 꾀하는 사람들을 좋지 않다고 볼 게 아니겠습니 까? 그렇게 되었을 때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그것은 바로 반역이 니 백성들은 업신여기게 될 것입니다.]
강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어깻죽지를 두드리더니 웃으며 말했다.
[맞았네. 충성을 다해 국민에게 보답하는 사람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 을 크게 떠벌려야 하네. 천하의 백성들 가운데 어느 누가 그걸 부인할 사람이 있겠는가? 오삼계가 군사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몰라도 군사를 일으킨다면 아무도 그 뒤를 따를 사람이 없을 것이네.]
위소보는 말했다.
[저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고로 가장 뛰어난 충신 의사로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이 바로 악비 나리이시고 또 한 분은 관 제 왕야라고 했습니다. 황상, 이번에 우리가 양주에서 충렬사를 세우게 된다면 악비와 관왕의 묘도 수리를 헤주는 것이 좋겠군요.]
강희는 웃었다.
[자네는 정말 꼼꼼하군. 그러나 애석하게도 글공부를 싫어해서 탈이야. 관제묘를 수리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지. 관우는 정말 충성을 다해 군주에게 보답을 했고 의리를 지킨 셈이니 나는 그에게 봉호(封號)를 내리도록 하겠네. 악비가 싸운 상대는 금(金)나라 군사들일세. 우리 대 청나라는 본래 후금(後金)이네. 금이 바로 청나라이고 금나라 군사는 바로 청나라 군사지. 그러니 이 악왕묘(岳王廟) 는 아랑곳할 필요가 없네.] [그랬군요.]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그대들 오랑캐는 김올출과 합미치(哈迷蚩)의 후예들이군. 그대들 의 조상은 정말 형편없었지.)
[하남성의 왕옥산에는 오삼계가 매복해 놓은 한 떼의 병마가 있었지?]
위소보는 조금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을 그대가 만약 들먹이지 않았다면 나는 잊을 뻔했구나.)
[당시 그대는 오삼계가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사람을 보내 상소했지만 나는 오히려 그대를 한바탕 꾸짖었는데 그대는 그 이 유를 알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가 오삼계를 상대할 계휙을 제대로 짜놓지 못한 때라서 황 상께서는 일부러 믿지 않는 척함으로써 타초경사의 누를 범하지 않으려 고 한 것이겠죠.]
강희는 웃었다.
[맞았네. 타초경사라는 말은 제대로 사용했군. 조정에는 오삼계가 잠복 시켜 놓은 심복이 있을 것이니 우리의 일거일동을 그 도적은 똑똑히 알 고 있을 것이네. 왕옥산 사도백뢰의 일을 그 당시 내가 조사를 하였다 민 오삼계는 즉시 알아차리고 마음속으로 깜짝 놀라 즉시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르지. 당시 조정의 허실을 그는 모조리 다 알고 있었고, 그의 병력과 부서가 어떻게 된 것인지 나는 조금도 몰랐으니 싸움을 하게 되었다면 우리들이 반드시 패할 것이 아니겠는가? 반드시 지피지기해야만 백전백승할 수 있는 것일세.] [황상께서 당시 사람을 보내 저를 크게 꾸짖었던 일은 온 군영의 군관 들이 모조리 알게 되었습니다. 오삼계가 만약에 첩자를 저의 군영에 보 냈더라면 그 첩자가 반드시 그 늙은 녀석에게 보고하여 알렸을 것입니 다. 그 늙은 녀석은 어쩌면 마음속으로 황상께서 멍청하다고 웃었는지 도 모를 일이죠.] [그대가 이번에 양주로 갈 때 오천 명의 병마를 거느리고 하남 제원(濟 源)에 이르게 되면 갑자기 상대방의 의표를 찌르고 왕옥산의 도적굴을 소탕하게. 오삼계의 이 한 떼의 복병은 서울과 너무도 가까이 있기 때 문에 심복지환일세.]
위소보는 기뻐했다.
[그것 참 잘되었습니다. 황상께서 차라리 친히 정벌하여 오삼계로 하여 금 겁을 집어먹도록 위세를 떨침이 어떠합니까?] [왕옥산은 겨우 일, 이천 명의 도적들에 불과하고 그 가운데 태반은 노 약자와 부녀자들일세. 그 원가라는 녀석은 과장해서 삼만여 명이나 된 다고 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일세. 내 이미 사람을 산 위로 보내 똑똑히 알아봤네. 천여 명의 도적들을 상대로 내가 친히 정벌을 한다면 남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일세. 하하하!]
위소보는 강희를 따라서 헛웃음을 웃었다. 그는 속으로 소황제는 정말 너무나 똑똑해서 거짓으로 숫자를 크게 불려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 다.
[왕옥산의 도적들을 어떻게 소멸할 것인지 물러가 잘 생각해 보고 하루 나 이틀 뒤에 상주하게.]
위소보는 물러나와 생각했다. (나는 군사를 움직이고 싸움을 하는 일은 잘하지 못한다. 그 날 수전에 서는 시랑에게 의지했는데 육지에서의 싸움온 누구에게 의지해야 옳을 까? 옳지, 광동성 제독 오륙기를 불러 조수로 삼고 그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그는 싸움에 능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는 생각을 다시 고쳐먹지 않을 수 없었다. (황상께서는 나에게 방책을 강구해서 하루 이틀 안으로 상주하라고 했 다. 광동으로 사람을 보내 오륙기를 데려오더라도 한 달은 걸릴 것이니 시간이 안 맞는다. 북경성에 싸움에 능한 자가 있을까?) 그는 한참 동안 생각해 보았다. 북경성 안에는 훌륭한 무장들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만주의 대관들이었다. 이미 공작이나 백 작에 봉해진 사람이 아니면 장군이고 제독이었다. 조그만 일개 도통으 로서 그들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그의 작위는 이미 백작에 봉해져 있었다. 청나라 직관제도에 있어서 자작은 일품이고 백작 이상은 초품 (超品)으로 열거되어 대학사나 상서에 비할 때 그 직위는 더 높았다. 그러나 그것은 칭호에 불과한 것으로 존귀하기는 하나 내실이 없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유명한 신하들과 용장들을 데리고 명령을 내려서 듣 도록 한다는 것은 수윌한 노릇이 아니었다. 그는 방안에서 서성거리며 생각했다. 그리고 탁자 위의 시랑이 선물한 옥그릇을 바라보며 생각했 다. (시랑은 북경성 안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게 되자 나에게 부탁을 하러 왔다. 북경성에서 출제하지 못한 무관들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 아니겠 는가? 그러나 출세하지 못했으면서도 재간이 있는 사람을 일시에 모을 수는 없는 일이다. 재간이 없으면서도 크게 출세한 사람들은 북경성에 서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위소보만 하더라도 그중의 한 분이 지. 하하하!)
그는 탁자로 다가서서 옥그릇을 손에 들고 생각했다. (가관진작이라는 네 글자를 새겼는데 이 말은 정말 들어맞았구나. 그가 나에게 옥그릇을 선물하였을 때 나는 자작이었는데 지금은 이미 백작으 로 올라갔지 않았는가? 내가 무슨 재간으로 가관진작을 하게 되었지? 가장 큰 재간은 바로 아첨을 떠는 것이다. 아첨을 떠는 것 외에 나의 재간이라고는.... 제기랄! 하나도 없다. 무릇 재간이 있는 사람은 아첨 을 떨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알고 있는 무관 중에 누가 아첨을 떨지 않는가를 생 각해 보았다. 천지회의 영웅호걸들은 물론 함부로 아첨을 떨지 않았다. 그러나 사부 진근남과 오륙기 외에는 모두 내공이나 외공만 알았지, 군을 통솔하고 싸움은 할 줄 몰랐다. 사부의 부장인 임흥주는 전쟁을 할 줄 알았으나 애석하게도 그는 이미 대만으로 돌아간 후가 아닌가? 갑자기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날 그가 시랑을 데리고 천진으로 가서 바다로 나아갔을 때, 수사총병 황포는 자기를 매우 떠받들었는데 천진 위(天津衛)의 한 털보 무관은 자기에게 눈살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쭉이 며 업신여기는 표정을 짓고 한마디의 아첨도 하지 않았었다. 그 녀석은 누구일까? 당시에도 그는 그 군관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더더욱 생각해 낼 수 없어 그저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아첨을 떠는 사람은 재간이 없다. 그 털보는 아첨을 떨고자 하지 않았 으니 반드시 재간이 있을 것이다.) 그는 즉시 병부상서 아문(衙門)으로 가서 상서 명주를 찾았다. 그리고 는 그에게 빨리 천진위에 있는 한 명의 털보 군관을 북경으로 불러 주 십사 하고 청했다. 그 털보의 계급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고 부장(副 將)이 아니면 참장(參將)쯤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명주는 이상하게 여겼다. 이름도 없고 성명도 없는 털보를 어떻게 데려 오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소보는 지금 가장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는 사람이니, 천진위로 사람을 보내서 한 명의 무관을 데려오는 것은 물론, 설사 열 배나 더 어려운 일이라 해도 방법을 강구하여 일을 처리 해 줘야 했다. 명주는 그 즉시 대답했으며 친히 븟을 들어 한 장의 육 백리가급문서(六百里加急文書)를 작성해서 천진위의 총병에게 전달하도 록 했다. 그 천진위 총장 휘하의 모든 털보 군관을 일제히 북경으로 올 라오게 하여 병부상서 아문으로 들어와 인사를 올리도록 한 것이다.
이날 정오 무렵 위소보가 점심밥을 먹자마자 친위병이 달려와서 병부상 서 대인이 뵙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위소보는 대문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고 보니 명주의 등 뒤에는 이십 명의 털보 군관들이 서 있었다. 어 떤 군관들은 검은 수염이었고 어떤 군관들은 허연 수염이었으며 또 어 떤 군관들은 반백의 수염이었다. 하나같이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명주는 웃으면서 말했다.
[위 백작, 나오시오. 그대가 말한 사람을 한 무더기 찾아왔소. 아무쪼 록 그대가 보아 합당한 사람을 뽑도록 하시구려.]
위소보는 갑자기 이토록 많은 털보 군관들을 대하자 어리둥절해 졌으나 그 말을 듣고 껄껄 웃으며 말했다.
[상서 대인, 저는 그저 한 털보를 찾아 달라고 했을 뿐인데 상서대인께 서는 정말 치밀하게 일을 처리하시는군요. 대뜸 이십여 명이나 찾아내 다니 말이외다. 하하하!] [사람을 잘못 부르게 되면 나으리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 아니겠소? 그것이 염려스러워 여러 사람을 불렀던 것이오.]
위소보는 다시 껄껄 소리내어 웃으며 말했다.
[천진위의 총병 휘하에 이토록 많은 털보들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람들 틈에서 갑자기 누가 우뢰 같은 소리로 호통을 내질렀다.
[털보가 어쨌다는 것이오? 그대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람을 데리고 장난을 치는 것이오?]
위소보와 명주는 깜짝 놀라 일제히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의 체구는 우람했으며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가 한 개 더 있을 정도였다. 그는 얼굴 가득히 노기를 띠고 있었다. 위소보는 어리둥절해 졌으나 곧 기뻐서 말했다.
[맞았소. 바로 노형이오. 나는 바로 그대를 찾고 있었소.]
그 털보는 더욱 화를 냈다.
[지난번 그대가 천진에 왔을 때 나는 그대의 비위를 거슬렸소. 그때 이 미 그대가 보복할 것을 알고 있었소. 나는 아무런 죄를 짓지 않았소. 억지로 나에게 죄를 씌우는 것은 결코 수월한 노릇이 아닐 게요.]
명주는 꾸짖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어쩨서 상관 앞에서 이토록 무례한가?]
그 털보는 조금 전 병부의 아문에 이르렀을 때 이미 명주에게 인사를 올린 바 있고 명주는 그의 직속상관일 뿐만 아니라 상관 중에서도 큰 상관이니만큼 함부로 반박할 수 없어 허리를 굽혔다.
[대인께 알립니다. 소장은 천진부장 조양동(趙良棟)이라고 합니다.]
명주는 말했다.
[이분 위 도통께서는 벼슬이 높고 작위도 존귀하신 분으로 위인됨이 너 그럽고 인자하여 본관과는 절친한 친구인데, 그대는 어째서 그의 위엄 을 거슬리려고 하는가? 어서 앞으로 나와 사과를 하도록 해라.]
조양동은 화를 삭이지 못하고 못마땅한 눈초리로 비스듬히 위소보를 곁 눈질하며 생각했다. (젖비린내 나는 녀석에게 내가 어째서 사과를 해야 한단 말인가?) 이때 위소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조형, 너무 탓하지 마시오. 이 형제가 그대의 비위를 거슬렸으니 마땅 히 그대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이오.]
그는 고개를 돌리고 군관들에게 말했다.
[형제는 조 부장과 한 가지 상의할 일이 있었소. 그러나 일시 그의 존 성대명을 기억할 수 없어 병부 대인으로 하여금 여러분들을 일제히 북 경으로 초청해 오도록 한 것이오. 여러분들은 밤을 도와 길을 재촉하느 라고 수고를 했는데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그는 연신 두 손을 모아 공수했다. 군관들은 재빨리 반례했다. 조양동 은 그가 겸손하고 온화하게 말하자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가슴속의 울화가 대뜸 사그러져 위소보에게 말했다.
[소장이 죄를 지었습니다.]
위소보는 두 손을 맞잡고 웃었다.
[너무 겸손해 할 것 없소이다.]
그는 명주에게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대인, 왕림하셨으니 아무쪼록 안으로 들어가 앉으시지요. 형제가 술을 올려 사의를 표명하겠습니다. 천진위의 친구들도 모두 들어갑시다.]
명주는 위소보와 사귀고 싶었던 심정인지라 기꺼이 응해서 안으로 들어 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