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원래 1977년작 <스타워즈> 에피소드 4 개봉 20주년이던 1997년에 필자가 PC 통신 천리안 영화 동호회 SCREEN 게시판에 '<스타워즈>에 대한 잡기(雜記)'라는 제목으로 올렸던 글을 version up 하여 동년 8월, 웹진영화 제2호의 FILM FATAL 섹션에 역시 같은 제목으로 실었던 것이다. 따라서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협 The phantom menace>이 개봉되었던 1999년 이전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혼란을 일으키게 할 만한 표현이 몇 군데 있다. 예를 들면 '<스타워즈> 3부작(trilogy)'이라는 표현이 그렇다. 이는 1부 <스타워즈 Star Wars: 새로운 희망 a new hope>(1977), 2부 <제국의 역습 The empire strikes back>(1980), 3부 <제다이의 귀환 Return of the Jedi>(1983)을 총칭하는 말인데, 이 1, 2, 3부는 에피소드 1이 개봉된 1999년 이후에는 각각 에피소드 4, 5, 6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서로 혼동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요즘은 기존 3부작(즉, 에피소드 4, 5, 6)을 특별히 구별해서 언급하고자 할 때 '오리지널 3부작'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글을 읽다 보면 '97년판 <스타워즈> 3부작'이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이는 에피소드 4 개봉 20주년인 1997년을 맞이하여 원작자이자 감독이자 제작자인 조지 루카스가 오리지널 3부작의 일부 씬을 보완하여 재개봉한 이른바 '특별판 Special Edition'을 의미한다.
1999년 개봉한 에피소드 1 <보이지 않는 위협>을 보고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감도 컸던 게 사실이다. 나이를 먹은 탓인지, 초등학교 6학년이던 1978년 당시 종로 피카디리 극장(그 때는 지금처럼 개봉관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의 개봉관은 -내 기억이 맞다면- 피카디리 극장 한 군데 뿐이었다)에서 경험했던 에피소드 4의 그 엄청난 시각적 충격을 에피소드 1에선 전혀 맛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컴퓨터 그래픽을 기반으로 한 소위 특수 시각 효과 기술은 벌써 20년 전에 그 전반적인 토대가 완성됐던 게 아닐까 싶다. 게다가 어떤 의미에서 에피소드 1이 담고 있는 얘기는 이미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이 에피소드 4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똑같은 배경(황량한 사막 행성 타투인) 하에서 아버지 애너킨 스카이워커(에피소드 1)와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에피소드 4)는 동일한 여정을 걷게 되니 말이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아버지는 악의 구렁텅이로 추락하여 다스 베이더라는 악의 화신으로 변하지만,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는 다행히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고 오히려 종국엔 아버지를 악에서 구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구조가 서로 유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미국의 저명한 비교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도 지적했듯이 아마도 <스타워즈>의 근간이 '영웅 신화'라는 인류 공통의 무의식적 원형 구도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원작자인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의 구상을 위해 조셉 캠벨의 영웅 신화 연구서인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1949)을 탐독했으며, 캠벨 생전에 그를 캘리포니아에 있는 자신의 목장(ranch)으로 초대하여 함께 오리지널 3부작을 관람하며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루카스와 캠벨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셉 캠벨과 빌 모이어스의 대담집인 <신화의 힘 The power of myth>(1988) 서문을 읽어 보면 된다. 그리고 <스타워즈>가 영웅 신화와 어떤 식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인지 간단히 알고 싶다면 애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통독할 필요 없이 <신화의 힘> 제5장 '영웅의 모험'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과 <신화의 힘>은 두 권 모두 필자가 좋아하는 이윤기 님 번역으로 국내에 출간돼 있다.]
개인적으로 아래의 글은 필자와 필자의 아버지 사이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에 쓰여진 글이어서 그 당시 필자의 사적(私的) 상황이 많이 반영돼 있다. 굳이 전문 용어를 써서 설명하자면, 당시 상황에서 필자는 영화 속의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동일시 identification'라는 감정을 품었던 것이고, 반면 다스 베이더에겐 필자의 아버지와의 동일시 과정을 거쳐 일종의 '투사 projection'라는 감정을 가지게 됐던 것이라고나 해야 할까? 그리고 그러한 감정들이 글쓰기라는 작업을 통해 나름의 방식으로 '승화 sublimation'된 것일 테고. 그래서 이 글만큼은 이번에 교정 작업을 하면서 고칠 게 거의 없었다. 부족하나마 나의 생생한 고통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2000/05/29.
A long time ago in a galaxy far, far away…
<스타워즈 Star Wars> 3부작에 대해 지난 20년 간 쏟아져 나온 좌파 진영의 비판들은 대체로 다음 몇 가지 범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파시즘과 이에 근거한 폭력의 옹호 내지 정당화; 反혁명과 구질서의 회복과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 성차별과 인종차별과 계급구조의 고착; 가부장제적 아버지의 복권;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 즉 기회 균등과 선택의 자유와 개인주의적 영웅주의에 대한 신화의 신화적 재확신; 할리우드 영화 산업을 거대화시킨 주범 등등…. 그간 하도 지겹게 들어온 것들이라서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들이지만, 어쨌든 이들 좌파의 비판은 적어도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존중받을 만한 가치가 있기는 하다. 영화가 갖는 오락으로서의 모든 부정적 속성에 대한 의미 있는 반론은 오로지 이들 좌파의 시각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글에서 좌파가 거론하고 있는 위의 이슈들을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아가 이들 좌파의 주장들에 굳이 정당성을 부여해 줄 생각도 내겐 없다. 영화 보기의 출발점과 종점이 모조리 좌파의 '정치적 해석'(권력 의지의 한 표현이라는 점에서)에 포섭돼 버린다면 그 또한 괴롭고 짜증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게 사실 심각해 봤댔자 얼마나 심각할 수 있겠는가? 영화 보기란 일종의 유희다. 유희가 꼭 심각한 그 무엇이 되어야만 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사실, 좌파의 <스타워즈> 3부작에 대한 어느 정도는 소모적이라 할 수 있는 준동(?)은 상당 부분 이 영화의 원작자이자 감독이자 제작자이기도 한 조지 루카스(George Lucas, 1944- )에게 그 일차적 책임이 있다. 베트남전 시대에 캘리포니아에서 청년기를 보낸 루카스는 그 당시 수많은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反문화 운동의 세례를 듬뿍 받아 좌파 영화인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물론 당시 반문화 운동과 좌파가 서로 조직적인 정치 연대를 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스타워즈>의 탄생을 위해서는 다행이게도 당시 평균 미국인들이 갖고 있던 모럴 수준을 크게 뛰어넘지 않는 건전한(?) 상식의 소유자로 남았다. 즉, 최소한 심정적으로라도 보수주의자라는 것이다. 그의 이 심정적 보수 성향이 고스란히 반영된 영화가 바로 <스타워즈>라고 본다면, 좌파의 <스타워즈>에 대한 반발은 결국 조지 루카스로 대표되는 미국인의 평균 모럴에 대한 반발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아닌게아니라 루카스는 자신이 <스타워즈>를 만든 주된 이유가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세대가 공유했던 종류의 것들, 즉 성실/정직, 건전하고 멋진 삶과 같은 것들을 제시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Time>, 1997. 3. 17, 47쪽].
1944년생인 루카스가 자신의 세대가 공유했던 것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가치관은, 그가 감독한 두번째 장편 영화인 <청춘 낙서 American Graffiti>(1973)를 통해서도 어느 정도 형상화되고 있다시피, 아마도 루카스가 청소년기를 보낸 아이젠하워 시대에 뿌리를 둔 미국 백인 중산층의 모럴을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스타워즈>가 개봉되던 1977년 당시의 젊은이들이 상실해 버렸다고 보고 있는 과거의 '선한 가치들'-앞서 언급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로부터 비롯된 뿌리 깊은 신화들 말이다. 여담이지만, 이에 대해 동년배인 데이빗 린치(David Lynch, 1946- )는 <블루 벨벳 Blue Velvet>(1986)을 통해 루카스와는 정반대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으니 상당히 재미가 있다. 린치는 이 영화에서 미국 백인 중산층의 모럴을 억눌릴 대로 억눌려 신경증화된 아주 추악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예의 <타임 Time>지는 같은 47쪽에서 현재 세 아이를 슬하에 둔 이혼한 아버지로서 루카스가 다음의 관점에 대해 심각한 고려를 하게 됐다는 평을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다. "엔터테이너(entertainer)는 자신의 작업을 통해 긍정적인 도덕 가치를 조성해 낼 책임이 있다."라는 것. 데이빗 린치나 퀜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1963- )라면 일고의 가치도 없노라고 부정할 그러한 관점 말이다.
분명한 것은, 이혼을 경험한 루카스의 더더욱 심화된 보수적 성향, 가족의 가치에 대한 집착과 보상 심리(사람은 상실한 뒤에야 상실한 대상의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식)가 앞으로 제작될 前 3부작(prequels; 에피소드 1, 2, 3을 말함)에 어떤 식으로든 반영될 것이고, 따라서 이 전 3부작은 현 3부작(에피소드 4, 5, 6을 말함)보다 더 노골적으로 가족 이데올로기와 구질서에의 향수를 드러내게 될 공산이 크며, 결국 좌파의 논점이 더더욱 정당성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하긴 오늘날의 할리우드는 전반적인 분위기 자체가 1980년대 보수 회귀의 영향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사실이다. 가족의 가치에 대해 잔잔한 관심-영화 평론가 로빈 우드(Robin Wood)의 표현을 빌려서 얘기하자면, "이성애주의 남성과 착한 여자의 궁극적인 결합"-을 표명하고 있는 숱한 할리우드의 영화들을 보라! 최근의 <솔드 아웃 Jingle all the way>(1996)에서부터 일전의 <미세스 다웃파이어 Mrs. Doubtfire>(1993)에 이르기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