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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무산소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창호(49) 대장을
포함한 한국인 5명이 네팔 히말라야
다울라기리산 구르자히말 원정 도중에
실종된 김창호 대장 등 한국인 5명 시신을
13일 새벽(현지)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발견.
2018.10.14
산에 미친 두 남자
고 '김창호 & 임일진'
30년 동행, 한날 떠났다.
- 2018년 10월 13일 -
히말라야에 잠든., 김창호 대장.
2018.10.13.
영원한 산악인
故 김창호 대장
'히말라야'.,잠들다.
영원한 산악인
고 김창호 대장.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히말라야 14좌 중에서
파키스탄 5좌.,트랑고 산군.
네팔 9좌 히말라야를 합쳐 14좌.
지구 상에는 여러 형태의 삶이 존재.
다른 이의 삶을 경험하고 돌아보는 여행.
히말라야는 척박한 땅의 풍경과 환경 속에
자연(自然) 그 자체가 ‘시간’이고 ‘기다림’이다.
파키스탄 히말라야는 ‘순수한 땅’을 의미.
이곳 자연은 전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곳.
히말라야 14좌 중 5좌가 파키스탄에 있다.
K2,
낭가파르바트
브로드 피크
가셔브룸 1 & 2.
.
파키스탄 발토로 빙하의., 트랑고 호수.
그 수면에 비친 트랑고 타워 산군의 위용.
파키스탄 트랑고타워에서 바로본.,별자리.
아랍어로 '신의 뜻'이란 인사말이., "인샬라"
파키스탄에 도착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다.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는 '산의 왕' '악마의 산.'
가파른 절벽과 날카로운 능선이라서
눈이 많은 쌓이지 않기에.,;벌거벗은 산.'
옛 독일 탐험가들은 '살인하는 산'이라 명명.
한국원정대도 1983년 첫발을 딛은 이래
낭가파르바트에서 2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1990년 7월 고 정성백, & 2009년 7월 고 고미영.
낭가파르바트에 영혼을 묻은., 두 산악인.
도전하는 자에게 기쁨도 주고 좌절도 주는 산.
산은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한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도전의 대상.
자신을 낮출때만 보답과 결실을 채워준다.
산에 대한 겸손과 미덕을 잊지 않아야 할 산.
엄홍길 산악인(1960.9.14 출생)
.
엄홍길은 히말라야 14좌 중 5좌를 외국등반대와 등반.
외국인과의 합동 등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그들과 합동 등반을 통해 경량 등반을 처음 체험한 엄홍길.
이는 국내 산악계 등반에 큰 변화와 혁신을 가져왔다.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를 감수한 엄홍길은 혁신가였다.
엄홍길을 영입한 스페인 등반가.,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
그는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14좌를 완등한 클라이머.
오이아르사발을 만나면서 엄홍길은 등반가로서 성장.
비전과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기 위한 프로로 거듭난다.
..........................오이아르사발............................
2010.4. 30 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54) 스페인 국민영웅.
1999년 히말라야14좌 등정 후, 세계 최초로 재등에 도전.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를 무려 24번이나 오른 산사나이.
안나푸르나는 그에게
두번째 14좌 완등 중에서
10번째 도전하는 산이었다.
오이아르사발은 파사반의 등반 파트너였지만.
파사반이 오은선을 언론 플레이로 비방하자 결별.
하지만, 오은선과 파사반의 경쟁은 높게 평가하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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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엄홍길의 인연은., 1990년 가을에 에베레스트.
연이어 92년 여름 낭가파르바트, 95년 초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에서 우연히 조우하면서 서로 신뢰를 쌓아갔다.
오이아르사발은 엄홍길을 히말라야 마칼루봉에 초대한다.
개인 장비만 갖추고 네팔 비행기표만 구하면 되는 좋은 조건.
당시 원정경비 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엄홍길에겐 매력적인 제안.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개성도 제각각인 그들과 어울려
등반을 끝마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결정을 어렵게 했다.
고산 등반은 기술과 체력 못지않게 팀워크도 대단히 중요하다.
오이아르사발의 등반팀에는 그를 제외하고
나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
” 혼자 적진에 뛰어드는 기분이었지만 결국
엄홍길은 합동 등반 새로운 시도를 하기로 결정.
그리고, 그들의 방식과 문화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입맛 없는 고산지대에서 타국음식을 먹는 것이
어려웠지만 엄홍길은 스페인 음식을 먹으며 등반.
빵, 치즈, 육포, 스파게티, 절인 고기인 하몬에 포도주."
쌀밥에 김치 먹는 꿈을 악몽처럼 꾸기도 했을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같은 음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그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동료의식을 갖는 출발점이라 판단."
"스페인 음식을 먹는 것으로 동질감은 만들려 노력하며
동지적 신뢰를 얻기 위해 ‘솔선수범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동료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자’는 원칙을 세우고 실천했다."
엄홍길과 오이아르사발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둘은 마칼루를 시작으로 브로드피크·로체·가셰르브룸 1봉·
안나푸르나 1봉의 5좌를 등정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나눈 것.
오이아르사발의 14좌 완등 순간에도 엄 대장은 함께 한다.
오이아르사발과의 등반 경험은 엄홍길에게는 신선한 충격.
등반 효율성과 운영의 합리성에서 몇걸음 앞선 유럽 산악인.
그때까지 우리나라는 많은 인원이 가서
시끌벅적한 잔치 분위기로 등반해왔던 것.
스페인 팀은 경제적 등반의 개념을 가졌던 것.
소규모 인원과 장비로 단시간에 등반하는 방식이 확립.
등반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체계화되어 있었던 것.
등반이 끝나면 곧 다음 등반을 떠날 수 있는 효율적 시스템.
‘경량화와 속공’, 체계적인 조직력을 바탕으로
군더더기 없는 프로세스에 따라 등반을 진행하는
‘최소비용의 최대 효과’ 유럽식 효율적인 접근방식.
산에서 대장의 말은 절대적이다.
이는 스페인 팀도 마찬가지였지만
자유롭게 의견교환을 하는 점은 달랐다.
전체적인 등반 분위기가 밝았고,
우리나라와 달리 필요 이상 정신력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결과보다 과정 자체를 즐기고
과정을 중요시하는 등산 문화와 태도.
그들은 성공하면 목표를 이루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실패하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점에서 만족.
쓰라린 실패에 짓눌려왔던 엄홍길에게는 가장 공감이 가는 대목.
당시 우리나라는 원정을 마치고 국내에 들어오면
누구를 만나도 ‘성공했느냐, 실패했느냐’부터 질문.
등반과정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엄홍길도 스페인 팀에 가르쳐 줄 것은 많았다.
한국인 특유의 동료의식과 동질감을 알게 했다.
‘우리는 하나' 팀에 대한 희생정신을 인식시킨 것.
결과적으로 히말라야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한국인과 스페인 사람들은 상호 윈-윈 (Win-Win).
엄홍길은 이를 통해 14좌 완등 기반을 구축하게 된다.
동서양의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피부색·언어·식성·
등반방식 등 모든 것이 달랐지만 인내와 노력으로
이 차이를 극복하면서 서로의 좋은 점을 서로 배웠다.
서로 개방성이 없으면 변화를 받아들일 수 없고
서로에게 혁신은 기대할 수 없지만,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도전하여 혁신을 이루어낸 개방성.
엄홍길의 히말라야 16좌 성취는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다.
“살아서 돌아오는 등반이
가장 성공한 등반.” - 오은선.
..........오은선(1966년 3월 5일 ~ ) 칸첸중가 논란...........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여성 산악인이다.
직업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강원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거주하고 있다.
2010년 4월, 세계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14좌 완등에 성공.
실제로 칸첸중가 정상을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대한산악연맹은 그가 칸첸중가 등정에 실패했다고 결론했다.
대한산악연맹의 7인 회인 엄홍길(2000년 등정),
박영석(1999년), 한왕용(2002년), 김웅식(2001년),
김재수(2009년), 김창호(2010년), 서성호(2010년)
1986년 인류최초 히말라야14좌 완등.,라인홀트 메스너.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산악인(14좌 무산소등정 업적).
그는 2010년 저서 ON TOP에서 세계 각국 여성 산악인을 소개.
그중 오은선에 대해.," 칭키즈 칸 오은선".
여성 최초 14좌 완등을 인정하며 축하한다.
유럽과 세계의 경쟁자들의 반대 의견에 대해서는
성공에 대한 시기심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
라인홀트 매스너는 2010년 5월 8일 네팔 카트만두에서
오은선과 직접 만나 칸첸중가 등정에 대해 인터뷰한 뒤
"내 관점에서는, 모든게 들어맞는다. 그당시 눈보라때문에
정상을 못찾아 수 m를 못 갔을 수 있겠지만 등정은 등정이다”
자신이 칸첸중가 정상의 정확한 꼭짓점에
서지 않았다는 것은 오은선도 인정하는 부분.
아직 오은선의 14좌 완등에 대해 논란 중이지만,
14좌 완등에 실패했다고 결론이 나지도 않은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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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첸중가는 다르질링에서 북북서로 74㎞ 떨어진 지점,
'인도 시킴 지방과 접한 네팔국경'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
거대한 십자가 모양으로 동서남북을 향해 뻗어 있는 대산괴.
현지 주민들의 신화와 종교의식에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는
이곳은 수많은 모험가와 등반가들이 등반 시도 중 사망한 곳.
그래서, 한동안 등반 시도가 단절되기도 했던.,'5개의 보물' 산.
칸첸중가 티베트어는 4개의 낱말(캉-첸-조-가)의 합성어.
이것은 시킴어로 '큰 눈으로 이루어진 5개의 보물'이란 뜻.
히말라야 등정 기록을 수집해 관리하는 엘리자베스 홀리 씨는
오은선(44) 씨가 칸첸중가를 등정하지 않았다고 입증될 때까지는
등정 성공으로 여기겠다고 밝혔다."현재로서는 오은선 칸첸중가 성공."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3일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히말라야 등정 여부를 기록하는 절차에 관해 설명하며
오은선씨 등정 의혹과 관련해 이런 공식 입장을 밝혔다.
홀리 측은 "`논란중(disputed)'이라는 말의 의미는
누군가 정상 등정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등정을 성공했다는 마지막 판단을 통과한 것은 아니다."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논란중'이라고
기록된 등정을 모두 성공한 것으로 간주한다"
홀리 측은 이어 "나중에 등정 주장이 거짓으로 판명이 된다면
그때는 `불인정(unrecognized)'으로 기록이 된다"고 덧붙였다.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진실을 파악해 기록하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에 자료를 요청해 기다린다고 밝혀 귀추 주목.
홀리 측 "지금까지는 산악연맹 입장을 전달받은 바 없으며
최근 회의를 열었다는 것은 한국 언론을 통해 알게 되었다."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에 의혹을 제기한 사람은., 파사반.
"누르부와 파사반이 우리에게 직접 이견을 제시했으며
한국에서 제기된 이견은 간접적으로만 들었다"고 밝혔다.
옹추 오은선 & 페마.
관련자 인터뷰와 관련해서는 "오씨의 세르파인
다와 옹추와 페마 치링은 정상에 올랐다 말했지만
다른 한명인 누르부 세르파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이 없었다"
히말라얀 데이터베이스는 오씨 정직성에는 의문이 없으며
등정이 실패로 기록된다면 오씨를 이끈 세르파 옹추의 책임.
홀리 측은 "우리는 오씨가 등정을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오씨의 믿음은 옹추가 등반 때 말한 것에 기반한다"고 말했다.
"만약에 오씨가 꼭대기에 오르지 않았다면
옹추가 오씨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때문이다."
"오씨는 완전히 옹추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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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파 옹추는 칸첸중가 정상에 네 번이나 오른 네팔인.
네팔 카트만두 셀파 페마는 31일 '사람과 산'과 통화에서
"(오씨 등) 우리 4명은 21시간이나 걸려서 정상에 올라갔다. "
오은선 히말라야14좌 완등에 도움을 줬던.,다와 옹추.
2010년 7월에 오은선과 함께 낭가파르바트 등정에 성공.
오은선이 안나푸르나 등정할때 곁에 있던 셀파.,옹추(37).
^.,옹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는
오은선과 두 달을 함께 보낸 옹추.
“세계 5위의 고산인 마칼루 근처 산골이 내 고향.
14살 카트만두로 나와 키친 보이, 쿡을 거쳐 셰르파.
지금까지 총 19차례 8000m급을 등반.
그중에서 에베레스트에만 네 번 올랐고.
오은선 대장과 안나푸르나까지 6좌를 등정.”
히말라야 14좌 중에서 옹추는 10좌를 등반.
옹추 셰르파는 셰르파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사다’
오은선에게는 고용인 이전에 든든한 자일 파트너.
옹추는 원래 라마 스님 생활을 한 적도 있다” 한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오은선 대장처럼 14봉을 오르고 싶다.
안나푸르나가 10개째가 되는데 나머지도 모두 오르고 싶다.
네팔 장부 셀파는 11개 등반, 나는 그를 넘어 1등을 하고 싶다.”
1934년 독일 원정대가 낭가파르바트를 오르다가
악천후에 2주간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다.
움직일 수 있는 두 대원은 스키로 하산해 버렸다.
그 높은 곳에 남겨진 셰르파 9명은 모두 다 죽었다.
옹추 셰르파가 히말라야에 오르는 이유는 하나.
자신의 자식들은 그렇게 모멸적인 취급을 받으며
히말라야를 가지 않게 하기 위해 공부를 시키고 싶다.
바로 교육비 때문이다.
“오 대장과 함께 오른 산 중에서
제일 힘든 산을 꼽으라면 캉첸중가.
엄홍길· 한왕용과도 그곳에 함께 섰다.
따라서 그 산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다시 그 산에 가지 않을 것.”
항간엔 오은선의 캉첸중가 등정 시비가 있었다.
그 말을 전하자 옹추는 즉석에서 웃으며 말했다.
“내가 오 대장과 오른 곳이 정상이 아니라면
그동안 나와 함께 오른 사람도 정상이 아닌 셈이다.
정상은 내 눈에 익은 곳이기에 절대 실수할 리가 없다.”
2010년 봄, 오 대장과 캉첸중가를 함께 등정
옹추는 이 산만 총 네 번 올랐으며 이미 5개 봉을
오 대장과 함께 오른 옹추에게.,'오은선은 누구일까?'
“성격이 직선적이다. 가끔 불같이 화를 내지만 뒤끝은 없다.
내가 맡은 임무는 오 대장을 도와 함께 정상을 오르는 일인데
그녀의 등반 능력이 뛰어나다. 특히 7000m 이상에서는 최고다.”
옹추 셰르파에 대한 오은선의 신뢰도 전폭적이다.
“‘사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네팔인들의 리더다.
그일은 베이스캠프 셀파에게 맡기고 나는 등반에만 전념
원정대 성공은 정상 등정 성공.그것이 나에게는 가장 중요.”
옹추 셰르파는 등반을 선도했다.
셰르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르듯
등반에 관한 생각도 서로 다르다.
더군다나 목숨이 걸린 등반이라면 더 그렇다.
그러나 옹추는 자신의 휘하에 있는 셰르파보다
매번 먼저 등반에 나선다. 명장 밑에 약졸 없는 법.
솔선수범하는 옹추를 셰르파들은 절대적으로 따랐다.
“옹추는 나와는 동서 간이다.
내가 아래인데 그는 아버지 같다.
항상 어려운 루트를 뚫을 때 앞장선다.
또 짐을 많이 지려 한다.
그런 점을 우리는 배운다.
셀파 세계에서 옹추는 강인함과 동시에
넉넉한 마음가짐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함께 등반한 페마 셰르파의 말인데
옹추의 자리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언.
망중한이면 옹추는 불심 깊은 셀파답게
늘 라마제단에 불을 피우고 청소를 했다.
언제나 새벽엔 그가항상 라마제단에 불을 피운다.
옹추는 등반 중 라마 불교 ‘옴마니반메훔’을 외운다.
“2009년 여름 낭가파르바트에서 오 대장과 등반하며
숨진 고미영을 자주 만났고 정상에 오를 때도 만났는데.,
나는 베이스캠프에 있을 때면 아침마다 라마제단에
향불을 피우며 고미영 그녀의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
오은선 대장은 13개 최고봉 등정 시
에베레스트와 K2에서만 산소를 썼다.
그러나 자신의 셰르파에게는
안나푸르나에서도 산소를 쓰게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옹추가 답변한다.
“산소를 쓰는 건 내겐 기록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는 점 때문.
오 대장은 무산소 등정기록 때문에 절대 산소를 마시지 않는다.
그 산소를 셀파에게 쓰게 하는건 비상시 자신을 구해 달라는 뜻."
“아이들이 공부가 끝날 때쯤이면 나도 나이를 먹고
현업은 후배 셀파에게 양보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고향으로 가서 야크 치고 농사지으며 여생을 보낼 생각.
다만 아직 히말라야를 무대로 활동할 때
네팔 최초로 14좌 완등 셰르파가 되고 싶다."
" 도와 달라.”
옹추 셀파의 소망이 이루어질까? 그럴 확률이 높다.
그의 묵직함을 아는 한국 산악인들이 적극 추천해서
2010년 여름 K2 원정대에 고용되었다는 소식이 들린다.
2010년 가을 한국 원정대와 시샤팡마 등반 예약.
세계 여성 최초로 14봉 등정을 만든 옹추 셰르파가
네팔에서도 1등이 되는 뉴스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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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선 산악인이 칸첸중가 등정 의혹을
종식시키기 위해, 만약 재등반을 한다면
여성최초 14좌 등반기록은 무너지게 된다.
오은선 산악인은 단순히 의혹 해소 만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재등반할 수 없는 입장에 놓여 있다.
'라인홀드 매스너'가 저서에서 극찬했던
오은선의 14좌 무산소등정 고소 등반능력.
그러나, 대산련은 이마저 인정하지 않는다.
국내 남성 산악인들 경험을 토대로
세계 최초로 여성의 14좌 완등에 대해
아예 미리 결론을 내려놓고.,인정을 불허.
"칸첸중가 정상으로 통하는 손톱바위는
등산로가 험악하고 강풍이 부는 지역이라,
남성 산악인도 유산소 등반에 5~7시간 소요."
"오은선이 공개한 등정 기록을 보면,
손톱바위에서 정상까지 3시간 30분."
"유명한 산악인 故 박영석조차
유산소 등정으로 5시간 걸린 곳."
물론 고산에서는 여성 산악인이 남성 산악인보다 빠르다.
실제 폴란드의 전설적인 여성 산악인인 반다 루트키에비치.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등반하여
'크리스토프 비엘리키'가 불가능하다 할 만큼 빠른 예가 있다.
"하지만. 반다는 오은선과는 달리 사진을 제시했고
상세하게 정상 지형을 묘사하여 등정이 인정되었다."
대산련 7인회가 오은선의 등정을 인정하지 않는.,이유.
그것도 엄홍길은 훗날 다른 강연에서
'나는 오은선이 칸첸중가에 오르지 못했다.
고 말한 적이 없다'라고 소신을 밝힌 바가 있다.
또 그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서성호 산악인은
대산련 회의 도중에., 전화로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대산련이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7인회를 소집한 증거.
그리고, 비공개회의에서 내린 결론을
7인회를 내세워 공개적으로 발표한 것.
2010년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오은선.
대한산악연맹은 칸첸중가 등정에 의혹을 제기한 것이 아니라
두 차례 비공개 청문회 끝에 칸첸중가 등정을 인정하지 않은 것.
오 대장의 칸첸중가 등반과 관련된 의문은
▲오 대장이 ‘정상 사진’으로 공개한 사진 속
풍경이 같은 계절 칸첸중가 이전 사진과 다른 점
▲셰르파들의 증언이 엇갈린다고 파사반이 주장.
▲오 대장 뒤에 칸첸중가에 오른 노르웨이 원정대가
오 대장 태극기를 정상 200m 아래 지점에서 발견한 점
▲오 대장 사진에 나온 로프가 8530m 지점에
묶여 있었다는., 후속 원정팀 증언이 나왔던 점
▲오 대장 원정이 예상 밖 짧은 시간에 이뤄진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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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반(36·스페인)이 '기자'에게 했던 말.
2010.4. 27 "그 일에 대해 얘기한 건 맞지만
결코 언론에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뜻밖에 기사화되어 논란이 재연된 것에 대해
당황했다고 익스플로러스웹 닷컴이 26일 전했다.
파사반 - "우리는 늘 등정 주장을 의심했지만
언론이 관심가진 적은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갑자기 언론들이 주목했다. 특히나
이 뉴스가 온 스페인을 뒤덮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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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 30 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54) 스페인 국민영웅
1999년 히말라야14좌 등정 후, 세계 최초로 재등에 도전.
그는 발가락을 모두 잘라내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안나푸르나는 그에게
두번째 14좌 완등 중에서
10번째 도전하는 산이었다.
“안나푸르나는 내가 첫 14좌 완등때 마지막으로 오른 산.
오은선은 칸첸중가에서 처음 만났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며 그 스피드는 놀라운 수준” - 오이아르사발(54)
오이아르사발은 지난해까지 에두르네 파사반의 등반 파트너.
파사반이 언론 플레이를 하는 모습이 맘에 안들어 결별했단다.
오은선을 만나면 다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돌아서면 아니라는 것.
하지만, 그는 둘의 경쟁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했다.
"도전은 칭송하면서 경쟁을 비난하는 건 옳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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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28 여성 세계최초 히말라야14좌 완등.,오은선(44)
안나푸르나에서 28일 새벽 12시45분 캠프4(7200m) 에 도착.
하지만, 스페인원정대 구조요청 때문에 캠프4에 16시간 머문 것.
후아니토 오이아르사발 대장이 이끄는 대원 1명이
7700m 부근에 탈진해 쓰러져 도움을 요청해왔으며,
이 때문에 오 대장이 캠프4에서 구조작업을 돕고 있다.
5600m 지점 캠프2에 머물던 오 대장 팀의
셰르파 3명도 구조에 동참하기 위해 떠났다.
파사반 & 오은선
당시 14좌를 완등한 오은선(44)의 경쟁자였던
파사반(36)이 칸첸중가(8586m) 등정 의혹을 제기.
이어 다시 스페인측에서 오은선이 안나푸르나 하산중
조난당한 스페인원정대의 구조를 거절했다는주장을 제기.
오은선 일행의 뒤를 이어 안나푸르나 하산 중
스페인 대원 톨로(39)가 조난당해 29일 숨진 것.
스페인원정대 휘니또 오이아르자발(54) 대장은
“스페인원정대가 한국원정대 셰르파에게 6000유로씩
사례금을 제시하며 구조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말했다고
스페인 바스크 공영 TV채널 EITB의 홈페이지가 30일 보도했다.
오이아르자발 “산악인의 동료정신이 없는 것에 분개한다.”
EITB는 이 기사 상단에 ‘오은선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라는
악의적인 제목을 달고 있어 우리나라 측의 강력한 대응이 필요.
하지만, 오은선은 베이스캠프로부터 조난당한 스페인원정대
도움요청을 연락받고, 체력과 산소 음식마저 바닥난 상태에서
하산을 중단하고 캠프4에 16시간을 머무는 등 최선을 다 했었다.
오은선과 인터뷰를 앞두고 있는 엘리자베스 홀리(86)도
이날 오전 영국 공영방송 BBC 인터넷판을 통해 “(산악인이)
하산할 때 약간의 에너지 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자신이 하산하는 데 써야만 한다”고 오은선 측의 입장을 옹호했다.
국제적 인증을 받기위해 네팔 관광청 관계자와
엘리자베스 홀리(Hawley·87) 여사를.,만날 계획.
홀리 여사는 히말라야 고봉은 물론
베이스캠프조차 올라본 적 없는 여성.
어떤 공식적인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다.
대체 홀리 여사가 누구이길래,
세계 산악인들이 그녀를 찾아가
자신의 기록을 인정해달라는걸까?
.
홀리 여사는 미국출신 전직 언론인이며 미혼.
미국 미시간대에서 역사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46년 Fortune지 입사후 언론인 길을 걸었다.
10여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1957년 사직하고,
2년간 구 소련과 동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여행.
잡지 Time-Life 임시 특파원.
네팔 카트만두에 자리를 잡은
1960년 9월, 그녀 나이 37세 때.
1962년부터 로이터통신 특파원으로서 ,
히말라야에 도전하는 등반대를 인터뷰하고
등반과 관련된 모든 기록을 50년간 정리해 왔다.
이때문에 1960년대 이후 히말라야 고봉 등정기록은
홀리 여사의 손으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3년에는 그녀가 모아온 기록에
1905년부터의 히말라야 등반사를 더해
‘The Himalayan Database’를 제작하였다.
한 마디로 ‘히말라야의 산 증인'인 셈.
그녀는 원정대가 네팔에 도착했을 때와
등반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두 번을 만나
등반 계획과 결과에 대해 인터뷰하고 기록.
5500 원정대와 3만 산악인들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 실제 등정여부를 판가름한다.
그러다보니 홀리 여사가 정식 공인자는 아니지만,
등반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산악계에서는 ’권위자'.
현재는 건강이 쇠약해져 기록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원정대 만 직접 인터뷰, 나머지는 조수 2명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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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역’이라 불리던 에베레스트 정상.
인간이 최초로 올랐던 시기는 1950년이다.
이후 8,000m 거봉에 대한 도전은 경쟁 양상.
북위 28°, 동경 87° 지점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성층권 2/3까지 솟아 정상에는 동식물이 살 수 없는 곳.
웅장한 크기와 높이 때문에 티베트어로., ‘세계의 어머니’
한국인은 1977년 고상돈이 세계 14번째 에베레스트 등정.
1920년 티베트 등반로가 열리면서 등반이 시도되었지만
험준한 환경으로 거듭 실패하다가 1953년에야 성공했다.
1953년 5월 29일 힐러리 & 네팔인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는
남동쪽 능선을 오른 후 남봉을 지나 정오 무렵 정상에 등정.
그로부터 '히말라야 14좌' 완등.,경쟁시대.
1986년 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1970년 낭가파르바트를 시작으로 1986년에
로체까지 16년에 걸쳐.,히말라야 14좌 첫등정.
.
메스너 이후에 지금까지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이는 2013년 5월 19일 기준 30명
13명은 산소통을 사용하지 않고 무산소 등정.
우리나라에서는 2001년 박영석이 세계 8번째 완등.
같은해 엄홍길이 9번째, 2003년 한왕용이 11번째 성공.
2011년 김재수 27번째, 2013년 5월 20일 김창호 31번째.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 남극점·북극점 원정 성공.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산악인.,고 박영석.
1988년 알프스 3대 북벽, 1991년 에베레스트산 남서벽.,등반.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무산소 등정에 성공.
1997년 6개월 만에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6개를 등정.
2001년 히말라야 14좌를 8년 2개월 만에 세계 최단기간 완등.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했고,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코리안 루트 개척.
2011년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를 개발하는 도중
10월 18일 남벽 5,800m 부근에서 마지막 교신을 남긴 채
연락이 끊겼으며, 수색·구조작업을 진행했지만 찾지 못했다.
북극점
김창호는 한국최초 무산소 완등기록
세계에서 14번째로 무산소 완등에 성공.
2005년 7월 14일 이후, 7년 10개월 6일 만.
김창호 산악인
이는 기존 최단기간 등정자 폴란드 예지 쿠크츠카
7년 11개월 14일보다 1개월 8일을 앞당긴 기록으로,
무산소 등정으로도 세계 최단기간을 기록하게 되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4좌 완등자를 배출.
고 박영석, 엄홍길, 한왕용, 김재수에 이어 김창호.
이로서 한국과 이탈리아가 각각 5명으로 가장 많다.
여성산악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등정하고도
칸첸중가 등정 논란으로 공인 보류 중
오은선까지 포함하면, 한국은.,세계 No 1.
'히말라야 16좌 완등'., 세계 최초.,엄홍길.
네팔에 16 학교 건립 목표 중.,14 학교를 준공.
명실공히 우리나라는., '세계 No 1' 산악 강대국.
1993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작으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박영석은 이어서
2004년 무보급 세계 최단기간 남극점 도달(44일).
2005년 북극점을 밟으며.,인류 최초 산악 그랜드슬램.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등정,
지구 3극점 정복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루트 개척.
2011년 안나푸르나 남벽 신루트 개척 도중 실종.
엄홍길의 14좌는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도전했다가 실패
이듬해 재도전에서도 고배 1988년 정상에 등정.
엄홍길은 이후 5년간 벽등반에 몰두
1993년에 다시 히말라야 14좌로 선회
초오유와 시샤팡마 정복으로 속도를 내
1997년까지 9개 봉우리를 넘어선 과정에서
그가 유독 진을 뺀 봉우리가 안나푸르나였다.
1950년 인류 최초로 정복된 8,000m급 봉우리지만,
20년이 지난 1970년에야 두 번째 등정이 이뤄진 곳.
그는 에베레스트 등정후 안나푸르나를 목표로 잡았다.
1989년 첫도전
1996년 두 번째 도전.
거푸 기상악화로 물러났다.
1997년 셰르파가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
1998년 봄 등반중 대원을 구하려다 중상.
다섯 번째 도전에 나선 1999년에야 등정.
엄홍길은 히말라야14좌 완등에
셰르파 4명, 대원 3명, 기자 1명
총 8명의 희생이 따른 후에 성공.
엄홍길은 2000년 한국 최초로 14좌 완등을 공식 발표.
등정의혹에 휘말려 2001년 로체와 시샤팡마에 재도전.
이로 인해 박영석이 완등 순서에서 그를 앞서게 되었다.
김재수는 1990년 에베레스트를 시작으로 시동.
2011년 안나푸르나 정상에 서며 21년 만에 완등.
2007년 고 고미영 등반매니저를 맡으며.,다시 도전.
.............고미영 산악인..............
1991년 스포츠클라이밍에 입문했다.
1995~2003년 전국등반경기대회 9연패,
1997~2003년 아시안챔피언십 6회우승 등
1997년 공무원을 그만두고 전문 산악인 활동.
2007년 에베레스트, 브로드피크, 시샤팡마 봉
여성 등반가 최초로 한 해 3개봉 등정에 성공했다.
2008년 에베레스트 등정을 포함해 3대륙 최고봉 등정.
2009년에는 세계 최초로 한시즌 8,000m 3개봉 연속 등정.
스포츠클라이밍 아시아 1인자로 활약하다가
2006년부터 히말라야 14좌 고봉 등정을 시작.
2009년 히말라야 11좌에 올랐으나, 하산중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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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14좌 중 11좌 낭가파르바트에서 추락사.
- 산악인 故 고미영 일기 중에서-
'당신을 가까이에서 지켜봤읍니다.
안되는줄 알면서 마음은 당신을 향해.,
이제 백일동안 당신을 잊으려고 합니다.
곰이 사람이 되는데
걸린 백일이 지나서도
잊혀지지 않는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용서하십시요.'
베이스캠프를 30m 남겨둔 지점에서
그녀는 그만 절벽 아래로 추락사 한 것.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켜주던 김재수 대장은
그녀를 위해 먼저 내려와 물을 끓이고 있었다.
헬기로도 찾지 못한 시신은 김재수 대장이 찾아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고 고미영 산악인 시신을 수습.
"편히 쉬어. 이젠 안추울꺼야." 라면서 오열을 토했다.
고미영(41) 김재수(47)은 연인.,스포츠칸 보도.
“미영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두고 있었다.
히말라야 14좌를 모두 오른 후 결실을 맺으려 했다”
“이제 미영이의 꿈은 눈 속에 묻히고,
사랑은 눈꽃으로 남게 됐다”- 스포츠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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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14좌' 도전 중 에서
10좌를 같이 오른.,자일 파트너.
그가 늘 생전에 고미영에게 한 말,
"너를 정상에 데려갈 수는 없지만
만약, 네가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면
그때 네 곁에서 같이 죽어줄 수는 있어."
김재수는 고미영 사고 후 안나푸르나와 초오유 실패.
2010년 여름 가셔브룸 2봉과 가셔브룸 1봉.,연속 등정.
2011년 4월 26일 마침내 안나푸르나를 오르며 14좌 완등.
둘이 함께 못 올랐던 히말라야 3좌 정상에
故 고미영의 영정 사진을 파묻고 내려온.,그.
“고미영은 내게 초록빛 꿈을 줬던 사람이다.”
김재수 산악인
위키디피아와 에베레스트뉴스닷컴 등 권위 있는
국제적인 소식통의 14좌 완등자 명단에서 빠졌지만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오은선.
'오은선 & 고미영' 산악인.
오은선은 1993년 지현옥의 에베레스트 등반대 출신.
그당시 38세의 지현옥. '산과 결혼했다'던 여성산악인
히말라야 곳곳에 '한국 첫 여성등정' 기록을 남긴 지현옥.
1993년에는 대한산악연맹 원정대 대장으로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8850m)에 등정.
1999년 안나푸르나 등정 후에 하산하다가 실종.
여성 산악계에 큰 발자취를 남긴.,고 지현옥.
1993년 체육훈장 기린장, 2000년 체육훈장 백마장.
충북산악연맹에서 고인 유지를 받들어
후배 양성과 추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3년 한국여성등반대 대장으로
한국 여성최초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
당시 막내대원으로 정상공격조에서 제외된.,오은선.
그로부터 11년후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등정 성공.
불의의 사고로 숨진 지현옥의 빈자리를 채운.,오은선.
고 지현옥 11주기
1997년 가셔브룸2봉을 시작으로
13년에 걸쳐 14개 고봉에 도전했고
이중 13개 고봉의 등정을 인정받았다.
탁월한 고산 적응력을 지닌 그녀는
많은 8,000m급 고봉을 무산소 등정.
캠프를 줄여 속공법으로 등정에 성공.
라인홀트 메스너는 “14좌 완등보다
15개월 사이 8좌 등정이 더 놀랍다.”며
오은선의 등반력에 찬탄을 금치 못할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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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악인의 히말라야 14좌 도전사에는
고미영의 죽음처럼 가슴 아픈 이들도 많다.
2013년 5월 21일 에베레스트 4캠프에서 사망한
부산 산악인 서성호(34)와 같은 날 캉첸중가에서
사망한 광주 산악인 박남수(47)를 예로 들 수 있다.
고 서성호(향년 34세)
2013.05.21 에베레스트 4캠프에서 사망한 서성호(34)
그는 14좌 중 12좌를 오른 젊은 산악인의 대표주자였다.
그는 2012년에 산악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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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좌를 오르며 생각의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처음에 친구들이 결혼하고 집 사는게 부러웠는데,
지금은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지금 이렇게 차 마시고,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것,
자체로 만족스럽습니다.” - 서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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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멈출 줄도 알아야…”
- 'No 3 산악인' 한왕용 씨 -
히말라야14좌 국내 3번째 완등.
더 이상의 도전은 포기.
쓰레기청소 위해., K2로
.......................한왕용 산악인.......................
1966년 9월 0일 (군산 출생 49세) 군산동고 졸업.
등반 과정에서 여러 희생적 일화로 유명한 산악인.
.
한왕용은 1994년 초오유(8,201m) 등정을 시작으로
2003년 브로드피크까지 9년간 히말라야 14좌를 완등.
그는 14좌 완등의 꿈을 이룬 후에 다른 산악인들과 달리
히말라야 14좌 거봉을 청소하는 클린 등반을 이끌고 있다.
대한산악연맹 환경보전이사.
(주)콜핑 홍보이사를 맡은 그.
.......................................
1995.10.14. 14시 30분 에베레스트 등정 촬영 후
동료대원, 셀파들과 서로 연결한 로프를 풀고 하산.
그곳 모든 산악인들이 그렇게 해왔듯이
한명의 실수가 전원으로 이어지지 않게끔
'각자 살기' 방식으로 하산을 시작한 것이다.
얼마후 무전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뒤를 이어 하산하던 한 대학산악부원이
8750m 지점에서 탈진하여 주저앉았다는 전갈.
그는 동행한 셀파와 더불어
그 대원을 앞뒤로 로프와 연결.
20시간에 걸쳐 탈출을 감행한 것.
주저앉으면 달래기도 하고
피켈로 엉덩이를 후려치면서
그 자신도 초죽음이 된 상태로
다음날 오전 3시 경 캠프에 도착.
2000년 k2 등정때 자신의 산소마스크를
선배에게 벗어주고도., 정상 등정에 성공.
그러나 하산길 눈보라 속에 길을 잃고 탈진.
결국, 무사히 탈출한 후 살아 돌아왔지만
4차례에 걸쳐 뇌혈관 수술을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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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17 산악인 한왕용(韓王龍 38)씨는 소위 넘버 3.
2003년 히말라야 14좌 완등 기록은 국내에서 세 번째였다.
우리나라에서 박정(薄情)한 사람들은 2등을 기억하지 않는다.
No1 엄홍길, No2 박영석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히말라야 위성봉 얄룽캉봉(8505m) 등반 혹은 남극점
No3 그는 “삶에서는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고 반응했다.
“14좌 완등은 내가 좋아서 했고
스스로에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줬으니
이제는 사회 속으로 돌아갈 때라고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계속하려면 결혼은 왜 했고,
아이는 왜 낳았는가? 잊혀진 산악인이 되고 싶다.”
2004.6.2., 그는 히말라야의 K2봉(8611m)으로 떠난다.
기록 경쟁의 도전과 무관한., 쓰레기 청소를 위한 등반.
“내가 히말라야 등반에서 저지른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
“2002년에 K2봉의 베이스캠프에 있는
일본 원정대 텐트로 놀러갔을 때였다.
한국산 깻잎·마늘·장아찌 통조림 식사 대접.
일본팀은 캠프1에서
다른 원정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왔다’ 말했다.
그 내용물은 한국 원정대들이 버린 것들.
나도 내게 짐이 되는 것을 그렇게 버렸다.
그후 K2를 떠났지만 산은 그곳에 남아 있다.
.
그래서, 나는 과거 흔적을 지우는
마지막 원정을 하고 싶은 것이다.”
히말라야14좌 완등 선배들이 기업체 후원을 받을 때,
그는 직장에 다니며 후배들과 함께 원정비를 모았다.
그의 원정대는 2~3명 소규모였고 경비는 늘 빠듯했다.
“산을 타는 것은 누구에게 고용되어 하는게 아니라
내가 좋아서 하는 행위인데 도움바라는 것이 싫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0년에 걸쳐 14좌 완등을 이뤄냈다.
그는 그 과정에서 단 한명 동료도 잃지 않았다.
“가장 능력이 떨어지는 대원과 보조를 맞추었고
문제가 발생하면 정상을 눈앞에 두고도 포기했다”
“산악인에게 등정(登頂) 욕망은 강렬한 것이지만
내가 살아 있는한 다시 오를 기회는 언제든지 있다.
이번에 실패하면 원정 경비를 벌어 다시 오면 된다."
설령 그 산을 다시 못 올라간다고 한들 어떠한가?
산 정상에 올라간다고 인생이 바뀐 적이 있었는가?
'꼭 정상을 밟아야 하겠다.'는 욕심이 화를 부르는 법.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라고 늘 생각했다.
― 정상에 섰을 때 감흥은 있지 않는가?
“정상에 서 있으면 어떻게 살아 내려갈지를 걱정했다.
히말라야 14좌에서 마지막으로 남겨놓앗던 브로드피크봉.
정상에 올랐을 때, 베이스캠프에서 무전기로 소감을 물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 그런가,
‘아무 생각없다’고 답했다. 물론 기뻤다.
앞으로 더 이상 높이 올라가지 않아도 되니까.”
2000년 K2 등정 하산길에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눈보라로 하산길을 잃었다.
올라오면서 남긴 발자국과 흔적은 모두 다 지워졌다.
언제 낭떠러지를 향해 발을 잘못 디딜지도 몰라
해발 7000m 지점에서 하산을 포기하고 주저앉았다.
의식을 잃어갈 즈음 눈앞에 노란 오줌자국이 보였다.
하산하던 누구인가 오줌을 누었던 모양.
그걸 이정표로 삼아 방향을 놓치지 않으려고
왼쪽 대각선으로 50 발자국 다시 반대쪽으로
50 발자국씩 걸으면서 더듬 더듬 내려왔었다.
귀국 후 그는 네 차례나 뇌혈관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는가?
“자기가 좋아해 마음먹은 것을 한 것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20년간 취미로 그림을
그려온 사람에게 왜 그리는지를 따질 수 없지 않은가.
14좌 완등의 영광이 내게만 집중되어 대원들에게 미안했다.
혼자였다면 못했을 것이다. 나는 동료들의 힘을 많이 빌렸다.
쉬운 산도 혼자면 어렵고, 어려운 산도 함께면 오를 수 있는 것.”
- 산을 안 탔다면 무엇을 했을까?
“식당 주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요즘 한 등산장비업체의 부장으로 근무.
―산과 사회, 어느 쪽이 더 힘든가?
“산소가 희박한 고산보다 사회생활 적응이 힘들다.
사람들은 온통 무엇인가 잡으려고 날뛰는 것 같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파벌을 짓고 거짓말을 한다.
무엇보다 자기에게 손해보는 일은 절대 안하려고들 한다.
처음 산을 다닐때 나도 급했다. 시간이 지나며 여유로워졌다.
오늘 안되면 내일을 기다리고, 정녕 안되면 수용할줄 알게 됐다.”
―장차 어떻게 살 작정인가?
“앞으로 아내에게 내 인생을 투자하려 한다.
아내는 노인복지시설을 하려고 요즘 공부 중.
섬진강변에 복지시설을 지을 장소도 봐 놓았다.
거기서 아내가 하는 일을 도우면서 보낼 작정이다.”
인터뷰를 끝낸 뒤 저녁식사를 제의했더니,
“집에서 아내가 밥해놓고 기다리기로 했다”
오호, 삶과 죽음 사이를 걸어온 인물이
어찌 호방하지 않고 가정에 귀착할까?
-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의 인물기행 -
한왕용은 1994년 초오유를 시작으로
때로는 엄홍길, 박영석과 호흡을 맞추며
하나씩을 취한 끝에 10년 만에 목표를 달성.
초반에는 박영석과 동행하며 경력을 쌓다가
1998년 엄홍길과 함께 안나푸르나를 올랐다.
2000년 엄홍길의 K2 원정에 동행, 등정 성공.
한왕용은 7번째 봉 낭가파르바트부터
박영석과 다른 독자적 행보를 시작했다.
한왕용은 박영석과 엄홍길보다 늦었지만
20회 중 14회의 성공율은 두 선배를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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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휴먼원정대는 2004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등정후
하산길에 사망한 '계명대 산악원정대' 故 박무택, 故 백준호,
故 장민 대원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서 에베레스트로 떠났다.
그때 엄홍길 등반대장과 함께 동행한.,한왕용.
2005. 5. 29 사고발생 1년 만에 故 박무택 시신 수습.
휴먼스토리를 보여줘 전국민에게 감동을 남긴 바 있다.
에필로그.
2010년 9월 현재 에베레스트를 20번 오른.,아파(Apa·50) 셀파.
세계 산악계에서는 그를 수퍼 셰르파(Super Sherpa)라 부른다.
지난 21년간 그랬듯 지난 5월 21일에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등정.
매년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우는 아파.
에베레스트 등반 역사 상에서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에베레스트 최다 등정 기록.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언제나 있는.,아파 셀파.
그에게는 일단 교만이 없으며, 누구에게나 친절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똑같아 분쟁이 끊이지 않지만
결론은 늘 그의 말을 따르게 되는 조용한 카리스마.,셀파.
아파에게는 행동하는 카리스마도 있다.
2007년에 그가 만든 환경 원정대가 그것.
“히말라야는 신성한 곳이다.
만약,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면
이곳은 청정 지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쓰레기를 치울 수가 없다.
그 책임은 우리 셰르파들에게 있다.”
그 말처럼 아파는 해발 8000m까지 올라가
빈 산소병과 각종 쓰레기를 수거해 내려왔다.
올해에도 그는 솔선수범 봉사정신을 보여줬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본격적인 등반에 나서면
죽은 산악인들의 시신이 방치된 채 많이 보인다.
빙하가 흐르며 얼음 속에서 노출되는 시신도 있다.
아파는 등반을 지연시켜가며 시신을 거둔다.
나라도 다르고, 일면식도 없는.,시신들이지만
이번에도 3구의 시신을 베이스캠프로 내려 화장.
2010년 1월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 다녀온 .,아파.
“봄에 에베레스트 정상을 꼭 올라야 할 이유가 있다.
정상에서 힐러리 경의 천도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라마 불교 식으로
유골을 뿌려야 할., '달라이 라마' 같은 분이다.
나는 그분의 영정사진을 집에 늘 모시고 제사지낸다.
힐러리 경은 1966년부터 자선단체를 만들어
수십개 학교, 보건소, 네팔에 다리를 놓은 분.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죽으면 화장을 해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산골(散骨)해 주기를 희망.
1m65cm의 키에 55kg. 작은 체구인 아파 고향은
힐러리 경과 함께 에베레스트 초등한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와 같은 네팔 쿰부 지역 타메(Thame) 마을이다.
“나는 그곳에 작은 로지(여관)를 경영하고 있다.
원래 내 아버지가 만든 것이다. 아버지도 셰르파.
내가 12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산에서 죽었다.”
아파는 돈벌기 위해 포터 일부터 시작했다.
1990년 롭 홀과 처음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
1996년을 빼곤 매년 단 한번 실패도 없이 등정.
“1996년에도 롭 홀과 에베레스트를 오를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내가 말렸다. 당시 타메에 있는 로지를 증축 중.
일손도 바쁘지만 꿈자리가 안 좋다는 이유로 그를 붙잡은 것.
아내는 이혼까지 하겠다며 너무 강력하게 말려 결국 못 올라갔다.”
96년 그해 에베레스트에서 대참사가 일어났다.
에베레스트 등반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숨졌던 해.
무려 15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 사고로 롭 홀도 죽었다.
‘수퍼 셰르파’라는 수식어는 누가 붙여준 것일까?'
“나와 락파 겔루(Lhakpa Gelu) 셰르파가 그렇게 불린다.
락파는 에베레스트를 10시간46분 만에 오른 기록 보유자.
2003년 에베레스트 등정 50주년 때 네팔 언론이 붙여준 것.”
'최단시간 등정자와 최다 등정자'.,슈퍼 셀파.
그 50주년 기념 등반 때도 아파는 정상에 섰다.
무사히 내려왔지만 아파는 죽음을 맞을 뻔했다.
“베이스캠프에서 우리가 타고 카트만두로 귀환하던 헬기.
추락하는 바람에 4명이 죽었는데 락파와 나, 둘은 살았다.
그래서, 더욱 우리 둘을 수퍼 셰르파라고 불러주는 것 같다.
아마 에베레스트를 더 오르라고
에베레스트 신이 살려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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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2.28 네팔 셰르파 아파(52)씨가 기후변화로 인해
에베레스트 등반이 더이상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AFP 인터뷰에서 온난화로 에베레스트 정상의 눈이 녹아
바위가 드러났으며 또 얼음이 녹으면서 균열도 많이 발생.
낙석 위험이 매우 커졌으며 또한 아이젠을 사용해야 하지만
바위만 남은 산에서 아이젠 착용은 미끄러지기 쉬워 극히 위험.
앞으로는 더 이상 에베레스트 안전 등반은 불가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온난화와 오염으로 망가진
히말라야 되살리기 위한 캠페인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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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5월 28일 -[서울신문 나우뉴스]
미국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아파(53)
12살 부터 짐꾼으로 히말라야를 오르내린 그는
현재, 미국으로 이민 가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유타 대학은 그의 헌신을 기려 명예박사 학위 수여.
아파는 "박사학위를 받아 너무나 큰 영광"이라면서
"산은 나에게 많은 축복을 안겨주었는데
학위도 받아 너무 자랑스럽다. - 아파 -
아파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22번 도전에 나서 21번 성공.
이같은 공로로 네팔 국왕으로 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또한 그는 미국에서 어렵게 살면서
인터넷 비영리법인을 만들어 얻어진
수익금을 네팔 어린이 교육사업에 쓴다.
"청소부 이 일 덕분에 아이들을 키우고
지금은 교육환경이 좋은 미국에서 산다."
"네팔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나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격려할 것"
덧 말.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경배하고 상생(相生)할 터전이다."
네팔 셀파들이 갖고있는., 공통의식.
셀파(sherpa)라는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53년 영국 힐러리 경이 에베레스트를 초등할 때,
함께 그곳을 올라갔던 '텐징 노르게이'에 의해서였다.
그 이후로 계속 셀파들은 고산 정복의 첨병 역할.
셀파는 알려진 것처럼 산악 가이드 뜻말이 아니다.
네팔 일대에 사는 고산족에서 한 씨족의 성(姓)이다.
..............셰르파(sherpa)족............
네팔의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민족이다.
티베트어로 ‘ཤར་(shar)’와 ‘བ་(pa)’는 각각
‘동쪽’ ‘사람’ 즉, 동쪽에서 온 씨족을 의미.
약 500년 전, 티베트에서 네팔 산악지대로 이주.
셰르파 족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거주하고 있어
고소 적응력이 뛰어나 원정대 안내와 짐꾼으로 활약.
“원정을 돕는 사람들”이란 보통명사로 사용되고도 있다.
실제로 원정초기부터 고산 등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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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의 셀파들은 히말라야를 오를 수 있는
확실한 등정 방법인 노하우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작은 체구에 무거운 짐을 잘 짊어진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앞으로만 계속 전전한다.'는 분명한 사실.
어렵고 힘든 곳일수록 힘을 비축하며 걷는다.
보통 사람들이 4km를 한시간에 걷는다면
네팔 셀파들은 1시간에 그 절반 정도 걷지만
급경사에서는 1분을 걷고 45초 쉬는.,느린 걸음.
그것이 히말라야 14좌를 보다 더
안전하게 잘 오를 수 있는.,'노-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