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특집____
늙은 집 외 2편
김경성
슬픔도 오래 묵히면 붉은 꽃으로 피어날 수 있는가
달팽이관으로부터 시작된 실금이 문쪽으로 흘러가더니
문턱에서 멈추었다
이내 싸르락 소리를 내며 뜨거운 물이 아래층 천장을 타고 흘러갔다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속에서 나온 뜨거운 숨도 순식간에 틈으로 스며들어서
벽을 타고 같이 내려갔다
먹구름으로 달빛을 찍어가며 비가 내릴 때
사라진 달빛을 찾아서 찰진 바람이 몇 차례나 뒤척이다가 갔다
한쪽 눈이 먼 형광등은 빛을 좇아 껌벅거리고
늙은 애자를 감고 있는 전깃줄에서는 퍼드득 불꽃이 일며
집의 안과 밖이 순식간에 요동쳤다
늙은 집이 하혈을 했다
제 속에 고여있는 꽃물을 터트렸다
오래 익어서 검붉은, 그 꽃을 보여주려고
밤새도록 뒤척거렸다
미처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붉은 꽃물을 퍼내며
그 속에 가라앉은 것들을 손으로 읽고 눈에 들였다
비 내리는 밤,
늙은 집의 뱃고래에 붉은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보았다
참을 수 없었던 아주 오래된 말을 읊조리며 정적 속에서 피워올린, 꽃
먼 길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체인을 풀어놓은 채 생각에 잠겨있다
해진 의자 사이로 보이는 그의 등 가운데 움푹 들어간 상처의 흔적이 있다
그가 지나온 길의 지도는 이미 화석이 된 지 오래, 더는 길의 맥을 짚을 수 없다
제 속에 접어놓은 길을 펼치면 지구를 몇 바뀌나 돌 수 있을까 별까지 닿을 수 있을까
그중에 가장 오래된 길 하나를 꺼내자 스르르륵 먼지를 일으키며 신작로가 흘러나온다, 꽃이 피었다
다시 또 길 하나를 꺼내자 둥글게 말린 길이 떼구르르 굴러간다, 언덕 위에 팽나무를 한 번 감고 간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곧 시작이라는 것을 풀어진 체인이 말해준다
수많은 길의 흔적들,
겹쳐진 길마다 다른 기억의 무늬를 가지고 있다
체인을 끼우는 순간, 자전거는 새로운 길 하나를 바퀴에 감기 시작하더니 덜커덕거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내 속에 접어두었던 길 꺼내본다
수십 번 넘어졌다가 일어서기도 했던, 되돌아가며 주저앉기도 했던
웅덩이와 낭떠러지가 있는
나에게로 가는 가장 먼 길 초입에 막 들어섰다
실타래 같은 길을 문 새 떼가 내게로 오고 있다
늙은 악기의 노래
벽의 방에 잠을 비우고 숲을 들였다
나뭇잎에서 나뭇잎으로 건너가는 빗방울이 새소리를 타고, 나는 늙은 오동나무 아래 앉아서 이제 겨우 속잎 꺼내놓은 나무의 속을 들여다본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순한 말들을 옮기는 바람의 혀는 붉고,
산길에 모로 누워있는 늙은 오동나무 텅 빈 방에 애기똥풀꽃 노랐다
숲이 내어주는 길을 따라 짐승의 발자국을 좆는다
산꽃들 피어 출렁이는 숲에서
휘어진 허리를 길 위에 걸치고
이정표처럼 서 있는 늙은 오동나무
오래 익었던 시간의 악보들 가지 끝에 내다걸었다
악기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숲을 울린다
말문을 닫다
기억의 회로는 처음과 끝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 사이를 넘나들던 것 중에서 남아있는 시간의 흔적을 보여줄 뿐이다.
1.
내 손톱 밑 가시가 아프다고 말하고 있지만, 당신과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내가 웃고 있을 때는 우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울음을 멈추지 못하고, 울음 속에서 부유할 때에서야 우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흙담 아래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낭떠러지에서도 나무는 자라고, 움푹 팬 바위에서도 빗물이 고여 찰랑거린다고, 내 마음의 절벽에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곧 희망이다. 꽃이 지기를 기다리는 시간도 희망이다. 희망이라는 말은 입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바로 꽃이 된다는 것을 말문을 닫고 살면서 알게 되었다.
늙은 집에 세들어 살면서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젊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늙은 집이 내어준 손바닥만 한 화단이 피워올리는 라벤다와 쑥갓꽃의 향기에 젖고, 거실 가득히 들어오는 햇빛에 온몸을 던져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이었다. 늙은 여자의 가랑이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맨손으로 늙은 여자의 음부에 손을 넣어 하혈을 막았다. 그래도 거침없이 쏟아지는 붉은 물은 아래층 거실을 다 채운 후에 멈추었다. 얼마나 오래 참고 살았는지 천장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사막에서 컹컹 울어대는 여우 소리 같기도 했다. 늙은 여자는 밤새도록 수없이 많은 말들을 쏟아낸 후, 새벽 무렵에 제 말을 멈추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난 후부터는 늙은 여자의 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더는 눈물을 흘리지도, 하혈을 하지도 않고 추운 겨울이어도 늘 뜨거운 숨을 내어주었다.
2.
텍사스의 저녁노을은 나무 전봇대를 타고 밀려온다.
석유 몇 드럼을 부어서 불을 붙인 듯, 서쪽 하늘이 빨간색으로 물든다. 긴장한 나무 전봇대는 전선을 점점 더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그때쯤이면 부리가 날카롭게 생긴 바짝 마른 까마귀 떼가 전선에 앉는다. 이쪽저쪽을 바라보며, 붉은 하늘을 몇 장 뜯어다가 멕시칸음식점 간판에 내다걸기도 하고, 밀림 속인 듯 축축 늘어져 있는 양치류의 긴 줄기에 걸쳐두기도 한다.
오래된 대학의 교정에는 너무 낡아서 도저히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자전거가 있었다. 도서관이며 강의실을 다니던 학생의 길이었을 자전거, 페달을 밟으면 금세 가야 할 길을 찾아갈 것 같았다.
신작로에서 몇 번이고 넘어지며 자전거를 배웠던 때, 내 가슴에서 빠져나갔던 그 길은 지금 어느 산모퉁이를 돌아나가고 있는지…. 이제는 너무 늙어서 한없이 휘어지고 구부러진 나의 첫길은 지금 어디에.
3.
새벽 숲의 첫 음은 새의 혀에서 시작된다. 동틀 무렵이면 새가 새를 부르는 소리가 숲을 간지럽힌다. 산안개도 새의 혀에서 흘러나오는 말에 길들여져 저만치 물러서기 시작한다. 늙은 오동나무, 그의 잎은 너무 넓어서 의자인 양 깔고 앉아있게 한다. 보라색 오동꽃을 내다 걸 때는 한낮에도 해 질 무렵에도 나를 불러들인다. 푹 꺼진 그의 가슴 안쪽에는 해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난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을 열어보는 버릇이 생겨났다. 소리의 샘이 어디쯤 있을까?
늙은 오동나무처럼 나도 늙어서 내 가슴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깊은 방을 가질 수 있을까? 가슴 안쪽에 우물을 들인 늙은 오동나무가 깊은 소리로 나를 불러들이는 것처럼, 내 마음으로 빚어낸 소리로 세상을 물들일 수 있을까? 무엇을 내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
늙은 악기의 몸통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숲을 울린다.
나는 말문을 닫고,
단지 그의 소리를 눈으로 듣고 귀로 듣고 몸으로 듣는다.
늙음이란 곧 시간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우물이다.
김경성 /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으며 2011년 『미네르바』로 등단했다. 시집 『와온』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