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 일대를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대한민국의 연쇄살인범이자 쾌락살인범이다. 최종 확정판결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수감 중 자살했다.
2. 상세
그는 2004년 1월 14일부터 2006년 4월 22일까지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힌 범죄자다.[4]
유영철과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5] 서울 서남부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며, 유영철의 소행으로 알려졌던 서울 이문동 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졌다. 그 후 보강 조사에 의하여 범행의 대부분이 밝혀졌다.
정남규는 수사기관의 조사 과정에서 “피 냄새를 맡고 싶다. 피 냄새에서는 향기가 난다”고 말했으며, “천 명을 죽여야 하는데 채우지 못하고 잡힌 게 억울하다”며 살인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였다. 법정에서는 “더 이상 살인을 못 할까봐 조바심이 난다”고 토로했다. #
흉악성으로는 KCSI 요원 사이에서 역대 최악으로 평가되었다. 또한 전문 프로파일러들조차도 그의 평가에는 일단 욕을 넣고 보는 최악의 연쇄 쾌락살인범.[6] 어떻게든 중벌을 피하고 싶어 동정론에 호소하고 최대한 사실을 숨기려 들며 증거를 들이대도 일단 아니라고 우기고 보다가 견디지 못하면 그제야 자백하는 일반적인 절대다수 범죄자들과 달리, 시키지도 않은 자백을 알아서 하거나[7]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거리낌 없이 전부 늘어놓는 등 사형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연쇄살인범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 그러나 한 편으론 자신의 범행을 감추거나 스스로도 까먹기도 했다. 링크.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세 차례(301회[8], 579회, 632회)에 걸쳐 정남규를 다룬 바 있다. 2019년 10월 27일, 《그것이 알고싶다》 1188회에서 사망하기 얼마 전의 정남규의 얼굴이 공개되었다. 아래 영상의 썸네일과 1:53 경에 오른쪽 2번째에서 나온다.
3. 생애
1969년 4월 17일, 전라북도 장수군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의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 홀로 남원에서 자취하며 상업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온 가족이 인천광역시로 이사하게 되자 영진상업고등학교로 전학했다. 그의 학창 시절 성적은 중하위권에 머물렀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4개월간 음료 공장에 다니기도 하였으나 직장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그만두고 방앗간에서 배달일을 하거나 건축 공사 현장에서 일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군입대를 하였으며 육군 하사로 만기 제대(1992)하였다. 이후 별 다른 직업 없이 생활하였으며, 절도 등 범죄 행위로 생계를 유지하여왔다.
정남규는 어린시절, 아버지(1999년 사망)의 끊이지 않는 폭행과 자신을 아껴주던 동네 아저씨로부터 성추행과 성폭행[9], 성희롱을 당한 일로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고등학교 재학 중에는 동급생이나 선배들에게 집단괴롭힘과 학교폭력을 겪었고 후배들에게 무시당하는 일도 빈번했다. 고등학교 재학 중 자취방 옆에 살던 아저씨에게 두 번이나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군대 복무 시절에도 선임들에게 가혹행위와 심한 구타를 겪었고, 한 선임에겐 또 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후임들에게는 기수열외를 당하는 등 군 전역 후 사회생활을 힘들어하며 사회에 대한 복수심으로 범죄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1989년 4월, 특수강도죄로 징역 2년 6개월, 집행유예 4년, 1994년 절도죄로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 및 벌금 20만 원 등의 선고를 받은 후, 1996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로 징역 2년 6월, 1999년 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죄(절도, 강간 등) 징역 2년, 2002년 절도죄로 징역 10월 등 총 3년 4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된 경험이 있었다.
30대 시절에는 어머니, 친누나와 3명이서 함께 살았지만 가족 중 직장을 가진 이가 없어 기초생활수급자로 어머니 명의의 낡은 주택에 딸린 방을 세놓고 받는 월세 55만 원이 수입의 전부였다.
요약하자면 가난, 가정폭력, 성폭력, 학교폭력, 가혹행위, 집단따돌림 등 끔찍한 폭력들을 전부 다 겪은 굉장히 암울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전형적인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 안타까운 사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거가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그의 죄들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쾌락살인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4. 범행 일지[편집]
- 2004년 1월 14일 밤 9시경, 버스를 타고 부천시 원미구 소사동에 내린 후, 놀이터에서 놀던 윤모 군(13세, 남)[10]과 임모 군(12세, 남)을 칼로 위협해 근처 춘덕산으로 데려가 성추행[11] 후, 스카프 등으로 목을 졸라 살해했다. 시신은 실종 16일만인 1월 30일, 아이들의 집에서 3km 떨어진 춘덕산 정상 부근에서 옷이 대부분 벗겨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미궁에 빠질 뻔했으나[12] 정남규가 체포된 후 그의 자백으로 범행 사실이 드러났다.
- 2004년 1월 30일, 새벽 3시경, 구로구 구로동의 한 빌라에서 원모 씨(44세, 여)를 수 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6일 오후 7시 10분경,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골목길을 지나던 전모 씨(24세, 여)[13]를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살해했다. 이 사건은 유영철이 자백한 후 무죄를 선고받은 뒤 한동안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가 정남규가 체포된 후 그의 자백으로 범행 사실이 드러났다.
- 2004년 2월 13일 오전 6시 30분경, 영등포구 신길5동 골목길에서 서모 씨(30세, 여)를 흉기로 수 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25일 오전 1시경, 영등포구 신길2동 골목길에서 홍모 씨(29세, 여)를 흉기로 수 회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2월 26일 오전 6시 20분 경, 신림4동 신림시장 골목길에서 출근하는 할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오던 박모 양(17세, 여)[14]을 골목길에서 흉기로 10여 차례 찔러 중상을 입혔다.
- 2004년 4월 8일 오전 2시 30분 경, 신길4동 귀가 중이던 피해자 정모 씨(25세, 여) 흉기로 수 회 찔러 살인미수.
- 2004년 4월 22일 오전 3시 경, 서울 구로구 고척2동에서 여대생 김모 씨(20세, 여)를 따라가 집 앞에서 흉기로 무참히 찔러 살해.
- 2004년 5월 5일 오전 2시 30분 경,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최모 씨(22세, 여)를 따라가 흉기로 수 회 찔러 살인미수.
- 2004년 8월 4일 오전 3시 경, 경기 안양시 만안구 안양6동 주택에 침입해 안모 씨(50세, 남)를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힘.
- 2005년 4월 6일 오전 1시 30분 경, 안양시 만안구 안양5동 주택에 침입해 강모 씨(71세, 여)와 한모 양(13세, 여)를 둔기로 내리쳐 부상을 입히고 방화.
- 2005년 6월 4일 새벽 2시 55분 경, 경기도 광명시 철산동의 한 주택에 침입해 김모 씨(36세, 여)를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혔다.
- 2005년 10월 9일 오전 3시 20분경, 관악구 봉천11동 장애인 주거 시설에 침입해 그 곳에서 자고 있던 홍모 씨(39세, 여) 등 2명을 둔기로 내려쳐 중상을 입힘.
- 2005년 10월 19일 오전 5시 경, 봉천10동 주택에서 변모 씨(26세, 여)를 성추행 후 목졸라 살해 후, 안방으로 들어가 동생 변모 씨(23세, 남)를 둔기로 내리쳐 중상을 입힌 뒤 불을 지르고 밖에서 젓가락을 문에 끼워 나오지 못하게 하여 중상을 입혔다.
- 2006년 1월 14일 오전 4시 경, 서울 도봉구 창동 반지하 집에 침입, 자고 있던 김모 양(7세, 여)을 추행, 구타하다가 김 양의 아버지가 인기척에 깨어나자, 도주.
- 2006년 1월 18일 오전 5시 경, 서울 강북구 수유동 송모 씨(48살, 남)의 집에 침입해 둘째(17세, 여)의 머리를 둔기로 내려친 후 목졸라 살해한 뒤 집에 불을 질러 첫째(21세, 여), 막내(12살, 남), 총 3명을 살해했다. 생존자 겸 유족인 송모 씨는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아내와 이혼을 하는 등 주변 가족들과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고.# 한마디로 한 가정이 완전히 파괴된 것. 이 때문에 수많은 정남규의 살인사건 중 가장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 2006년 3월 27일 오전 4시 50분 경, 봉천8동 2층 단독주택에 들어가 잠을 자고 있던 김모 씨(25세, 여) 등 세 자매를 둔기로 마구 내려쳐 2명을 살해하고 1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사건 현장 모습
- 2006년 4월 22일 오전 4시 40분 경, 서울 영등포구 신길6동 반지하 집에 침입, 자고 있던 김모 씨(24세, 남)를 둔기로 내려쳐 상해를 입히고 격투 끝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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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수법이 초창기 때(2004.1.~2004.5.)와 후반부(2005.4.~2006.4.)에 차이가 있다. 범죄기간 내내 CCTV 설치가 미비하고 저소득층이나 주택가가 많았던 서울 서남부 지역 일대를 범행 장소로 주로 삼은 것은 맞지만, 초창기 때는 흉기로 골목길에 혼자 있는 여성들을 습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집중 보도가 이루어지자, 이후에는 문을 열어놓고 있는 다세대 주택가 등을 새벽 중에 침입하여 둔기로 범행을 저지른 뒤 방화를 저지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옛날에 흔히 '가정파괴범'이라고 부르던 범행 수법이었으며, 실제로 정남규가 이러한 범행을 저지른 뒤, 피해 가정은 말 그대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흔히 마지막 피해자가 유일한 성인 남성 피해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판결문을 보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2명의 성인 남성 피해자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16] 정남규는 주택에 침입했을 때 성인 남성이 깨어나는 경우에는 곧바로 도주했지만, 자고 있는 경우엔 자신의 통제 하에 있다고 생각, 그대로 범행에 나아갔다.
몇몇 범죄를 제외하고는(이문동, 수유동, 군포시, 안양시) 사건 장소의 거의 대부분이 서울 서남부지역(구로구, 금천구, 동작구, 관악구, 영등포구, 광명시) 일대임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당시 언론에서도 이 사건을 '서울 서남부 지역 연쇄살인 사건'으로 부르기도 했다. 정남규는 지리감이 있는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범행을 저지르다가, 언론에 자신의 범행이 크게 나오면 안양시와 군포시에서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살인의 편리성을 위해 CCTV가 없는 등 보안과 치안이 취약한 곳을 주 범행지로 삼았기 때문에, 당연히 안전 시설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지역에 거주하던 사회적 약자들이 잔인한 범행의 희생자가 되었다. 정남규 본인도 자신이 약자들만을 공격했다는 점을 인정했다고 한다. 물론 유영철처럼 부유층 등 사회적 강자로 분류되는 이들을 공격 목표로 삼는 범죄도 잔인무도하고 전혀 미화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 정남규의 피해자들은 힘든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생활하던 선량한 소시민들이 절대다수였기 때문에 더 안타깝고 분노하게 되는 것. 홀로 어린 딸을 키우던 어머니(우유 배달부 여성) 등이 희생자가 되었다.
보라매 공원 살인 사건 발생 이후 그 지역엔 비 오는 목요일 밤의 괴담이 생겨났으며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자신의 범행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그 전부터 연쇄 범죄의 낌새를 눈치 채 온 경찰이 본격적으로 수사에 착수하자, 완전범죄를 꿈꾸던 정남규는 범행 방법과 도구를 바꿨다. 노상과 예기(칼)에서 침입과 둔기로 말이다.
게다가 2005년 10월 19일, 정남규는 한 주택에 들어가 남매 중 누나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같은 집에 있던 남동생도 둔기로 머리를 내리쳐 살해를 시도하고, 방에 불을 질렀는데, 남동생이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젓가락을 손으로 구부려, 밖에 있는 문고리에 걸어 잠가버렸다. 정남규의 범행이 얼마나 잔혹한지 알 수 있는 부분.5. 검거[편집]
사실, 정남규의 검거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2006년 4월 22일 새벽, 신길동의 어느 다세대 주택에 침입하여 방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만 원짜리 상품권 1장밖에 발견하지 못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정남규는 방 안에서 자고 있던 20대 청년을 둔기로 내리쳤으나 정남규의 둔기가 빗맞았고, 기절하지 않은 피해자가 극렬히 저항하고, 옆 방에서 자고 있던 청년의 아버지까지 합세하여 격투한 끝에 제압당해 경찰에 인계된다. 당시 청년의 아버지의 말로는 아들의 비명 소리는 아주 짧은 순간 들렸지만, 보통의 비명 소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이에 심상치 않은 상황임을 깨닫고 다급히 옆방으로 갔다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정남규와 격투를 벌이는 아들을 보고 바로 가세해서 격투 끝에 정남규를 제압했다고. # 하지만 정남규는 경찰서로 이송되기 직전에 순찰차 뒷자리에서 수갑을 찬 채로 그대로 달아나버렸고, 2시간만에 동네 주민의 신고로 옥상에서 다시 검거된다.
이 사건은 프로파일링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정남규가 처음 검거될 당시에는 단순한 강도상해범으로 보고가 되었다. 즉, 잘못했다면 교도소에서 몇 년만 살다 나온 후 다시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었다는 것. 하지만 몇 년간 정남규를 쫓고 있던 프로파일러 권일용이 그를 추궁해 자백을 받아내어 끔찍한 연쇄살인의 진상이 드러나게 된다.[17] 또한 야산에서 운동화 끈에 손가락이 묶여 성추행을 당했다는 말에서 힌트를 얻어, 운동화 끈에 손이 묶여 성추행을 당한 뒤 살해당한 부천 소년 살해 사건에 대해 추궁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등, 한마디로 프로파일링의 승리였다.[18]
한편, 이 이야기는 《용감한 형사들》에서의 내용과 다른데, 당시 검거했던 이두연 형사가 단순 강도가 아니라고 판단해서 12시간의 심문 끝에 살인 자백을 받았다고 한다.
6. 특징
체포 후 심문 과정에서 범행 후, 특히 피해자가 정남규에 의해 끔찍히 살해되는 장면을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으며 죄책감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발언을 하여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심지어 유영철은 정남규 자신보다 한 수 아래라고 했다고.
현장 검증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그에게 돌을 던지고 달려들려고 하자, 피하거나 고개를 숙이는 다른 범죄자들과는 다르게 시민들을 노려보고 맞서 달려들려 했으며 다른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연행차량 안에 탔을 때는 카메라를 향해 씨익 웃기까지 하며 지켜보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권일용 프로파일러의 해석에 따르면, 정남규의 이 웃음의 의미는 "나같이 사는 사람을 왜 너희가 비난하느냐, 너희들은 과연 나보다 낫냐"라며 도리어 세간을 비난하는 것이라고 한다.
유영철은 주로 둔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다면, 정남규는 날카로운 흉기를 사용하여 범행을 저질렀으며 성폭력과 방화를 함께 저질렀는데, 이러한 "찌르는" 행위, 성폭력, 방화 등의 행동은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하는 성적인 동기에서 유발되는 것으로 분석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남규도 강간, 성추행을 여러 차례 저질렀었다. 살인(시도)과 성범죄를 함께 저지른 적도 적지 않다. 또한 재판 과정에서 "사람을 더 죽이지 못해 우울하고 답답하다. 빨리 사형을 집행해 달라"는 발언을 하는 등 전형적인 쾌락살인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는 범행을 자백할 당시 "강남구 등 부유층이 사는 동네엔 CCTV가 너무 많아서 CCTV가 없는 곳에서 했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살인을 더 쉽게 하기 위하여 주로 방범 시설이 잘 갖춰져 있지 않은 서민층 및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범행 대상으로 잡았으며, 침입 방법도 문을 따거나 창문 등을 이용하는 것이 아닌, 문을 열어놓고 있는 집을 대상으로 범행하는 등, 철저하게 사회적 약자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는 살인 자체를 쾌락으로 여겨서 좀 더 쉽게 많은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장소를 택하는 행동이다.
게다가 이런 자신만의 쾌락을 위해서 범죄를 준비하는데 있어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쏟았다. CCTV에 잡히지 않기 위해 지하철 몇 정거장 정도의 장거리를 도보로 이동하였는데, 범행을 염두에 두고 범행 현장에서 쉽게 도주하기 위하여 주 3회 주거지 인근 운동장에서 10km씩 달리기 연습을 하고, 악력기와 역기 등으로 체력을 다지기도 하였으며, 도주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술, 담배도 끊었다. 자신의 방에 있을 때는 건강 정보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며 영양정보에 대해 정리해서 공책에 적었다. 자신의 식단까지 철저하게 관리하는 등[19] 살인을 쉽게 하기 위해 장기적 계획까지 짰다. 거기에 범죄를 준비하기 위해서 체력만 단련한 게 아니라 학습도 매우 열심히 했는데,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 과학수사 관련 잡지만 수십 권이 발견되고 체포당하기 직전까지 'CSI 과학수사대 시리즈'를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계속 시청했다. 이 정도 노력을 선하고 생산적인 일에 쏟았다면 뭐가 돼도 됐을 수준.
또한 자신의 범죄를 전하는 기사를 스크랩하며 수사 현황을 학습하고 있었다. 나중에 수색된 그의 집에서는 수사진은 물론, 권일용 프로파일러의 얼굴을 찍은 주간지 스크랩까지 발견되었다. # 이걸 압수수색에서 찾아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름 아닌 권일용 프로파일러 본인이었는데, 그는 그걸 보고 '이야 책에서만 보던 건데, 이걸 내 눈으로 보네'라고 신기했다고.
게다가 완전범죄에 최대한 가까운 노력을 했는데, 모든 신발에는 밑창을 도려내서 족적이 나오지 않게 했고,[20] 피해자를 신속하고 확실하게 살해하기 위한 흉기를 사용하는가 하면, 지문이 쉽게 발견되지 않으면서도 미끄럽지 않은 장갑을 착용했다. 그래서 그 오랜 기간 동안 잡히지 않고 살인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문동 살인 등 일부 사건은 미제사건으로 남아있었다가 정남규가 알아서 자백하는 바람에[21] 진상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가 밝힌 동기 중에 어린 시절 성학대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실제 첫 번째 범행으로 알려져 있는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에서는 당시 10살과 11살 남자아이 두 명을 납치하여 자신이 당했다고 진술한 방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성추행한 뒤, 살해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정남규가 처벌 수위가 올라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이문동 사건 등 굳이 묻지도 않은 사건까지 알아서 자백하거나 재판정에서 자기는 살인 중독자니 하루라도 빨리 사형시켜야 한다고 대놓고 말한 점 등을 보면, 자작극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동정받을 생각이면 이런 짓을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 그리고 실제 성범죄자, 특히 소아대상의 범죄자의 경우, 어릴 때 본인이 피해자였던 경우도 많다. 첫번째 범행 이후에는 거의 여성들은 살해하였고 남자의 경우는 주로 살인미수로, 중상해를 입혔다.
재판 과정에서도 그의 피해자는 저소득층 및 여성으로 전원 사회의 약자들이고 그 목적이 엄연히 쾌락에 의한 연쇄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더 죽이지 못해 억울하다"는 주장을 하는 등 자신의 살해 동기를 조작하려는 시도를 했기 때문에 판사들도 설득력이 떨어지는 동기라고 판단해 "반성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논조로 판결을 내렸다.
일부 기사나 네티즌들은 정남규가 사이코패스 테스트 PCL-R에서 29점[22]을 받았다고 하지만,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유영철과 버금가는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7. 사망
2007년 4월, 대법원까지 가는 재판 끝에 사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겠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1989년 첫 범행으로부터 20년 후인 2009년 11월 21일, 서울구치소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하여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다음 날 새벽에 사망했다. 빈소에는 그의 매형 외에 다른 유가족은 오지 않았다. 향년 40세. 유언은 남기지 않았으나 자살 전 사형 여론에 대해 언급을 자주 한 것 때문에 당시 일반인들은 사형 집행에 대한 두려움[23]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한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프로파일러들은 사형 집행에 대한 두려움보단 살해할 대상이 더는 없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빨리 사형을 집행시켜달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그는 자살하기 전까지 태연히 지냈다고 한다. 세간의 사형 여론에 대한 언급 또한 전문가들은 그가 두려움보다는 자신이 사형을 당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 것으로 보고있다. 그를 프로파일링했던 권일용 프로파일러는 김원의 방송에 출연하여 "정남규는 자살한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신조차 살해하고 끝난 사람이다. 살인의 끝은 자기 자신이었다."라고 말했다. 즉, 감옥에 들어와 더 이상 살인을 할 수 없고 살인의 대상이 완전히 사라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려서 그 끝을 완성한 셈이다.
2020년 12월 16일 오후 10시 이후에 방송한 《유 퀴즈 온 더 블럭》 85회에서 권일용 前 프로파일러가 다시 이전에 한 말을 남겼다. 사건 당시 영상 자료나 다른 사진 등이 나오면서 유재석, 조세호를 비롯한 청자들의 깊은 공감을 다시 이끌었다.