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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의 미학
--- 강승원 테라코타 전
2019. 11. 금계
11월 24일, 드디어 강진 아트홀 전시실에서 열리는 강승원 테라코타 작품전을 보러 나선다. 오늘이 전시회 마지막 날이므로 더 미룰 수 없다. 그 동안 혹시 함께 타고 가서 구경할 승용차가 없을지 갸웃거리다가 부득이 홀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다.
목포 버스정류장. 줄줄이 늘어선 빨간 버스 가운데 유독 ‘아이 낳기 좋은 전남’이라는 광고판이 눈길을 끈다. 저 광고판만 보고는 전라남도가 왜 아이 낳기에 좋은 환경인지 알 수가 없다. 결혼하면 축의금이라도 한 뭉텅이 안겨주는가. 청년 일자리도 다른 도보다 훨씬 많은가. 출산 장려금이라도 한 1억 원쯤 지급하는가.
어쩌다가 우리나라가 출산율 가장 낮은 나라가 되었을까. 내 형제자매는 5남2녀 7남매였다. 다른 집들도 5남매 7남매 9남매였다. 한국전쟁 후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는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보건소 직원들은 손가락에다 콘돔을 낀 채 피임 방법을 열심히 강의하고, 정관 수술을 받은 예비군들은 훈련을 면제시켜주었다.
“잘 키운 한 아이, 열 아이 안 부럽다.”
지금 전남의 농어촌 학교들은 학생 수가 폭삭 줄어 통폐합이 계속되고 있다. 콩나물 교실, 오전반 오후반 2부제 수업을 하던 50년 전이 꿈만 같다.
드디어 강진 아트홀. 솔찬히 예쁘고 멋지다.
“강승원 테라코타 작품전”
아트홀 전시실 입구에 현수막이 걸려 있다.
테라코타 : 점토를 구워 장식이나 건축물에 쓰는 방식.
강승원 - 1955년 강진 출생. 목포교육대학 졸업. 전교조 해직. 33년 교직 생활.
전시실에 들어서니 테라코타 작품들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어쩌면 점심이라도 먹으러 갔을까. 나는 강승원 선생한테 전화라도 걸어볼까 하다가 번거로울까 염려되어 그만두기로 한다.
출입구에서 들어가는 첫 번째 작품은 ‘발’
저 발목은 어쩐지 농부의 발 같다.
그냥 사람의 발목이 잘린 게 아니라 속이 양말처럼 텅 비었다. 저 구멍은 무언가.
“고난”
십자가를 걸머진 예수의 형상일까. 하기야 불가에서도 인생은 고해라 하지 않던가. 산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연속이다.
사람과 바깥 테두리 사이의 너른 공간이 유난히 눈길을 사로잡는다.
장가계 천문동 동굴은 진짜로 산봉우리 밑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이상하다. 월출산은 구멍이 뚫려 있지 아니한데 왜 저 테라코타 작품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다는 말인가.
그래도 구멍을 뚫어놓으니 꽉 막혀 있는 것보다는 시원하고 예술성도 더 좋아 보인다.
사물을 곧이곧대로 표현하기보다는 뭔가 비틀고 왜곡하고 변형시켜서 창의적으로 참신하게 재현하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1989년 전교조에서 탈퇴하지 않는다고 해직당하면서 나는 강승원 선생을 알게 되었다. 나는 목포지회장을 맡았고, 그는 무안지회장을 맡았다.
전시실에 비치된 팸플릿 사진을 다시 찍었더니 사진이 흐리게 나왔다.
강 선생의 월출산장 입구에는 손수 나무에 새긴 현판이 걸려 있다.
- 空手(공수)來(래)喫(끽)茶(다)去(거)(빈손으로 왔다가 차를 마시고 간다.)
강 선생은 2007년 강진군 성전면 월출산 아래 전원주택을 짓고 ‘월출산방’이라 명명했다. 그가 하고 싶은 일은 세 가지였는데 첫째, 시골에 전원주택을 짓는 일, 둘째, 차밭을 가꾸며 차를 마시는 일, 셋째, 조소 작업을 하는 일. 결국 그는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루었다.
월출산방 한쪽에 500평 차밭을 가꾸며 녹차와 황차를 만들어 마시고, 정원에는 수십 년 동안 작업해 온 석조 작품과 테라코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테라코타 작업실이 있고, 거기에서 1000도 이상으로 찰흙을 굽는다.
그는 이만하면 자기 인생은 성공한 셈이라고 만족한단다.
포옹
거참, 눈도 그렇고 구멍도 그렇고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빗금도 그렇고, 참 단순하고 명료하고 해학적이고 환상적이며, 창의적이고 미학적이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정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듯싶다.
포옹
거참, 눈도 그렇고 구멍도 그렇고 두 사람 사이를 가르는 빗금도 그렇고, 참 단순하고 명료하고 해학적이고 환상적이며, 창의적이고 미학적이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정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듯싶다.
男女相悅之詞(남녀상열지사) 같다. 작품들만 들여다보아도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전라남도에서는 강 선생한테 부탁하여 이런 작품을 수백 점 제작하여 도청 현관이나 보건소 대기실에 진열하여 놓으면 혹시라도 아이들을 더 많이 낳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부부애
탄생
열애
하모니
행복
사람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로또 당첨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빛에 따라다니는 그림자처럼 고난까지 포함하여 행복해야 마땅하다. 행복을 따로 떼어내서 생각지 말자. 희로애락애오욕을 다 합쳐서 낙관적으로 행복이라고 생각하자.
그러나 이 세상에는 나처럼 생각지 않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만 불운하다거나 불행하다고 비관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깨동무
사람과 팔을 사각형 일색으로 표현한 것도 재미지고 사람 사이를 비뚜름하게 파놓은 구멍도 재미지다. 작가의 창의성이 꽤 높은 경지에 이르지 않았는지 그런 짐작을 해본다.
한마음
머리는 둘에다가 구멍은 하나. 이 작품은 제목이 쉽게 이해가 간다.
토르소
토르소 : 머리와 팔다리가 없이 몸통만으로 된 조각상
강승원 테라코타의 공통점은 단순화, 반 추상화, 사물을 축소시키거나 어떤 부분을 생략하거나 터무니없이 부풀리기, 직유나 은유 상징, 반어법이나 역설 (아이러니나 패러독스) 등등이다.
이 토르소를 들여다보노라면 팔다리나 머리를 생략한 걸로는 모자라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을 뻥 뚫어놓았다. 이런 작품도 토르소라고 부를 수 있을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러나 이 비대칭적이고 반 추상화된 토르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인체의 비밀을 뚜렷이 표현하는 것 같다. .
강승원의 구멍들은 조형미를 뛰어넘어 삶의 비애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잠시 ‘없음’에서 ‘있음’으로 소풍 나왔다가 금세 ‘없음’으로 되돌아가는 허망한 존재다. 죽음이 있음으로 삶이 존재한다. 죽음은 삶의 마지막 완성이다. 죽음이란 말이 없으면 삶이란 말도 성립하지 않는다. 토르소가 우리의 육신이라면 거기에 뚫린 커다란 구멍은 누구나 깨닫고 있는 육신의 허망함, 삶의 허망함, 그래서 영생을 획득하지 못한 우리의 허기, 허허로움, 헛헛함, 슬픔, 비애; 그런 따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부질없도다! 헛되고 헛되도다!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처럼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영롱히 반짝이다가 순식간에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는 존재의 허망함, 삶의 허망함이여!
그대들이 오늘 보고 있는 삼라만상은 實相(실상)이 아니노라. 오히려 저 뻥 뚫린 구멍들이 존재의 實相(실상)에 가까우니라. 강 선생의 테라코타는 존재의 이중성, 삶의 이중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것도 같다. 테라코타는 ‘있음’을, 작품마다 뚫린 구멍은 ‘없음’을.......
치미
치미 : 전통 목조 가옥에서 용마루 양 끝에 높게 부착하던 장식기와.
점토로 제작.
주로 새 날개나 물고기 꼬리 모양의 장식.
강 선생의 작품은 새 날개 모양에 사람 얼굴을 집어넣었다.
길고도 늘찐한 얼굴, 멋지구나, 멋져부러!
작아도 구멍은 구멍이다. 눈구멍도 구멍이다.
삶의 허허로움은 저 쬐그만 눈구멍에도 역력히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비구니
머리를 깎아놓으니 여자인지 남자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작가인 강 선생 얼굴을 많이 닮은 느낌이기도 하고.
비구니의 시선은 먼 데 몇 억 겁 너머를 향하고 있다.
어쩌면 저렇게 편안하고 아늑하고 다사롭고 인생의 희로애락을 초월한 눈길을 완벽한 표정으로 나타낼 수 있는지 작가의 공교로운 손길에 매료된다.
별로 쓸모없어 보이는 젖꼭지가 애처로워 보인다.
무소유
무소유란 제목이 붙은 걸 보니 법정 스님 얼굴인가.
무소유란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게 아니라 꼭 필요한 것만 가진다는 뜻이라던가.
텅 빈 충만함으로 가득한 일생을 허허롭게 살다 가신 스님은 그 발걸음 하나하나가 貪瞋痴(탐진치)로 가득 찬 사바세계에 던지는 날카로운 경종이었다.
목을 길게 빼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을까.
어떤 사람의 묘비명.
“드디어 그 날이 왔다.”
나 같은 노인들이 두려움 속에서 기다리는 날은 그 날뿐이다.
작품이 일단 전시회장에 나오고 나면 그 때부터는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작품 해석은 관람객의 몫이요 관람객의 자유라던가.
아무리 관객의 자유라지만 내가 어쭙잖은 예술론과 인생관으로 작품을 멋대로 해석한 것이 어쩐지 뒤가 꿀린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팸플릿에 쓰인 [작가의 변]을 읽어보니 구멍에 관한 내 해석은 작가의 의도와는 얼토당토않게 턱없이 천 리 만 리나 동떨어진 것이라서 웃음이 나왔다.
“공간은 내적 공간, 외적 공간으로 구분한다. 내 작업은 내적 공간에 구멍을 뚫어서 외적 공간을 끌어들이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적 공간과 외적 공간이 서로 소통하게 되고 그런 공간의 소통은 관람객의 시선을 끌어당기는 효과를 가져 온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벽 앞에 섰다고 가정해보면 그 벽을 바라보는 답답함을 이해할 것이다. 만일 그 벽에 구멍이 뚫렸다면 우리의 시선은 당연히 그 구멍으로 집중될 것이다.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보이는 또 다른 공간으로 인해 답답함이 해소될 것이다. 내 작품의 뚫린 구멍도 이런 공간적 해석에 바탕을 두었다.”
강승원의 테라코타 작품전 건너편 전시회장에서는 ‘아버지의 옹기, 아들의 옹기’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더라고 거기에도 들러 사진 몇 장을 찍고 팸플릿을 얻어 가지고 나왔다.
아버지 옹기장 정윤석, 1941년 강진군 칠량면 출생. 2010 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 지정.
아들 옹기장 정영균. 1968년 강진군 칠량면 출생. 2016 국가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수자 지정.
나한테는 도자기보다 옹기가 훨씬 친숙하고 다정하다.
강진 버스정류장 앞 로터리. 미세먼지가 없는가보다. 늦가을 하늘이 드높고 짙푸르다.
목포에서 강진 가는 길에 살펴보니 독천 시장에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음, 장날이군.
강진에서 목포로 돌아오는 길에 독천에서 내려 시장에 들렀다. 50년 전이었더라면 이곳에도 사람들이 정신없이 복작거렸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대형 마트에 밀려 조금쯤은 한산하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시장 입구에서 호떡 하나와 어묵 한 꼬챙이로 시장기를 달랜다.
‘오늘은 모처럼 테라코타 전시회, 옹기 전시회, 문화생활 좀 했군.’
늦가을 귀로의 발걸음이 여유롭고 흡족하다. (끝)
첫댓글 "구멍은 누구나 깨닫고 있는 육신의 허망함, 삶의 허망함, 그래서 영생을 획득하지 못한 우리의 허기, 허허로움, 헛헛함, 슬픔, 비애; 그런 따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와~! 감상자의 소감을 넘어 평론가의 논평 같습니다. 미술가들의 함정은 왕왕 감상자 보편의 눈을 위한 내면의식 보다 자기 표현적 완성과 그 기술에 치우쳐 말함으로써 번번이 관람자 대중을 실망?시키죠.^^ 달숙하고 달긋하며 담담하고 담박한 글로 늘 함께해주셔서 카페가 많이 감사합니다...
미술과 김진수 선생님, 이번에는 내가 좀 아부한 것 같아요. 김 선생의 입맛에 맞은 것 같아 흐뭇해요. 작품 감상이야 천차만별이고 그래도 이번 전시회가 아마 김 선생님의 입맛에 맞지 않았나 그리 생각이 드는군요. 앞으로는 김 선생님의 작룸에도 삼류 관객의 느낌을 적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 고대합니다. 김 화백 화이팅! 글 사진 올리느라 수고 많으셨어요.
편집공부가 모자라 번번이 선생님께서 구성하신 짜임새 있는 화면을 고대로 옮겨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운 판에 치하까지는 못 받겠습니다. 명색 화가에게 최신작이 없다는 것은 고생 그 자체입니다. 제 마지막 미술은 별수 없이 그 고생을 견디기 위한 고생길이 되겠죠. 항상 늘 매일 존경하는 선생님의 다디단 말씀을 듣기 위해서라도 언능 붓동가리를 놀려야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뒤 박철우화백과 함께 우리들 과거 광주항쟁미술 30년의 역사 아카이브 <파랑만장 展(구카톨릭회관)>을 보기 위해 나갑니다. 그림쟁이의 외롭고 따가운 '아주 오래된 외출'인바 가슴 달구기 행사죠. 따뜻이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