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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수필사랑
에세이마당-조문국(召文國)
무작정 따라간 작약밭이 삼한시대 진한의 12개 연합체의 하나인 조문국의 고분군 옆에 있다.
작약 꽃밭 주변에 흩어져 있는 고분 40여기 중 조문국의 마지막 왕 경덕왕릉. 능지는 조선시대 외밭으로 어느 날 꿈에 금관을 쓴 백발의 조문국 경덕왕이 나타나 원두막 철거를 주장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현령이 원두막 자리에 봉분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문국은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 있는 금성산 주변을 무대로 성장한 고대국가로 고조선에서 삼국시대로 넘어가기 전의 삼한시대 부족국가이다. 삼국사기에는 “벌휴왕(이사금)이 왕위에 오르니, 성은 석씨이고 탈해왕의 아들 구추 각간의 아들이다. 신라의 제9대왕 벌휴이사금(伐休尼師今)이 소문국(召文國)을 쳐서 병합시켰다. 이후 신라는 보다 급격한 영역확대를 실현시켰다.”고 되어있다.
애초의 이름이었다는 ‘소문국’의 ‘召’자는 부를 소와 대추 조, 각각 두 개의 훈과 음으로 되어있어 현재에는 조문국으로 불린다. 그 예로 ‘召’를 쓰면서 조로 읽혔던 조문면(召文面)에는 지금은 폐교가 된 조문초등학교가 있다. 향토사학자들은 그 부근을 왕궁 터로 유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문, 양면, 산운 면을 통합할 때 조문면이라 하지 않고 금성면이라 한 것은 3개의 면이 조문국(召文國)시대 요충지인 금성산(金成山)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조문국의 역사를 안고 있는 금성산은 주변에 260 여기의 고분을 거느렸다. 삼각모양의 늠름한 기개를 가진 금성산은 한 나라의 버팀목이었던 만큼 풍수지리가 좋아 묘 자리에 얽힌 전설도 있다. 그것이 궁금해서 3번이나 등반을 했는데 과연 주민들이 파헤친 곳이 큰 웅덩이로 곳곳에 남아 있다. 또 등산로를 따라 북쪽으로 조문국 시대로 추정되는 높이4m, 넓이 2∼4m인 산성이 있다. 안쪽에는 유사시 군사훈련장과 병기고로 사용되었던 곳이 있고, 산꼭대기의 분지는 한반도 최초의 화산 폭발 흔적이다.
금성산 자락의 낮은 구릉지 작약 꽃밭을 둘러보고 공원 휴게소에 올라 고분군을 건너다본다. 여기서부터 좌우로 부드럽게 굽어진 산책로가 작약 밭을 빙 둘러 경덕왕릉으로 향해 있다. 그 길을 따라가던 시선이 문득 남편이 어릴 적에 잔디 썰매를 탔다는 말없이 엎드린 고분군에 머문다.
고분군 주변에는 작약 외에도 파란 잔디 속에 토끼풀이 꽃다발처럼 무더기로 피어 있다. 카메라 들고 따라온 아가씨가 모델이 되어 하얀 토끼풀꽃 옆에 앉아서 공주처럼 웃는다. 표정이 싱그럽다. 작약 꽃밭에서는 노란 옷을 입은 주부 모델이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주변에 흩어져 오고가는 사진가들은 이곳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사진 찍기에 바쁘다.
몸을 낮게 수그려 능선을 이룬 작약밭이 수평선이 되게 앵글을 맞추고 셔터를 깊게 눌렀다.
하늘에는 하얀 새털구름이 융단처럼 펼쳐져온다. 아침부터 변화무상하던 구름이 한쪽으로 기세를 뻗으면서 용머리 모양을 만들었다. 그 한 컷 속에서 신라에 병합된 조문국 경덕왕릉의 고요를 읽는다. 마지막 왕의 슬픔을 기리듯 작약이 울음처럼 붉게 피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덧없는 세월이라며 한숨처럼 꽃잎 날릴 작약아 슬퍼 마라, 시대의 흐름을 어느 누가 거스를 수 있으랴. 한때 번창했던 그 향기, 신라에 살아있고 오늘에 닿아 있으니 이나마도 역사로써 족하리라.
임정희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