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 생신에 맞춰, 내려가는 김에 배추와 무를 파종하려다 시기를 놓쳤다. 농사일을 “가는 김에”라니. 늦었지만 배추는 모종을, 무는 파종해도 된다는 장모님의 말씀을 듣고 작은 처남과 함께 무와 배추를 심기로 했다.
울산에 있는 고깃집에서 장모님과 처가 오 남매 식구 이십여 명이 모여 점심을 먹었다. 사대가 한자리에 모인 셈이다. 아흔을 훌쩍 넘긴 장모님의 얼굴엔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칭얼거리는 손주를 안고 식당 앞 삼호천에서 열리는 ‘삼호 곱창 거리 축제’를 관람했다. 본격적인 축제라기보다 분위기를 띄우는 시간인 것 같았다. 축제장에 있는 할머니 한 분이 “너무 귀여운데 한 번만 안아 봐도 되나?”라고 했다. 순간적으로 당황이 되고 마땅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손주도 안아 볼 수 없는 세상인데 무슨 소리냐!”라며 말리는 다른 할머니 덕에 난처한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며느리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렇게 모여 얼굴 볼 수 있으니, 나도 자식 농사는 잘 지었나 보네.”라는 장모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처남과 종묘·농약사에 갔다.
종묘사에서 두 가지 종류의 배추 모종 130여 포기, 무씨, 상추씨, 쑥갓씨를 사서 밭으로 갔다. 400평이 넘는 밭을 알차게 가꾸기 어려워 대부분은 단감나무를 심었다. 50평 정도에는 두릅나무, 부추, 고추, 오이, 가지, 호박 등을 심어 가족들과 나눠 먹는다. 처남이 미리 만들어 놓은 이랑에 맞춰 배추 모종을 심는다. 해는 벌써 서산에 걸려 있고 골은 많이 남았다. 허리가 아프지만 연하디연한 모종이기에 시간이 더디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심는 와중에 아들 장가가던 날이 덜컥 생각났다. 바쁘고 넉넉잖은 일상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컸는지, 어떻게 졸업했는지 기억이 별로 없다. 물론 순간순간마다 최선을 다했겠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어둠이 내리고 일은 끝났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앞마당과 붙어 있는 텃밭에서 일을 시작했다. 20평 남짓한 텃밭 일은 삽과 호미만 있으면 된다. 어제저녁에 뿌려 놓은 비료와 퇴비가 이슬에 눅눅하다. 일단 삽으로 땅을 파고 고른다. 배추 심을 이랑은 두 줄로 심을 수 있게 넓게 고른다. 호미로 넓은 이랑에 줄을 내고 40㎝ 거리로 엇갈리게 심는다. 모종 트레이에 물을 조금 뿌려 놓으면 쉽게 빼낼 수 있다. 어제는 시간이 없어 모종을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잎이 5~6개고 하얀 잔뿌리는 트레이 크기에 맞게 흙과 뭉쳐 있다. 호미로 땅을 파서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흙을 돋우어 가만히 눌러 준다. “아차 하는 순간” 잎이 부러지기에 집중해야 한다.
한숨을 돌리고 나니 손주가 생각났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손주를 돌보러 가기에 태어나서부터 커가는 과정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다. 어느 손가락과 발가락이 긴지, 울음소리는 무엇을 뜻하는지, 아들을 많이 닮았는지, 며느리를 닮았는지, 최종적으로 나와 비슷한 데가 한곳이라도 있는지 찾고 또 찾아본다. 텃밭은 손주를 돌보는 것처럼 천천히, 정성껏, 바라는 것 없이 내가 좋아서 가꾸는 밭이다. 텃밭에서 일하는 순간만은 생각이 없다.
다시 이랑을 만들고 늦었지만 튼튼하게 자라기를 기원하며 무씨를 파종하다가 봉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원산지가 뉴질랜드란다. 상추씨의 원산지는 미국, 쑥갓은 덴마크다. 그럼, 손주 돌보듯 심은 배추 모종의 씨는 어디서 왔을까? 우리나라 기후 및 토양에 맞는 품종개량과 기술 발전이 부족해서 외국에서 수입했을까? 아니면 외국 기업의 특허권 때문일까? 농사꾼이 아니라서 그런지 모두가 궁금하다. 상추와 쑥갓씨를 파종하고 올여름에 받아둔 대파씨도 뿌렸다. 식물의 생장에도 “늦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억지를 부리며 싹이 트기를 다시 한번 빌어본다.
일하다 보면 밭일은 자식 농사짓는 것 같고 텃밭 일은 손주를 돌보는 느낌이 든다. 사실, 이번 주는 그동안 지적 호기심을 자극했던 “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에 대해 쓰려고 책을 읽고 자료도 준비했다. 그런데 텃밭에서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리다 보니 그런 마음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은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2025.9.21.(71)
첫댓글 가을농사와 손주 어울리는 글입니다.정겨운 모습은 가을의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저는 배추 모종심는 시기를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심었는데 망했어요. 조금 늦게 심는 것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재미있게 잘 읽엇습니다.
텃밭 농사는 규모가 작지만 신경을 써야 잘 지을 수 있습니다. 화목한 가정이 최고 입니다.
장모님도 건강하시고
손주도 일주일에 두번씩 돌보고 텃밭도 잘가꾸시네요
늘 행복한 시간이 기다리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