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성장의 허구
개혁교회이루기
한국 교회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는 치명적이고 이단적인 생각은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 된다는 생각'입니다.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을 본능적으로 만들고 신자들의 삶을 파괴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보수적이고 현실적인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는 기복주의적 설교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만듭니다. 부담 없이 만들어줍니다.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입니다.
서울 강남 중심지에 있는 교회에서 새벽기도회 주제가 '대대로 축복받자'였다고 합니다.
자기 세대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까지 복을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 주제에 감동했겠습니까.
욕망에 불을 지르는 기복주의 메시지는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인간은 끝없는 욕망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고, 더 많은 소유만을 지향하는 집단은 미친 집단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갈라디아서에 인간 내면 가운데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치열하게 싸운다고 말하고,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탐욕적인 인간이 어찌 성경의 사람이며, 성령의 사람이겠습니까?
대대로 복 받는 게 능사인가
성경 가운데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복음서, 베드로서 등은 초대 교회의 고난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기 위해서 씌어졌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점쟁이 책이 아니라,
기독교의 위대한 역사 철학이 담겨있는 책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세계적인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인 콜로세움이라는 원형 경기장이 있습니다.
무려 5만 명을 수용하는 세계적 건물입니다.
이곳에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짐승의 밥이 되고, 불타는 십자가 위에서 죽기도 했습니다.
또 로마에는 카타콤이라는 지하 동굴이 있습니다.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파여진 이 동굴은 총 길이가 450km나 된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의 탄압 속에서 성도들이 얼마나 고난이 심했던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초대 교회도 세례를 받으려면 가문에서 쫓겨나고, 집에서 쫓겨나고, 동네를 지나가다 돌에 맞는 것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물며 세상적인 복이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교회는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로 가득 차있습니다.
미신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신앙으로 중독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 이름으로 중독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나라 반세기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리영희 선생은
'내가 왜 종교인이 아닌가'라는 글에서
'지금 우리나라 종교에는 치사량 이상의 마약이 들어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27절에 보면 '허다한 무리들이 함께 갈 새 예수께서 돌이켜 가라사대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원초적 본능'에 충실한 설교
그런데 오늘날 신자라고 자칭하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등에' 지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에' 매고 따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당시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놀랍게도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얄팍한 술수로 그들의 욕망을 부채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설교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사람의 본능에 호소하고 원초적 욕망에 불을 지르고 있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어찌 진리일 수 있습니까?
진리는 부자와 성공한 자를 만들 수도 없거니와 성공한 자의 것만이 아닙니다.
아파트 값이 오르면 좋아할 수는 있지만,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없는 자, 소외된 자들을 성공주의 이름으로 부끄럽게 만들고 있으니
어찌 이런 일이 진리의 전당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진리의 무게가 어찌 이다지도 가볍습니까?
상업주의·실용주의가 편만한 세상에서 교회마저 장단을 맞추고 있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로마서 8장17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또 18절에서는 '현재의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12절에서는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의 영광을 얻기 위해 필연적으로 적극적이고 선택적으로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고,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이 땅에 독재와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가운데
오히려 교회가 성장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외국인들이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고 있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입니까?
해리 블래마이어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사고해야 하는가>에서
'성경적으로 산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충돌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만이 충성의 대상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노라
나는 사람이 제 아버지와 맞서게 하고 딸이 어머니와 맞서게 하고
자기 시어머니와 맞서게 하려고 왔다'(마태복음 10:34~35)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가 성경적으로 살려고 한다면
세상의 세계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고,
그것을 저항이라고 표현할 수도,
고난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잘살 수도 있고,
출세할 수도 있고, 부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복의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한 사고방식입니다.
성도란 본질적으로
고난의 삶, 저항하는 삶, 혁명하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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