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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문 : http://duizilland.egloos.com/99409
자그마치 500여년을 이어오며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도 끈질기게 살아남았던 조선왕조.
우리는 항상 근현대사를 공부하면서, 그 조선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일제의 마수에 사로잡혀 망하게 되는걸 아쉽게 생각한다.
"쪽팔리게 총 한방 못쏴보고 먹혔죠."
누군가는 국권침탈의 과정을 이렇게 일축하며 부끄러운 역사라 평가하지만, 1907년, 그 과정에선 목숨을 던져서라도 이를 격퇴해 내려 했던 이름없는 영웅들이 있었다.
쓰러져가는 조선을, 아니 대한제국을 지켜내기 위해 서울 한복판에서 장렬히 산화했던 영웅들. 대한제국군.
그러나, 이 냥반들은 아니다. 우리가 근현대사에서 흔히 '구식군대 vs 신식군대'의 도식으로 배우는 임오군란이라는 구 조선군들의 봉기 사건이 있지만 거기 등장하는 신식 군대 별기군은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영웅들이 아니다. 이들은 친일 양반들의 자제로서 미군 교관에게 훈련을 받을때도 '더럽게 땅바닥에서 뒹굴 수 없다.'며 대신 자신의 하인을 보내거나, 하인의 등에 업혀(...) 훈련을 받으려고 했던, 뼛속까지 허례허식에 물든 봉건제의 마지막 찌꺼기에 불과할 뿐이니까.
치욕적인 을미사변 이후, 자신들이 조선 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민비를 제거한 일본은 이전보다 한층 더 심하게 조선에 대해 간섭을 시작한다.
안그래도 나라 안팎으로 시달리고 있던 차에 일본군의 무지막지한 위력(?!)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된 고종은 겁을 집어먹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기에 이른다.
바로 오늘날 국사책에서 '아관파천'으로 일컬어지는 웃지못할 사건이다. 자신의 반려자가 무참히 살해당했는데도 한 나라의 국왕으로서 복수는 하지 못할 망정 오히려 남의 나라 공사관으로 꽁지 빠지게 도망간것도 모자라, 거기서 1년을 유유자적하며 보냈던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 후,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1897년 8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칭제를 한다.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서양배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강력하게 무장시키기 위해 수많은 병기 실험을 했었던것과 같이, 고종 자신도 이제 막 탄생한 제국을 일본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선 강력한 군사력만이 살길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는 이미 갑신정변 당시부터 근대식 군대를 원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구식무기로는 군대를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없다고 판단한 고종은 서양 열강의 교관을 초빙하고, 그에 맞게 발달된 무기를 수입하기에 이른다. 복식과 편제도 서양의 그것에 맞게 고친다.
대한제국 1년 예산의 30%가 넘는 돈을 군비에 투자하는 철저한 황제 중심의 부국강병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일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이상 사사건건 걸어오는 일본의 간섭을 피하지 못했으며, 일본은 구한국군이 필요 이상의 무장을 하는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당시 대한제국은 무기와 탄약을 직접 자체 생산할 인프라가 전혀 구축되지 않아 군대의 모든 무기를 서양의 무기상인들에게 사다 써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덤태기를 써 몇배나 더 비싼 값에 사들였고, 일본은 영국제 퇴역 수송선을 군함이라고 속여 팔기도 했다. 또한 구한국군의 훈련 교관이 바뀔때 마다, 교관의 국적에 따라 병사들이 사용하는 제식 병기도 계속 바뀌어 그때마다 드는 비용 또한 천문학적이었다.
그런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군대를 근대화 하겠다는 고종의 의지는 확고했고, 그는 느리지만 서서히 군비를 늘려 나간다.
그러던 중, 격동의 1907년이 되었다.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평리원 검사 이준과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주 러시아 공사관 참사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여 줄 것을 전 세계에 호소하였지만, 당시 일본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대다수 강대국들의 입장에선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동양의 강자인 일본과 척을 지면서까지 극동의 작은 나라의 독립을 지지해줄 이유가 전혀 없었다.
특사 파견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은 이를 빌미로 7월 20일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켜 버리기에 이르렀고, 결과적으로 이것은 고종 자신의 무덤을 판 것밖에 더 되지 못했다. 그러나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기 마련이다. 앞서 고종의 강제퇴위에 이은 순종에게의 양위는, 한국인들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는 상황에서도 한국인들의 필요 이상의 무장을 원치 않는 일본에 의해 '군사비 절약'이라는 표면적인 목적 아래 줄기차게 축소되어오던 구한국군이었지만, 이 시기에 도달하여서도 약 15000여명의 육군이 제국 전역에 산재하여 있었고, 그중 서울에는 9600여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구한국군은 상시 휴대 탄환 15만여발 이상과 전시 비축 탄환 6백만여발, 탄약과 개틀링포 및 맥심기관포, 크루프 75mm 속사포와 암스트롱포 등의 포병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본의 입장에서도 만만하게 볼 수 없었던 막강한 전력이었다.
고종의 퇴위에 반발하던 시위 제 2연대와 3대대는 궁내부대신 박영효와 접촉하여 일본에 의해 퇴위되어 감금되어 있다시피 한 고종황제를 구출(!) 하러 황궁에 진입한 후, 시위대가 직접 황제를 주변에서 보위하며 일본군으로부터의 위협을 완화시키는 동시에 나라를 좀먹던 친일 관료들을 제압. 필요에 따라선 이들을 모두 제거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이들이 세운 결단은 일본과의 실질적인 전쟁이었다.
이병무로부터 보고를 받은 이토 히로부미는 발빠르게 움직인다. ----------------------------------------------------------------------------------------------------- 자주국방네트워크 사맛디님의 글 대한제국군의 항쟁 사실인가 펌. http://koreadefence.net/bbs_detail.php?bbs_num=913&tb=board_article&b_category=&id=&pg=1 * 원문 : http://duizilland.egloos.com/99409
그러나 우리 역사에 단 한번이라도 배신자가 등장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가..
이들의 계획은 정미칠적 중 한명인 군부대신 이병무에 의해 사전에 발각되고 만다.
1907년 7월 19일 자정, 조선 주차 일본군 51연대 3대대는 고종이 있는 경운궁의 각 문을 급히 봉쇄하였으며,
1대대는 시위 2연대 3대대의 본영을 기습 포위한다. 대한제국군의 작전 개시 30분 전의 일이었다.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대한제국군의 조직적인 반격을 두려워하던 일본은 남산 일대에 산포 6문을 전개하는 한편, 51연대 병력을 동원하여 용산 육군병기창을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구한국군 육군의 유일한 자랑거리다 시피 했던 맥심 기관총 6정을 비롯한 중화기와 탄약 대부분이 고스란히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고, 전시 병사들에게 개인별로 지급되기로 되어 있던 실탄 6백만발 이상이 모두 일본군의 관리 하에 들어가게 된다. 일본은 황궁 진입 계획을 세웠던 구한국 경찰과 군대의 수뇌부들마저 모두 해임시켜 버린다.
이어 24일, 일본은 '정미7조약(한일신협약)'을 강제하였는데, 여기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킨다.'는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의 비밀 각서가 삽입되어 있었다.
이는 일본의 한국 병합의 최종 단계로서, 대한제국 군대를 완전 무력화 시킨 후 그들의 저항을 사전에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조선을 일사천리로 강제 합병해야 된다는 일본 내의 대다수 강경파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토 히로부미의 대 조선 관련 정책은 어디까지나 '점진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있어서도 조선을 완전한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어 잘 요리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선 마지막 걸림돌인 대한제국 정규군을 해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는 구한국군들의 반발을 이미 예상했다. 전국적인 일본군 병력 재배치가 이루어졌고, 7월 30일 융희황제 순종을 협박하여 군대해산 조칙을 선포하게 만든다. '죽으나 사나 왕의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봉건제의 맹점을 이용한 술책이었다. 한국 황실이 자진해서 군대를 해산하는 것 처럼 꾸며 대한제국군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8월 1일, 일본은 구한국군 각 부대의 장교들에게 아침 8시까지 조선주차군 사령관의 관저에 집합하라는 비상 호출을 명령한다.
대한제국군 장교들이 한 방에 모였다. 그 곳에 군부대신 이병무와 조선주둔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나타났다. 동시에 관저는 완전 무장한 일본군 병사들에 의해 이중 삼중으로 포위되었다. 이병무는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구한국군 해산에 관한 순종의 조칙을 읽어내려 갔다.
장교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하세가와는 '제군들은 대상이 아니라고' 하였다. 일본은 구한국군의 장교들과 부사관, 사병들을 분리시켜 장교들의 반발을 막을 생각이었던 것이다.
동시에, 동대문에 있는 훈련원 광장에서도 군대 해산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맨손 훈련과 공로금을 지급한다는 명목 아래 2000여명이 넘는 구한국군 병사들을 비 무장으로 집합시킨 일본은 광장 주변을 엄청난 수의 일본군으로 포위시켰고, 군부협판 한진창이 순종황제의 군대해산 조칙을 낭독했다.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그들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병사들의 동요를 막을 생각이었는지 한진창은 더욱 큰 소리로 해산과 더불어 공로금을 지급한다고 말했고, 그 공로금은 하사관 80엔, 1년 이상의 병졸이 50엔, 1년 미만의 병졸이 25엔으로 상당한 수준의 금액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지폐를 받자마자 땅바닥에 던져 버리면서, 총에 손이 없다는 사실에 분통을 터트렸다.
일본군은 즉석에서 구한국군 한 사람 한 사람씩 계급장을 떼었다.
그 와중에, 군대해산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온 몸으로 저항한 군인이 있었다. 바로 대한제국군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나라의 군병이 있는 이유는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다. 지금 왜적이 온 강토에 가득한 데 홀연히 군대를 해산한다는 것은 황제의 뜻이 아니고 적신이 황명을 위조한 것이다. 나는 죽을지언정 명을 받들 수 없다."
그는 군대해산은 곧 망국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망국을 지켜봐야만 하는 치욕적인 군인. 대한제국 군인 박승환은 그 치욕을 단호히 거부한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애석할 것이 없다.'
그는 한 장의 유서로 모든 것을 정리한다.
박승환이 자결하자, 중대장인 정위 오의선도 칼로 자결한다. 이에 1연대 소대장 부위 남상덕은 부하들에게 "대대장이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 의로움을 보였는데, 내가 어찌 홀로 살기를 바라겠는가? 마땅히 저 적들과 결사 항전하여 나라의 원수를 갚자!" 라고 하며 시위대의 봉기를 주도하였다. 박승환의 자결로 술렁이고 있던 시위대원들의 놀라움은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격분한 시위대원들은 탄약고를 접수한 뒤, 무기를 가지고 병영 밖으로 나가 일본군들을 공격한다.
대한제국군의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인 1907년 '서울 전투'의 시작이었다.
한편 그 시각, 인접한 제2연대 1대대도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당시 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대해산에 항명하다 해임된 상태라 부대원들의 감정이 격양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웃 대대로부터 총성과 함성이 들리더니 1연대 1대대원 3명이 허공에 총을 쏘며 달려왔다. 그들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2연대 부대원들도 "앉아서 무장해제를 당할 수는 없다. 1연대가 봉기했으니 우리도 싸우자!"라고 외쳤고, 대대원들 역시 이에 적극 호응하여 "1연대가 봉기했다!"고 외치며 병영 내로 난입, 마침 무기고를 점검하며 탄약을 반출하던 일본군을 발견. 육탄으로 그들과 난투극을 벌이며 마침내 총과 탄약을 회수하고 1연대를 따라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이들 외에도 300여명의 다른 부대원들도 항쟁에 참여하였다.
이들과 시위 1, 2연대의 각 1대대 병력은 거리에서 합류, 2연대 정위 권중협, 참위 남상덕. 장세정, 노덕세, 이준영, 이한승, 그리고 무관학교 3학년 생도로서 소대장 견습차 파견되어 있던 견습참위 이충순 등 3명, 특무정교 다수의 지휘 하에 전투를 개시했다.
시위대와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미 일본군은 시위대의 저항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였기 때문에 시내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보병 13사단 51연대를 중심으로 진압 작전을 감행하였다.
특히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은 남대문 부근이었다. 일본군 보병 9중대와 보병 10중대 등 2개 중대, 공병대와 호치키스 기관총 3정이 즉시 현장에 투입되었다. 일본군 9중대는 한국군 제2연대 1대대를, 10중대는 제1연대 1대대를 담당했다. 대한제국 군인들은 일본군이 접근하자 맹렬한 사격을 가해 접근을 차단시켰다.
일본군의 1차 공격은 아직 실탄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던 시위 1, 2연대 각 대대의 치열한 반격에 좌절된다.
상황이 악화되자, 일본군은 추가로 시위 2연대 병영 가까이에있던 남대문 위에서 기관총 2정을 추가 거치한다. 이때 구한국군은 큰 위기에 봉착한다. 당시 서울의 건물은 대부분이 단층 건물이었고 전투 장소 부근에서 2층 건물이란 남대문 밖에 없었는데, 이곳을 일본군에게 선점 당해 그들의 기관총 사정권에 완벽히 노출된 것이다. 구한국군은 2차례 이상 남대문 방향으로 진출하여 통감부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관총 사격에 매번 전진을 포기해야 했다.
기관총 세례와 동시에 일본군의 중대장이 손수 다이너마이트를 들고 병영으로 돌입, 육탄 폭파를 가하는 맹공을 펼친다. 이 과정에서 남상덕이 이끄는 시위대 병사들은 그 중대장, 러일전쟁에서 용맹을 떨쳤던 가지하라를 사살하는 등 전과를 세웠지만 개떼로 몰려드는 일본군들을 감당하지 못하고 백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때 남상덕은 시위대 병사들과 함께 칼을 빼들고 일본군에 대항하였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많은 병사들과 함께 순국하고 만다.
결국 제2연대 1대대 병영은 일본군에게 점령되고, 그 일본군이 1대대가 항쟁하던 병영에 투입되면서 그들을 상대하느라 남은 1연대 1대대는 서서히 탄약이 떨어지기 시작해 곤경에 빠진다. 결국 이들도 결사적인 항전을 펼쳤지만 일본군에게 병영을 내주고 말았다.
마침내 시위 1,2연대 1대대 병사들은 병영을 포기하고 서울 시내로 흩어져 시가전을 개시하게 된다. 그 사이에도 훈련원에서 강제 해산된 병사들 상당수는 울분을 터트리며 봉기를 일으킨 그들에게 연거푸 합류해 왔다. 그러나 탄약이 부족했던 그들은 제대로 저항할 수가 없었고, 그날 밤 11시경 마침내 전투는 일단락 되었다.
이날 구한국군 시위대의 희생은 대략적으로 전사자 68여명, 부상자 100여명, 포로가 516여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수의 외국인들이 이 날의 전투를 목격했다.
스웨덴 출신의 기자로 서울에 취재차 왔었던 아손 그렙트는 그들중 한명으로, 훗날 이 날의 목격담을 이렇게 술회한다.
"1개 소대병력 정도의 한국군이 일본군에게 무장해제를 당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총을 땅에 버리라고 했고 한국군은 저항했다. 곧 교전이 벌어졌고 일본군과 한국군 측에서 사상자가 나왔다. 일본군은 숫적 우세로 한국군을 압도했다.
그때 길을 지나가던 한국인들이 우르르 몰려 구경하던중 몇명이 일본군에게 돌을 투척했고 곧이어 수백명이 투석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한국인들에게도 발포하기 시작했고 몇명이 쓰러지자 군중이 해산했다.
한국군은 창고를 방어물 삼아 저항하다가 모두 무장해제 당했다. 하지만 그중 한명은 총을 버리려 하지않았다, 일본군이 강제로 총을 뺏자 그 한국군은 일본군의 총검을 뽑아든뒤 얼굴을 찔렀다. 일본군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동료들이 그 한국군을 난도질했다, 조금후 그의 시체는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얼마 전 발굴된 프랑스의 일라스트라시용 지.
이 신문은 사건 발생 한달여 후인 9월 7일자 신문에 '서울의 쿠데타'라는 제목으로 6장의 사진과 함께 3페이지에 걸쳐 이 사건을 증언했다. 포로가 된 한국군이다. 손이 묶이고, 굵은 밧줄로 목이 감긴 충격적인 모습니다.
성벽 근처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진엔 너무나도 가슴 아픈 해설 기사가 실려 있다.
한국의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죽은 "용감한" 이들의 시신은 동대문 밖에 전시 되었다.
부모들은 자식들의 흔적을 찾으러 왔고 그들을 장례 지냈다.
일본인들도 이 "영웅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했다.
그것은 1907년 8월 1일 조국을 지키려다 죽은 고귀한 대한제국 용사들의 버려진 주검들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들여 군대를 양성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의 목적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기 위한 것.
나라가 망하는데 국군이 총을 들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사실 대한제국은 썩을 대로 썩은 나라였다. 사전에 포병 전력을 죄다 일본군에게 넘겨 이렇게 패배하게 만든 장본인인 군부대신 이병무는 이 사건 직후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렇게 기득권층 모두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부귀영화에만 몰두하여 나라를 팔아먹고 있을때, 하급 장교와 병사들은 쓰러져 가는 조국을 구해보고자 거병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압도적인 화력의 일본군에 맞섰다.
조선 정부로부터 가혹하게 수탈당하기만 했던 수많은 백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죽어간 의병들이 아직도 이 나라, 대한민국의 산천 곳곳에 묻혀 있다. 우리나라는 이름 모를 민초, 아니 영웅들이 이렇게 지켜온 나라다.
남의 손에 의한 강제적인 군대 해산. 이것은 그 나라가 실질적으로 망했음을 의미한다.
이 무명의 용사들은 망해가는 조국과 함께 마지막 불꽃을 함께 태우며 장렬히 산화했다.
그러나 이들, 서울의 1연대와 2연대 1대대원들의 장렬한 패배는 항쟁의 끝이 아니었다. 이들 중 살아남은 구한국군 출신의 군인들이 다수 의병활동에 뛰어든 것이다.
이날 남대문 아래서 지펴진 작은 성냥불은 구국의 횃불이 되어 그 어느때 보다도 일본과 치열하게 싸웠던 무장투쟁운동인 정미의병으로 번져 구한말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정미운동이 실패한 후 2년 뒤, 그들은 마지막으로 13도 창의군으로서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 이후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외국으로 뿔뿔히 흩어진 그들의 후예들 중 누군가는 만주에서, 누군가는 상하이에서, 누군가는 중국 내륙 깊숙이서.. 조국이 광복하는 그 날까지 끝내 대일항쟁의 기치를 내려놓치 않았다.
1907년 8월 1일, 구한국군들의 항쟁은 싸움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구국전쟁을 위한 위대한 신호탄이었던 것이다.
첫댓글 조선은 어차피 망할 운명이었고, 예나 지금이나 윗대가리는 무능해야 제맛인듯.
그리고 그 무능한 윗대가리들이 나라망치면 아랫놈들이 다시 나라탈환하고 그 아랫놈들중에 다시 윗대가리가 다시 나라말아먹고 반복의 혼돈의 카오스가 시작.
저 중간중간에 나오는 재현 사진들은 뭔가용? 어디서 얻은거죠?
이번해 초에 KBS1 에서 토요일 마다 오후 8시에 역사 스페셜(?) 에서 나온 내용중 있던것 입니다. 내용은 민긍호의 의병장의 후손을 찾아서 부터 시작합니다.
슬프네요. 안타깝습니다.
솔직히 전쟁한번 못해보고 나라 뺏긴건 많이 아쉬움
대한제국군은 1904년 최대 25000명에 달했습니다. 만약 이들이 국군으로서 외적에 싸우겠다, 라는 의지와 결속력이 있었다면 재한일본군을 밀어내고 러일전쟁이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이들은 국군이 아니었고 차라리 용병의 성격에 가까웠으며 무엇보다 중고위급 장교들 대부분이 친일파들이었기 때문이죠. 고종의 명령보다 일본의 명령에 따르는데 일본과 전쟁이 될리가 없죠.
중고위급이 친일파이기보다는 핵심 인물들이 친일파 였던거져 중고위급에서도 침탈 당한 것때문에 자살하신 분들도 상당하다고 알고 있습니다.(그래도 이분들은 핵심위치에 있지 못하셨던 분들이져..)
아놔 눈물납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