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윤 화백의 작품들
http://www.kcaf.or.kr/art500/osyngyoon/main.htm
오승윤화백의 자살사연
노화가가 화도를 멈추고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하게끔 몰고 갔던 한 화상의 사건 내막을 접하면서 우리나라 화단은 너무도 침울하였을 것이다.
그동안 화랑의 역할이 창작가들을 발굴하고 작업의 삶을 영유할 수 있는 경제적 보장을 해주는 관계역할을 기본 정신을 펼쳐왔는지?
많은 화랑들은 작품의 질을 떠나 상품적 가치를 높여주는 캐리어가 이미 쌓인 작가에게만 손을 내밀어왔다는 것이 우리나라 화랑가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들이 종교적, 개인우상 이념을 반영한 내용을 주문받아 제작한 그림들에 대하여 회화가 아니라는 현대미학가들의 견해는 오늘 날 화랑을 위해 작품제작하는 작가들에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 질 것인가?, 사뭇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나라의 현대문화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물질성이 해결해주는 자본주의 이념이 도가 넘치도록 범람한 미국상업주의 정신이 모든 영역에 깔려있다.
그래서 우리사회엔 진기명기에 가까운 사기 사건들이 터지고 진행되고 있지 않는가.
얼마 전 평론가선생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OO화랑에서는 유명작가 작품20여점을 우선 가져다주면 합계2억을 그림 값으로 지불해 주겠다는 이야기다.
일을 추진하는 동안 우선적으로 가져오는 작품 수 만큼 지불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한다. 물론 여기에는 20점에 대한 전시, 도록제작, 전문미술지 등에 홍보 등이 포함된 Project가 될 것이란다.
그동안 미술가가 화랑을 상대로 한 사기사건이 있었는가? 그동안 이러한 사건들이 화랑을 운영하는 화상들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는 점이다.
지난 오승윤화백의 자살사건 요인이 한 화상 인에 있다고 하니 이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하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오승윤 화백의 화업인생>
오 화백은 1939년 개성에서 태어났고 8.15해방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후 화순 동복으로 이주한 뒤 초등학교 6학년까지를 이곳에서 마쳤고 지금의 광주 지산동으로 옮겨왔다.
부친은 한국근대미술의 선봉 오지호 선생이며 가계는 근동이 알아주는 선비집안이었다. 그가 고교 3년이던1959년, 서울에서 있었던 전국학생실기대회에서 『소묘』로 최고상을 받았고 그것이 인연이 돼 미술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 한국에는 추상미술의 물결이 유행처럼 밀려들어 너나없이 그 물결에 휩쓸리고 싶어했다.
그럴 때에도 오 화백은 그림의 정석은 튼튼한 기초에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의 자연이나 풍물을 구상화로 표출했는데 여기에는 무엇보다도 부친의 영향이 컸다. 1974년부터는 전남대학교에 봉직하면서 예술대학을 창설했다. 그야말로 후진양성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 초 자신의 회화적 재충전을 위해 파리로 건너갔고 그때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카데미 그랑드 쇼미에르 등 유명 미술관의 전시품을 감상하고 인체 그리기에 돌입했다.
오승윤 화백의 조형언어는 말하자면 원리 면에서는 '풍수'이지만 방법 면에서는 '오방정색'의 자기대입이라고 할 수 있다. 평론가인 빠뜨리스·드·라 뻬리헤르씨는 오승윤은 20세기 저장의 반열에 들면서 자기관의 조형기법을 갖춘 작가라고 평하였다.
오승윤 화백의 회화적 세계성은 우선80년대를 분수령으로 탐색되고 창출된 것이다. 이제 오승윤 화백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자연을담보로 한 거대한 화맥을 소유한 대부호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채굴하면서 '이것은 꼼짝없는 오승윤만의 그림'이라 할만한 움직일 수 없는 세계를 세계인의 미감 위에 올려놓았다.
*아카데미 드 라 그랑 쇼미에르(l’Académie de la Grande Chaumière, à Montparnasse)
파리 6구에 위치하고 있는 사립예술시설학원으로서 일정액의 사용료만 지불하면 누가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개방된다.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작업을 하는 화가들에게 는 그다지 추천할 만한 곳은 아니지만, 비정기적으로 작업을 하거나, 파리에 도착해서 준비작업이 필요한 예비화가들에게는 추천할 만한 곳이다.
이곳은 매일 이용권 문화예술 쿠폰을 미리 구입해서 가고 싶은 날에 가서 크로키를 하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주소:14, rue de la Grande-Chaumière, 75006 Montparnasse).
http://www.ccsparis.com/old/prom20.html
--------------------------------------------------------------
-참조: 우승윤화백의 자세한 자살이유 -
며칠 전 저는 제 친구와 이름이 같은 한 노 화백이 자살했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았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예술가니까 또 저렇게 자살로써 자신을 알리며 죽는구나.. 하고 한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암니옴니에서 오승윤 화백의 사연을 보고 나서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한국 서양화단의 거장인 그는 1월 13일 광주 서구 풍암동 모 아파트 화단에서 숨진채 발견되었습니다. 자살소식이 언론에 알려진 후 오화백의 화실에서 그가 직접 쓴 유서가 1장 발견되었습니다. 유서에서 '판화는 그대로 둬라. 재판시 증거로 놔둬라'라는 글과 함께 '사회는 너무 냉정했다', '예술은 나의 목적이었다' 등의 말로 자신의 심정을 나타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오 화백은 자신의 작품인생을 정리하는 의미로 지난해 11월 화집 발간과 함께 12월 서울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 예정이었으나 발간 작업 등이 늦어지면서 크게 상심한데다 자신의 작품을 회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소송도 준비중이었다고 합니다.
홍대 미대를 졸업하고 국내와 해외에서 서양화의 거장으로 인정받아 오던 그에게 '연미술' 이라는 문화상품개발 회사의 제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오화백이 1년에 500만원 가치의 그림을 그려서 연미술에 제공하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하고 1억원 정도를 투자하여 오화백이 평생 모은 작품들로 고급 화보집을 만들어 주며 국내에서 제일가는 현대 갤러리에도 개인전을 열어준다는는 내용의 계약이었습니다. 평생 미술에만 그 삶의 목적을 두어서 많은 돈을 모으지 못 했기 때문에 오화백은 너무나도 좋아하며 주위사람들에게 '연미술'의 대표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며 행복해 했다고 합니다.
계약당시 오화백은 계약서 내용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계약을 체결하고 무작정 화보집을 기다리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약속한 화보집이 나올 기미가 안보였으나, '연미술'의 대표 전후연 씨는 자신을 믿지 않느냐며 자신은 화가 나서 화보집 못 만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고 유서에는 적혀 있습니다.
성격이 소심한 오화백은 주의의 권유로 몇년 몇월 몇일 까지 화보집을 만들어 준다는 약속을 받아냈지만 지켜지지 않았고 그 후 시간을 연장해 언제까지 화보집을 만들어 준다는 각서까지 썼지만 결국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또 현대 갤러리에서 11월에 열어준다던 개인전도 아무이유 없이 연기 되었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습니다. 참고로 현대 갤러리 측에서는 자신들은 오화백의 개인전을 연기 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들 또한 '연미술'로 부터 일방적으로 들은 사실이다 라고 밝혔습니다.
얼마전에는 '연미술'의 전후연 대표가 광주 비엔날레에 출품한 오화백의 귀중한 유화들을 '연미술'이 소유한 싸구려 판화들과 바꾸자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개인 화보집에 대한 조그마한 희망이라도 남아있었기에 오화백은 당장 거절도 못하고 생각해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유서에는 자신의 예술 작품들이 그런 헐값에 넘겨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이것 큰일이다 완전 사기당했다'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사실 그 사건만이 아니라, '연미술' 측은 화보에 대한 대가로 여러차례 오화백에게 그림을 요구 했고, 오화백은 그림을 그려 주었습니다. 오화백이 그들에게 그림을 준 장부 목록을 보니, 어떤 그림은 '인사'목적으로 주었다 라고도 적혀 있더군요..
'연미술'대표 전후연씨는 화보제작과 개인전이 열리지 않은 것은 단순히 작품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老화백의 작품의 숫자가 여러번 개인전을 하는 젊은 작가들 보다 적었을까요?
경찰은 오 화백이 이 같은 이유로 인해 우울증 치료를 받았으며 아파트 8층 계단 창문이 열린 점 등으로 미뤄 엘리베이터를 탔다가 내려서 창문에서 뛰어 내렸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가족 등을 상대로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중이라고 합니다.
순수한 미술가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우리나라의 국보급 화백.. 그러나 소심한 성격 탓에 헐값에 자신의 작품들이 빼앗길 것이 두려워 주위와 언론에 제대로 밝히지도 못하고 한권의 유서로만 남겨야했던 오승윤 화백의 명복을 빌며 부디 그림만 마음편히 그리실 수 있는 편한 곳으로 가셨으면 합니다.
참조글 출처
http://blog.naver.com/akira215?Redirect=Log&logNo=1300015620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