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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은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지 않았다???
한글이 반포된 지 올해로 553번째 해를 맞았다.
우리 민족의 글자, 한글.
우리는 한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것일까?
중학교 국사(상)
현재 대부분의 책이나 교과서엔
한글은 세종과 정인지, 신숙주 등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상식은 정확한 것일까?
"한글 창제 당시 기록으로는 그런 증거가 하나도 없습니다."
- 이기문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창제했다고 하는 것을 모르는 시절에 그런 설이 나와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되었죠."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실록에 전혀 그런 말이 없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을 온 국민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니
세종이 아마 무덤속에서 통탄하고 있을 겁니다."
- 여증동 명예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한글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지 않았다!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나랏 말씀이 중국과 달라... '
많이 들어보셨죠,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훈민정음 서문입니다.
또 여기를 보면,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 여덟자를 만드노니...'
즉, '내가 스물 여덟자를 만드노니' 적고 있는데,
그동안은 별 생각없이 지나쳐왔는데,
만약 집현전의 학자들이 같이 한글을 만들지 않았다면,
이것은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뜻으로 기록한 셈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한글이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이
같이 공동으로 연구한 결과 완성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상반된 주장이 나오는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역사스페셜,
오늘은 한글창제와 관련된 하나하나의 의문점들을 되짚어보겠습니다.
먼저 한글이 창제된 직후
신하들이 강력한 반대상소를 올렸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겁니다.
바로 집현전 학자들이었습니다.
세종과 더불어서 한글을 창제한 이 학자들이
한글창제 이후 한글반대상소를 올렸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2. 집현전 학자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달(1443년 12월)
임금이 직접 언문 28자를 만들었다...
글자는 간단하고 쉬우나 변화가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른다"
- <세종실록>
한글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443년 세종 25년의 일이다.
실록엔 이것에 대해 매우 간략한 기록이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창제는 당시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료들이 집단으로 상소를 올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를 대표로
신숙주, 김문, 정창손 등 모두 일곱명의 학자들이 반대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집현전 소속으로
집현전내에서도 높은 관직을 차지한 원로학자들이었다.
이들이 상소를 올린 것은 무엇때문이었을까?
"언문을 굳이 만들어야 한다하더라도
마땅히 재상에서 신하까지 널리 상의한 후 행해야 할 것 인데...
갑자기 널리 펴시려 하시니
그 옳음을 알지 못하겠나이다."
이들의 상소를 통해
한글 창제가
세종의 독단적 행동이었음을 비난하고 있다.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최만리도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것을 아마 그때 와서 알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그 전에 그런 기록이 없구요,
집현전 하면 대제학은 하나의 명예직이고,
부제학은 실무책임자인데요.
그분이 그때 그런 상소를 올렸는데,
만약 미리 알았다면 벌써 그 전에 올렸겠지요.
이건 한글 창제를 전혀 몰랐다는 뜻이지요."
- 박종국 회장, 세종기념사업회
3. 신숙주, 성삼문은
한글 서적을 만드는 데만 참여했을 뿐이다!~
집현전의 최고책임자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몰랐다면
창제 과정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한글창제에 참여했다고 알려진 사람은
정인지, 최항, 신숙주, 성삼문 등 모두 일곱 사람이다.
반대상소를 올린 사람들이 대부분 원로라면
이들은 대부분 소장학자에 속한다.
집현전 7학사라고도 알려진 이들은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성연의 <용재총화>.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고령(신숙주), 성삼문에게 명하여 언문을 지었다."
집현전학자 중에서도
한글 창제와 관련해 가장 주목을 받는 인물은 신숙주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을 뿐아니라
한글 관련 사업에 가장 많이 동원된 사람이 바로 신숙주이기 때문이다.
신숙주 사당 - 충북 청원군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 5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이 같은 사실은 그가 한글 창제에 참여했을 거란 생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신숙주가 남긴 문집,
<보한제집(保閑齊集)>에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신숙주가 직접 쓴 글부터
당대 학자들의 그에 대한 기록이 실려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글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건
세종이라고 적고 있다.
신숙주가 한 일은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서적을 편찬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왕이 28자를 만들고 언문이라 했다.
궁중에 기관을 설치하고
문신을 선발해 책을 편찮케했는데
공이 혼자 내전을 드나들었다."
그러나 그동안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신숙주가 요동에 다녀왔다는 기록이다.
당시 요동에 유배 와 있는 중국의 음운학자 황찬을 만나기 위해
성삼문 등과 여러 차례 요동을 다녀왔다는 것이다.
"요동에 한림학사 황찬이 유배 와 있어
을축년 봄에 그를 찾아가 음운을 물었다.
그 후 13번이었다."
신숙주가 황찬을 만난 것은
훈민정음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질문한 것은
한글을 만드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이 아니고,
한자음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한자음을 질문하기 위해서 간 것이다.
한자음의 관한 이론이었던
성음학(聲音學)에 대해 질문하러 간 것이지,
우리 한글을 만드는 데
조언을 얻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연도를
조선왕조실록에 확인하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그렇다면 신숙주가 황찬을 만나기 위해 요동으로 간 것은 언제일까?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검색한 결과
신숙주가 처음 요동에 간 것은 1447년 1월,
한글이 만들어진 뒤 1년 2개월이후였다.
"성삼문, 신숙주, 그 또래가 참여했다고 하는데,
한글반포가 세종 25년 되었는데,
실제로는 성삼문은 반포 직전에 집현전에 들어왔고,
신숙주는 세종 23년에 집현전에 들어왔지만, 그 다음해 바로 일본에 갔어요.
이러니 한글창제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지요."
- 이기문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한글 창제에
집현전 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오히려 원로학자들은
한글창제 자체를 반대했고,
젊은 학자들도
나중에 '한글 서적'을 만드는데 참여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냈을 뿐이다.
결국 세종 25년에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그들의 공로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4. 한글은 언어학의 천재,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
"한글 스물여덟자가 만들어진 것은 세종 25년이고,
그로부터 한글서적이 만들어진 것은 3년뒤인 세종 28년이란 것인데,
만약에 집현전 학자들이 이 한글책을 만드는 데만 동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세종 25년에 만들어졌다는 한글 스물여덟 글자는
세종 혼자 만들었다는 것인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세종대왕은
조선왕조 500년간 뿐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화적 업적을 남긴 군주였습니다.
농업, 천문, 의학, 과학기술 등 이런 것을 장려해서
측우기, 해시계, 물시계, 간의, 혼천의 등 수많은 발명품을 만들어냈고
또 각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전문서적을 수백권씩 만들어낸 것도 바로 이 시기였습니다.
때문에 우리 역사에서
그가 재위했던 32년간보다
과학과 문화가 발달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세종'이라는 임금이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문헌들을 보면
그 일을 맡았던 실무자의 이름이 명확히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글만이 세종이 만들었다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훈민정음에 관한 책 중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것은
훈민정음 혜례본 원본(국보70호)이다.
바로 이것이 세종 28년 한글 반포 이후에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혜례본은
한글 글자 하나하나에 대한 해석을 담고 있는 책이다.
집현전 학자였던 정인지가 쓴
이 책의 서문 중에
한글을 만든 이에 대한 언급이 있다.
'전하창제(殿下創制)' - "전하가 지으셨다."
여기서도 훈민정음 스물여덟 글자를 만든 것은
세종이라고 밝힌 것이다.
"신하들이 만들었는데
관례에 의해서 임금이 한 것으로 표현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른 경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죠.
세종대왕 때 한글만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것도 많이 만들었는데
모두 만든 사람의 이름을 알리고 있죠.
한글의 경우
다른 사람이 만들었는데
공을 임금한테 돌리고 있다고 보다는,
오히려 한글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그 당시 사람들 생각이었기 때문에,
공을 임금에게 돌리기 위해
세종이 지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인 것 같습니다."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이번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재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
학문에 방해됨이 있고, 정치에 유익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 최만리 상소문
이에 대해 세종은 다음과 같이 반박을 한다.
"너희가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제 군주가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세종 스스로
한글을 만든 사람이 자신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언해본 훈민정음.
세종이 직접 쓴 글속에서도
한글창제를 다른 사람에게 명해서 만들겠다는 뜻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 같은 사실은 훈민정음 서문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한글 스물 여덟 글자는 자신이 직접 만든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내 이를 위하여...'
'만드노니...'
"'친제(親製)'라고 하는 거,
이건 훈민정음에서만 볼 수 있거든요.
다른 곳에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세종대왕이 '친제(親製)'를 할
배경과 능력을 가졌다는 거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거죠."
-이기문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세종은 어린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에 몰두해 건강이 나빠지기 일쑤였다.
이 때문에 아버지였던 태종이
책을 읽지 못하도록 책을 모두 빼앗았다는 기록도 있다.
세종은 이미 왕자시절에
학문에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종을 '학문의 대왕'이라 하지요,
어릴 때부터 임금이 된 후에도
늘 책을 보셨지요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요.
그러니까 세종께서 '나는 정사를 위해 안 본 책이 없다'고 하셨지요.
그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웬만한 책은 다 보신 겁니다."
- 박종국 회장, 세종기념사업회
세종은 언어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가볍게 옛사람들의 운서에 터무니 없는 언문을 붙이면 되겠습니까?"
이에 대한 세종의 대응은 단호했다.
"너희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과 자모가 몇이냐?"
세종 스스로 언어학에 대해
자신감과 해박함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세종의 물음에 대해
당시 이름난 집현전 학사들은 단 한마디도 댓구하지 못한다.
"최만리라 하는 분이 집현전의 대표였는데,
다른 말로 하면 당시 최고 학자였는데,
그를 앞에 두고 '당신이 이런 걸 아느냐?'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자신이 뛰어난 역량이 없다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한글을 만든 직후
세종은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도록 명한다.
이것은 방대한 중국음을 모두 한글로 옮겨적는 일이었다.
그런데 실무자였던 신숙주가 쓴 서문에 따르면
'聲(성)과 韻(운) 하나하나를 정함에 모두 상감의 재가를 받았다'고 했다.
이것은 음운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가 세종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동국정운> - 세종 때 신숙주, 최항, 박팽년 등이 왕의 명으로 편찬하여
세종 30년(1448)에 간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표준음에 관한 책으로,
6권 6책이며, 활자본이다.)
그렇다면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 집현전 학자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정인지가 쓴 훈민정음 혜례본 서문에서 그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왕이) 상세하게 해석을 덧붙이라고 명했다('命詳加解釋'-명상가해석)
세종의 명을 받아
한글 스물 여덟 글자의 원리와 용례를 해석하는 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록을 볼 때
집현전 학자들은 한글 스물 여덟 글자의 해석과
<동국정운>과 같은 한글 편찬 사업에 관여했을 뿐이었다.
그것도 세종의 지시를 일일히 받아서 일궈낸 일이었다.
"임금이기 때문에 학자라고 하는 사실이 가려지는데
세종대왕은 왕이면서 아주 뛰어난 언어학자였죠.
만약 왕이 아니었다면
언어학자로 세계사에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워낙 여러가지 일을 하셨고 임금이다 보니까 가려졌는데
한 일과 업적을 보면 세종대왕은 분명 아주 뛰어난 언어학자셨죠."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세종대에 이뤄진 한글 관련 최고 책임자,
그것은 바로 당대 최고 언어학자였던 세종 자신이었던 것이다.
5. 한글 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다!!!~
"우리가 훈민정음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사실은 두 권의 책이 하나로 묶여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앞에 있는 책은 훈민정음이라고만 되어있고,
뒤에 있는 책은 훈민정음 혜례라고 적혀 있지요.
즉, 용례를 풀어서 기록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앞의 부분은 원래 훈민정음이고,
뒤의 부분은 그 해석을 하여 붙인 것이 되는 셈이지요.
이 두 권을 가만히 살펴보면
글자꼴도 서로 다릅니다.
앞부분이 글자가 더 큽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앞, 뒷부분이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세종 25년에 작성된 어제 훈민정음,
즉 세종이 직접 만든 훈민정음이고
뒷부분은
세종의 명을 받아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집현전 학자들이 동원된 것은
글자가 다 만들어진 후에 해설서를 만들기 위해서였고,
한글 스물 여덟 글자는 세종 혼자서 만들었다는 그런 이야기가 가능해집니다.
세종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였다고 하더라도
혼자서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만약 혼자서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말로 쓰이기까지 무수한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말에 맞게 하기 위해서는
수없는 실험도 해야 할 것이고 사용도 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을 세종이 혼자서 해결할 수 있었을까요?
혹시 세종에게 우리가 모르는 협력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훈민정음 창제를 둘러싸고 떠도는 이야기는 많지만
그중 믿을 수 있는 이야긴 거의 없다.
그런데 한 가문에서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고 하여 찾아가 봤다
바로 세종의 둘째 딸, 정의공주와 관련된 이야기다.
죽산 안씨 대종회
"우리 어릴 때부터 들은 이야기인데
정의공주가 한글을 창제하고 난 후에
민간에 실험을 거치는 데 정의공주가 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 안국승(73세), 대종회 부회장
한글을 만들었다고 이야기되는 정의공주는
죽산 안씨 가문으로 출가한다.
그런데 이 집안의 족보에
정의공주가 세종의 한글창제를 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이 족보를 보니까,
세종대왕께서 한글의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대군들에게 하명을 하여 풀어라 했는데 대군들이 아마 못풀었던 모양입니다.
그것을 정의공주에게 풀어보라고 했는데
정의공주가 풀어서 올리니
세종대왕께서 극찬을 하시고
노비를 수백구를 내리셨다고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안명국(61세), 대종회 사무국장
정의공주가 풀었다는 변음과 토착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다만 이것이 민간에서 사용하던 언어나 사투리 등이 아닐까 막연히 추정해볼 뿐이다.
한글창제 과정에서
정의공주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록은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서
세종의 직계가족들이 참여했다는 중요한 단서다.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시행된
한글서적 편찬사업에도
세종의 가족들이 깊숙히 개입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글창제후 가장 먼저 실시한 사업이
바로 운회를 번역하는 것.
'古今韻會擧要(고금운회거요)'
이 일에 왕자들이 동원된 것이다.
"세종때 한글창제 과정에서
나중에 문종이 되는 큰아들과 수양대군이 참여하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그 증거로 세종 25년 한글창제를 반포를 하고,
바로 그 다음해 봄, 두달뒤에 훈민정음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하는데
그때 총책임자를 세자를 시켰거든요.
문종하고 세조를 이 사업에 참여시킨 것은
그들이 이 사업의 내용을 알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때 처음 집현전의 젊은 학사 몇사람이 참여를 했고
그리고 나서 최만리의 반대상소가 나옵니다."
- 이기문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운회를 번역하는데
세자와 진양대군(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용이 그 일을 감독했다."
이들이 번역작업에 참여한 것은 왕의 아들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한글에 대해 잘 알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이들이
세종이 한글 스물여덟글자를 만들 때 도왔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세종의 세 아들이 모두 그 당시에
학식에 있어서도, 음운에 있어서도, 글씨에 있어서도 다 뛰어났지요.
어느 기록에는 심지어 세종과 문종이 같이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고,
또 하루에 한,두번씩 대군들과 같이 식사하면서
음운에 대해 주고받는 대화의 기록이 나옵니다.
또 나중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어
수양대군에게 <석보상절>을 만들게 하지 않습니까.
그분이 그런 거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만들 수 없었겠지요."
- 박종국 회장, 세종기념사업회
(* <석보상절(釋譜詳節)> - 1447년(세종29년)에 조선에서 만들어진 석가모니의 일대기이다.)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 성삼문 지음
문종과 관련해 <직해동자습>이란 책의 서문(序文)에 재밌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것은 신숙주와 함께 한글 관련 사업에 참여한 성삼문이 쓴 글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성삼문은 이 책에서
한글을 만든 것이 세종과 문종이라고 적고 있다.
이것을 뒷받침해주는 다른 기록은 없지만
한글 창제에 왕자들이 참여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기록이다.
"세종과 문종이 훈민정음을 지으시니
천하의 소리가 다하지 못함이 없었다."
6. "어리석은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못해..."
세종의 애민, 한글 창제!~
그렇다면 세종은 왜 한글을 만드려고 했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그러나 세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
그것이 바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세종 16년 간행)>다.
이 책이 만들어진 것은 세종 10년에 있었던 일 때문이다.
진주사람 김화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세종은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 자책하며
효자, 충신, 열녀의 내용을 담은 이 책을 간행한다.
이렇게 만든 삼강행실도는
내용과 함께 그에 맞는 그림을 그려넣었다.
글을 모르는 사람도 그림을 보고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면서도 세종은 문자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이
그림만으론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어리석은 백성이 알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림을 붙였으나...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해
책을 나누어 주어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어찌 그 뜻을 알아 감동할 수 있으리오."
- 세종 16년 4월.
문자 창제 필요성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다.
그리고 십년뒤
훈민정음 서문에서
'어리석은 백성'과 '문자'란 말이 다시 나온다.
<삼강행실도>에 백성이 아는 문자를 붙이고 싶었던 세종.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사업은 중단되고
훗날 성종때 이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한글 창제는
세종이 자식들을 데리고 십여 년간 비밀스런 연구를 한 결과였다.
7. 양반 지배층의 특권, 한자!~
우리말은 오랑캐의 말, 중국이 알까 두려워!~
"이렇게 보면 결국 한글은 세종이 신하들 몰래 만든 프로젝트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은 이렇게 비밀리에 한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일까요?
왕조국가에서 왕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백성들의 생사여탈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한 나라의 임금이 무엇이 두려워 이렇게 비밀리에 만들었을까요?
또 이렇게까지 하면서 문자를 만들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한번 최만리의 상소를 드러다보겠습니다."
한글 창제 이후 세종은 큰 곤경에 처한다.
찬성하는 이는 없는 반면,
가장 신임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최만리 등은 상소를 통해
왕의 행동은 사려깊지 못한 것이라며 강력하게 비난한다.
이들의 태도와 항변은 매우 당당한 반면
오히려 세종이 변명을 하는 형세였다.
"어찌 옛날부터 쓰는 폐해없는 글자를 고쳐
따로 낮고, 천하고, 속된 말인 이익이 없는 글자를
새로 만들어 쓰겠습니까?"
- 최만리 상소문 중
이들이 감히 세종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의 문제 때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중국에라도 알려지면 어떻게 되겠냐고
최만리는 걱정하고 있었다.
"그 당시 학자들의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태도였다고 볼 수 있겠죠.
상류사회의 문자생활은
중국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글을 만든다는 것은
그 사람들, 지배층에게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최만리의 상소에도 나오지만
오랑캐가 되려고 하는 것이라고 반박하지요.
반대를 한 게 당시 지배층 인식으로는 당연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 이기문 명예교수, 서울대 국문학과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우리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당시로선 위험한 생각이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사대관계를 가진 조선이
이미 쓰던 중국 한자를 두고 따로 국어를 가진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드릴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령을 하면 그들이 받아들였겠어요.
모두 다 반대를 했겠지, 그러니 한글창제는 비밀리에 할 수밖에 없었어요.
상상을 한 번 해보세요. '전하 절대로 아니 됩니다' 불복을 했겠지요."
- 여증동 명예교수, 경상대 국문학과
만약 한글 창제전 신하들의 반대가 있었다면
한글창제는 불투명했을 것이다.
이 같은 추측을 하게 하는 것이 바로 내불당 사건이다.
세종이 궁궐내에 법당을 지으려고 하자
신하들이 대대적으로 반대를 하고 나선다.
나라의 국교가 성리학, 즉 유교인데
왕이 불교를 숭상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엔
당시 신하들의 반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집현전학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업무를 중단하고 모두 집으로 가버렸다.
이에 세종은 당시 재상인 황희를 붙잡고
이를 어쩌면 좋은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세종이 눈물을 흘리며 황희에게
'집현전 여러 선비들이 나를 버리고 갔으니 어쩌면 좋겠소."
아무리 임금이라 하더라도
명분을 내세운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우기 글 모르는 백성을 위한 한글 창제는
양반의 이익과는 상반된 것이었기에
반대는 더욱 거셀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그 당시 최만리 같은 양반지배층들은
한문을 배워서 한문으로 문자생활을 하고,
그것이 다른 일반 백성들과
자신들을 구분해주는 특권과도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쓰는 문자를 가질 필요가 있겠느냐,
자기 고유의 글을 가지고 있는
일본이라든지, 여진, 서하 이런 나라들을 '오랑캐'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게 상소문에 나오지요.
한문을 쓰는 사대부 입장에서는
우리 문자가 필요없다는 것이고
세종은 글을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 입장에서 보니까
우리 문자가 필요하다라는 의견대립이 생긴 것이죠."
- 강창석 교수, 충북대 국문학과
내불당 사건 때와는 달리
세종은 반대론자들에 대해 매우 단호하게 대처한다.
반대상소를 올린 집현전 학자들을 전원 하옥시키면서까지
한글의 사용을 추진하려 했던 것이다.
한글 창제 이전에 이 사실이 신하들에게 알려졌다면
한글 탄생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의 명분에는 어긋나는 한글 창제,
한글은 세종이 신하들을 따돌리는 비밀작업으로 추진된
거대한 비밀 프로젝트였던 것이다.
8. 한글은 '옛글자'를 참고하여 만들었다???
- 일본 신대문자, 고조선 가림토문자, 돌궐문자...'속용문자'도 있었다!~
"한글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을 거치고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세종은 학자들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새로 스물여덟글자를 고안해낼 수 있었을까요?
훈민정음의 서문과 실록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字倣古篆(자방고전)' - 옛글자를 참고했다.
이 한 글자 때문에
한글의 기원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한글 창제 당시
우리 주변에는 여러 문자들이 있었습니다.
중국 한자,
한자를 변형한 거란, 여진문자, 몽고의 파스파문자, 일본 가나문자...
그 중에서도 몽고문자를 두고
조선시대부터 우리 한글의 기원이 되는 글자가 아닌가 추측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비슷한 글자가 거의 없지요?
그 중 몇 글자가 비슷하다고
한글의 모태라고 보기에는 무리인 거 같습니다.
만약 한글이 어떤 문자를 참고했다면
가장 가능성이 있는 문자는 어떤 문자일까요?
한글과 가장 닮은 문자를 찾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본 남단에 위치한 시코쿠항 이와즈.
이곳에 한 어귀에 작은 비석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자가 한글과 관련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비석엔
마치 한글을 풀어쓴 것 같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일본에선 이 문자를 '신대문자(神代文字)'라 부른다.
일본에 한자가 들어오기 전,
'신대(신들이 살았더 시대의 문자)에 사용하던 문자'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신대문자 시비(1862년 건립)
"이것이 한글의 모형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글이라고 합니까? 나는 잘 모릅니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 온 일본의 신대문자라고 배웠다.
- 가가와(63)
북한 학계에서는
바로 이 문자가 고조선 문자로 일본에 건너간 것이라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신대문자는 현재 일본 전역에 흩어져있다.
주로 조상신을 모시는 신사 등에 많이 남아있는데
그 분포 지역만도 백여 곳이 넘는다고 한다.
한글과 꼭 닮은 이 문자를 일본사람들은 어떻게 발음하고 있을까?
"일반적으로 '감나나가라'라고 읽지만
정식으로는 '가무나가라'입니다.
신들이 걷는 길, 바른길을 우리들 인간도 함께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 후쿠다 신주
놀랍게도 한글과 똑같이 발음되고 있었다.
"한글을 읽을 수 있습니까?"
"못 읽습니다."
일본사람들은 신대문자를
과거 조상들로부터 전해내려오는 문자라고 여겨 매우 신성시여기며 숭상하고 있다.
일부 신사에서는 이 글자 자체를 신 대신 모신 경우도 있다.
신대문자엔
그 자체로도 신령스런 기운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의 생활속에서도
신대문자의 자취는 쉽게 찾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부적이다.
부적에는
아직도 신대문자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신대문자 인장이라,
신대문자에는 두 개의 서체가 있습니다.
초서체와 친서체, 그리고 이것은 신사의 마크입니다.
뜻은 신이 세가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신대문자의 흔적은
비석, 청동검, 거울 등의 물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문자가 언제부터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한글 이전부터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인에게 신대문자를 최초로 소개한 것은
1819년 출간 <新字日文傳(신자일문전)>을 통해서였다.
매우 여러 종류의 신대문자들이 소개되었는데
일부에서는 이 책의 저자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 신대문자를 두고 많은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통 국어국문학계에서는 한글을 가지고 만들어서 신도정신에 많이 사용했고,
그리고 그 책은 위작이라 하고,
그리고 신사의 신도들은 신대의 문자, '신이 준 말' 바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 김문길 교수, 부산외대 일어과
신대문자를 가지고 진위논란이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부적속에도
고대 문자가 씌여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전해내려왔다는 부적의 문양속에서
한글과 유사한 글꼴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여기 다른 것은 읽을 수 없지만
'ㅁㅁㅁ ㄹㄹㄹ'
이렇게 미음과 비읍을 세 번 써놓은 것은
'물'을 세번 써놓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밝혀지진 않았지만
이 부적속에 있는 글자는 우리 조상들이 쓰던 글자들이고,
부적속에 많이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지요.
왜 부적속에 그런 글자들이 남아있는가 하면
조상신을 부른다든지, 하늘님을 부를 때, 또 북두칠성님을 부를 때,
그 당시, 그 시대에 썼던,
그 조상신이 알아볼 수 있는 글자, 소리로 불러야 오실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부적에는 영어로 쓴다든가 다른 언어로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조상들이 보고 읽을 수 있는,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쓰는 게 상식이죠."
- 김민기, 부적연구가
우리나라에 고대부터 문자가 있었다는 주장은
옛날부터 있어온 것이다.
연대를 알 수 없는 책속에는
옛날부터 사용한 고조선 문자라며
'신지문자'라는 것이 소개되어 있기도 하다.
'古朝鮮神誌字(고조선신지자)'
그런데 이 신지문자의 글꼴도
부적속에서 종종 발견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남해 양하리 각석을 일러
고대 우리 조상들이 쓰던 그림글자라고도 한다.
가장 최근에 소개되고 있는 것은
<환단고기(桓檀古記)>속의 가림토글자다.
모두 서른여덟글자로 이뤄져 있는데
글자 모양이 한글과 거의 유사하다.
때문에 일부에선 한글은 이 글자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부에선 이 가림토문자가 실제 존재하며 그 물증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가림토문자의 증거로 제시되기도 하는 이 탁본.
이 탁본의 글자가 고조선시대 과연 우리가 쓰던 글일까?
"이 탁본의 원래 소장자가 누구냐면
서울대학교 교수로 지내신 이상백 교수님입니다.
1930년대 학생시절에 만주지역에서 탁본하셨다고 합니다.
이교수님이 말씀하시길 '이 글자는 한글의 어머니글자'라고 하셨답니다."
- 정도화 교수, 경상대 미술교육과
탁본을 살펴본 결과 그 가운데에는 한글과 유사한 글꼴들이 더러 있었다.
정말 이것이 가림토문자, 원시 한글문자일까?
동아시아 고문자를 연구하고 있는
서울대 국문과 송기중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이 문자에 대해 알아봤다.
그 결과 이것은 가림토문자가 아니었다.
이미 어느정도 해석까지 마친 돌궐문자라고 했다.
그런데 이 돌궐문자는 동아시아 소리문자에 큰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돌궐족들이 9세기, 10세기에 쓰던 위글문자를,
몽고가 칭기스칸 등장 이전인 12세기말에 받아드려 썼던 걸,
16세기 만주족들이 다시 받아들여 썼어요.
그래서 이건 만주어죠."
- 송기중 교수, 서울대 국문과
이처럼 동북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뜻글자외에도
독자적인 소리글자의 전통을 잇고 있었다.
우리 민족과 언어학적 계통을 같이 하는 민족들.
그렇다면 우리 민족에게도 소리글자의 전통이 있었던 것일까?
이와 관련해 신경준이 지은
<훈민정음운해>에 다음과 같은 견해가 전한다.
"동방에 옛부터 속용문자(俗用文字)가 있는데
그 수는 갖추어져 있지 않고 그 꼴은 법이 없어..."
이것은 우리나라에 한자 이외에
민간에서 사용하는 문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만약 세종 당시 이런 문자가 있었다면
백성을 위해 한글을 만들었던 세종이
이 문자를 참고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방고전-글자는
고전(옛 글자)을 모방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서도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세종이 참고했다는 옛글자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9.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한글은!~,
인체 발음기관을 본떠 만든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언어!~
"'자방고전'이라는 글에서 명시하듯
세종이 한글을 만드는데 무언가를 참고했다는 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참고했다는 옛 글자가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를 만드는데 끼친 영향은 아주 미미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훈민정음 혜례본 때문입니다.
훈민정음 혜례본은 지금 이 한 권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1940년대 안동의 한 민가에서 발견된 이 혜례본으로,
이전까지 있었던 훈민정음의 제작원리를 둘러싼 수많은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의 제작원리가 이 책속에 적혀있었기 때문이지요.
실로 500여 년만에 글자 한자한자의 제작원리가 밝혀지게 된 것이죠.
혜례본을 통해본 훈민정음 스물여덟글자의 독창적인 제작원리!
그 비밀의 세계로 들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훈민정음의 제작원리는 오랜세월 미궁속에 잠들어 있었다.
때문에 어떤 이는
세종이 문을 바라보다가
문틀의 모양에서 '기역, 니은' 등 만들게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은
훈민정음 혜례본이 발견되면서
터무니없는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한글의 글자꼴이 무엇을 본떴는지
명백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본떴다."
이처럼 다섯개의 기본음은
발음기관의 생김새에서 본따 만들었던 것이다.
"기역글자가 왜 그런 모습을 가졌느냐 하는 거이죠.
그것은 발음할 때 혀의 모습을 본떠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인류 공통이죠.
동양사람, 서양사람, 백인, 흑인,
누구나 '기역' 발음을 할 땐 발음기관이 그렇게 된다는 거죠.
문자를 만들 때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거
그게 아주 독특한 일이고,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 이현복 교수, 서울대 언어학과
한글의 글자꼴이 발음기관을 얼마나 정확하게 본떴는지
컴퓨터를 통해 사람의 발성기관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이것이 맞다면
세종은 이미 500년 전에
발음기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 가, 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모양을 본떴다'는 혜례 설명 그대로였다.
(ㄱ象舌根閉喉之形-ㄱ상설근폐후지형)
'나, 나, 나...'
'ㄴ은 혀가 위 입몸에 붙는 모양을 본떴다'
(ㄴ象舌부上?之形 - ㄴ상설부상빙지형)
'ㅁ은 입모양을 본떴다.'
(ㅁ象口形 - ㅁ상구형)
'ㅅ은 이빨모양을 본떴다'
(ㅅ象齒形-ㅅ상치형)
'ㅇ은 목구멍모양을 본떴다'
(ㅇ象喉形 - ㅇ상후형)
나머지도 혜례 설명 그대로였다.
그 외의 문자들은 매우 간단한 원칙에 의해 만들어지도록 했다.
'다섯글자를 기본으로 삼고, 소리가 점점 강하게 되면 획을 더 한다.'
"발음기관을 딴 'ㄱ'을 기본글자로 만들고
거기에 획을 하나씩 더 그어서 'ㅋ'소리를 만들고
'ㄱ'을 두번을 더해서 'ㄲ'소리를 만들거든요.
ㄱ -> ㅋ -> ㄲ,
여기에 기본획 'ㄱ'이 다 있잖습니까?
때문에 시각적으로 누구나, 어느 민족이나,
하나를 배우며 셋을 알게 되는 거죠.
하나를 알면 열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여기에 적용되죠."
- 이현복 교수, 서울대 언어학과
사람이 내는 기본음은 다섯가지로 구분된다.
여기에 획을 추가해 나머지 글자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이 경우 동일한 계열의 소리는
동일한 글자꼴을 갖게 됨으로써
한글은
소리와 모양이 일치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문자가 되는 것이다.
牙音(아음), ㄱ, ㅋ,
舌音(설음), ㄴ, ㄷ, ㅌ, ㄹ.
脣음(순음), ㅁ, ㅂ, ㅍ,
齒音(치음), ㅅ, ㅈ, ㅊ,
喉音(후음). ㅇ, , ㅎ
"15세기 세종때에 오면,
세종이나 학자들이 우리나라가 음운이론에 대해 아주 밝게 알게 됩니다.
소리를 낼 때
혀와 입술이 어떻게 움직여 소리가 나는지 잘 알게 되죠.
한글이 고도로 발달된 발성기관을 본떴다는 것은
우리가 고도로 발달된 음성지식을 가지고 나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 권정선 명예교수, 대구대 국문학과
한글에 대한 외국인들의 평가는 어떨까?
세계적 과학잡지 '디스커버'는
지난 94년 문자에 대한 특집 기사를 실었다.
이 글은 한글을 설명하는데 많은 지면을 할애했을 뿐아니라
최상급의 표현을 써서 한글을 극찬하고 있다.
과학잡지 '디스커버' 94년 7월호.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글자'
다른 문자와 비교해도 한글의 우수성은 탁월한 것이다.
미국인 학자로 한글을 연구하고 있는 레드야드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한글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문자학적 사치!'
'세계 문자 역사상 가장 진보된 글자!'
- 레드야드 교수, 1146년 한국 언어 개혁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문자학적 사치!
그것은 천재 언어학자 세종의 외로운 노력이 가져다준 고귀한 선물이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비록 오랑캐가 된다고 하더라도
백성이 글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의지.
한글 창제는 극소수 양반만 누리던 문자의 특권을
모든 백성에게 나눠준 세종의 거룩한 문자혁명이었다.
"한글은 어느날 문득 떠오른 영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언어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치밀한 연구와 끊임없는 실험을 거쳐 이룩한 과학적 발명품인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한글을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을 받게 되고
집현전학자들과 공동으로 만들었다는 오해를 낳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세종의 단독 발명을 부인할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종이 집현전학자들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몰래 노력하고 연구한 흔적들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글이 세종과 집현전학자들의 공동창작이라고,
혹은 세종은 명령만 내리고 실제로는 집현전학자들이 만들었다는
우리의 견해는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쉽게 말하여 사실은 실담어(산스트리트어)에 능통한 신미대사를 통하여 비밀리에 한글 창제작업을 구상하여 실행하고 있었으며 당시 그를 지목하면 재상들과 집현전 학자들의 반발이 거세고 그의 생명까지 위태로움에 처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사전에 신미대사가 세종임금이 책임지는 것으로 훈민정음 반포시에도 정인지로 하여금 서문을 쓰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월인천강지곡,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이 신미대사의 작품임에도 거의 모든 저자가 세종, 세조임금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역사스페셜을 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